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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한 말씀/김양재목사
출애굽기 33장 1∼23절
출애굽기 19장부터 후반부가 시작됩니다. 19장은 '말씀 사역의 장'이라고 했습니다. 대단한 사람만 말씀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모두가 제사장의 직분이 되어 말씀 사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말씀 사역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다보면 이런 저런 모양으로 다 말씀 사역을 하게 됩니다. 주일 학교 교사를 하든 구역장을 하든 여전도회 일을 하든 그리고 집에서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도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장에서는 십계명을 말씀하시고 21장부터 23장까지는 사회, 도덕, 종교적인 규례들을 말씀하십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요. 말씀을 모르는 '도덕의 유치원 시대'에는 늘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헌금 많이 하는 사람들이 다 좋아 보이고 멋있어 보입니다. 그 내용이 21장부터 23장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말씀을 다 이루어 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안 믿는 사람 중에 믿는 우리보다 훌륭한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교양이 있어서 남이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분별해서 행동하기 때문에 대하기도 편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까 늘 문제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훌륭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은혜' 그 자체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나를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신다'는 은혜를 나누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모든 삶의 규례들을 가르쳐 주신 후에 25장부터 40장까지 성막 짓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조각목 같은 우리를 정금으로 입혀서 사용해 주셨다는 것, 갈고리에 불과한 나, 놋그릇에 불과한 나인데 하나님께서 기름 발라주시고, 써 주시면 성막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니까 계속해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시고"가 31장까지 나오고, 35장까지는 "모세가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였더라"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언약궤 이야기, 등대 이야기, 어디에도 구속사가 나와있습니다. 생활의 규례로 주신 말씀도 구속사적으로 읽었지만 그것보다도 성막에 와서 더 은혜를 받으셔야 합니다. 쓸모도 없이 흔하게 널려있는 조각목 같은 나를 주님께서 금으로 입혀주셨다는 것이 성전의 주제입니다. 번제단에서 피로 씻음을 받고, 물두멍에서 물로 회개하고, 그 다음에 떡상에서 교제를 하고 등대로 비취이는 인생이 될 때 언약궤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씻는 것입니다. 특별히 번제단과 물두멍을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피의 공로로 거듭나서 끊임없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데에는 기술이 필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회개케 하는 것도 지식이 아니라 나의 회개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날마다 물두멍에서 씻어야 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려면 하루에도 수백 번씩 손을 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적인 원리와 육적인 원리가 이렇게 똑같습니다. 씻는 데에는 자격이 필요 없고 기술도 필요 없습니다. 아침에 새롭게 화장을 하려면 씻어야 합니다. 씻지도 않은 얼굴에 다시 화장을 덧발라 보십시오. 아무리 예쁜 얼굴도 깨끗하지 않으면 예뻐 보일 수가 없습니다. 육적으로 사람을 만나려고 해도 씻어야 하는데 영적으로도 씻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씻어야 사람을 대할 수 있는 자격이 생깁니다. 씻지 않고 성경 공부만 해서는 소용이 없어요. 이것이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기 때문에 물두멍에서 씻는 것으로 성막에 대한 말씀이 끝을 맺었다고 생각됩니다.
모세가 40일 간을 금식하며 산에 올라가서 말씀을 받는 동안 백성들은 말씀을 받지 못하고 산 밑에서 우상을 만들고 섬겼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이 아닌 모세만 바라보고 따랐기 때문에 결국 모세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없이 사람을 따라다니면 꼭 버리게 돼있습니다. 사람끼리의 교제는 어차피 썩어질 육신끼리의 교제이기 때문에 사건이 오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산에 올라가자 아론을 따랐고 아론은 모세가 없는 자리에서 지도자 노릇을 하느라고 모세에 대한 한 마디 설명 없이 백성들의 요구에 응합니다.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을 같이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딴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 죄의 뿌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사건을 보면서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나' 그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숨기고 옳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더 일찍 일어나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형제간의 교제를 과시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목이 곧고 부패한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아론과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고 변명만 했기 때문에 모세 혼자 돌판을 깨고, 모세 혼자 회개하고, 모세 혼자 애통했습니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니까 결국 레위 자손이 삼천 명을 죽이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너무 못 깨달으니까 그것이 우상이라는 걸 알게 하시기 위해 사람을 끊게 하셨고, 사람을 끊어야 사람에게 헌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세가 생명 책의 이름을 내어놓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책임을 물으시고 회개케 하셨습니다.
1∼3절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우리가 남을 위한 중보기도를 정말 절박하고 간절하게 하면 결국은 내가 회개할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를 하니 하나님은 모세의 죄를 보게 하시고 회개하도록 하십니다. 모세에게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하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시니 굉장히 좋은 말씀인 것 같은데 함께 가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푸셨다는 것입니까, 안 푸셨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삐지신 겁니다.
모세에게 책임을 물으셨다는 것은 1절에서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어느새 모세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사람이 돼 있다는 것입니다. 32장에서 백성들도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모세'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표현 자체를 안 쓰고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세가 하나님의 자리에 가 있습니다. 그래서 큐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막을 묵상하면서 제사장들은 늘 물두멍에서 씻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도를 하면서도 회개해야 하고, 양육을 하면서도 회개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다 죄인인 인생이라 전도하면서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너무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니까 나도 흥분해서 혈기를 내면서 전도를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사람이 영접하게 하셨다면 '하나님, 오늘 그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고 영접하게 하셨지만 저는 제 방법대로 잘난 척 하고, 혈기를 부렸습니다. 그리고 100%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내지 않고 제 영광도 드러냈습니다.'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모범적인 부부생활을 했다고 해도 내가 진심으로 상대를 위해서 기도하면 지금까지 생명을 내놓고 기도하지 못한 것까지 회개하게 하십니다. 생명을 내놓고 기도했을 때 내가 어느새 하나님 자리에 가 있었다는 걸 깨닫고 하나님 없이는 절대 갈 수 없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집회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분들에게 더 필요한 고백이겠죠. 그런 고백이 있을 때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그렇게 말씀에 의거해서 기도하니까 가게 해주마. 그런데 네가 인도한 네 백성이라고 하니까 나는 안 가겠다. 네가 데리고 가라.' 고 하십니다. 이것을 보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자리에 서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이게 해주신 것이지 저 때문에 모인 게 아닌데 '몇 백 명이 모인다, 몇 천 명이 모인다....'하는 말을 하다 보면 그 숫자 자체가 남들에게 자랑으로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중로에서 진멸할까....' 하셨으니 어쩌면 하나님이 함께 안 가시는 것이 이들에게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며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일분 일초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얻어낸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공동체 어디에서나 내가 하나님보다 더 윗자리에서 왕 노릇을 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깨닫게 하시는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안 가시겠다고 하는 것은 백성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너무나 애통하게 눈물로 기도를 했는데 기도가 끝나자마자 그 사람이 '그런데 왜 그렇게 우세요?' 고 한다면 기도를 알아듣지 못했다는 뜻이죠. 그런 사람이 예상외로 많기 때문에 저도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아이를 갖지 못해서 고난 중에 있던 분이 계셨는데, 말씀을 들으며 기도하는 가운데 아이를 갖게 되시더니 그 때부터 모임에 안 나오시더군요. 모임이 있는 시간에 산모 체조 프로그램에 가야하기 때문에 못 나오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 기도해서 얻은 아이니까 끝까지 기도로 준비하고 낳아야지, 산모 체조가 중요한 게 아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남편도 함께 믿음으로 아이를 낳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하고, 은혜 산부인과의 장부용 원장님이야기도 하면서 수중 분만이 남편과 함께 물에 들어가서 아이를 낳는다는데 그것도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얘기했죠. 그랬더니 그 분의 대답이 "저희 남편에게 무좀이 있는데요." 이러시는 거예요.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가 얘기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말씀 듣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산모 체조 때문에 그럴 시간이 없다고 하시니까 '산모 체조를 한다고 건강한 아이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라고 얘길 하면 혹시 건강한 아이가 안 나올까봐 기분이 너무 나쁜 겁니다. 그래도 그 자매는 제가 정말 사랑을 갖고 기도하는 것을 알고 함께 눈물 흘리고 회개하며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면서 아무리 말씀을 넣어주려고 해도 도무지 안 들리는 때가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갈아서 마시게 해도 못 알아듣고, 삼천 명이 죽어도 못 알아듣는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을 내놓는 것밖에 없습니다. 저도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아무리 말씀을 전하려고 해도 못 알아들으니까 생명을 내놓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남편에게는 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꾸 기대하는 것이 있어서 잘 안 됩니다. 인내하고 기다리기가 참 어려워요. '이 정도 얘기하면 알아들었겠지. 큐티를 이만큼 했으니까 어느 정도는 되었겠지' 하는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적용)
주의 일이라도 열심히 하다보면 어느새 왕의 자리에 앉아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회개의 씻음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중보기도와 회개기도를 하셨는지요?
4절 -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황송한 말씀'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징벌과 관련된 '불길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삼천 명이 죽고 나니까 이제서야 '불길한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는 사람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시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의 삶에서 이미 삼 천 명이나 죽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 그런 사건이 없으면 아무리 해도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33장에서 조금 들을 뿐입니다. 조금 있으면 또 안 듣습니다. 우리의 죄성이 그렇게 끝이 없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적용)
왜 말씀묵상을 하고 간증을 듣고 경건 서적을 읽습니까? 날마다 우리의 죄성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불길한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겼는데도 이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면......... 정말 불길한 일입니다.
5절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하셨음이라
불길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만도 큰 수확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이 가장 최악의 슬픔이라는 것을 백성들이 안 것만 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걸 삼천 명이 죽고 나서야 알았으니 이 상황에서 단장을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결국 지금의 모습은 슬픔 때문에 단장품을 제하는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단장품을 제하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영성이 없으면 겉을 치장하는데 애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금송아지를 부수어서 갈아 마시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내게서 금세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육적인 단장품, 정신적인 단장품, 영적인 단장품이 있습니다. 단장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실제보다 허세를 부리고 싶어하는 것인데 우리가 단장하는 모습이 거의 종교적인 수준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지 두 달밖에 안 돼서 아직도 애굽의 단장품을 차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애굽의 종노릇하던 습성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고, 그래서 더 단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 많이 한 친구들 모임에 가면 괜히 나도 영어 몇 마디 쓰려고 애쓰고, 뭔가를 보여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애굽의 문화가 너무 멋있고 교양 있어 보여서 예수 믿는 내가 괜히 주눅이 듭니다. 동창 모임, 잘 사는 친척들 모임에 가려면 단장품을 더 취하게 됩니다. 육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누리고 사는 게 너무 좋아서 단장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오히려 안 하는 사람이 우스워 보이죠.
십여 년 전인가요. 강남의 비교적 잘사는 동네에 위치한 어느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게 됐습니다. 그 때가 한 여름이었는데 교회가 꽤 큰 편인데도 에어컨이 없더군요. 그런데 부자 동네의 교회인데도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은 것이 참 소박하고 좋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집회를 인도하면서 땀이 줄줄 흐르는 데 참 곤혹스러웠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여름에 그 교회에서 행사가 있다고 하면 가기가 망설여지는 겁니다. 저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모두가 단장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수건하나 가지고 다니면서 쓱쓱 땀을 닦을 수 있는 분위기라면 모르지만, 화장도 하고 좋은 옷 차려입고 가서 땀 흘리고 앉아 있을 생각을 하면 막막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죄성 입니다. 제게 아직도 이런 부요함이 많아서 근본적으로 모세 같은 지도자가 못 되는가 봅니다.
시댁에서 살 때 자동차, 에어컨 다 갖추고 있었지만 시부모님께서 워낙 절약하시는 분들이라 한 여름에도 에어컨 켜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남편이 병원을 개업하고 따로 살림을 살면서도 병원에서는 환자들을 위해 에어컨을 켜 놓지만 살림집에서는 어림도 없었지요.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5층으로 이사를 와서도 한 여름에 5층을 걸어 올라오려면 그 큰 덩치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에어컨 사자'는 소리 한 번 안 했습니다. 어쩌다 제가 에어컨 얘기라도 꺼내면 '친정에서 에어컨도 없이 산 '주제'에 언제부터 에어컨 찾으면서 살았느냐'고 자존심 상하는 말만 했습니다. 결국 시집살이할 때나 살림을 나서나 에어컨을 구경만 했지 켜놓고 살아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남편 가고 나서 에어컨을 사지 않았겠습니까? 남편이 없어서 '때는 이때다'라고 산 것이 아니라 저희 집에서 큐티 모임을 갖게 되고 사람이 삼십 명, 사십 명 모이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 키고 살던 습관이 지금도 남아서인지 모임이 없이 혼자 있을 때에는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을 키려면 정죄감이 듭니다.
6절 -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
방송에서 논어 강의를 하다가 중도에 그만두신 분도 백화점식으로 많은 정신적인 단장품을 갖추고 있지만 생명의 본질이 없으니까 아무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 말이 없어지면 꼭 학벌을 들고 나오는 겁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런 단장품들, 육적, 정신적, 영적 허세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단장품을 제해야 할 나의 호렙산은 어디일까요. 내가 어디에서부터 단장품을 제했던가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직까지 그런 기억이 전혀 없다면 좀 곤란합니다. 단장품을 제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어느새 단장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속성인데 단장품을 제하려는 생각조차 안 해보셨다면 정말 곤란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저절로 그런 마음이 들게 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부렸던 허세와 허례를 깨닫고 이제라도 그것들을 제하려고 했던 여러분의 호렙산 사건이 꼭 있으시길 바랍니다.
남자 분들에게 자신의 단장품을 제했던 호렙산에 대해서 물었더니 '몇 년 전까지는 담배도 피고, 술도 마셨는데 그것을 제했다' 라고 하셨어요. 그런 것이 단장품을 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점점 가면서 단장품의 종류가 달라져서 술, 담배 같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들도 깨닫고 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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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지금 어떤 단장품을 취하고 있습니까? 교회 모임에서조차 학벌이나 자식 자랑, 남편 자랑을 하고 있는지는 아닌지요? 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만이 아는 영적교만들도 단장품입니다.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 구역장이라는 것, 직분자라는 것, 새벽기도와 철야예배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 봉사에 열심이라는 것..... 자신을 단장하고 있는 것들을 점검하고 인정하고 회개하십시오.
7∼10절 -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합니다. 모세가 진 밖으로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던 때도 아니고, 안식일을 범하던 때도 아니고, 아말렉이 쳐들어왔던 때도 아니고, 진안에서 공개적으로 우상 숭배가 행해졌기 때문에 이 때는 진 밖으로 나갔습니다. 도저히 백성들과 같이 있을 수 없어서 모세가 나간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함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함도 아니요, 너의 죄가 너와 나의 사이를 가리웠다....'고 하셨는데 하나님과의 사이게 간격이 생기면 사람과의 사이에도 뭔가 떳떳하지 못하고 어색해집니다. 백성들이 단장품을 제했다고 해도 아직 들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에 모세가 나간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은 다 회막으로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모세가 회막문에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구름 기둥을 보며 어디에서 경배하고 있습니까. 각기 장막문에 써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자기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7절에서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갔다고 했는데 아직 나오지 못했다는 것은 여전히 모세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 자기 장막에서는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장막문' 이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나왔습니다. 단장품을 제한다는 것은 성별(聖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적용)
남의 간증을 듣고 은혜를 받기만 할 것이 아니라 다 자기 장막문에서 나와 자기 수준에 맞는 간증을 하고 나누는 것이 겸손함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단한 간증을 한다고 해서 '나는 절대 저렇게 못해' 하고 주저앉는 것도 교만입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장막문에서 안 나오시겠습니까. 성경공부에서 배운 것 중에서라도 적용할 것이 있다면 홈페이지를 통해서 함께 나누시면 됩니다.
11절 -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7절부터 11절까지 '회막'이라는 명칭이 여섯 번 나옵니다. 단장품을 제하고 하나님을 경배해도 내 삶의 현장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보았습니다. 내 삶의 현장에서 순종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느 때는 분명 떠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백성들이 너무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으니까 모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역할을 맡기실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에게는 힘든 자리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면하여 교제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모세가 백성의 죄에 대해 스스로 통감하며 진 밖에 장막을 치고 성별(聖別)된 삶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엄청난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안 보이기 때문에 나오지 못합니다. 지성소에 있는 정금 등대와 그 아름다움은 세마포 앙장으로 가리워진 성소 밖에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성소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정금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장막에서 십자가 지려고 못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장막이 우상이 돼서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광의 참 의미를 모르고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구름 기둥의 영광만 보고 거기에 경배하기 때문에 제가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보고 말씀 깨닫는 것을 부러워하기보다는 단지 이 자리만 부러워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해서 먼저 자기 삶을 오픈하고 어려운 지체들과 나누면서 도움을 주기보다는 성경을 가르치는 노하우(know-how)만 배우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영광과 지성소에 깊이 들어갈수록 보여지는 영광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면하여 교제하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끼리 대화할 때도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들여다보며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감이 없어 보입니다. 자신이 투명하지 못하면 어색해서 못 쳐다보지요.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겠습니까. 쳐다봤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내 인생에도 하나님을 쳐다보지 못할 시기가 있지만 모세처럼 하나님과 대면하여 교제할 수 있는 시기도 있습니다. 저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친히 말씀해 주시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분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해 주시기 때문에 저도 하나님과 대면하여 교제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때 모세의 몸은 회막을 떠나오지만 자원함으로 회막을 떠나지 않는 여호수아를 허락하십니다. 청년 여호수아가 미래의 지도자로 이렇게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사람이 있는 진보다 사람이 없는 회막이 더 즐거운 사람입니다. 아론과는 다른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적용)
어떤 오해가 생겼을 때 아무리 내가 옳다고 할지라도 믿음의 지체들과 대면하여 떳떳한 나눔을 나누지 못하고 있다면 우선 나의 교만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과도 대면하여 말씀하시는데 왜 우리끼리 대면하지 못하겠습니까?
12∼13절 - 모세가 여호와께서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백성들이 아직도 자기 장막문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기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서 너무 애쓰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으면 이렇게 말을 안 듣는 백성과 함께 갈 수가 없다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은총을 입은 자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은총을 입은 이유가 백성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고 나와 함께 보낼 자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시기 전에는 주의 길은 스스로 알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깨달아지는 것이 주의 길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성막을 지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부터 지으라고 하셨지만 모세는 세마포 앙장부터 지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처음부터 말씀이 잘 깨달아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도 수많은 간증을 듣고, 많은 책을 읽고, 교제하면서 비로소 말씀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마지막 39장에 성막을 정리하시면서 다시 언약궤부터 나옵니다. 말씀이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무슨 일을 시작하든지, 무슨 일이 생기든지 주의 뜻을 알면 행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주의 뜻과 길을 깨닫기 위해 말씀묵상이 꼭 필요합니다. 말씀이 잘 안 깨달아져 조급하십니까? 먼저 주의 은혜를 입어야 하지 않을까요?
14∼15절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보내지 마옵소서
드디어 하나님께서 친히 가리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14절에서 그렇게 말씀을 해주셨는데 모세의 이 대답은 문맥이 안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컴패니언 바이블을 보면 14절의 문장이 의문형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친히 가랴? 내가 너로 편케 하랴?' 하셨을 때 모세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불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함께 가기를 간구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께서 이게 믿음인가, 성품인가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이런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다져져 갑니다. 그랬을 때 모세가 일분 일초도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적용)
환경이 조금 나아지면 우리는 잠시 하나님을 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아도 잘 살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그 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친히 가랴?'하고 묻고 계십니다.
16∼17절 -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13절에 대한 대답을 여기에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삶만이 안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면 내가 죄를 지어도, 슬픔이 있어도, 수고를 해도 안식입니다. 이 땅의 삶은 죄와 수고와 슬픔뿐이지만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면 그 때마다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모세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더 큰 영광을 보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적용)
예수를 믿지 않아도,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아도 만사가 잘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가끔씩 스스로를 그렇게 속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편안함은 있을지 몰라도 평안함, 참된 안식은 결코 없습니다.
19절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면서 이런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본성은 영이기 때문에 아무도 본 일이 없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름으로 다양한 속성을 나타내시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그 인성을 통해서 상세하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가까이 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볼 수 없는 분이시라고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석은 예수님이십니다. 택함을 받은 영혼은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 반석 위에 서 있으면 거기에 있는 동안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지나가신다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 나타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고 이 때부터 벌써 그 구속사를 나타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