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24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자명고自鳴鼓를 기우며’]
<陋巷詩>
자명고自鳴鼓를 기우며
허공의 싯누런 황사를 보면 세상이 좁게 보인다.
고비사막에서 산해관을 넘어 창파를 타고
조선반도 항구의 골목까지 스며든 그 질긴 비상,
무언가 신비로운 애린의 비늘이 묻어 있는 듯한
삼십 년 전 내 고모 얼굴 분가루 같이
켜켜히 미분微粉된 설움 같은 황사.
낮은 처마, 그을린 석가래가 틈틈이 홀깃 보이는
양팔간격 골목을 나와, 오래된 구두만큼
애증의 먼지 풀풀 떠다니는 동네 재래시장 입구에 섰다.
약방 카브머리 구석에서, 오늘도 그렇게 사반세기를
쭈그려 앉아 망각된 세월을 기우고 있는 신기료 할아버지…
언젠가 신발대신 찢어진 장고를 주워와 깁던 날이 계셨었지
온종일 기다란 구두칼로 장고 음색을 고르며 뚱땅 뚱땅
시장통 할머니, 어머니들 응고된 옛 신명을 용케도 살려냈던
그 날 누항의 휘파람 소요, 작은 전설.
그 맺힌 가락 속에서 깡소주에 비틀거렸던 내 복장을
보듬어 주었던 북소리, 찢어진 장고소리
아득한 옛사람들… 준수한 얼굴에 비통, 환희의 눈물을
철철 대었던 호동왕자의 망연한 모습이나
벌어진 자명고를 끌어안고 종루에 엎어져 간 낙랑공주의 사랑이
내가 갔던 세상처럼 환청으로, 주마등 되어 시장통에 날 붙박았었지
그래 할아버지는 타임머신 장침으로 자명고를 깁고 계셨던 거야.
구둣방 옆 비린내 상큼한 어물전, 싱싱한 오월의 빛살에
체념도 아픔도 잊어버려 화석이 되어 가는 북양 동태의 눈깔이
그 또한 세월의 객수客愁를 하나 둘 세고 있다.
소금끼 절은 좌판 꼭대기, 궁상맞은 관록의 골드스타 테레비
빗금선 죽죽 긋는 화면 위로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는 헤드라인 뉴스가
터진 장고소리 같이 왱왱거려도
대범한 어물전 할머니 늦봄 하품이, 나른한 무지개로 번져만 간다.
아 아 언제나 세월은 오늘에 있는 것을
내 눈앞에서 그 장구한 풍상, 역사, 정신이 휘청거리고
북소리 두둥둥 고동색 이끼 향,
고락을 반죽하며 빛살처럼 눈앞에 머무는 구나.
내 곁에 옛날이, 어제가, 오늘이 멈춰 있는 것을 이제 보았네
하지만, 우리가… 어찌 모두들
아직도 찢어져 허공에서 울고 있는 푸르른 북소리를,
그 자명고를 깁지 않고 있단 말인가.
(2003 . 5 . 14)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누항시(陋巷詩) - 자명고를 기우며>**는 남루한 골목길(누항)이라는 일상적 공간을 배경으로, 과거의 역사적 상상력과 현재의 고단한 삶을 '자명고를 깁는 행위'를 통해 연결한 수작입니다.
이 시의 주요 의미와 감상 포인트를 정리해 드립니다.
1. 제목의 의미 : 누항(陋巷)과 자명고(自鳴鼓)
⚫누항(陋巷) : 좁고 지저분한 거리나 가난한 동네를 뜻합니다. 시적 화자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 세계(재래시장, 골목)를 상징합니다.
⚫자명고(自鳴鼓) : 낙랑국의 전설 속 북으로, 외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리는 신물(神物)입니다. 여기서는 **'민족의 정서, 공동체의 신명, 혹은 우리가 지켜야 할 정신적 가치'**를 상징합니다.
2. 주요 시구 및 시상의 흐름
⚫황사에서 느끼는 설움의 역사
시의 도입부에서 화자는 황사를 보며 30년 전 고모의 분가루와 '설움'을 떠올립니다. 황사는 단순한 먼지가 아니라 고비사막과 산해관을 거쳐 온 긴 시간의 흔적이자, 우리 민족이 겪어온 **질긴 생명력과 한(恨)**을 시각화한 매개체입니다.
⚫신기료 할아버지와 자명고
재래시장 입구에서 구두를 수선하는 '신기료 할아버지'는 이 시의 핵심 인물입니다.
그는 단순히 신발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 "망각된 세월을 기우는" 존재입니다.
할아버지가 찢어진 장고를 수선할 때 나는 '뚱땅' 소리는 시장 사람들의 응어리진 신명을 살려냅니다.
화자는 이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가 전설 속 **'자명고'**를 깁고 있다고 인식합니다. 즉, 사라져가는 전통과 가치를 되살리는 거룩한 행위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현실과 전설의 교차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가 시장통의 풍경과 겹쳐집니다. 이는 과거의 역사가 박제된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비루한 골목 안에도 **'주마등'**처럼 흐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현대 사회의 소음과 대범한 일상
⛹어물전 동태와 골드스타 TV : 낡고 소외된 존재들을 상징합니다.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는 뉴스 : 긴박한 현대 사회의 갈등(파업 등)을 보여주지만, 어물전 할머니의 '하품'과 대비됩니다. 거창한 구호보다 더 숭고한 것은 삶을 묵묵히 견뎌내는 민초들의 생명력임을 암시합니다.
3. 핵심 정리 및 주제
⚫주제 : 현대의 비루한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역사적 숭고함과 공동체적 신명의 회복.
⚫특징 : * 과거와 현재의 병치: 전설(낙랑공주)과 현실(재래시장)을 절묘하게 결합함.
⚫비유의 확장 : 구두를 깁는 행위를 '역사를 깁는 행위'로 확장함.
⚫성찰적 어조 : 마지막 연에서 "왜 우리는 자명고를 깁지 않고 있는가"라고 자문하며, 소중한 정신적 가치를 방치하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림.
4. 감상평
이 시는 2003년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은 언제나 오늘에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낡은 시장 골목이나 노인의 손길 속에 우리 민족의 거대한 서사와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찢어진 북(자명고)을 고쳐 다시 울리게 하는 일, 즉 상처 입은 시대의 정신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이 우리 모두의 과제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