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6일 연중 27주일 설교
마르 10:2-16, 히브 1:1-4, 2:5-12, 창세 2:18-24
거룩한 회복의 근원
오늘 복음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길에 일어난 사건이라 하여 ‘예루살렘 상경기’라고 부릅니다. 결혼과 이혼, 어린이, 재물, 가족 등에 관한 주제이므로 ‘가정훈’이라는 별칭이 붙죠. 2독서로 들은 히브리서 2장 11절에는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를 중심으로 오늘은 ‘거룩한 회복’이라는 주제로 함께 묵상해 봅니다.
거룩하신 분이 스스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성육신의 의미가 잘 드러납니다 ‘사람처럼’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거룩하신 분이 인간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조종하는 신이 아니라 직접 역사의 현장 안으로 오셨고, 사람들은 그분을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그 체험의 충격이 얼마나 강했는지 그들은 세상에 남아 주님의 유언을 목숨 바쳐 실천합니다.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서서 ‘거룩한 관계’를 맺었던 것입니다.
먼저 창세기의 말씀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하느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는 세상의 동물들에게 이름이 붙이게 하십니다. 세상의 근원은 하느님의 창조에 있지만, 사람(아담)이 이름을 붙임으로써 세상을 지키고 관리할 전권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악과 고통이 하느님께서 직접 인간에게 주신 것이 아니기에, 이를 이겨 나갈 몫 또한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애초부터 밀접한 관계 안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 잠이 든 그의 갈비뼈에서 여성을 만듭니다. 흙으로 만든 남성과 그 뼈에서 나온 여성을 생각합니다. 흙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기에 남성은 불안정합니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창조성은 있을지라도 안정적으로 서기 어려운 존재의 상징입니다.
그의 짝은 그 불안함을 메꾸어 비로소 완벽함을 가지도록 태어난 존재입니다. 둘이 합하여 비로소 완성체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여인을 보고 ‘내 뼈(살) 중의 뼈(살)’라고 환호합니다.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존중과 기쁨의 표현입니다.
지극히 높은 존재로 존중하는 지아비, 지어미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거룩한 관계의 시작은 먼저 가족과 배우자 그리고 타인 특히 여성에 대한 존중에 있습니다. 우리도 아담처럼 환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가족과 배우자야말로 거룩한 관계의 모본임을 깨닫고, 그 바탕 위에 타인에 대한 바른 이해를 지닌 성숙한 사람이 되자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하신 결혼과 이혼에 대한 선언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당시의 율법을 고스란히 거부하십니다. 가히 혁명적입니다. 가족에서 내쳐진 여인의 삶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9절). 이 말씀의 대상은 남성들, 그것도 자신의 권력과 욕망을 하느님의 율법으로 치장한 유다교의 고위 성직자와 지도자들이었을 겁니다. 하느님이 태초에 세우신 거룩한 관계는 무너졌고, 율법으로 상징되는 제도와 규정으로 인해 거룩함의 본래 의미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쓰신 방식은 일상에 굳게 스며든 습(習)을 완전히 전복하여, 보고 들은 사람들이 휘청거릴 정도로 충격을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야 다시 새로운 관계,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거룩한 관계의 회복은 역설적으로 강한 부정과 완전히 무너뜨리는 전복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관계의 회복은 자녀에 대한 성찰로 이끕니다. 나의 바람대로 되지 않는 자녀 앞에서 절망과 분노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개개인에 자녀를 대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하지만 모든 부모가 가진 공통된 인식이 있습니다. 자녀를 포기하지 않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 때문에 자녀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자녀를 믿고 기다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믿고 기다리듯이 우리도 기다립니다. 그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그분이 개입하지 않으심을 원망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하느님은 우리에 대한 신뢰를 거둔 적이 없습니다. 자녀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기다리듯이, 하느님도 우리에게 견딜 수 있을 고통만을 주십니다. 믿고 참고 기다리는 것.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대하는 것과 닮았습니다. 거룩한 관계는 가장 기초적인 인간관계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관점의 근원은 하느님에게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이의 심성을 가지라 하신 것도 거룩한 관계를 완성할 품성이자 자세입니다.
두 주전 1부 설교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린이(파이디온, παιδιον)는 성경에서는 부정적 이미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사 3:4. 1고린 13:11) 율법 특히 모세오경에 대해 무지하다고 업신여김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성찰해 보면 오늘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으로 기존의 ‘어린이’에 대한 시각이 무너지고 새로 정립됩니다. 오늘 본문은 어린이를(16절) 끌어안으셨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무지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편견을 버리고, 끌어안고 축복까지 하십니다.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린이’를 영적으로 성찰합니다. 어린이는 묻습니다. 궁금한 것은 부끄러워 하지 않고 묻고 또 묻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은 묻는 사람입니다. 묻는 가운데 그 의미를 알아 갑니다. 또 어린이는 약합니다. 아직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우리 역시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은 끌어안아 축복하십니다. 우리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 해결할 문제와 고민, 즐거울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 두려운 현실과 미래. 과연 우리는 모두 약한 사람입니다. 놀랍게도 그 약함을 가져다 귀하게 쓰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거룩한 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의 힘을 받은 우리가 눈앞에 보이는 존재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데서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렸으니, 이제 우리는 주님과 우리 간에 거룩한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주님과 나, 우리와 우리 사이 관계의 완성은 거룩함을 입으려는 노력에서부터라는 사실,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해 그분이 무너뜨리셨으니, 우리가 힘을 합쳐 굳건히 다시 세울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