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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진지하고 긴 글로 제 물음에 화답해주신 선생님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왜 ‘배용한’인가?
봄비가 참하게도 내린 그날 제가 왜 배용한 선생님이 보고 싶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선생님과 저는 뭐 유별나게 친하지도 않고 서로에게 호의를 표시한 적도 없는데, 그리고 선생님이 제 글 속의 ‘한사람’이 되어 저에게 무슨 말씀을 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권정생 선생님의 부재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답답하고 우울할 때 저는 가끔 권선생님 댁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그리고 마당 댓돌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곤 했습니다. 대체로 선생님 잔소리를 듣고 있다가 나오기가 쉬웠는데 징징거리는 목소리며 답답하고 고리타분하기만한 잔소리가 듣기에 썩 좋지는 않았지만 한티재를 넘어 안동으로 돌아오는 그 길 어디쯤에선가는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곤 했습니다.
권선생님을 뵈러 가던 그 한티재 너머 어디쯤에 이제는 배용한선생님께서 계신 것 같습니다.
혜량하여주시기 바랍니다.
밑도 끝도 없는 제 물음에 대하여
돌이켜 보면 저의 삶이란 것은 제가 앞선 글에서 비판하였던 그분들의 삶보다 훨씬 개인적이고 하찮은 삶이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가부장적인 가풍 속에서 자랐고 물욕과 명예욕이 남다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운동’을 통해서 훨씬 나은 인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렸을 때 사회과학 공부를 하면서 제가 받은 두 가지 감동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내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던 우리집의 가난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우리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구성체의 질곡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본의 착취에 맞서 싸워야한다고 이빨을 깨물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이 해방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공부를 하면서 얻은 또하나의 감동은 ‘인간은 변화 가능하다’는 명제입니다. 방안에 누워서 마당에 있는 동생을 불러 내 머리맡에 놓인 물잔 심부름을 시키던 제가 동생과 이야기를 하고 여성을 보는 시각이 바뀌고 어려운 이웃을 대하는 방법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제 모습에 감동해서 제 여동생이 ‘도대체 운동이라는 것이 뭐길래 우리 오빠를 저렇게 변화시켰을까?’를 궁금해하며 대학 운동권을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생업을 시작했을 때 저는 상지전문대학을 졸업한 열등한 노동력일 뿐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박봉을 참아내는 일 뿐이었습니다. 출판사에 다니다가 대학 교수님들께 교재를 판 돈의 10%를 돈봉투를 만들어 갖다 줘야하는 일에 진저리를 치고는 사표를 냈습니다. 낙향해서 지역신문 기자를 했지만 촌지를 받지 않는 일이 고작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마누라 잘 만나서 먹고 산다는 소리를 면치 못했습니다. 그것은 ‘먹고 산다’는 측면에서 사실일 뿐만 아니라 내가 시험에 들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선생 마누라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짧은 학력의 제 노동력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면 촌지를 거절할 수 있었을까? 연구실로 돈봉투를 나르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까? 글쎄요.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시험에 들지 않았음을 감사하고 살 뿐입니다.
제가 선생님께 드린 질문을 다시 한 번 읽어 봅니다.
선배가 권정달 사무실에 비서로 나간다고 해서 ‘권정달은 광주학살의 원흉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했더니
한 사람이 ‘국민회의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 선배가 이번에는 서울에서 출마한 한나라당 권택기 후보 선거를 도우러 갔다고 해서 뭐라고 했더니
한 사람이 ‘동향 사람이고...뭐 지도 먹고 살아야지....’했습니다.
친구가 파렴치한 짓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화를 냈더니
한 사람이 ‘너는 친군데 어떻게 그러느냐’고 하였습니다.
내 친한 친구가 한나라당 공천으로 시의원에 출마를 해서 친구들이 돈을 좀 모아 함께 가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는 친구지만 ‘한나라당을 지지할 수는 없다’고 했더니
한 사람이 ‘친군데 너무 빼족하게 그러지 마라’고 했습니다.
존경하는 신부님이 집을 크게 지어서 제가 ‘집이 저렇게 클 필요가 있나’ 했더니
한 사람이 ‘혼자 사는 분들은 시야가 좀 더 넓은 데서 살아야한다’고 했습니다.
또 아는 분이 크고 비싼 집을 지어서 ‘좀 심하지 않냐’했더니
한 사람이 ‘그분들은 오래도록 전원생활을 꿈꿔왔다’고 그랬습니다.
‘해외여행을 너무 자주 다니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한 사람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나라당을 떨어트리기 위해서 김광림 후보에게 투표를 하자고 할 때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거 캠프에서 전교조 운동가와 한 때 농민운동가와 한 때 문화운동가였던 ‘우리 사람’들 몇 몇이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김광림이는 당선되면 한나라당에 들어간다고 이야기했고 권정달 정동호 김길홍 류돈우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선거운동을 하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냐’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고 빈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나왔습니다.
내가 그 친구한테 이리 말했다면 ‘한 사람’은 또 뭐라고 말했을까요?
‘한 사람’은 모두 우리 사람들입니다.
선생님.
대답해주십시오.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1989년쯤으로 기억합니다. 운동을 하면서 제가 받은 세 번째 감동이 있었습니다.
한 선배가 여자 둘을 두고 양다리를 걸쳤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한 여자를 선택했는데 다른 한 여자가 심하게 앓았습니다. 이 사실이 여럿에게 알려졌고 사람들은 ‘활동(운동)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분개했습니다. 급기야 어느 날 그 선배가 불려오고 우리 사람들이 여럿이 둘러 앉았습니다. 선배고 후배고 할 것 없이 공개적으로 그 선배를 비판했고 그 선배도 자기 비판을 했습니다. 살벌한 자리였습니다. 저는 그날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추상적이고 멀게만 느껴지던 ’동지‘라는 단어가 제 가슴에 오롯이 들어왔습니다.
위에 적은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면서 제가 슬펐던 것은 바로 그 ‘우리’라고 하는 규정력의 경계가 점점 희미해지더니만 이제는 아예 눈으로는 잘 구분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토록 경계하자고 했건만 우리는 이제 우리가 그토록 타파하고자 했던 연고주의 온정주의 조직이기주의 등등의 오류에 타파는 커녕 우리가 빠져들어서 모든 것이 정당화되고 마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저리도록 아팠습니다. 박노자인가요? ‘우리 안의 파시즘’ 이야기를 했지요. 진보운동을 한다하는 사람들이 집에서는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자세를 버리지 못하고 가사노동을 하지 않고 수신(修身)하지 않았으니 어찌보면 진보의 성장은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도 사람이 객관성과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사상과 실천이 달라서도 안되고 안과 밖이 달라서도 안되고 나와 남이 달라서도 안되는 것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한결같음’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로만 친다면야 저도 튼튼한 낙관주의자입니다. 원시공산제 사회가 이제 자본주의를 지나고 있으니 곧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리라 아직도 믿고 삽니다.
대중성으로 친다면야 저만한 대중성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동창회도 나가고 여자 있는 술집에도 가고 해외여행도 가고 집도 짓고 싶고 미제국주의 다국적 기업 국경을 넘어드는 초국적 금융자본 나이키도 좋아하고 펀드도 하나 들어 있습니다. 성중이 형이 그리 싫어하는 햄버거도 아들과 시내에 나가면 가끔 사먹습니다.
도덕성으로 친다면야 저만한 치명적 결함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참교육학부모회 중앙 이사를 하면서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한나라당 권오을 의원이 보낸 갈비짝도 받아먹었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고 신앙인답지 않게 산 적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제가 뾰족한 놈이 아니라는 항변이기도 하고 제가 제기했던 문제가 문제 제기자로서의 제 자격문제를 넘어서서 그리 특별한 사례들만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최소한 ‘우리’라는 규정력이 있다고 믿고 있었고 거기에 많이 기대고 살았습니다.
제가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럴 수 있느냐?’는 식의 문제제기를 했던 것도 아니고 제게 ‘그럴 수 있다’고 말한 사람들도 ‘우리’를 벗어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 결론은 제가 너무 과거에 매달려 산 것일까요?
이미 세월은 87년 형식적 민주화의 성취라고 하는 공간으로부터도 20년이 훌쩍 지나있는데 아직도 공개비판을 하던 ‘우리’라는 규정력에 대한 향수를 잊어버리지 못하고 살아온 것일까요?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조금 무안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것이 희석되고 퇴색만 하는 것은 분명 아닐테고, 그렇다면 우리 운동이 다른 형태로 전환하거나 변형된 것일까?
계급혁명을 꿈꾸던 변혁운동의 맥락에서의 우리 운동은 다 사라지고 이제 우리에게는 ‘새만금’이나 ‘운하’나 천연기념물이나 하는 신사회운동의 성격들만 남아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평통사는 뭘까? 주한미군을 내몰고 민족 과업을 완수하겠다는 우리 운동의 좌표는 무엇인가?
당분간 생각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렇게 이 문제를 풀어 볼 것입니다.
대안학교 이야기를 잠깐 할까합니다.
제가 제안한 평화센터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어서 김헌택선생님이 제안한 대안학교 이야기로 구체화되었지만 저는 2005년 1년동안의 준비과정을 평통사와 정평과 함께 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나혼자 할 일도 아닐뿐더러 그럼 의미도 없다. 그래서 두 단체 회의에서는 늘 보고를 하고 의견을 구하고 활동자금도 일부러 달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학교가 만들어지고도 한참동안 저는 회의때마다 학교 일을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갈등이 있어서 한 회의 때 보고를 했더니 그 이야기를 왜 여기서 하느냐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마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람들이 귀찮아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골치아픈 일에 그리 관심두고 싶지 않다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가톨릭상지대학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 피재현이 되어 있습니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저는 그냥 직장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일하기 싫거나 더 좋은 직장이 있어서 사표내고 옮기면 그만입니다. 누가 저보고 너 그러면 안된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바자회때 도와주지 않느냐고요? 최형석 선생님이 강의를 나가지 않느냐고요? 그것은 제 동창들도 하는 일이고 우리 옆집 아줌마도 하는 일입니다. 저는 ‘우리’에게 그 정도로 배가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내공에 대하여
제가 이 험난한 무림에 나온 지도 어언 몇 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저는 내공이 부족하여 장풍도 못쓰고 축지법도 못합니다. 그저 몇 가지 초식만으로 겨우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30갑자 이상의 내공을 단숨에 끌어올려준다는 드래곤볼을 빨리 찾아야할텐데...
선생님.
저도 그 내공이라는 것이 갖고 싶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흔들리지 않고 혼자서도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애꿏은 나무 판때기를 후벼 파면서 수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력이 드높다는 도법스님을 따라 걷기도 하고, 강성중 선배처럼 평생을 한결같이 걸어가시는 분들을 보면서 사모의 정을 키우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제 내공의 하찮음을 저도 뼈아프게 알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그래왔고 앞으로의 삶 속에서도 내공은 제가 붙들고 가야할 ‘화두’일 것입니다. 정진하겠습니다. 좀 더 넓어지고 좀 더 깊어질 수 있도록 정말로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제기한 문제는 내공과는 차이가 좀 있지 않을까요? 역사에 대한 믿음도 그리 막연하게 다다를 수 있는 고지는 아니지 않을까요? 이것저것 다 인정하고 ‘넓고 길게 보자’는 식으로 용인하고 나면 소위 ‘우리’라고 하는 경계는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나요?
‘해병전우회’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교통정리를 합니다. ‘새마을 부녀회’는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학교 앞에서 봉사를 합니다. 한나라당 사조직 아줌마들도 무료급식소 봉사를 하고 우리가 욕해 마지 않는 삼성그룹은 소외계층을 위해 1년에만도 수백억의 장학금을 내놓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더불어 사는 삶에 헌신할 수 있습니까?
새벽 한 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꽃지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저는 20층 아파트에서 지상으로 내려가 꽃나무들을 보았습니다. 내일이면 많은 꽃을 털어내고 힘차게 새 잎을 밀어 올릴 꽃들을 보고 싶어서 아파트 주변을 걸었습니다.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가 화단 꽃나무에 연신 랜턴을 비춰보며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했더니 “이기요, 조팝나무지요? 꽃이 어째 이리도 이쁠까요? 참 이쁘지요? 햐! 참 곱지요?” 합니다. 덩달아 옆에 서서 금모래처럼 반짝거리는 쌀알같은 꽃잎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꽃보다 경비원 아저씨 얼굴이 더 고왔습니다.
우리 아파트는 서민 아파트라 아파트를 빙 둘러싸고 덤프트럭이며 중장비들이 즐비하게 서 있습니다. 트럭 등에 업힌 포크레인도 15톤 25톤 덤프트럭들도 간간이 지게차도 함께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비가 내일까지 오면 저 장비의 주인들은 일을 쉬어야 합니다. 참 철딱서니 없이 야심한 밤에 비를 맞고 돌아다니는 내가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대운하를 파면 저 사람들이 다 놀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을텐데...
역시 세상은 어렵고 복잡합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제 나이 이제 40을 조금 넘었습니다.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집안도 없고 학벌도 없고...믿을 것 하나 없는 세상에서 만난 여러분들이 저를 이만큼 키워주셨고 지켜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겨우 삶이 두렵지 않은 정도가 되었습니다.
공부를 통해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면서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첫댓글 '병산'님의 글이 또 나를 울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게 공개로 말을 거는 것이 반갑고 고마워서 밑천 있는 대로 주절주절 썼는데, 머 좀 "이거는 말이 되나?" 이런 말이 좀 나오면 소득이 좀 나을 것도 같습니다. 공개로 묻고 공개로 답을 하고 그러니 아무라도 좀 거들면 더 감사하겠습니다만서두...
거 참, 거들고 싶지만 딱히 뭘 거들지 모르니...
요즘 병산이 이런저런 생각에 고민이 많은 모양입니다. 상도 임상옥에 보면 `戒盈盃'라고 있는데 위기에 직면한 임상옥을 구해주기도 하지요. 부디 너무 넘치지 않기를.....
아아아 깊은 댓거리 잘 새깁니다...내공없이 속살을 엿본 것 같아 민구스럽지만 그래도 문득 감사해졌습니다.
그래요! 나도 우상숙 언니로부터 운동권 언저리에서 이 길을 시작했지만 이십년이 지난 지금 왜?라고 자문해 봅니다.모두가 행복하게 사는길이라 생각했기에 묵묵히 일해 왔다고 여겼는데...모든것을 다 끊어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그리고 우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우리가 아닐때 그때서야 무조건 우리를 믿어버린 나의 어리석음을 나무랍니다.내공이 없어서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