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가 나타났다
-임은자 첫동시집 『시력검사』(브로콜리숲, 2023)
박 일
1.
숟가락으로 한쪽 눈 가리고/ 보지도 않는 지우에게 윙크했다.//
윙크 한 방에/ 나비가 날아간다.//
윙크 한 방에/ 비행기가 날아간다.//
윙크 한 방에/ 물고기가 날아간다.//
안경 없이도 온 세상이 훤-하다.
- 「시력검사」 전문
2021 전국동시공모전은 서울 강동문화재단이 주최했다. 이 행사는 코로나 블루 극복 대국민 프로젝트로써 1회성이었다. 공모 개요는 ‘생산하는 도서관, 열린 문단을 지향하여 전국 규모 동시문학상을 현상 공모합니다. 따뜻한 감성에 즐거운 상상력을 더하여 당신만의 동시를 만들어 보세요.’였다.
『동시발전소』(2021, 가을호)가 입선작 여러 편을 발표했는데, 그 중에 가장 높은 자리(대상)에 올려놓았다.
읽을수록 재미있다. ‘시력검사’를 하기 위해 한쪽 눈을 가린다. 갑자기 지우에게 윙크를 하고 싶다. 시력의 수치 따위야 생각할 겨를도 없다. 지우만 보이면 온 세상이 훤해지니까.
임은자!
신인이라서 거의 기억하는 이들도 없으리라.
연전에 수필집 『인생을 쓰는 시간』을 상재했다. 프롤로그 일부를 옮긴다.
마흔 후반에 나에게 온 글은, 작은 내 세계를 확장시켰다. 동시로 시작한 글은 수필로 이어졌고 <매일매일은자>라는 새로운 세상을 펼쳐주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방송국 인터뷰를 하고 지면에도 소식이 전해졌다. 기적처럼, 처음 시를 배운 그곳에서 첫 특강을 하고 원고를 청탁받는다. 전혀 상상도 못 한 꿈같은 일들의 연속이다. 이런 날이 나에게 올 것이라곤 상상도 해 본 적 없다.
요가, 요리, 장사, 이것저것 기웃거렸지만 내 것이 되지 않았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줄 알았던 글이 어느 날 내 품으로 왔다. 놓치지 않으리라 마음먹지만 언제 또 떠나버릴 인연일지 알 수 없다.
나를 바라보게 하고, 사라진 내 과거를 살려낼 수 있는 유일한 도구, 오늘을 살게 하는 이유,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주는 글 앞에 겸허해진다.
글은 숙명이었다. 글을 쓰면서 비로소 오늘을 살게 하는 이유를 알았고, 그 앞에 겸허해지는 자신을 발견했으니까. 그는 ‘매일매일은자’라는 플랫폼을 통해 날마다 쓴 글을 소개하고 공유한다. 매일 쓰지 않으면 손끝에 가시가 돋칠 정도다.
2.
수많은 동시집을 만난다. 『시력검사』(브로콜리숲, 2023)를 만나면서 “진짜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동시의 전범을 다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쉽고, 재미있고, 참신한 비유와 긴장감, 동심성(순박성) 그리고 꿰맨 자국이 전혀 보이지 않는 천사의 옷이었다.
그날/ 19층 아저씨는 범죄 현장에서 사라졌다.//
나와 방귀 냄새만 남았다/ CCTV에도 아저씬 무죄다//
6층에서 현지가 탄다/ 나는 죄도 없이 얼굴이 빨개진다//
나에겐 알리바이가 없다
-「알리바이」 전문
현장 부재 증명을 해야 알리바이가 성립한다. 그러나 방귀를 뀐 당사자는 이미 내렸고, 6층에서 현지가 탔으니 그 범인은 누구겠는가. 죄도 없이 얼굴이 빨개진다. 쉽고 재미있다. 순박한 동심에 절로 웃음이 터진다.
5교시//
내려온다/ 내려온다/ 눈덩이가 굴러 내려온다//
책도/ 칠판도 다 덮었다//
선생님도/ 학교도 다 덮었다//
내려온다/ 내려온다/ 눈꺼풀이 내려온다
-「눈사태」 전문
졸음은 책도, 칠판도, 선생님도, 학교도 다 덮는 눈사태다. 어쩌면 ‘졸음’을 이렇게 절묘하게 표현했을까? 좋은 동시는 ‘정말 좋다!’는 말을 거침없이 나오게 한다. 신선한 충격을 주는 기발한 표현 때문이리라. 시인은 늘 참신하고 독창적 비유를 만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태종사 수국//
할머니는 꽃이 예쁘다면서/ 자꾸만 이름을 까먹어//
국수를 거꾸로 하면/ 수국이라고 얘기했어//
집에 오는 길에/ 다시 물었더니/ 할머니 수국은//
태종사 국시
-「할머니 국수」 전문
체험도 내면의 진실이 담겨야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할머니께 ‘수국’을 가르친다. 그러나 할머니는 자꾸 까먹는다. 결국 수국은 국시(국수의 경상도 방언)가 되고 말았다. 이런 엉뚱한 발상이 즐거움 아닌가.
우리 오빠 십팔 번/ 너 일로 와//
아이스크림 혼자 다 먹었을 때/ 못 생겼다고 놀릴 때/ 얼레리꼴레리 까불 때//
일로 와/ 하고 소리친다//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매번 오빠가 왔다
-「일로 와」 전문
화자는 동생(여자 아이)이다. 아이스크림을 혼자 다 먹기기도 하고, 오빠 못났다고 놀리기도 하고, 얼레리꼴레리 까불기도 한다. 그 때마다 오빠가 외친다. “너, 일로 와!” 하고. 오빠의 허세를 알기 때문에 결국은 오빠가 다가올 수밖에 없게 하다. 이런 역설적 우애도 정감이 간다.
운동회날//
보나마나/ 일등이라서//
뛰나마나/ 일등이라서//
엄마는 오지 않았다.
-「거짓말」 전문
여운이 쓸쓸하게 남는다. 운동회날은 가족 잔칫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엄마가 올 수 없는 처지니까 본심을 보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뛰나마나/ 일등이라서’이라고 하면서 자위를 한다. 정말 엄마가 없는 운동장은 쓸쓸하지 않고, 일등이라서 괜찮다는 말인가. 아니다. 「거짓말」이라는 제목에서 속내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시정신이란 세속적인 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인의 승화된 욕망이다. 가족(또는 친구나 이웃 등)을 위해라면 외로움도 불쾌나 불편함도 인내할 줄 알게 하는 것도 훌륭한 시정신의 발로이리라.
내가 쓸 게/ 넌 닦아//
쓱쓱/ 예쁜 글은 쓰고//
싹싹/ 미운 글은 닦는//
우리는/ 청소 짝꿍/ 연필과 지우개
-「쓰고 닦고」 전문
시의 정신은 진선미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지우개는 미운 글을 싹싹 닦으며, 연필이 예쁜 글을 쓸 수 있도록 돕는다. 예쁜 글(세상)만 남는다. 동시도 예술이다. 그래서 견고한 시적 미학을 견지해야 하는 것이다.
까불이 봄비 좀 봐요//
찰랑거리며 내려와/ 땅속 새싹을 불러내요//
빼꼼 내민/ 새싹 손잡고//
퐁퐁/ 방방이 뛰고 있어요
-「봄비」 전문
체험도 중요하지만 동시는 친자연을 지향한다. 친자연은 세계(사물)와 자아(시인)의 화해거나 순응이다. 봄비는 까불이다. 땅속 새싹을 불러내고, 새싹 손잡고 퐁퐁 뛰고 있다는 남다른 관찰력이 이런 상큼한 메타포를 찾아낼 수 있었으리라.
이 동시집은 제4부로 나누어 50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편편마다 시인의 개성이 드러나고, ‘맑음’과 ‘깨끗함’을 주면서 마음을 즐겁게 한다. 그리고 ‘생각의 여운’을 갖게 한다. 우리 동시가 진짜 가져야 할 특성을 다 갖추고 있는 것 같아 읽는 내내 마음이 즐겁다.
3.
이 동시집에는 마침표가 없다. 젊은 시인들이 대체로 지향하는 바다. ‘내 동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과 ‘시적 이미지의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일 게다. 앞으로 거는 기대가 커진다.
그림을 그린 김동현은 그의 부군이다. 대학생 때 광고대상 일러스트부문에서 대상을 차지했지만, 아내의 동시집에서 미술의 꿈도 이루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 동시집의 가치가 더 빛난다.
이제 우리 동시도 정체성을 찾아야할 때가 됐다. 임보 시인은 「오늘의 한국시 왜 이렇게 되었는가」(한국예인문학, 2023, 가을호) 하면서 ‘오늘의 시라는 글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난삽하고 골치 아픈 글이 되었는가’ 하면서 반문을 제기했다. 동시도 같은 현상은 아닐까? 동시를 읽는 일이 고통스럽고 짜증스럽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동시는 아동들이 읽는 시다. 자꾸 어려워지고, 배배 꼬고, 건조해지고, 개념화되면서 재미없어진다면 동시도 문제가 생긴 것이다.
임은자의 동시집에서 동시의 정체성을 찾았다. ‘시인의 말’에서 ‘자두를 먹을 때마다/ 윙크가 나와서/ 아이들을 만나면/ 윙크가 나와서/ 시를 쓰면/ 윙크가 나와서’라고 했다.
동시는 자연(사물)과 아이들에 대한 윙크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천연덕스러운 윙크라야 감동을 준다. 어쩌면 엉뚱한 상상력과 순박한 동심의 윙크도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정말, 진짜가 나타났다!
첫댓글 박일선생님의 서평에 <시력검사> 동시집이
더욱 더 빛납니다.
사랑이 많으신 선생님, 아름다운 동시교실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시인의 글에 이렇게 평을 해 주면
글쓰는 사람은 신바람 날 겁니다.ㅎ
시가 밝고 긍정적입니다.
임은자 시인의 앞날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