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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의 장자 '김인'과 백범을 잊은 며느리 '안미생'
해방 70년과 겹치는 독립운동가 김인 70주기
독립운동가 김인(金仁, 1918~1945)의 70주기가 3월 29일이란 사실을 나는 청년백범 4기의 임시정부 노정 답사단의 해설을 맡았던 홍소연 선생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2013년 자료실장을 끝으로 백범기념관에서 정년 퇴임한 홍 선생은 그리던 해방을 맞지 못하고 스물여덟의 짧은 생애를 마쳐야 했던 한 청년 투사의 죽음을 느꺼워하고 있었다.
임정 요인 백범 김구의 맏아들로 태어나 열일곱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시작해야 했던 김인은 폐병을 앓다가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서 병사했다. 1945년 3월 29일, 해방 다섯 달 전이었다. 그의 70주기가 해방 70년과 겹치는 까닭이다.
해방 전후사를 살펴볼 때마다 안타까운 것은 숱한 독립운동가들이 해방을 맞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일이다. 노령으로 인한 병사도 안타깝긴 마찬가지지만 젊디젊은 청년들이 해방의 감격을 맛보지 못한 채 스러져간 일은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
역사는 어차피 소수의 핵심 인물을 중심으로 기술된다. 중국 땅에서의 임시정부 27년의 역사, 거기서 펼쳐진 독립투쟁도 저명 독립운동가 중심으로만 기억되고 반추된다. 역사도 ‘선택과 집중’의 형식으로 기억되고 재현될 수밖에 없는 이상 그것이 불가피한 일이긴 하다.
해방 70년과 겹치는 김인 70주기
그 풍찬노숙의 여정에서 스러져간 유명 무명의 숱한 독립투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투쟁의 삶을 마감했던 이들을 따로 호명하지 못하는 우리 역사와 그 기억의 방식은 참으로 매정한 것이다.
그 간난(艱難)의 삶은 고작 한 줄의 기록으로, 고국으로 봉환된 유해가 안장되는 걸로 정리된다. 하기야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이국땅에 묻힌 무명지사들의 외로운 죽음에 비기면 그것은 얼마만 한 호사일까.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이 해방 조국에서 누린 영광 대신 이들의 희생은 역사의 이면에 쓸쓸히 가려져 있다.
백범은 상하이 영경방(永慶坊) 10호에 살던 1922년, 둘째 아들 신(信)을 얻었지만, 이태 후 아내를 잃었다. 아내 최준례(1889~1924)는 산후조리 중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다 뒤늦게 외국인 무료 진료소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병원이 프랑스 조계지를 벗어나 있어 백범은 아내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
둘째 아들 신이 태어났을 때 첫째 아들 인(仁)은 다섯 살이었다. 1918년, 아버지의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인은 1920년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상하이로 건너가 거기서 자랐다. 어머니 최준례가 세상을 떠나자, 젖먹이 신을 기르는 것은 할머니 곽낙원의 몫이었다.
할머니는 젖먹이에게 끊인 물에 설탕을 타 먹이고 자신의 빈 젖을 물려야 했다. 가난은 매 끼니를 걱정하게 할 만큼 끈질겼다. 인은 중국인들이 버린 채소 더미에서 먹을 만한 푸성귀를 골라내는 할머니를 거들며 자랐다. 그런 장면을 목격한 백범은 모친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원했고 결국 할머니는 신을 데리고 고향인 해주로 돌아갔다.
고향이라고 해서 가난을 넘어설 방도가 달리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허드렛일로 끼니를 벌면서도 할머니는 “오늘은 두 부자가 어느 집 처마 밑을 기웃거리며 밥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결국, 곽낙원은 장손인 인마저 고향으로 보내라며 힘들여 모은 돈을 백범에게 보냈다. 그래서 인도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조손(祖孫) 세 식구는 이국땅의 자식과 부친을 그리며 가난하게 살았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백범이 일제에 수배되면서 조국의 가족들에게는 일경의 끊임없는 감시와 협박이 이어졌다. 결국, 백범은 다시 가족을 중국으로 부를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 도착한 김인은 백범과 장제스의 합의로 설치된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들어갔다가 난징의 중앙군관학교로 옮겼다. 일제의 항의로 과정이 마무리되지 못하긴 했지만, 이들 학교에서 공부한 한인 청년들은 뒤에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을 혁명자·반역자로 매겼던 김인
김인은 1935년 11월, 백범이 이동녕·이시영과 함께 항저우(杭州)에서 애국단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을 조직할 때 실무진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때 그는 우리 나이로 열여덟 살이었다. ‘소년’을 ‘청년’으로 자라게 하고 살게 하던 시대였다. 이듬해에는 한국 독립군 특무대 예비훈련소의 감독관으로 나가 군사훈련에 전념하였다.
이후, 그는 백범의 지시에 따라 사지를 넘나드는 활동을 계속했다. 1938년 5월 창사(長沙)에서 상하이에 다시 잠입하여 당의 재건을 기도하고 일본의 중요 관공서를 폭파할 것과 일본의 현관(顯官)들을 총살할 계획을 지휘·감독하였다.
또한, 일본 전투함 이즈모(出雲)를 폭파, 격침할 준비를 진행하였지만, 사전에 정보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1939년 10월,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첩보 활동에 참가하였다. 그의 첩보 활동은 주로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스물두 살이던 1939년, 김인은 충칭(重慶)에서 당시 임시의정원 의장이었던 김붕준의 큰딸 효숙을 만난다. 그 길거리에서 김효숙은 수첩을 내밀며 글 하나를 써달라고 한다. 김인은 철필로 짤막한 즉흥 시구를 적었다. 그게 지금도 남아 있는 김인의 필적이다.
누이!
우리는 叛逆者(반역자)!
現實(현실)과 妥協(타협)을 拒絶(거절)하는 무리외다.
우리는 革命者(혁명자)!
正義(정의)를 우리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외다.
그리고 우리는 先驅者(선구자)!
先驅者(선구자)인 까닭에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압니다.
김인은 자신을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반역자, 정의를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혁명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걸 알고 있다는 선구자로 매겼다. 그것은 사춘기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야 했던 혁명가의 아들이 정립한 자신의 정체성이었을 것이다.
김인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의 장녀 안미생(安美生, 1914~ )과 연애 끝에 결혼했다. 베이징에서 나서 상하이에서 자랐고 홍콩에서 중등학교를 나온 뒤 쿤밍(昆明)의 서남연합대학(칭화대·베이징대·난카이대의 전시연합 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이 재원은 영어, 러시아어 등 외국어에 능통해 충칭의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김인을 만났다. 둘 사이에서는 딸 효자(孝子, 1941~ )도 태어났다.
1940년 9월에 임시정부는 치장(綦江)에서 충칭으로 옮겼다. 충칭은 중국 서부의 분지 도시로 그 여름은 난징·우한과 함께 양쯔강 연안의 ‘3대 화로(火爐)’ 중 한 곳으로 알려질 만큼 무덥기로 유명했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본에 밀린 중국이 수도를 충칭으로 옮기자 갑자기 도시 규모가 열 배 이상 커지면서 충칭의 공기는 더 나빠졌다. 고령의 독립운동가들이 폐병을 앓다가 세상을 뜨는 일도 잦았다.
페니실린, 김구의 선공후사
김인도 폐병을 앓기 시작했다. 공기가 나쁘기도 했지만,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첩보 활동을 했던 긴장감이 병을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안미생은 시아버지 백범을 찾아가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진 페니실린을 맞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백범은 폐병으로 죽어가는 동지들도 그렇게 해 주지 못하는데 아들이라고 특별히 손을 쓸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중경의 기후는 9월 초부터 다음 해 4월까지 구름과 안개 때문에 햇빛을 보기 힘들며, 저기압의 분지라 지면에서 솟아나는 악취가 흩어지지 못해 공기는 극히 불결하며, 인가와 공장에서 분출되는 석탄 연기로 인하여 눈을 뜨기조차 곤란하였다. 우리 동포 300~400명이 6~7년 거주하는 동안 순전히 폐병으로 사망한 사람만 70~80명에 달하였다.
이는 중경에 거주하는 전체 한인의 1~2할에 해당하는 숫자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중경에 거주하는 외국의 영사관이나 상업자들이 3년 이상을 견디지 못한다는 곳에서, 우리가 6~7년씩이나 거주하다 큰아들 인이도 역시 폐병으로 사망하였으니, 알고도 불가피하게 당한 일이라 좀처럼 잊기 어렵다.
- 김구, <백범일지> 중에서
어버이로서 자식의 목숨을 근심해야 마땅했지만, 백범은 그 위급한 순간에도 공사(公私)를 엄격히 구분했다. 그게 그 시대의 지도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덕목이었겠지만, 남편의 친부로부터 구원을 거절당한 며느리와 이를 전해 들은 아들은 그것을 어떻게 갈무리했을까.
▲ 경교장에서의 김구와 안미생(1946년)
병이 깊어져 김인은 결국 1945년 3월 29일, 일흔을 앞둔 부친과 젊은 아내, 어린 딸을 두고 먼저 눈을 감았다. 21년 전 어머니 최준례가 시모와 남편,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차마 감기지 않는 눈을 감은 것처럼 그 역시 가족과 조국에 대한 강렬한 미련을 두고 눈을 감아야 했다.
남편의 사후, 안미생은 백범의 비서관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11월 임정 환국 제1진이 귀국할 때 백범, 김규식 등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경교장에서 살림을 도맡으면서 비서관으로 김구를 수행했다. ‘안 스산나’라고도 불린 그녀는 외부 강연과 함께 반탁운동에도 행동으로 참여하는 등 여성 지식인으로서 꽤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48년께 안미생은 딸 효자도 떼어놓은 채 돌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남편 없는 이 나라에 살기 싫다’는 말만 풍문처럼 남긴 채. 1949년 6월, 시아버지 김구가 경교장에서 급서했을 때에도 그는 뉴욕에서 조전(弔電)만 보냈을 뿐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안미생은 대학에 진학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50년 이후 그는 소식이 끊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까닭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딸 효자도 1960년대 중반 어머니의 제안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 소식이 끊겼다.
효자는 고통스럽게 잃은 맏아들 인의 유일한 혈육, 백범이 홀로 남겨진 효자를 얼마나 끔찍하고 애틋하게 여겼는지는 불문가지다. 손수 이름을 지은 손녀 효자는 할아버지 김구의 손에서 자랐다. 한때 대만대사로 가 있던 숙부 신(信)을 따라 대만에서도 생활했던 그녀도 대학(서울대 조소과)을 졸업하고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김인은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추서 받았다. 그의 유해는 1948년 고국으로 봉환돼 정릉 가족묘역에 묻혔다가 1999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 묘역에 할머니 곽낙원(1858~1939)과 함께 안장되었다.
그러나 현재 김인의 직계가족 가운데 김인의 연금을 수령하는 이는 없다고 한다. 훈장 서훈이 결정되면 보훈처는 유족들에게 이를 통보해주고 ‘유족 등록’을 권고한다. 그러나 어찌 된 까닭인지 김인의 직계가족들은 아직 ‘등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안미생은 1914년생이니 살아 있으면 백 살이 넘었다. 유일한 혈육 효자도 진작 일흔을 넘겼다. 안미생이 살아 있을 확률은 떨어지지만, 김효자는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들의 소식은 정부(보훈처)는 물론이거니와 국내의 유족들도 알지 못하는 듯하다.
연락 두절,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린다.’는 속설은 적어도 백범의 후손들에겐 해당하지 않았다. 김구의 집안은 그나마 사회적으로 대접받은 유일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본인은 흉탄에 쓰러졌지만, 후손은 비교적 교육도 잘 받았고 정부의 배려와 기념사업회의 지원이 뒤따르면서 순탄하고 안정적인 삶과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백범의 둘째 아들 신(信)은 공군 참모총장과 교통부 장관을 지냈고 그의 3남 1녀 자녀들도 공기업이나 정부 기관 등에서 요직을 지냈다. 아들들은 각각 주택공사 사장, 보훈처장을 역임하고 기업체 대표로 있다. 딸은 재벌기업 ‘빙그레’ 회장의 부인이 되었다.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대물림되는 가난 속에 잊히고 있는 대다수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과 비기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백범 김구는 단순히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내서가 아니라 이 나라 항일 독립투쟁의 상징적 존재다. 그의 아들도 열일곱에 항일투쟁의 길로 나서 스물여덟 꽃다운 나이에 페니실린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외로이 죽어갔다.
그의 70주기는 곧 광복 70년이다. 안미생이 원했던 페니실린을 백범이 허락했다면 김인은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그러면 안미생과 김효자가 조국을 떠나지도, 소식이 끊기지도 않을 수 있었을까. 임정 주석 김구의 아들 김인 유족의 소식조차 알지 못하는 게 해방 70년의 현실이라면 그건 너무 씁쓸하지 않은가.
대전현충원을 찾은 청년 백범, 민족문제연구소, 효창원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원들이 보내온 사진 속에서 김인과 곽낙원의 묘소는 3월의 햇살 속에서 평화로워 보였다. 할머니와 나란히 누워 해방 70년, 자신의 70주기를 맞으며 김인은 떠나간 아내와 딸애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의 묘소에서 술을 올리는 뒷사람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이 나라와 겨레가 망국, 그 간난의 시대를 기억하고 그것을 추모하는 방식은 참으로 덧없고 속절없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가 없었다. 1세기도 아니고 70년, 고작 70년이 흘렀을 뿐인데 말이다.
2015. 4. 3. 낮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