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사랑은 하늘 같아서...로 시작하는 노래도 있듯이,부모님의 사랑과 그 은혜는 가이없습니다.
그러나 모성애와 부성애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이 고등학교 3학년 말,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학교에 다니던 중,진학문제 상담차 집에 왔을 때 이야깁니다.
부모님 계신 사랑방에 들어온 남편은 진학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꿇어앉아 이마가 방바닥에 닿을만큼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답니다.
아들의 심중을 헤아리신 시어머님께서 먼저 말문을 여셨답니다.
"무신 말을 할라카는데,이리 말을 못하고 뜸을 디리노? 어여 말 해 보거라."
"아부지예,저 서울 고려대학교에 시험 한 번 쳐볼라 캅니더."
어렵게 말을 꺼낸 남편의 말에 시어머님께서
"거가 그리 어렵다 카던데...그래 한 번 쳐봐라."
시어머님의 말씀이 끝나자말자, 벌떡 일어서신 시아버님께서
"우리한테 무신 돈이 있다꼬,서울에 있는 대학시험을 보라카노?"
벽력같은 고함을 치시며 시어머님께 폭력을 행사 하기 시작했답니다.
너무나 놀란 남편은 아버지께 매달리며
"아부지예,지가 시험 안보겠심니더,어무이 때리지 마이소,예"
이 일화는 결혼 후, 시어머님께서 반복적으로 제게 들려주신 이야깁니다.
성품이 불 같으신 시아버님은 곧 잘 시어머님께 폭력행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시어머님은 고난의 세월을 견뎌오신 아프고 슬픈 한평생이셨습니다.
넉넉지 못한 농가에서 자식을 서울유학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어머님의 희생과 자신의 노력으로 원하던 대학에 진학했고,가정교사를 하면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답니다.
시부모님 희망사항은 큰아들인 시숙님을 공부 시켜 공무원으로 만들고,나머지 자녀들은 농부로 가업을 이으실 계획이셨습니다.그러나 공부와는 사돈의 팔촌격인 장남에게 실망하고 둘째인 남편을 고등학교까지 시키신 것입니다.집안 형편과 아버지 성품을 잘 아는 남편이 진학 이야기를 꺼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 것인지는 안봐도 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남편은 아버님께 효성스런 아들이었습니다.
결혼하고 바로 둘째인 저희집에 오셔서 9년을 함께 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장남인 시숙님내외보다 저희가 더 좋으시다며 내내 서울에만 계셨습니다.
아버님 모시고 보신탕도 사드리고,평생 한복에 고무신만 신으신 아버님께 구두도 맞춰 드리는,남편은 착한 아들이었습니다.따라서 저도, 담배는 안하셨지만,술을 좋아 하시는 시아버님께 안주감 사러 을지로 중부시장을 자주 들락거렸습니다.
저의 친정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사범대학을 나와 중학교 교사이신 아버지는 외동아들로 이기적이고 책임감이 부족하신 편이었습니다.
위로는 부모님과 다섯자녀와 아버지와 어머니,집안일 거드는 아이까지 10명의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으로서 막중한 책임의식은 잠시 접어둔채,날이면 날마다 술에 취해 자정무렵 귀가하셨습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때,아버지께서 교과서를 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중학교에서 교과서를 얻어다 주시겠다고 하셔서,그리 했습니다.
국민학교 교과서와는 달리 중학교 교과서는 국어,도덕 과목은 국정교과서로 같았지만,다른 과목은 출판사가 다르면 내용도 완전히 다른 책이었습니다.
다행히도,얻어다 주신 대부분 교과서가 같았지만, 사회과목은 완전히 달라서,저만 다른 교과서를 펴놓고 앉아있는 모습을 본 사회선생님께서,그 이유를 물으셔서 얼굴이 빨개진채로 머뭇거리고만 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2학기,고등학교 입시원서를 낼때 즈음,아버지께서 저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동생도 많으니,H여고 전면 장학생으로 가거라."
옆에서 듣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안된다,K여고에 원서 써넣어라.내가 우짜든동 학비 마련해 줄테니,다른 생각 말거라."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제 인생의 전환점에서,다행히도 좋은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아버지가 교사이시기에 육성회비는 면제되었고 수업료만 납부하니,금액이 그리 많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 하루 술값으로도 충분할 만큼이었을텐데,야속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지금은 80대 후반 노인으로
삭정이처럼 기운이 줄고 계십니다.
'딸들 대학까지 시킬 팔요 없다.'며 남의 일처럼 보시던 아버지를 제쳐두고, 온갖 고생을 마다않으시고 딸 넷을 다 대학까지 보내신 장한 우리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니의 희생으로 의과대학을 나온 여동생은 어머니께 효도를 가장 많이 잘 하고 있습니다.
병원 경영을 하니 어머니께 매달 드리는 많은 용돈보다,어머니께는 '원장 어머니'라는 칭호가 더 흡족하신 것 같습니다.
시댁도 친정도 아버지 말씀을 따랐다면, 지금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분명히, 모성애는 부성애보다 지극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어머니는 분명히 위대하십니다.
첫댓글 날 낳아 주시고 날 길러 주셨지만 부모님 가운데 모성애가 현명하고 탁월합니다. 예전에 있었든 어려운 시절에 흔히 있었든 일이지만 지금도 가정에서 우리가 내리는 판단이 아이들께 용기를 주고 집안에 웃음을 남기고 하는 일이 많습니다. 엄마는 분명히 위대합니다 그리고 대범하지요 남자는 이기적이고 소심하고 불협조적이고....흉 볼려면 많습니다
어머니,한국의 어머니는 위대합니다.
어머니의 교육열로 이렇게 생활수준이 높아졌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희생적인 모성애에 비하면 부성애는 초라하지요.
우리집은 반대로 부성애가 너무대단하여 제가 무척힘듭니다.9월8일이 자기생일이고 9월 12일이 추석인데
아빠는 자기생일은 하지말고 제사밥 해서 아이들 모두불러 먹이라는데 아이들이 반대하여 아빠생일은 이틀
늦추고 추석은 이틀당겨 9월10일에 식당에 예약해 두었다고 합니다.두딸과 며느리가 결정하여 모두에게
알려주는데 은근히 걱정되드니 편하게 되었지만 제사밥하여 갈때 집집이 나누어 줘야겠읍니다.
영택님은 배려심이 많으십니다.
배려심이 많으신 가장이 계시면 가족들이 편하지요.
저보다 7년 선배님이네요,,저희 친정쪽 이모님이나 사촌 언니들도 오빠들만 공부시키고 딸은 넘 준다고 공부를 못했어요,,,
그 뒤 사촌 여동생들 질녀들은 시대가 좋아서 공부를 했답니다,,,이 모두 가난한 우리나라이였기에,,,지금 우리나라가 잘 사는것도 힘들지만 자식 공부시켜주신 부모님이 있었기에,,,
숙희아우님 처음듣는 이름이군요.저는 30회윤정자인데 재미 남가주동문입니다.컴초보라서 동문들 많이
괴롭히는 문제아 였지요.아직도 쉬원찮은 솜씨로 덧글은 읽으면 꼭 달다보니 겨우 소식 주고받고
있지만 아직 사진도 못올리고 설명도 무슨말인지 모르고 아이폰으로 읽기만 하는 왕초보입니다.
자주나와서 안부나누어요.반갑습니다 숙희아우님!
숙희라는 이름만으로도 더욱반갑네요.동호회에 관심가져 줘서 고맙구요.
김숙희 아우님,처음 보네요.
학력입니다.
수 없잖아요.
43회 제 여동생과 동기여서 더 반갑습니다.
대구 수성구 시지동에서 김내과를 운영하는 43회 김옥희가 제 여동생입니다.
그 옛날에는 다 그랬지요.
아버지만 대학에 보내고,두분 고모님들도 국민학교가 최
시대를 잘못 타고난 운명이라 생각해야지
아하 옥희가 선배님 동생이군요,,반가워요 제가 시자동에 살때 김 내과 여러번 갔었답니다,,,지금도 아프면 가는병원이에요
그시절의 우리들은 부모님들의 무관심이 거의였을 것 같아요.저역시 어려운 사정이었기에 고등학교도 떨아지길 바라셨으니까요.ㅎㅎㅎ
아들만 대우 받던 시대라 더더욱 딸들에겐 차
이 심했지요.
옥덕님은 정말 훌륭하신 어머님을 두셨습니다. 어머님에게 효도 많이하십시요.
어머니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공부했어요.
효도를 해야한다고는 생각하면서도,쉽지가 않네요.
후륭하신 학자나 위인들의 뒤에는 훌륭하신 어머니가 계셔요. 부성애보다 모성애가 강함을 주위에서 더 많이 보지요.옥덕님 얘기는 우리 시대의 가정사들인 것 같습니다.청상으로 우리 남매를 길러주신 우리 어머니의 생전 모습이 생각납니다.생전에 효도 많이 받으셨지만 항상 애틋하답니다.
청상으로 남매를 기르신 어머니도 훌륭하십니다.
우리 나라 어머니들은 아버지보다 위대하고 훌륭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