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국회, 내각책임제 개헌안 부결 ←한민당이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본회의에서 난투극 끝에 표결에 부쳐졌으나 부결됐다. 한민당이 한국헌정사상 처음 국회에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부결됐다. 개헌안은 1950년 3월 13일 국회본회의에서 한민당과 여당인 국민회가 난투극까지 벌여가며 표결에 부쳤으나 재적의원 179명 중 가 79, 부 33, 기권 66, 무효 1표로 재적 3분의 2가 미달되어 부결됐다. 한민당은 1948년 제헌의회 총선 승리와 이승만 정권 수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나 1차 내각구성에서 완전히 소외되자 反이승만 투쟁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서상일 의원 등 한민당 소속의원 28명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정부수립후 처음 제출된 이 1차 개헌안은 1.순수내각책임제 구현 2.법령의 위헌여부 심판을 위한 특별법원 설치 등을 담고 있어 이승만 대통령의 차기집권을 봉쇄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1999년] 삼성의료원 명예원장 한용철씨 별세 ←한용철 삼성의료원 원장 한용철(70) 삼성의료원 명예원장이 1999년 3월 13일 삼성서울병원에서 폐암으로 별세했다. 한 원장은 국내 의학계에서 호흡기학을 처음으로 만들어 한국 의학 수준을 한단계 높인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미국 미네소타 의대를 2년 간 연수한 뒤 1961년 귀국, 내과학에 통합되어온 호흡기 내과학을 분리해 별도의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한 원장은 1956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 1962년 서울대 의대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30여년 간 서울대 의대에서 진료와 교육에 헌신했다. 1986년부터 4년 간 두차례에 걸쳐 서울대병원장을 역임했으며, 재직 중 호흡기 질환의 대표적 명의로 꼽혔다. 1967년 대한결핵협회 이사로 발을 들여놓은 뒤 1983년부터 지금까지 결핵협회 회장을 맡아왔으며, 한국심장재단 이사장, 한국금연운동협의회 부회장, 대한노인병학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했다. 1994년 삼성의료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의료경영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1986년] 납북된 신상옥과 최은희, 북한 탈출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에서 납북되었던 신상옥·최은희가 탈출에 성공했다. 1978년 영화배우 최은희가 납북된 데 이어 영화감독 신상옥도 홍콩 여행 중 납북되었다. 최은희는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작품에 거의 모두 출연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납북된 신상옥은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실권자인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신필름영화촬영소'를 설립했으며, 최은희와 함께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탈출기>(1984)·<소금>(1985)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1986년 신상옥은 오스트리아에서 최은희와 함께 서방세계로 극적으로 탈출했으며, 이후 칼기 폭파사건을 다룬 영화 <마유미>(1990)를 제작했다.
[1781년] 허셜, 천왕성 발견 1781년 3월 13일 독일 태생의 영국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이 최초로 천왕성을 발견했다. 허셜은 멀리 떨어진 천체를 연구하기 위해 배율이 6,450배나 되는 강력한 접안 렌즈를 직접 만들었다. 그의 누이 캐롤라인 허셜도 그를 도와 1783년 발견한 성운과 1786∼97년 발견한 8개의 혜성 관측에 참여했다. 허셜은 망원경으로 2번에 걸쳐 전천(全天)의 예비 관측을 수행한 후 1781년 3번째이자 가장 완전했던 전천 관측을 하는 동안 천왕성을 발견했다. 그는 W. 웟슨 2세에 의해 런던 왕립학회에 소개되었고, 천왕성 발견의 업적을 인정받아 코플리 메달을 받았다. 조지 3세는 그를 궁정 천문학자로 임명했다. 이후 그는 태양계의 행성과 다른 구성요소들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로 성운구조론·항성진화론·우주진화론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1901년] 함석헌 咸錫憲 출생 1901년 3월 13일 태어남 / 1989년 2월 4일 죽음
"생명의 씨알은 눈이 있고 귀도 있고 입이 있습니다. 사람이란 두려움이 없어야 사실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작은 나 속에 갇혀 있지 않고 큰 나 속에 한 통 치고 들어야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중략)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여는 일인데, 마음을 열지 않고는 천백 번 만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중략) 나는 하나의 우는 씨알입니다. 한 마리가 울어서 백백천천 마리와 같이 우는 민초(民草) 속의 풀벌레입니다. 서풍 속에 떠는 역사의 숲, 그 속의 작은 가지입니다." - 함석헌
함석헌은 민중계몽운동에 힘쓴 종교인이자 사회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했고, 평양고등보통학교,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10여 년 간 교직생활을 했다. 해방 직후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을 지낸 뒤 월남해, 1956년부터 <사상계>를 통해 그의 사상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한일협정을 반대한 단식 투쟁과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 등 종교인으로서 사회운동에 참여했으며 필화사건을 여러 차례 겪었다. 1970년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해 사회개혁을 위한 글들을 발표하는 한편, 독재반대투쟁과 민권운동을 끊임없이 펴나갔다. 1979년과 1985년 2차례에 걸쳐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되었고, 제1회 인촌상을 받았다.
[1890년] 사상가 유영모 柳永模 출생 1890. 서울 ~ 1981. 2. 3. 호는 다석(多夕).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유교·불교를 섭렵하다가 1905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에서 행한 명사들의 강연을 들으러 다니다가 초대 YMCA 총무 김정식(金貞植)의 인도로 연동교회에 나간 것이 계기가 되어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1910~1912년 오산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이것이 오산학교가 기독교학교가 되는 시발이 되었다. 1912년 일본의 도쿄[東京] 물리학교에 입학하였다가 귀국하였으며, 1921년 오산학교 교장으로 1년 있었다. 1928년 YMCA의 연극반을 지도하였으며, 1959년 《도덕경(道德經)》을 번역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후 7년 동안 교회주의 정통신앙인으로 살다가 비정통신앙인으로 전향하였다. 여기에는 톨스토이의 저서를 통한 신앙의 영향과 아울러 불교 경전과 노자의 《도덕경》을 읽은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톨스토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仁祖反正 1623년(광해군 15) 이서(李曙)·이귀(李貴)·김유(金瑬)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뒤의 인조) 종(倧)을 왕으로 세운 정변.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 내정 면에서 왜란으로 인해 파괴된 사고(史庫) 정비, 서적 간행, 대동법 시행, 군적(軍籍) 정비를 위한 호패법의 실시 등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으며, 외교 면에서도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後金)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국제적인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왕위를 위협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동복형(同腹兄)인 임해군(臨海君)과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했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호를 삭탈하고 경운궁(慶運宮:西宮)에 유폐(幽閉)했다. 이러한 행위는 성리학적 윤리관에 비추어 패륜으로 여겨졌고, 명을 배반하고 후금과 평화관계를 유지한 것도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던 당시의 사림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부터 정치권력을 잃었던 서인세력들이 그러한 사류(士類)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정변을 계획했다. 1620년부터 이서·신경진(申景禛)이 먼저 반정의 계획을 수립한 후 구굉(具宏)·구인후(具仁垕) 등을 끌어들이고, 이어 김유·이귀·최명길(崔鳴吉) 등의 문신과 연계하여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1623년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 계획은 거사 직전에 이이반(李而攽)의 고변(告變)에 의해 누설되었지만 광해군이 후궁과 연회를 즐기느라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능양군은 직접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이서가 장단으로부터 통솔해온 700여 명의 군사와 연서역(延曙驛)에서 합류한 후, 김유를 대장으로 삼아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했던 이귀·최명길·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의 600~700여 명의 군사, 그리고 이천으로부터 온 이중로(李重老)의 군사 등과 함께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성문을 격파했다. 이어 창덕궁에 이르자 반정군에 포섭되었던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반정군을 체포하지 않고 오히려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대궐을 쉽게 점령했다. 반정세력은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호를 회복시켜준 후 그 권위를 빌려 광해군과 동궁을 폐출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을 왕위에 추대했다. 한편 광해군은 반정군이 대궐에 침입한 뒤 비로소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서인으로 강등된 후 강화로 귀양보내졌다. 또한 폐모정청(廢母庭請) 등에 앞장섰던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은 물론 북인으로서 광해군 말기까지 정치에 관여했던 수십 명이 처형을 당하고, 200여 명이 유배당했다. 반면 반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1623년(인조 1) 윤 10월 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다. 인조반정 후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광해조 대북정권 몰락의 원인을 정책의 패륜성에서도 찾았지만, 보다 주요한 원인은 당시 정치세력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던 서인·남인 등 다른 붕당의 존재와 반대의견을 무시함으로써 야기된 불만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서인정권은 북인을 도태시키면서도, 남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는 등 명분상 하자가 없는 남인을 크게 등용함으로써 반대당의 존재와 비판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1944년]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金瑪利亞 순국 1891(고종 28) 황해 장연~1944. 독립운동가·교육자. 본관은 광산. 아버지는 윤방(允邦), 어머니는 김몽은(金蒙恩)이며, 김규식(金奎植)의 처제이다.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세운 소래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1910년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졸업했다. 그뒤 광주 수피아여학교와 모교에서 교사를 지냈다. 1914년 일본 히로시마[廣島]의 긴조 여학교[錦城女學校]와 히로시마 여학교에서 수학한 뒤, 1915년 도쿄 여자학원[東京女子學院] 예비과에 입학했다. 1918년말경 동경유학생독립단에 가담했으며, 1919년 2·8독립운동에 참가했다. 2·8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국하여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기존의 애국부인회를 바탕으로 9월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임시정부 군자금 지원에 힘쓰던 중 11월 오현주(吳玄洲)의 배신으로 비밀조직이 탄로나, 3년 형 선고를 받았다. 복역중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1921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 상하이애국부인회 간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면서, 난징[南京]의 진닝대학[金陵大學]에 다녔다. 1923년 6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1924년부터 파크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고, 1928년 시카고대학교에서 사회학석사학위를 받았다. 1930년에는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곳에서 황에스터·박인덕(朴仁德) 등과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재미한국인의 애국정신 고취와 일제의 식민정책을 서방국가에 알리는 데 노력했다. 그뒤 원산에 있는 마르타윌슨 신학교에서 신학 강의만을 한다는 조건으로 귀국하여, 그리스도교 전도사업과 신학발전에 노력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40년] 독립운동가 이동녕 선생 사망 1869(고종 6) 충남 천안~1940. 3. 13. 개요 대한제국기에 민권운동·자강운동에 앞장섰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임시정부 지원의 우익단체를 조직해 활동했다. 본관은 연안(延安). 이명은 이량(李亮). 자는 봉소(鳳所), 호는 석오(石吾). 민권·개화 운동 아버지는 영해군수 병옥(炳鋈)이고, 어머니는 광주안씨이다. 어려서 향리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고, 10세 때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에 사는 할아버지 이석구(李錫九) 문하에서 수학했다. 1885년 상경하여 서울 봉익동(鳳翼洞)에 거처를 정했고, 곧 아버지를 따라 경상북도 영해읍으로 갔다. 1892년 응제진사시에 합격했다. 1893년 아버지를 따라 원산으로 가서 육영사업에 조력했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해 간사원으로 활약하며 개화민권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국가의 비정(秕政)을 규탄, 성토하며 이권침탈에 반대하고 자체개발을 강조했다. 다음해 독립협회 회원들이 다수 가담하면서 각계각층을 포섭하여 민권민생투쟁을 전개했던 만민공동회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어 부국강병을 위한 각종 상소문을 제작, 주달(奏達)하다가 이승만(李承晩) 등과 옥고를 치렀다. 이승만과는 이때 이후 친숙한 동지가 되었다. 1898년 이종일(李鍾一)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이종일의 권유로 〈제국신문〉의 비상임논객으로 〈민족자강(民族自强)의 방도(方途)〉·〈위국(爲國)의 방도〉 등 수십 편의 논설을 기고했다. 신민회의 창설과 운영 1903년 이상재(李商在)·전덕기(全德基) 등과 손잡고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운동을 전개했다. 상동교회에 하와이에 거주하는 강천명(姜天命)이 보낸 5원을 기초로 청년학원을 설립하여 청년을 육성했으며,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총무로서 직접 운영했다. 당시 상동교회·연동교회·묘동교회·숭동교회 등은 모두 양반교회인 동시에 외국선교사의 도움을 받지 않았던 자립교회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방적으로 체결되자 동지들과 손잡고 결사대를 조직한 뒤 매국노의 응징과 일제의 철수를 주장하는 한편, 그들의 야만적인 침략행위를 규탄했다. 다음해 북간도 용정(龍井)에 망명하여 이상설(李相卨) 등과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 교포교육에 전념했다. 1907년 이상설이 이회영(李會榮)의 건의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특사로 파견되어 가자 그도 여준(呂準) 등에게 이 학교를 맡기고 귀국했다. 1907년 4월 양기탁·이회영·이동휘·이갑·안창호·전덕기·김구·이종일 등 20여 명과 서울에서 비밀항일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다. 신민회가 결성되기 1년 전에 이회영·이동녕 등은 "지금 국내에서 일고 있는 각종 항일투쟁을 볼 때 곧 그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니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해서 보다 원대한 계획하에 장기적으로 독립운동를 꾀해야 승산이 있겠다"고 해외 독립군기지 건설을 통한 무장독립전쟁론을 폈고, 이에 호응 참여하는 인사가 많았다. 그는 총서기로서 신민회의 실질적인 운영과 정책의 수립과 방략을 실시하는 일을 맡았다. 동삼성에서의 항일투쟁 1910년 식민지가 되자 원산에 계신 부모님께 하직서를 띄우고 가산을 정리, 그해 겨울 류허 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망명했다. 동지들과 교민의 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 이는 뒤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를 토대로 독립군 양성에 힘쓰면서 뒷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성장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했다. 신흥강습소는 그곳 토착민의 냉대로 곤경을 겪었으나 이회영이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교섭하여 빈 창고를 빌려 개설할 수 있었다. 그는 신흥강습소장으로 군사교관에다 사환까지 겸하면서 유능한 청년을 육성하여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3,500명의 인재를 육성, 실전에 배출했다. 경학사 이후 부민단(扶民團)·권업단(勸業團)을 잇달아 조직하고, 1915년 이상설 등과 같이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 최초의 민주정부를 조직했다. 한편 〈대동신문 大東新聞〉·〈해조신문 海潮新聞〉을 발행했으며 대종교도가 되었다. 1918년말 무오독립선언서를 선포한 39명 중의 한 사람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시베리아와 중국 동북방면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그는 국내에서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즉시 비교적 자유롭게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상하이[上海]로 갔다. 신규식이 마련한 상하이 프랑스조계 애인리(愛仁里) 숙소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3·1혁명 이후에 우리가 할 일은 세계혁명 이후에 상식적으로 나타나는 임시정부의 수립이다. 이 일이 선행되어야 빼앗긴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직접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조계 내 보창로(寶昌路) 329호에 국립임시사무소를 설치·운영했다. 정부를 수립함에 앞서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을 설립해 4월 10~11일 김신부로(金神父路)의 회의실에서 10개조의 임시헌장을 이시영·조소앙 등과 서로 연구 검토해서 제정하고, 4월 13일 이를 내외에 선포했다. 그는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체제의 순수 민간정부로 수립되었고 국무원·의정원·사법부로 3권을 분립했다. 이동녕은 국무총리에 취임해서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운영했다. 당시 국내외는 상해임시정부 외에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가 있었고, 기호의 대한민간정부, 평양의 신한민국정부·조선민국임시정부 등이 설립될 단계에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할 임시정부는 하나만 있어야 되겠다고 보고 5개월에 걸쳐 상해·노령·한성의 임시정부대표와 타협 끝에 제1차 개헌을 통하여 단일통합정부를 구성한 후 내무총장으로 단일통합정부의 실질적인 운영을 전담했다.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가 부재하거나 알력으로 국무가 원만히 처리되지 않았으므로 그가 국정을 주관하다시피 했다. 이어 대통령직무를 대행했으며 국무령, 국무위원회의 주석 등으로 임정의 위기를 구했으며, 내정교통과 임정의 광복정책을 집행해나갔다. 전후 임시의정원 의장을 3번 역임했고, 행정부의 수반 등 요직을 두루 거쳐 국정을 처리해나갔다. 4차의 개헌을 주도한 그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이념하에 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김구 등과 조직, 이사장이 되었다. 윤봉길 의사의 투탄의거도 김구와 상의, 결행했다. 1935년 한국국민당 당수로 대한광복진선(大韓光復陣線)을 결성했다. 1940년 3월 13일 치장[綦江]에서 죽었다.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효창원(孝昌園)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李炫熙 글)
그밖에 2006년 김유림, 세계 주니어 빙속 종합1위 2006년 前육참총장 김용배씨 별세 2002년 댄스가수 보아(BoA) 앨범 `내 마음에 귀 기울여 봐(Listen to my Heart )` 일본에서 음반판매 1위 2002년 국내 복권 사상 최고액인 55억원 복권 당첨 2002년 `한국의 슈바이처` 문창모 박사 별세 2001년 아펜젤러 타입캡슐 69년 만에 개봉 2000년 조선일보 주최 `세기를 넘어서-21세기 한민족 대항해 시대`전 개막 1998년 주한미군사령부, 미8군을 육군구성군사령부(ASCC)로 개편 1996년 폴란드 영화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사망 1993년 인도 뭄바이 연쇄 폭발사건 1992년 터키, 강도 6.2의 강진으로 3천~5천명 사망 1990년 아이티 임시정부, 여성대통령 에르타파스칼 트루이요 취임 1986년 우주비행사 레오니드 키짐과 블라디미르 솔로비예프, 미르호에 도착 1982년 충주 다목적댐 착공 1981년 광업진흥공사, 강원도 영월서 국내최대 몰디브덴 광맥 발견 1981년 국무회의, 노동청을 노동부로 승격 1979년 대법원, 근로자의 법정시간외 근무거부는 태업아니다 판시 1979년 EC수뇌회담, 유럽신통화제도(EMS)발표 1979년 그레나다 무혈쿠데타, 새정권 수립 1976년 최규하 제12대 국무총리 임명 1976년 해운항만청 발족 1976년 베트남 대규모 관개공사 1974년 서울 고려대 앞서 우리나라 첫 나체질주자 등장 1973년 노동3법 공포, 발효 1971년 서울~부산간 자동전화 개통 1969년 문공부, 문화상 일원화 결정 1969년 남산 제1호 지하터널 기공 1962년 서울시 초등학교 휴교 1959년 박태선 장로교 신자, 법정 난입 1958년 미국-영국-프랑스 정상회담 1956년 한국과 스칸디나비아3국, 메디컬센터 건립 협정 조인 1946년 함흥 학생반공의거 1946년 조선문필가협회 결성 1938년 독일-오스트리아 합병 1938년 오스트리아 재벌 로스차일드, 나치에 체포 1926년 런던-남아프리카 비행성공 1923년 뉴욕서 발성영화 첫상영 1917년 독일의 세균학자 베링 사망 1915년 러시아 제국 헌법에 따라 임명된 초대 총리 비테 사망 1913년 호주, 캔버라를 연방수도로 공식 결정 1908년 우표-엽서 자동판매기 파리에 등장 1901년 미국 제23대 대통령 해리슨 사망 1891년 프랑스의 시인 방빌 사망 1883년 이탈리아 작곡가 토셀리 사망 1882년 독일 경제학자 슈미트 출생 1848년 독일 3월혁명 발발 1828년 `일본도덕론`(1887)을 저술한 니시무라 시게키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