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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업 교수님, 좋은 글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바로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드러내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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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맞춤법으로 다시 읽는
백석의 노래
김수업 / 진주문화연구소 이사장
<들머리에서>
백석(1912-1963)이 이승을 떠난 지가 벌써 쉰 해를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남들이 모두 내버리고 돌보지 않던 토박이말을 찾아서 꽃 비단처럼 아름다운 노래로 겨레의 삶을 끌어안고 사랑하던 그가 새삼 그리워 그의 노래를 다시 읽어봅니다. 노래를 따라 그가 걸었던 마음의 길까지 더듬고자 하는 이들이 있을까 해서 그가 세상에 내놓은 차례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백석의 노래를 다시 읽고 싶어진 데는 요즘 더욱 모질게 짓밟히고 버려지는 토박이말을 어떻게 살려볼 수 있을지 여러분과 더불어 걱정해보고 싶어진 까닭도 있습니다.
백석이 토박이말을 귀신처럼 찾아 쓰면서 토박이말을 찾지 못한 말은 한자를 그대로 드러내 놓았다는 점을 짚어두고 싶습니다. 스스로 눈에 거슬리는 한자를 보면서 토박이말로 쓰지 못한 아쉬움을 잊지 않으려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의 노래에는 갈수록 한자가 줄어지지만 끝까지 이런 마음가짐을 버리지 않았고, 마침내 한자 없는 노래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읽는 노래에서는 한자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한자를 그대로 드러내는 노릇이 요즘 여러분께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1. 정주성(定州城)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졸던 무너진 성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
어디서 말 있는 듯이 커다란 산새 한 마리가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이
하늘 빛 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조선일보, 1935. 8. 30.)
<말뜻 풀이>
쪼는: 타들어가며 졸여지는
파-란 혼: 파란 빛을 내는 넋. 예로부터 우리 겨레는 죽은 사람의 넋이 파란 빛을 내며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음
말 있는 듯이: 무슨 말이 있었다는 듯이
메기수염: 메기의 수염처럼 몇 오라기만 양쪽으로 길게 기른 수염
청배: 익어도 껍질이 푸른 빛깔인 배
<노래에 붙이는 군소리>
어떤 노래나 모두 그렇지만 이 노래도 맨 먼저 노래이름을 읽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노래이름이 ‘정주성’이다. 모르는 사람은 그저 정주에도 성이 하나 있었나보다 하겠지만 아는 사람은 그럴 수가 없다. 정주성은 우리 겨레의 삶에서 잊을 수 없을 만큼 큰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십구 세기 들머리인 1811년 섣달 열여드레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횃불이 처음에는 닷새 동안에 가산, 박천, 정주, 선천을 손아귀에 넣고 기세를 올렸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관군에 밀려 스무날 만에 모두가 정주성에 갇히고 말았다. 정주성에 갇혀서 석 달을 버티고 마지막 열흘 동안 피투성이 싸움을 벌이다 끝내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과 함께 그 횃불은 울부짖으며 꺼져버렸다. 해가 바뀌고 사월 열여드레 날 밤을 지새고 열아흐레 날 새벽에 북문 밑에 보름 동안 관군들이 몰래 파고 묻은 폭약을 터뜨리면서 백성의 횃불은 꺼져버린 것이다. 노래도 첫머리에 ‘외로운 불빛’으로 말문을 열어 정주성의 외로운 ‘밤’을 보여주고 마무리 또한 ‘날이 밝으면’으로 해서 정주성의 ‘새벽’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한 밤을 안간힘으로 지새고는 수많은 백성의 슬픈 울부짖음과 더불어 꺼져버린 홍경래의 횃불을 ‘정주성’이라는 노래이름이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노래는 세 도막으로 이루어졌다. 첫 도막은 원두막을 노래한다. 가운데 도막은 성터를 노래하고, 끝 도막은 성문을 노래한다. 공간으로 읽으면 정주성의 언저리에서 성터를 둘러보고 성문에 다다르는 노래라 하겠다. 그러나 시간으로 읽으면 날이 밝는 때를 생각하기는 하지만 밤의 한 때에 머물러 있는 노래다. 다만, 반딧불이가 날고 청배를 따서 내다 파는 것으로 보아 늦여름 어느 밤 한 때에 머물러 있음을 알겠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공간은 백석의 눈을 따라 도막에서 도막으로 흐르지만 노래의 속살은 한결같은 고요함과 쓸쓸함으로 채워져 있어서 세 도막을 꿰뚫고 흐른다.
첫 도막은 산턱에 자리 잡은 원두막을 노래하지만, 백석의 눈은 빈 원두막을 홀로 밝히고 있는 불빛에 꽂혀 있다. 불빛은 사기 종지에 아주까리기름을 붓고 헝겊으로 심지를 비벼 담가서 심지 끝에 불을 붙여 밝힌 것이다. 우리 겨레 백성이 길이길이 그렇게 하여 불을 밝히고 살았던 것이기에 낯설지 않다. 오늘 밤은 기름 먹은 심지가 타면서 기름이 졸여 내는 소리가 들릴 만큼 세상은 너무도 조용하다. 그래서 불빛은 참으로 외롭다.
가운데 도막은 무너진 성터를 노래하지만, 백석의 눈은 날고 있는 반딧불이와 산새 한 마리에 꽂혀 있다.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것은 파-란 넋들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이고, 커다란 산새 한 마리는 어두운 골짜기로 날아간다. 밤에 보이는 이런 움직임은 낮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낮의 무너진 성터는 잠자리가 앉아서 졸고 있는 곳이었을 뿐이다. 백석이 반딧불이를 보고 떠올리는 ‘파-란 혼들’이란 바로 지난날 홍경래와 더불어 울부짖으며 죽어간 백성들의 넋이 아니었을까? 커다란 산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저 ‘어두운 골짜기’란 그렇게 죽어간 이들의 넋들이 아직도 서럽게 울부짖고 있는 골짜기가 아니었을까?
끝 도막은 헐리다 남은 성문을 노래하지만, 백석의 눈은 다른 곳과 다른 때로 가서 새로운 세상에 꽂혀 있다. 먼저 공간을 건너 하늘로 가서 하늘빛처럼 훤한 세상을 보고 있다. 그리고 시간을 건너 밝는 날로 가서 청배 팔러 나오는 메기수염의 늙은이를 떠올린다. 속살은 늙어서 익었어도 겉모습은 늘 젊어 익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청배를 파는 늙은이의 삶을 떠올리는 것이다.
백석은 정주성을 찾으면서 참혹했던 어제의 삶을 떠올리고 그런 역사의 횃불을 치켜들고 일어섰던 백성들의 넋을 만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역사의 아픔을 딛고 다시 오늘의 삶을 일구어가지 않을 수 없는 우리를 떠올리며 청배 같이 밝은 내일의 삶을 기다리고 있다.
2. 늙은 갈대의 독백
해가 진다
갈새는 얼마 아니 하여 잠이 든다
물닭도 쉬이 어느 낯설은 논두렁에서 돌아온다
바람이 마을을 오면 그 때 우리는 서럽게 늙음의 이야기를 편다
보름밤이면
갈거이와 함께 이 언덕에서 달보기를 한다
강물과 같이 세월의 노래를 부른다
새우들이 마름 잎새에 올라앉는 이때가 나는 좋다
어느 처녀가 내 잎을 따 갈부던을 결었노
어느 동자가 내 잎닢 따 갈나발을 불었노
어느 기러기 내 순 한 대를 입에다 물고 갔노
아 - 어느 태공망이 내 젊음을 낚아 갔노
이 몸의 마디마디
잃어진 사랑의 허물 자국
별 많은 어느 밤 강을 내려간 강다릿배의 갈대 피리
비오는 어느 아침 나룻배 내린 길손의 갈대 지팽이
모두 내 사람이었다
해오라비 조는 곁에서
물뱀의 새끼를 업고 나는 꿈을 꾸었다
- 벼름질로 돌아오는 낫이 나를 데리려 왔다
달구지 타고 산그늘로 삿자리의 벼슬을 갔다
(조광 1권 1호, 1935. 11.)
<말뜻 풀이>
갈새: 갈대밭에서 사는 새, 곧 개개비
물닭: 오리과의 물새, 곧 비오리
갈거이: 갈게, 곧 갈대밭에 사는 게 또는 가을에 나오는 게
갈부던: 갈잎을 결어서 방울처럼 만들어 여자 아이들이 옷고름에 달고 다니던 노리개
강다릿배: 냇가 맞은 켠에다 이물과 고물을 매어서 다리 삼아 건너다니도록 해놓은 배
벼름질: 대장간에서 쇠붙이로 만든 연장의 날을 날카롭게 다듬는 노릇
<노래에 붙이는 군소리>
노래이름이 ‘늙은 갈대의 독백’이다. ‘늙은 갈대가 혼자서 털어놓는 소리’라는 뜻이다. 갈대가 늙으면 마른 잎이 서로 부딪치면서 소리를 낸다. 바람이라도 불면 소리는 제법 시끄러워지기도 한다. 백석은 이런 갈잎의 소리를 갈대가 제 혼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은 평생을 갈대밭 가까이 산다 해도 갈대 그것들이 저마다 혼자서 무슨 사연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할 것이다. 갈대를 조금도 목숨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물가에 나서 살다가 시들어 죽는 한낱 풀일 뿐이라고 업신여기며 살기 때문이다. 이 노래를 읽으면서 갈대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갈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쩌면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에 내 마음이 소용돌이를 치면서 나를 몹시 뉘우치게 했다.
다섯 도막으로 이루어진 이 노래의 첫 도막은 ‘해가 진다’로 문을 열고, ‘우리는 서럽게 늙음의 이야기를 편다’로 문을 닫았다. 해가 지면 머지않아 개개비는 잠이 들고, 비오리도 곧장 일터를 버려두고 잠자리에 들려고 돌아온다. 갈대는 이렇게 물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그들을 따뜻하게 품으면 마을은 아늑해지고 이런 갈대 마을로 바람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이때부터 갈대들은 저마다 서럽게 늙어온 제 이야기를 바람에 실어 펼치는 것이다.
나머지 네 도막은 갈대가 서럽게 늙어온 이야기를 펼쳐 놓는 그대로 들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네 도막을 그냥 늙어온 차례대로 가지런히 늘어놓은 것은 아니다. 이야기의 속살로 보면 가운데 두 도막은 서로 이어지고 얽혀서 한 덩이인 셈이고 그 앞과 뒤에 속살이 조금 다른 이야기를 앉혀 놓았다.
앞 도막은 우선 살아오면서 좋았던 때를 이야기한다. 좋은 때는 둥근 달이 뜨는 보름이다. 보름이면 언덕으로 올라오는 갈게와 함께 달보기를 하고, 강물과 더불어 세월의 노래를 부른다. 이때에는 새우들이 갈대의 마른 잎새에 올라앉으니 갈대는 보름이 참으로 좋다고 이야기한다.
가운데 두 도막은 갈대가 사람과 짐승에게 몸을 내주어 사랑을 베풀었던 이야기다. 어떤 처녀에게는 갈잎은 내주어 갈부던을 겯게 해주고, 어떤 아이에게는 갈잎을 내주어 갈나발을 불게 해주고, 어떤 기러기에게는 갈대 순을 내주어 주린 배를 채우게 해주고, 어떤 낚시꾼에게는 낚시터를 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그런 사랑을 알은체도 하지 않고 떠나가서 갈대는 그들이 누구였는지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게다가 낚시꾼은 갈대의 젊음까지 낚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 갈대의 몸에는 매듭마다 잃어버린 그 사람들의 허물 자국만 남았다. 그러나 잊을 수 없는 두 사람은 하나어느 별이 많던 $그런 많리0 어떤갈대를 몸통 채 베어 피리를 그래서 불며 강을 내려간 사람과 어느 비가 오던 날 아침떤갈대를 밑둥 채 베어 지팽이를 그래서 짚고 나룻배를 내리던 길손이 있다. 그들은 갈래를 몸통 알은체밑둥 채로 베어갔다. 그러나 갈대는 그들까지 모두 저의 사람은 하나갈대의 사랑을 받고 갈대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뒤 도막은 갈대가 꿈을 꾼 이야기다. 갈대는 꿈을 꾸는 그때에도 졸고 있는 해오라비 곁에서 벗이 되어주고 등에는 물뱀의 새끼를 업어주고 있었다. 갈대는 꿈에서 자기를 찾아온 벼름질로 날카롭게 다듬어진 낫을 맞이한다. 마치 사람이 자기를 찾아온 저승사자를 맞이하는 것과 같다. 그 낫이 갈대를 베어 달구지에 싣고 산그늘 길을 따라 삿자리 만드는 마을로 데려가는 꿈을 꾸었다. 갈대가 죽어서 삿자리가 되면 그것은 갈대에게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이라도 되는가? 갈대는 그렇게 주검까지도 사람들 삶에 알뜰하게 쓰이는 빛나는 죽음의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한다.
백석을 만나 갈대는 온 몸으로 자연과 짐승과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거룩한 성자가 되어 내게로 다가왔다. 백석의 노래를 만나 나 또한 갈대처럼 자연과 짐승과 사람에게 온 몸으로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아보고 싶어졌다.
3. 산지
갈부던 같은 약수터의 산거리
여인숙이 다래나무 지팡이와 같이 많다.
시냇물이 버러지 소리를 하며 흐르고
대낮이라도 산 옆에서는
승냥이가 개울물 흐르듯 운다
소와 말은 도로 산으로 돌아갔다
염소만이 아직 된비가 오면 산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 인가 근처로 뛰어온다
벼랑탁의 어두운 그늘에 아침이면
부엉이가 무겁게 날아온다
낮이 되면 더 무겁게 날아가 버린다
산 넘어 십오 리서 나무뒝치 차고 싸리신 신고 산비에 축축이 젖어서 약물을 받으러 오는 산아이도 있다
아비가 앓는가 보다
다래 먹고 앓는가 보다
아랫마을에서는 애기무당이 작두를 타며 굿을 하는 때가 많다
(조광 1권 1호, 1935. 11.)
<말뜻 풀이>
갈부던 같은: 어수선한. 갈잎을 이리저리 결어 만든 갈부던은 갈잎의 짜임새가 어수선하다.
산거리: ‘거리’는 ‘길’이 세 갈래 넘게 서로 얽혀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산거리는 산길이 여러 갈래로 얽혀 있는 곳이다.
다래나무 지팡이: 다래나무는 덩굴 식물이라 줄기가 구불구불하고 아주 가볍다. 다래나무로 지팡이를 만들면 가볍고 손잡이도 좋아서 안성맞춤이다.
된비: 되게 오는 비, 곧 세차게 오는 비
벼랑탁: 벼랑턱, 곧 벼랑 위쪽이 턱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부분
나무뒝치: 통나무 속을 파서 물을 담아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목을 가늘게 만든 뒤웅박
싸리신: 싸리 껍질을 벗겨 짚신처럼 만든 신
애기무당: 큰 무당 밑에서 굿을 배우며 큰 무당을 돕는 작은 무당
작두를 타며: 큰 굿을 하면 무당이 작두의 날을 딛고 올라서서 춤을 춘다. 이것을 작두 탄다고 한다. 애기무당이 작두를 타면 사람들은 더욱 마음을 졸이며 영험이 크다고 믿었다.
<노래에 붙이는 군소리>
노래이름 ‘산지’는 산골과는 다르다. 산골은 산이 갈라지면서 만든 골짜기를 이르지만 산지는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평지를 뜻한다. 그러니까 산골보다는 산지가 들도 넓고 마을도 여럿이며 사람도 많이 산다. 그러나 노래는 산지 온통을 다루지 않고 약수터가 있는 한 마을만을 다룬다.
첫 도막은 ‘약수터의 산거리에 여인숙이 많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의 뜻은 그뿐이다. 그런데 약수터의 산거리 앞에서 ‘갈부던 같은’이 매김을 하고, 여인숙이 많다 사이에서 ‘다래나무 지팡이와 같이’가 꾸며 준다. 이들 매김과 꾸밈이 노래를 노래답게 만든다. 갈잎을 얼기설기 결어서 만든 갈부던의 얽히고설킨 갈잎 줄기들이 약수터의 산거리와 같다. 어수선한 약수터와 거기서 여러 마을로 퍼져나간 산길의 모습을 겹쳐서 절묘하게 드러낸다. 약수터의 모습에서 조그마한 갈부던의 짜임새를 떠올리고, 여인숙 많은 것에서 산골 마을에 집집이 널려 있는 나래나무 지팡이를 떠올리는 상상력을 백석 아니면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둘째 도막에서 넷째 도막까지는 약수터 언저리의 산지 모습을 시냇물, 승냥이, 소와 말, 염소, 부엉이 같은 자연, 산짐승, 집짐승, 날짐승의 움직임으로 고스란히 드러낸다. 사람의 말로써 드러낸 하나하나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이들의 있음과 삶이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하다. 자연인 시냇물은 목숨 있는 벌레 소리를 하며 흐르고, 목숨 있는 승냥이는 자연인 개울물 소리처럼 운다. 이들 자연과 목숨의 소리와 몸놀림과 움직임을 삶과 더불어 깊이 살피면서 들어 올려 사랑하지 않고서는 다다를 수 없는 솜씨며 마음자리다.
끝의 세 도막에 와서야 마침내 사람을 드러냈다. 약수터에 약물을 받으러 오는 산아이다. 자연인 ‘산’과 사람인 ‘아이’가 하나로 어우러졌다. 게다가 나무뒝치 차고, 싸리신 신고, 산비에 축축이 젖었으니 자연에서 따로 떼어낼 수도 없다. 이곳 산지에는 모두가 이처럼 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진 사람들만 살고 있겠지. 이들이 약물을 받으러 오는 까닭은 오직 하나, 누군가 앓고 있는 것이다. 산아이의 아비가 다래를 먹고 앓는가보다고 했다. 약물이 앓는 이들을 고쳐주지 못하면 이들은 무당을 부르는 수밖에 없다. 자연과 푸나무와 짐승과 사람을 모두 지어내신 하느님의 힘을 빌어야 하기 때문이다. 애기무당이 작두를 타고 굿을 하는 그때 사람들은 모두 그런 하느님과 어우러져 하나가 된다. 노래는 그러니까 자연에서 짐승을 거쳐 사람으로 와서 마침내 하느님께로 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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