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시 읽기> 괜찮아/한강
맨부커상 수상자인 소설가 한강은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가 이름이 워낙 유명하여 소설가인 줄로만 알고 계신 분들에게 한강 시집의 일독을 추천한다. 그의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소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후회 없음을 보증하기 위해 한 편의 시를 소개한다. 아이를 키워본 모든 엄마와 아빠는 이 시를 읽는 순간 이해하고 말 것이다. 저 속에 바로 나와 아이의 시간이 담겨 있음을 말이다. 울지 않는 아이는 없다. 울어야 할 때 울어야 살 수 있다. 그런데 아이가 계속 울면 엄마 아빠는 통곡하고 싶다. ‘왜 그래’, ‘뭐가 더 필요해’, ‘나도 힘들어’ 이런 생각에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 괴로운 한때, 시 속의 엄마는 ‘왜 그래’ 대신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엄마는 뭔가 깨닫게 된다.
사실, 이 시는 아이와 부모의 이야기로 국한되지 않는다. 이 시는 ‘왜 그래’와 ‘괜찮아’의 이야기다. 나아가 모든 우리의 영원한 울음에 관한 시다. 이유 없이 우는 아이, 이유 있어 우는 아이는 마흔의 내 안에도 있고, 서른의 당신 안에도 있다. ‘왜 그래’라는 말로는 그 울음을 결코 그치게 할 수 없다. 눈물은 논리의 영역이 아니므로 우선 닦아줘야 한다. ‘괜찮아’라는 말이 마음의 손수건이 되어 줄 것이다. 이 손수건을 들어 우리의 울음을 닦아주는 법을 이 시는 알려주고 있다.
이 시를 읽는 이들에게 귀기울여 들어봄직 한 글이 있다. 정재현 교수의 ‘왜 그래와 괜찮아 사이’(인생의 마지막 질문)라는 글이다.
“왜 그래?” 일상생활에 아주 쉽게 던지는 질문이다. ‘왜?’라는 물음은 이유를 묻는 것이지만 ‘왜 그래?’라는 물음은 이유를 묻기보다는 대체로 못마땅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의사를 표현할 때 쓰는 것이다. 사실 물음이라기보다는 불만이고 시비다. 때로는 신경질적인 억양으로, 때로는 아주 설득력 있는 억양으로 나타날 수 있다. 어쨌든 이 말은 물음이라기보다도 더 깊은 뿌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다.
생후 두 달된 아기가 까닭 없이 울고 있다. 많은 엄마들이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아주 익숙해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배가 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라는 엄마의 판단도 있거니와 참으로 중요한 것은 아이의 울음에 이유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유가 없어 보이는 울음을 아기만 울까? 성인도 그런 울음을 울 수 있다. 아니 울고 있다. 자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저절로 눈물이 나거나 실컷 울고 싶을 때가 분명히 있다. 이유를 모를 뿐 이유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기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보기에는 배고픈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니 달리 울 이유가 없어 보이지만 아기에게 이유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모를 뿐이다. 엄마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모를 수 있다. 울고 싶은 순간이 올 때 그 이유를 확실하게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울고 싶다. 그럴 때는 울어도 좋다. 아니 시원하게 울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 때나 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학습 받은 이후 울음을 잊어버렸다. 이것이 더 슬픈 일이다. 울음이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울음을 잃어버린 것은 더욱 슬픈 일이다. 그렇게 슬퍼도 울지 않는다면, 아니 울지 못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아픔이자 비극일지도 모른다.
아픈 사람에게 “왜 그래 묻는 것은 상처에다가 또 칼을 들이대는 일이다. 그러니 답을 얻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답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고쳐 말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말이다. 아니, 사실 누가 가르쳐준다고 그렇게 고쳐 말할 수나 있을까? 참으로 이것은 ‘문득’ 고치는 일이다. ‘가르침 없이’라는 말에는 지식을 추가하거나 확장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다. 앎을 늘려서 고친 것이 아니라 삶의 켜가 쌓이면서 문득 튀어 오른 깨달음이다. 누가 따로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삶의 켜가 쌓이면서 문득 튀어 오른 깨달음이다. 누가 따로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삶이 깨닫게 해준 것이다. 앎은 이유를 더 캐물으려 하지만 삶은 이유를 몰라도 모른 채로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이끌고 간다. 그래서 “왜 그래?”에서 “괜찮아!” 넘어간다. 문득 슬며시 넘어간다.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넘어간다. 내가 삶을 받아들인다기보다는 삶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살기 때문이다. “괜찮아”라고 했더니 오히려 내 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랬더니 아기도 울음을 그쳤다. ‘우연’이라고 했지만 우연만은 아니다. 엄마의 울음이 아기를 더욱 크고 길게 울도록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울음이 멈추니 아기도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안에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늕”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아니, 사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서 누군가가 흐느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해내는 일이다. 물론 나의 울음을 우는 것이지만 내 울음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울음을 내 안에서 듣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억지로 울음을 멈추려고 하는 것이 아닐 스스로에게 “괜찮아”라고 다독였더니 오히려 다른 사람의 흐느낌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함께 울고, 더불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괜찮아”야말로 이렇게 더불어 살게 해주는 지혜인 듯하다. 그러나 “괜찮다”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값싼 ‘방임’은 아니다. 무수한 “왜 그래?”라는 시비의 씨름과 시행착오를 거친 것이다. 그러니 사실 “왜 그래?”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바로 “괜찮아”로 도망간다면 사실 괜찮아지지 않을 것이다. 이래서 “왜 그래?”는 중요하다. 다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답이 있을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 지점에서 “괜찮아”라는 말이 내게로 들어온다. 내가 ‘내뱉는 말’이 아니라 나에게로 ‘들어온 말’이다. 그래야 진정으로 괜찮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마구 내뱉은 “괜찮아”는 기만일 수밖에 없다. “괜찮아”가 자기기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왜 그래?”의 씨름은 중요하다 그리고 나서 자연스럽게 “왜 그래?”에서 “괜찮아”로 넘어가는 것이다. 문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