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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인물]
■ 3.1 민족대표 최연소자 이갑성(李甲成)
일경의 형무소 수감시절의 모습 |
이갑성(李甲成,1889년 10월 23일∼1981년 3월 25일/보명: 相天)선생은. 독립운동가, 정치가, 사회운동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30세의 최연소자로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만천하에 공포하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지게 한 장본인(張本人)이 바로 이갑성 선생이시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 11회에 걸쳐 도합 9년 여간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33인의 민족대표' 이갑성지사의 호는 연당(硏堂)으로, '광복회(光復會)' 초대회장과 2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민족대표 33인 가운데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로 일컬어진다.
이갑성 선생은 본관이 경주(慶州)로 익재공후(益齋公後) 21世 태상소경(太常少卿) 이지회(李之會,1407~1452)의 후손으로 32世 이무실『李茂實,1683~1736/1728년 이인좌의 난을 토벌한 공로로 분무일등공신(奮武一等功臣)에 녹선 되고, 가선대부(嘉善大-從二品)에 이름』공의 7대손이다. 아울러 대구의 독립운동가 이상정(李相定,1896~1947/본명: 李相旴)과 그의 동생 민족시인 이상화(李相和,1901~1943) 형제도 같은 무실공(茂實公)의 7대손이된다.
이갑성 선생은 1889년(고종 26) 10월 23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수동에서 아버지 이기덕(李基德)공과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7세부터 13세 까지 한학을 익히고, 13세부터 15세 까지 대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1904년경 서울로 올라와 1906년 서울 경신학교(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입학하여 1910년 제5회로 졸업하였다.
그 후 대구에서 1년간 대남소학교(大南小學校) 교사로 종사하다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약학(藥學)을 전공하여 1913년 학사(學士)로 졸업하였고, 1915년 세브란스병원 제약 담당 주임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1919년 2월 12일과 14일 두 번에 걸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연희전문학교 김원벽(金元壁,1894~1928), 경성의학전문학교 김형기(金炯璣,1896~1950), 경성전수학교 윤자영(尹滋瑛,1894~1938)·김문진(金文珍,1892~1926),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배동석(裵東奭,1891~1921) 등과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
이후 이갑성은 기독교 측 대표 중 한 사람이 되어 3·1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에 서명하여 이른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이를 세상에 공포(公布)한 사람이다. 따라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비롯한 각급학교의 학생중심의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태화관(泰和館,現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있었던 요리집)을 중심으로 한 민족대표의 서명운동과 전단 살포의 중책을 맡아 활약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4년에는 세브란스의약(醫藥)의 지배인으로 활동하고, 1926년 YMCA의 이사가 되어 항일청년운동을 지도하였으며, 1931년 경성공업(京城工業)의 지배인을 역임하고 같은 해 신간회사건(新幹會事件)으로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937년 흥업구락부(興業클럽事件)사건에 가담하였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7개월간 또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바로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를 결성, 회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47년 김규식(金奎植,1881~1950) 등과 협력, 과도입법의원(過渡立法議院)의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 국민회(國民會)의 최고위원에 추대되었고, 그해 자유당에 입당 1952년 10월 한국전쟁중 전시내각(戰時內閣)의 임시 국무총리(國務總理)를 역임했다.
1953년 이범석(李範奭,1900~1972)의 족청계(族靑系)가 양우정(梁又正,1907~1975)을 통하여 국민회 파괴공작을 시도하였을 때, 이에 저항하여 자유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족청계가 숙청된 뒤 상처투성이가 된 자유당을 재건하기 위한 8인 재건위원이 되어 정무부장(政務部長)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3.1독립 33인의 유족회장·국산부흥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자유당 말기에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조용한 삶을 영위하였고, 1956년에는 대한민국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로 수료하였으며, 1958년
6월에는 경주이씨중앙화수회 제4대, 제5대, 제6대(1958.6.29~1966.7.3) 총재를 역임하면서 전국 70여 곳의 각지역화수회 결성에 매진하였다.
또한 제5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1962.10.24.~1963.1.19.)을 맡아 공명선거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1963년에는 건국대학교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해 민주공화당의 창당 때에는 그 발기위원이 되었고, 1965년 광복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유공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같은 해 이준열사기념사업회(李儁烈士記念事業會) 총재로 활약하는 한편,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 고문으로도 활약하였다.
80세 이후에는 민족대표 33인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또한 3·1운동의 기념비적 인물로서 해마다 거행되는 3·1기념행사를 지켜보다가 1981년 3월 25일 여생을 마쳤다. 배위(配位) 연안차씨(延安車氏) 차숙경(車淑卿,1890~1948)여사는 그가 안장된 망우역사문화공원 묘비문에 행적이 기록되어있는데 여사는 1890년(고종 27) 12월 2일 서울 당인리에서 태어나 배화학당(培花學堂)을 졸업하고 18세 때인 1908년에 이갑성선생과 혼인(婚姻)하여 설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부군(夫君) 이갑성선생이 기미독립만세사건으로 투옥되자 남편의 독립운동 임무를 계승하여 비밀연락 활동을 하는 등 필사의 노력과 함께 부군의 감옥생활과 11931년 신간회사건으로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 망명 등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는데 여사는 늘 일경의 박해속에서 날품팔이로 극빈의 생활을 유지하며 자녀를 최고학부까지 수업시켰다.
1923년(외정 14)에는 경성여자기독청년회 이사에 선임되어 사회부구제부를 전담 1945년 8월 15일 해방이되자 애국부인회중앙집행위원, 여자기독청년회절제회이사, 교회간부 및 양재학원원장 등 침식을 잊으시고 자조지석(自朝至夕) 활동하다가 과로로 인하여 1948년 2월 한 번 병석에 누워 부군과 자녀의 지극한 정성도 효험을 얻지 못하시고 동년 8월 18일 오후 한 시 40분 59세를 일기로 영면하셨다(단기 4281년 서기 1948년 8월 18일 / 묘지번호 109453)라고 기록하고있다.
설하에 차자(次子) 이용희(李用熙,1917~1997)선생은 호가 동주(東洲)로 초대 통일원장관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의 정치학자와 미술사학자로 우리나라 정치학의 비조(鼻祖)로 알려져 있으며, 손자 이재명(李在明,1948~)은 전 대우그룹 기획실 사장과 제14대 제1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이갑성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끝>
▲이갑성선생 배위 차숙경 차숙경(車淑卿,1890~1948) 여사님 묘 / 망우역사문화공원 묘지번호 109453호
[참고문헌]
◇표암지(瓢巖誌)-1980년(경주이씨중앙화수회)
◇경주이씨익재공파대동보(2009 李大熙)
◇韓國獨立運動之血史(朴殷植, 維新社, 1920)
◇韓國獨立運動史 2(國史編纂委員會, 1966)
◇독립운동사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독립운동사 자료집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歷代國會議員總覽(韓國國會人物史編纂會, 租稅公論社,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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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갑성 선생의 3.1운동 비사 친필 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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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번째 민족대표,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
石虎弼(석호필) | Frank William Schofield
[생졸년]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릭셔 주 럭비시~1970년 4월 12일 서울 중구 을지로6가 국립중앙의료원 /수 (壽) 81
프랭크 스코필드는 한국명 석호필로 '한국의 호랑이'라 불렸다.
스코필드는 영국인으로 소아마비 장애인이어서 한쪽 다리와 팔이 불편한 상태였다.
그는 공장노동자로 일하다 캐나다로 가 토론토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했다.
선교사로 내한하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강의하였다.
3.1운동 때에는 민족 대표 중 한 사람인 이갑성(세브란스 의전 직원)이 독립선언서를
스코필드에게 전하며 미 백악관에 알려달라는 부탁과 함께 만세 시위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외국에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스코필드는 탑골공원 인근 건물 옥상에서 시위현장을 촬영하였고, 시위 참여자, 태형을 당한 자들을 치료하고 일제의 탄압 증거를 모았다.
또한 서대문형무소에 찾아가 시위 때문에 수감된 사람들을 면담하기도 했다.
화성 제암리, 고주리 학살현장을 찾아가 취재하고 촬영하였으며 이를 미 총영사관에 보고했고, 사진은 임시정부에 비밀리에 보내서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에 게재하여 일제의 만행을 널리 알리는데 일조하였다.
한국인을 위해 열심인 이유를 스스로 밝히기를 "식민지 지배 속에 조선인의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외국인의 비판이 중요하다."고 했다. 일본의 압박으로 1920년 한국을 떠난 후 캐나다에서도 강연, 언론 기고를 통해 일본의 만행을 비판하고 한국의 참혹한 상황을 알렸다.
1958년 대한민국 정부 초청으로 내한하여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로 일하면서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생활을 했다.
1970년 4월 국립의료원에서 별세하여 광복회에서 장례를 주관하였고,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는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기도 한다.
* 출처 : 박광일, <선 넘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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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 박사 이야기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릭셔(Warwickshire)주 럭비(Rugby)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프랜시스 스코필드 주니어(Francis William Schofield, Jr.)였으나, 1895년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로 개명하였다. 이명은 석호필(石虎弼)이다.
영국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농장의 가축관리인 조수로 일하다가 1907년 홀로 캐나다로 이민하였다. 농장에서 일하면서 토론토대학교(University of Toronto) 온테리오 수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했다. 1911년 같은 학교에서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3년 9월 음악을 전공한 앨리스(Alice)와 결혼하고, 1914년 모교에서 세균학을 강의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에비슨(O. R. Avision)의 초청과 권유로 부인과 함께 1916년 11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이 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쳤다.
그 때부터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배 하에 있던 한인을 마음으로부터 동정하고 사랑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첫날부터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같은 해 4월 15일에 일어난 수원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 사건 현장에도 몸소 찾아가 제암리와 수촌리에서 있었던 일제의 만행에 관한 보고서를 남겼다.
즉, 4월 17일 제암리교회 사건 소식을 듣고 다음 날인 18일 자신의 자전거를 가지고 9시 열차편으로 수원까지 갔다. 다시 자전거로 사건 현장에 도착하여 사진을 찍고 조사하였으며 같은 날 오후 수촌리도 방문하여 부상자들을 도와주었다. 이 때 작성한「제암리의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상하이 가제트(The Shanghai Gazette)』1919년 5월 27일자에 서울 주재 익명의 특별통신원(Special Correspondent)이 4월 25일 보내 온 기사로 실렸다. 같은 무렵 작성한「수촌 만행 보고서(Report of the Su-chon Atrocities)」는 비밀리에 해외에 보내져 미국에서 발행되던 장로회 기관지 『프레즈버티어리언 위트니스(Presbyterian Witness)』 1919년 7월 26일자에 실렸다.
그 후에도 일제의 비인도적 만행들을 조사하여 영국의 성서공회 총무 리슨(Ritson)을 거쳐 토론토의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A. E. Armstrong) 목사에게 보냈다. 그 내용은 다시 미국 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에 보내져 거기서 1919년 7월에 발행한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에 증거자료로 실렸다.
그가 찍은 사진 필름은 상하이 밀사 정환범(鄭桓範)을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에도 전해져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도 일부가 실렸고, 영문 사진첩 『한국 독립운동(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1919)』에 실렸다.
특히 그가 찍은 태형 피해자 사진을 비롯한 일제의 만행 피해자 사진은 서울주재 미국총영사 베르그홀쯔(Leo Bergholz)에게도 전해져 1919년 7월 17일자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첨부되었다. 또한 같은 해 6월 25일부터 원산에서 개최된 캐나다장로회 한국선교부 연례회의에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조선총독에게 일제의 만행에 대한 항의서를 보내기로 결정되었다.
1919년 8월 한국선교사 대표로 일본에 건너가 극동의 선교사 8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일본의 만행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였다. 또한 하라 다카시(原敬) 수상을 비롯한 요인들을 면담하여 일제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라 수상은 1919년 8월 29일자 일기에 그를 만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회담에 관한 회고를 캐나다에 돌아가 『글로브(The Globe)』지 1920년 9월 4일자에 실었는데, 여기서 “만약 일본 정부가 동화정책을 고집한다면, 결과는 유혈 혁명이 될 것입니다.”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로 일제의 미움을 사 항상 감시와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
한인을 위한 활동을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는 1919년도 말까지의 보고서에서 “스코필드 박사는 ‘이러한 것들이 공개됨으로써 중단되기를 희망하면서’ 현재 행정당국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악행에 관한 일련의 신문 기사들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것들은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박사는 고문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주기 위하여 총독에게 불려갔다.
당연히 고문과 구타와 악행 등을 다루는 기사들을 경찰들이 매우 싫어하였고, 이것은 일제 경찰이 그를 심하게 공격한 것을 설명해 준다. 어떤 사람은 총독이 스코필드 박사를 ‘교활한 음모자요 굉장히 위험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단언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한 만세운동 이후 일제가 동화정책을 폐기하고 한국인이 원하는 근본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제도만 바꾸는 피상적인 개혁에 대해서 일일이 그 근거를 들어 비판하였다. 1919년 11월 무렵부터는 일제가 젊은이들의 도덕적 타락을 조장하기 위하여 실시되던 공창제도에 맞서 강연을 통하여 그 폐해를 역설하고, 한국 청년들이 이런 끔찍한 죄악에 맞서 싸우자고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2월에는 최두선(崔斗善)을 단장으로 하는 혁청단(革淸團)을 조직하여 공창폐지운동을 이어가게 했다. 이러한 반일적 태도는 선교부에도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어, 1920년 3월에 세브란스 근무 계약 기간이 만료되자 본국인 캐나다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만행과 한국의 비참한 상황을 여론에 호소함으로써 이를 개혁하고 개선하는데 노력하였다. 일본에서 발행된 영자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캐나다 토론토에서 발행된『글로브(The Globe)』 등에 여러 차례 기고하여 일제 고관들의 안일한 한국 상황 인식과 피상적인 개혁을 비판하면서 동화정책과 민족차별을 철폐하고, 한인에 대한 강압과 만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한국의 독립과 자치를 허용하도록 요구하였다.
총독부나 일본의 고관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찾아가 일제 군경의 비인도적 만행을 규탄 항의하고, 개혁을 요구하였다. 1920년 3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연재되었던「한국에서의 개혁」은 마침 국내에서 창간된 동아일보 기자가 번역하여『동아일보』1920년 4월 23일부터 29일까지「조선통치개량에 대한 외국인의 관찰」이라는 칼럼으로 연재하였다.
일제의 한국에서의 개혁에 대해서 비판적인 글을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연재하자, 한국에서 일본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친일적 선교사 헤론 스미스(Rev. Frank Herron Smith)가 이를 비판하고 일제를 옹호하는 논쟁적인 글을 같은 신문에 발표하였다.
그 때 마침 귀국길에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을 때였으므로, 그 기사를 읽고 즉시 반론을 써서「한국 : 프랭크 헤론 스미스 목사(Rev. Frank Herron Smith)에 대한 답변」이라는 제목으로 『재팬 애드버타이저』1920년 4월 10일자에 기고하였다. 이것도 『동아일보』에서 번역하여 그해 5월 6, 7일자에 실었다.
캐나다에 돌아가서도 기회 있는 대로 강연이나 기고를 통하여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일제의 불완전한 개혁을 비판하였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1일자 창간호에 기고한 「조선 발전의 요결」이라는 글에서 한국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으로 교육·근면(노동)·재정(산업)·도덕(정의) 4가지를 들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을 권고하였다.
이러한 권고는 한국 사람들에게 불편한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오직 절절히 사랑하는 한국 국민을 위하여 도움이 되는 말을 기탄없이 하고자 함에 있다.”고 하여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였다.『동아일보』1926년 9월 17일자에 실린「조선의 친구여」는 1926년 여름 잠시 한국을 방문하고 캐나다로 돌아가는 길에 쓴 편지로 한국에서 받은 사랑에 감사하며, 한국의 장래는 희망이 있다고 격려하고 있다.
용기를 가지고 교육과 실천에 힘쓰며, 근검절약하고 도덕을 숭상하라고 권면하면서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같은 해 크리스마스 무렵에 보낸 「나의 경애하는 조선의 형제여」에서도 “조선은 나의 고향과 같이 생각됩니다.”라고 말하고, 1931년 크리스마스에 보낸 「경애하는 조선 형제에게」라는 공개편지에서도 “나는 ‘캐나다인’이라기보다 ‘조선인’이라고 생각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서양인으로서 우월감을 가지고 있던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한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형제처럼 생각하고 사랑했던 것이다.
1945년 8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해방이 되자 한국의 친지들에게 축하편지를 보내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6.25전쟁 직후인 1954년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서 66세로 은퇴하였다. 1957년에는 부인 엘리스가 사망했다. 그동안 한국 친구들이 수차례 한국에 돌아올 것을 권했으나, 건강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응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1958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국빈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전후 복구는 아직 진행 중이었고, 수많은 고아와 실업자들은 넘쳐났으며, 게다가 정부는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자유당 독재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조선일보』1959년 1월 3일자에 기고한 “민심은 공포에 잠겨있다.
의사당 앞에 무장경관이라니”라는 글은 국회의사당을 무장 경관들이 포위하고,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고 있는 것을 보고 1919년 만세운동 때를 회상하면서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한 글이다. 이 글은 “그래도 1919년에는 이런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기보다 위험하였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글을 우리는 썼다. 그런 글의 덕분에 우리가 자유를 얻었다고 나는 믿는다.”고 맺고 있다.
그 후 한국에 머물러 서울대 수의과대학 수의병리학 교수로 있으면서 고아원 두 곳과 직업학교를 지속적으로 돕고, 중고등학생들의 영어성경공부반도 지도하였다. 그러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3·1정신을 이야기하고, 현실사회의 독재와 부정과 악과 거짓을 경계하고 비판하여 정부 당국자들이 한 때 그의 서울대 강의를 중단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한국인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강연과 언론 기고를 통해 끊임없이 바른 소리를 했다. 「의, 용기, 자유의 승리」(『동아일보』1960. 4. 28)와「내가 본 한국혁명」(『조선일보』 1961. 1. 8)은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에 대한 평가와 개혁해야 할 과제를 제시한 글이다. 특히 사회 깊숙이 파고들어 있는 부패를 척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1961년『기독교사상』3월호에 기고한「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에서는 과거 40년 전 일제강점기 한국 교회와 1960년대 초 한국 교회를 비교하면서 “그 당시의 교회는 부패하지 않았는데 현재의 한국교회는 부패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교회의 부패를 “이 세상의 인간적인 기술을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대신하는 일과 또 그리스도교적인 신앙, 사랑의 겸손 봉사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바와 같이 부자가 되는 일이 위험하다는 이러한 원칙에서부터 고의적(故意的)으로 벗어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의 혼란기와 남북전쟁과 독재정권, 미국 원조물자의 유입 등을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권력과 정부 안에 이권을 추구하는 야심가들의 이용거리가 되어버렸고, 세속적인 부패세력에 침투당하여 영혼에 대한 사명을 망각하여 교회의 능력과 정직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품고 있던 온정과 존경을 잃어버렸다고 진단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과오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주의 교회를 함부로 비난하지 말고 용기와 겸손을 가지고 기도하며 속죄를 받기 위하여 힘써 일하여야 하겠다.”고 권고하였다.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한 달 후인 6월 15일자『경향신문』에「나는 이렇게 본다 한국의 군사혁명」이라는 글을 투고하여 ‘군사혁명’에 대한 지지와 기대를 표명하였다.
그러면서 한국사회의 당면한 문제를 “정실인사(情實人事)·깨솔린 빼먹기·깡패·세금 포탈·증수회(贈收賄)·병역 기피·모리 행위(謨利行爲)·졸업장 위조(僞造) 등등 온갖 교활한 형태의 부패를 숙청(肅淸)하는 일”로 보고 “부패된 사회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나 건전한 경제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다.”라면서, 군정이 이러한 부패의 고리를 끊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듬해 3·1절에 『동아일보』에 기고한 「3·1운동」에서도 일제에 맨주먹으로 항거하여 자유와 독립을 선언한 3·1운동을 “희망은 소생하다”로, 해방 후 이승만 독재를 “배신당한 희망”으로 4.19혁명 후 장면 정권기를 “희망이 꺼지다”로, 5.16군사쿠데타를 3·1정신을 소유한 이들이 일으킨 “다시 희망 소생”으로 규정하고, 부패와 싸우며 산업화를 계획하고 있는 혁명 정부에 협력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군사정권에서도 부패 추문이 일어나고 ‘군정 4년 연장’과 ‘출판·집회·언론 자유에 제한’ 등의 소식이 들리자 1963년 3월 20일 박정희 의장에게 군정 종식과 자유제한의 철회, 정치가의 관대한 처분과 정치재개를 권고하였다. 그 내용은 이에 대한 이후락 공보실장의 회신과 함께『동아일보』1963년 3월 23일자에 공개하였다. 이 공개편지는 군정의 민정전환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3·1운동의 산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3·1정신의 전도자였다. 한국에서 거의 해마다 3·1절 기념행사에 참여하고, 언론과 잡지에 3·1운동을 회고하고 그 정신을 이어받을 것을 권고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1963년 3·1절에 『동아일보』에 기고한「1919년 3월 1일과 1963년 3월 1일」, 1966년『The Feel of Korea』에 실은「1919년 3월 1일, 삼일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969년 3·1절에『동아일보』에 기고한「하나로 뭉친 독립만세」와『중앙일보』에 기고한「3·1운동은 한국 정신의 상징」은 모두 그러한 글들이다. 1960년대 후반에 영자신문인『코리아타임즈』의 “현대사조(Thoughts of The Times)” 칼럼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종교와 도덕, 과학과 종교, 무신론적 인본주의, 한국의 추석과 영국의 수확제, 예수의 죽음과 어린 초등학생의 자살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1969년 초 해외여행 중 심장성 천식이 발작하여 몇 차례 병원에 입원했다.
병상에서도 한국인들의 장래를 걱정했다. 1970년 3월 1일자『조선일보』에 실린「한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서거 직후『동아일보』같은 해 4월 16일자에 실린「스코필드 박사 병상 단상록」은 그러한 기록들이다. 특히『조선일보』에 실린 짤막한 글에서 “‘1919년 당시의 젊은이와 늙은이들에게 진 커다란 빚을 잊지 마시오.’ 이 몇 마디는 내가 오늘의 조선 청년들에게 주고 싶은 말이다.
국민은 불의에 항거해야만 하고 목숨을 버려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럼으로써 일종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고 조금은 광명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은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과 재벌 중심의 물질주의의 부패를 보면서 다하지 못한 말들을 함축하고 있다.
국립중앙의료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가 1970년 4월 12일 81세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4월 16일 광복회 주최의 사회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