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작품세계] "청각, 언어 장애를 초월한 입지전적 한국화가" - 김기창(雲甫 金基昶)
작성자춘수|작성시간22.12.
김기창 (雲甫 金基昶) (1913년 ~ 2001년)
1913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8세에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병으로 청각을 상실했고 언어장애를 얻었다.
1930년 이당 김은호의 화숙인 이묵헌(以墨軒)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첫 입선을 했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 4년 연속 특선을 해 추천작가가 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라는 위치와 김은호의 후원에 힘입어 일제강점기 유명 작가로 성장했다.
추천작가가 된 후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고 총독부 전시체제와 문예정책에 반복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 1942년 친일미술전인 ‘반도총후미술전’, ‘조선남화연맹전’, ‘애국백인일수전람회’ 등에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작품을 출품했다. 또 강제 징집을 고무하는 시화 연재물 「님의 부르심을 받고」의 삽화를 그리는 등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펼쳐 『친일인명사전』(2009)에 포함되었다.
해방 이후 1946년 5월 「해방과 동양화의 진로」, 12월 「미술운동과 대중화문제」 등의 글을 발표하며 동양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는 동양화가 추상 예술의 풍조를 따라 시대성에 발맞춰 전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김영기와 함께 ‘현대동양화’ 운동을 주창했다.
1946년 한국화가인 우향 박내현과 결혼했고 다음 해 제1회 ‘우향-운보 부부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회는 한국 미술계 최초의 부부전이었으며 1971년 제17회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특히 하와이 호놀룰루 동서문화교류센터와 뉴욕 동남아시아 박물관의 초청으로 개최한 부부전은 해외미술시찰의 계기가 되었다. 홍익대와 수도여자사대 교수로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고, 김은호 제자들의 모임인 후소회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7년에는 당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비판적이었던 작가들과 함께 새로운 동양화 모색을 주창하며 백양회를 결성하였다. 일제강점기 김기창의 작품은 김은호의 화풍을 충실하게 수용한 채색인물화였다.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인 박내현과 함께 서양 입체주의의 영향을 보여주는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완전한 추상화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대표로 미국과 멕시코 등을 시찰한 후 다시 작품에 변화를 보였다. 당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필선과 적색, 황색이 두드러졌으며 1970년대의 청록산수 연작과 바보산수, 민화풍의 화조화 등으로 이어졌다.
또한 1973년부터 세종대왕, 김정호, 을지문덕 등 역사적 위인들의 영정 제작을 담당했다. 청각장애우들을 위한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는데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설해 초대회장에 취임했고, 1984년에는 서울 역삼동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했다. 2001년 1월 23일 사망했다.
김기창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정청(靜廳) / 1934 종이에 채색
전복도(戰服圖)/ 1934, 비단에 채색
아악의 리듬/ 1967, 비단에 수묵채색
세 악사/ 1970년대, 비단에 수묵채색
문자도/ 1984, 적색 종이에 수묵
귀로/ 1993, 비단에 수묵채색
청산도/ 1967, 비단에 수묵채색
청산도 / 1970 비단에 수묵채색
초저녁/ 1974, 종이에 수묵담채
수묵 청산도/ 1976, 비단에 수묵담채
청록산수 / 1976 비단에 수묵채색
청산농경(靑山農景) / 1970년대 비단에 수묵채
백운도(白雲圖)/ 1978, 비단에 수묵담채
밤새(부엉이)/ 1972, 종이에 수묵채색
백두산천지 / 1967, 비단에 수묵채색
점과 선 시리즈/ 1993, 종이에 수묵채색
보리타작/ 1956, 종이에 수묵채색
군해(群蟹)/ 1966, 종이에 수묵담채
크리스마스 실을 위한 작품 1937
복덕방 / 1953~1955 종이에 수묵담채
군상(群像) / 1959 종이에 수묵담채 (4폭)
가을(엽귀) / 1935 비단에 채색
고양이와 나비 / 1964 종이에 수묵채색
군작(群雀) / 1959 종이에 수묵채색
전복도(戰服圖) 1934, 비단에 채색
전복도(戰服圖) 1934, 비단에 채색
호박꽃 1959 종이에 수묵담채
탈춤 1961 종이에 수묵채색
서상도 1984, 비단에 수묵채색
십장생 1984, 비단에 수묵채색
춘정(春庭)/ 1976, 비단에 채색
닭/ 1977, 비단에 채색
바보화조/ 1987, 비단에 채색
<운보 김기창 화백의 신앙화>
수태고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
제자들을 만남
초천명을 먹임
물위를 걷다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처라
예수의 발을 씻김
최후의 만찬
겟세마니동산의 기도
재판을 받다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
시체를 옮기는 제자들
부활
승천
7세에 장티푸스를 앓아 목숨은 건졌지만 청력을 상실해 귀머거리가 된 화가 김기창은 18세에 절대적인 멘토였던 어머니를 심장마비로 잃는다.
어머니는 당시 정신여고를 나온 신여성으로 일찍이 김기창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보고 화가 김은호에게 사사받게 한 정신적인 지주였고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비록 들을 수는 없지만 기죽지 말고 살아라."
어머니의 이 말을 김기창은 평생 기억했다고 한다.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김기창은 꾸준하게 노력하여 청력 상실은 물론 의사전달도 구필로 해야하는 장애를 갖고도 수도사대와 홍익대 교수의 지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위 신앙화는 김기창 화백이 군산에서 피난생활을 할 때 미국 선교사의 제의를 받아 성경을 연구하고 그린 초기 작품이다.
이에 대한 설명을 1978년에 발간된 그의 책 김기창 성화집 '예수의 생애' 에서 발췌해 아래 첨부한다.
"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믿음을 가진 신자였다. 그런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신에게 선택받은 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곱 살이란 어린 내가 열병을 앓아 귀를 먹었겠는가.
어쨋듯 나는 세상의 온갖 좋은 나쁜 소리와 단절된 적막의 세계로 유기되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이란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나는 소외된 나를 찾기 위해 한 가지 길을 택했다. 그것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며, 나는 화가가 되었다.(...)
나와 친분이 두터운 미국인 선교인 젠슨씨가 군산으로 나를 찾아주었다. 그는 나를 보고 피난으로 고통받는 이 기회에 한국의 풍속화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려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내게 그 작업을 권유했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물론 온 국민이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 시기에 예수의 행적을 그려보는 것도 계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의 유년 주일학교를 다녔었다. (...)
나는 다른 모든 일을 전폐하고 이 성화제작에 내 온 심혼을 다 쏟았다. 예수의 용모에 특히 고심을 많이 했다. (...) 그래서 이 성화 제작 기간은 꼭 1년 걸렸다. 내게 있어 그 시절은 매우 중요하게 기념된다. 성화를 그렸다는 데도 있지만, 동양화의 면혁인 입체적 동양화가 탄생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