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영원한 향기 선덕여왕과 여근곡(女根谷)
여행이나 산행을 다니다 보면 우리나라 명승지에는 유난히 형상을 구체화하여 지은 이름들이 많이있다. 코끼리,거북이,사자등의 동물에서부터 촛대나 칼같은 생활용품이나 서고(立) 누운(臥)모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물상(物像)들에 갖가지 이름을 붙여 놓았다. 비록 붙여진 이름과 비교하여 그다지 비슷해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 마음 속에서는 그 형상을 떠올려 모습이 흡사하다고 동조하며 반강제적으로 이입(移入)시키는 관대함을 가지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경주로 오고가는 고속도로를 지나가다가 그전부터 여성의 성기(性器)를 닮았다는 여근곡(女根谷)의 이야기는 들었으나 그것이 어느 곳인지 눈길을 몇 번 주어도 확실히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형상(形像)이란 것이 마음과 감각에 의하여 떠오르는 대상의 모습일 진데,마음이 어떻게 일어남(發心)에 따라 보여지는 모양도 변함인지 저것 같기도 하고 옆의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어디다 대놓고 묻기는 민망한 일이라 생각되고....
▲ 전망대에서 바라본 여근곡
경주에서 영천방향의 국도 4호선을 가다가 건천읍내를 3km 지난 곳에 서 있는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 하면 1km도 채 못 미친 곳에 "여근곡전망대"가 나타난다. 안내표지판이 서 있어 경주시에서 관광시설물로 설치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개인이 차려놓은 수석(壽石) 전시장겸 안내소다. 전망대라해서 거창한 것이 아니라 간단한 1층 옥상구조물로 짓고 난간을 설치해 놓았다. 여근곡은 가까이에서는 그 형태를 알 수가 없으므로 사방이 트인 개활지 같은 이런 곳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이 지형을 관찰하기에는 좋을 성 싶은 곳이다.
▲ 여근곡을 배경으로한 삼신할머니상(象)
조립식 소규모 건물의 전시장 앞에 민간신앙을 조형물로 조성해 놓은 것이다. 삼신할머니상 앞에 까만 돌로 남근을 깍아 놓고 삼신 할머니 체험장이라 써 붙여 놓았는데 무슨 체험을 하는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기를 가지려는 여인들에게 여근곡의 형상을 끌어들여 민간신앙과 결부시킨 마케팅 이라 생각된다. 처해진 현실적 상황과 정령신앙(精靈信仰.animism )을 연계시킨 아이디어다. 주위의 자연을 이용한 마케팅도 좋은 아이디어라 생각은 되지만 글쎄..........
▲ 전시장 내부. 여근곡을 진지하게 설명하시는 주인장 박 용氏
전시장에는 희귀한 수석들이 많이있다. 오랜기간에 걸쳐 이 집 주인장이 모은 것인데 번듯한 전시관을 만들어 학생들의 답방코스로 활용하고자 성금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주인장의 호(號)는 늘 산과 같은 여산(如山)이다.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에 내손은 어느새 바지주머니속 지폐사이를 오가며 꼼지락거린다.......
▲ 전시장의 여근곡사진
이 사진도 이 맘때 찍은 여근곡의 모습인데 그늘의 방향으로 보아 오전 이른시간에 촬영한 것 같다. 여근곡은 빛의 방향에 의한 그늘이나 상록수와 활엽수의 색갈차이에서 오는 단풍이 드는 계절의 적당한 시간 (이른 아침이나 해질 녘)에 그 윤곽이 잘 드러난다.
▲ 늦가을의 여근곡
전시장에서 나눠 준 팜플렛에 있는 사진을 촬영하니 색상이 흐려 다른 사이트의 같은 사진을 빌려온 것이다.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바라보는 여근곡의 모습이 제일 유사하다고 한다. 사실 여근곡은 눈으로 보고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고 느낄 일이다. 격식(格式)을 차려야 될 사이나 세대(世代)가 다른 이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진짜 닮았네!"하기란 낯 붉어지는 짓거리기 때문이다. 닮았네 닮았네하면 허구한 날 그것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인 줄 알 것이고....
▲ 가까이서 본 여근곡
고속도로상에서 여근곡은 이곳 전망대 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 대구에서 경주방향의 경주터널을 지난 500m쯤 우측,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주터널과 건천방향의 과속방지 카메라 중간지점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에서 보면 여성성기의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바깥 부분은 푸른 소나무숲으로 덮였고 안쪽 부분은 빽빽한 잡목숲을 이룬 가운데에 샘이 있고 주위는 깊은 계곡으로 패여있다. 여근에 해당되는 산은 너무커서 가까이에서는 그 모양을 잘 알아 볼 수 없다. 그러나 고속도로변이나 국도변으로 나와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양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희귀한 지형은 산아래 신평2리 마을 주민들에게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져왔다. 이 작은 산위에는 명당의 혈소가 있으며 그 혈소가 임란당시 왜군 또는 명군들에 의해 못질을 당했다는 전설이 아직 전해 내려온다.
또한 이 산의 샘에 작대기로 쑤시고 휘저으면 이 동네 처녀들이 바람이 나기 때문에 샘물은 동네 어른들에 의해 철저하게 지켜져왔다고 전한다. 조금만 감시를 소홀해도 이 동네 처녀들의 바람기를 추스리려고 타 동네 총각 들이 이 골짜기에 몰래 들어와 작대기로 휘젓기가 예사였다는 것이다.
현재 샘은 이 동네 상수도의 수원지가 되었다. 이 상수도 공사는 새마을사업으로 완공됐다. 이 공사를 놓고 샘을 건드려선 안된다는 동네노인의 반대는 대단했다. 그러나 청년들은 그런 미신이 어디 있느 냐며 상수도 시설을 강행했다. 지금은 이 동네 60여호의 주민들이 이 샘물을 먹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여성의 성기 모양을 닮은 지형이 꽤있다. 그러한 곳은 예외없이 명당이 되거나, 흉한 자리가 되고 있다.
명당과 흉한자리는 산의 형세에 따라 달라진다. 산세가 가랑이를 벌린 형세를 한곳은 흉한 곳이나, 정숙하게 오무린 형세를 한곳은 좋다는 식이다. 그래서 흉한 산세아래는 여자들의 바람기가 거세어지고, 남자들의 양기 가 위축된다고 믿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편법을 쓰게 된다. 여성 성기형의 산세 반대편에 남성을 상징하는 돌을 세우거나하여 음기를 누르는 것이 그것이다. 여근곡도 그 형상이 워낙 두드러지기 때문에 그 기세를 누를 필요를 느낀 듯하다. 그래서 물건너 마주 보이는 산을 남성산으로 설정했다.
이 일대는 역사적으로 피비린내나는 싸움이 잦았다. 특히 富山위에 위치한 산성은 신라의 서쪽을 지키는 요새다. 이 성이 축성되기전 선덕여왕때 백제군사 5백여명의 피비린내나는 죽음이 있었으며 무열왕때 이 성은 백제군 에게 함락되어 산라군사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고속버스를 타고 여행가는 사람들중에는 이 유명한 여근곡을 보며 키득거리기도 한다. 6.25사변때 국도변을 따라 행군하던 미군들은 그 기묘한 산세에 탄성과 야유 를 보내며 사진을 찍느라고 법석을 떨기도 했다고 마을주민들은 말한다. (☜ 자료출처: 신라문화진흥원)
아이러니(irony)라 해야되나..... 경부고속철도 2단계공사가 마무리단계에 접어 들었다. 동대구에서 부산까지 기존 철로를 사용하던 것을 2년후 면 신설된 철로로 달리게 될 것이다. 현재 노반공사는 완공되었고 철로궤도부설과 전력공급시설만이 남아있다. 여근곡 정면에서 오른 쪽으로 고속철도 터널이 턱 밑에 확연히 보인다. 여근곡과 터널..........왠지 무슨 연관이 있을 것 같은 묘한 기분이든다.
▲ 여근곡의 가람 " 유학사 " 전망대에서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좁은 산길을 1km정도 오르면 여근곡 속의 사찰 유학사를 만난다.
▲ " 유학사 " 대웅전
이 절이 창건된지는 약 60여년이 되었다고 한다. 단청을 올리지 않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구조다. 대웅전의 편액(扁額)과 주련(柱聯)의 글씨만을 금분으로 쓴 것이 오히려 내게는 강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으로 와 닿는다.여근곡이란 지명도(知名度)를 생각한다면 의외의 일이다.요즈음 그 흔하디 흔한 중창불사(重創佛事) 를 이 곳에서는 기왓장 하나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가 없다.
▲ 대웅전의 내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불로 두었다. 전각의 규모에 맞게 적당한 크기의 불상이 모셔져있다. 작은 법당의 지나치게 큰 불상은 구획(區劃 )하여 쳐다봐야 되는 불편이 있다. 무릇 좋은 것이란 한 눈에 반하고 한 눈에 쏙~들어와야 되는 법이다.
▲ 산신각(山神閣)과 용왕당(龍王堂)
내륙에 있는 사찰에서 찾아보기 힘든 용왕당(龍王堂)이 이채롭다. 이 곳이 바다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 한 때문이란 짐작을 한다.
▲ 여근곡의 샘물을 호스로 연결하여 끌어들인 유학사의 감로수 물은 알칼리성으로 약간의 단맛이 돈다.
▲ 산행 안내 표지판 주봉인 오봉산(五峰山), 일명 주사산(朱沙山)과 여근곡 중심을 안내하는 표시다.
▲음습한 기운을 느끼며 여근곡으로 향하는 길목엔 산행팀들이 걸어놓은 안내 리본이 나그네를 반기고 있다.
▲ 유학사 안내 표시판에서 300m쯤 오르면 이곳이 여근곡의 중심부인 옥문(玉門)샘 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걸세출(傑世出)의 여장부(女丈夫). 진평왕의 장녀이며 한반도 최초의 여왕인 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과 여근곡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機三事)설화와 관계 있는三國遺事 기이(紀異)편에 보이는 이 설화는 선덕여왕이 예지한 3가지 특출한 지혜를 밝힌 것이다. 그중 이곳과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영묘사(지금의 흥륜사)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개구리들이 모여 3∼4일동안 울었다. 사람들이 모여 이상하게 여겨 여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여왕은 급히 각간(角干)알천,필탄에게 명했다. 훈련된 정병 2천명 을 데리고 속히 서쪽으로 나가서 여근곡이란 곳을 들어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다. 습격하여 잡아라. 각간들이 명령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명씩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 물으니 富山아래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백제 군사 5백명이 거기에 숨어 있었다. 신라군은 곧 그들을 사살했다.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남산 고개에 숨었으므로 그도 에워싸 사살했다. 또한 백제의 후속부대에 1천3백명이 오는 것도 모두 죽였다. 신기하게 여긴 군신들이 왕에게 어떻게 개구리를 통해 백제군이 숨어있는 줄 알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왕은 개구리는 성내는 형상이니 군사(軍士)의 상징이다. 옥문(玉門)이란 여근(女根)이요, 여자는 음(陰) 인데 그 색은 희고, 흰(白) 것은 서(西)쪽이다. 그러므로 서(西)쪽에 군사가 있을 것을 알았다. 또한 남근(男根)은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으므로 쉽게 잡을 것을 알았다 라고 대답했다.
이 Sexy한 풀이를 통해 신라의 전통적인 사상 속에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이 합류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선덕여왕은 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옥문지(玉門池)의 ‘옥문’과 여근곡(女根谷)의 ‘여근’을 연결시키고
▲ 여근곡 옥문(玉門)샘
참~ 알뜰살뜰히도 안내를 해 놓았다. 그림까지 그려가며 거기에다 점까지 찍어 놓았는데, 그림 아래에는 여근곡 중심지(女根谷 中心地)라 쓰여있다. 바가지를 들어 고인 샘물을 마시러 안을 들여다 보니 검은 토사가 퇴적되어 있는 모습에 차마 마시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 꽂아 놓은 파이프를 통해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을 손으로 받아 한 모금 마셔 보았다. 물 맛이야 거기서 거기다. 미세한 단맛을 느낄 수 있는 정도다.
▲ 삼국유사 第二十七
第二十七 德曼(一作萬) 諡善德女大王 姓金氏 父眞平王 以貞觀六年壬辰卽位 御國十六年 凡知幾有三事 於靈廟寺 玉門池 冬月衆蛙集鳴三四日 國人怪之 問於王 王急命角干閼川 弼呑等 鍊精兵二千人 速去西郊 問女根 谷 必有賊兵 掩取殺之 二角干旣受命 各率千人問西郊 富山下果有女根谷 百濟兵 五百人 來藏於彼 竝取殺之 百濟 將軍于召者 藏於南山嶺石上 又圍而射之 又 有後兵一千二百人來 亦擊而殺之 一無孑遺----- 當時群臣啓於王曰 何知花蛙二事之然乎 ---- 蛙有怒形 兵士之像 玉門者 女根也 女爲陰也 其色白 白西方也 故知兵在西方 男根入於女根 卽必死矣 以是知其易捉 於是群臣皆服其聖智----
이글에서 선덕여왕의 여걸다운 진면목이 드러나면서 압권인 대목은 남근은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어나온다 는 말이다.성적(性的)으로 자유분방한 21세기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1400년 전에 선덕여왕
신라26대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자 왕위계승 문제로 화백회의가 열렸다.라이벌 김용춘을 누르고 진평왕의 장녀 덕만이 만장일치로 추대되었으니 그녀가 한반도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다.
여왕은 라이벌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를 과감히 등용하고 외교전반에 관한 권한을 부여하여 김춘추는 여왕의 재위기간 동안 일심으로 충성을 바쳤다. 정적을 곁에 두면서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하여 자신에게 이롭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선덕여왕의 탁월한 카리스마요, 용병술이었던 것이다.
또한, 금관가야 몰락왕족 김유신을 등용하여 군사권(軍士權)을 주어 지휘케 하여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졌다. 그녀의 여장부다움은 처녀의 몸인 김유신의 누이가 김춘추의 아이를 잉태하자 국법에 따라 처형하지 않고 그들을 맺게하는 지략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탁월한 인재등용,뛰어난 외교능력, 첨성대와 황룡사9층목탑을 세운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하던 여왕에게 스토커 (stoker)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지귀(志鬼)였다.
그 가운데 지귀(志鬼)라는 사람은 여왕을 짝사랑해 끝내는 상사병이 났다. 영묘사에 불공을 드리러 간 여왕은 지귀에게 알현을 허락하였다. 여왕이 불공을 마치고 나와보니 기다림에 지쳤던 지귀는 그만 잠이 들어 있었다.
선덕여왕은 지귀를 깨우지 않고 그의 가슴에 팔찌를 풀어주고 돌아갔다. 뒤늦게 잠에서 깬 지귀는 잠이 든 자신 을 원망하며 타오르는 사랑을 진정치 못해 애가 타서 죽었다. 지귀는 그로부터 나쁜 불귀신이 되어 행패를 부렸다. 지귀의 행패는 주로 방화였다. 그의 심화가 남의 집과 재산 을 태우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불귀신을 두려워하게 되었는데, 이 때 선덕 여왕은 불귀신을 쫓는 주문(呪文)을 지어 백성들에게 내놓았다.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 志鬼心中火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燒身變火神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流移滄海外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不見不相親 백성들은 선덕 여왕이 지어 준 주문을 써서 대문에 붙였다. 그랬더니 비로소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사람들은 불귀신을 물리치는 주문을 쓰게 되었는데, 이는 불귀신이 된 지귀(志鬼)가 선덕여왕의 뜻만 좇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원래 고려 초의 설화집인 박인량(朴寅亮)의 수이전(殊異傳)에 심화요탑(心火繞塔)이라는 제목으로 실렸었는데,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가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전재되어 전한다.
<대동운부군옥>은 은나라 음시부의 <운부군옥>을 본따서 단군 이래 선조 때까지 수천 년 간의 사실을 지리(地理)· 국호(國號)·인명(人名)·효자(孝子)·열녀(烈女)·수령(守令)·선명(仙名)·목명(木名)·화명(花名)·금수(禽獸) 11개 항목 으로 나누고, 이를 운별(韻別)로 분류해 놓은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삼국유사에는 지귀(志鬼)의 이야기가 너무 허황되다고 느꼇음인지 한 마디로만 언급하였다.
▲ 참조:2008년 2월 답사사진 초간정(草澗亭)
경북 예천군 용문면사무소에서 용문사로 가는 길을 따라 북으로 2km쯤 가면 울창하게 우거진 길가의 숲속에 자그마한 전통 기와집이 보인다. 이 기와집이 초간 권문해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을 집필했다고 하는 초간정(草澗亭)이다.
먼 후대에 김용화 시인(詩人)은 지귀(志鬼)가 되어 다음같이 노래했다.
지귀(志鬼)의 노래
그대의 눈길 한 번만 스쳐도 단숨에 타오를 목숨입니다 하늘에 별처럼 높고 빛나는 그대, 감히 사모하는 일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 아오나 어이합니까 생각사록 뜨거워지는 이 가슴 별똥별 풀꽃처럼 뿌려지는 길섶에서 그대 향기나는 발소리 기다리다 잠든 가슴 위에 귀하신 팔찌를 벗어 놓으시고 홀연 밤안개 헤치면서 사라지신 그대, 깊고 넓은 마음 헤아릴 듯합니다 마지막 뼈와 살을 우리어 바치는 불의 마음, 몸 밖으로 터져 나와 서라벌 산천을 불꽃으로 덮을 때 그대 넉넉한 치맛자락으로 황홀하게 불타버린 미천한 몸뚱어리를 알뜰히 거두어 주십시오.
▲ 신평2리 마을 저수지 둑길에서 바라 본 여근곡
여근곡(女根谷)을 여자의 성기(性器)와 닮았다는 이유로 호기심어린 눈으로 볼 일만은 아니다. 여근곡은 모혈[母血]로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子宮]으로, 생명창조의 상징적 의미를 자연을 통해 우리 인간들 에게 알리고 깨닫게 한다 또한, 관인명민(寬仁明敏)한 한 여성의 리더십(Readship)을 되새겨 보게한다. 자애로우며 명석한 지혜와 판단력및 예지력으로 국운을 융성케한 지도자의 통치덕목을 돌아보게한다.
타임머신이 있어 1,400년 전으로 돌아가 여왕을 열렬히 미치도록 흠모하면 지귀(志鬼)와의 삼각관계로 고민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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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쓸쓸히 채워져 있고 따뜻이 비워진 숲 원문보기 글쓴이: 들이끼속의 烏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