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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한국 한시에 나타난 국화의 의미
ysoo 추천 0 조회 111 15.08.22 11: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한국 한시에 나타난 국화의 의미

 

李東宰*

 

 

目 次

 

1. 緖論
2. 고결한 인격의 昇華物
3. 음주와 교유의 媒介物
4. 가을 節序의 認識物
5. 結論

 

 

1. 緖論

 

국화는 광의로는 국화과 국화속 식물의 총칭이지만, 협의로는 주로 관상용으로 널리 재배되고 있는 국화과의 다년초를 가리킨다. 국화는 가을을 대표하는 꽃으로서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서 사랑을 받아왔다.1)

 

꽃은 외면적 자태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가령 이른 봄에 피는 매화는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고, 여름에 녹음과 함께 피는 연꽃은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상징하며, 가을 서리 속에서 꽃을 피우는 국화는 절개와 함께 은자를 상징한다.

 

국화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상징은 한문학에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국화가 문학의 소재로 사용한 사람은 屈原(BC343?~277?)이 최초이다. 굴원은 ?離騷?에서 “아침에는 목란의 떨어진 이슬을 마시고,
저녁엔 가을 국화의 떨어진 꽃잎을 먹는다.”2)라고 읊었다. 그 후 東晋의 陶淵明(365~427)은 국화시인으로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宋나라 周敦?(1017~1073)는 ?愛蓮說?에서 “국화는 꽃 가운데 은일자이다.”3)라
고 하여 국화의 이미지가 ‘은일’을 상징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중국 魏나라의 宗會는 ?菊花賦?에서 국화의 특징을 다양하게 표현하였다.4)

 

* 공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1) 이상희?진태하, ?국화의 어원과 관련어 풀이?, 『국화』, 종이나라, 2006, 29쪽.

2) 屈原, ?離騷?, 朝飮木蘭之墮露兮, 夕餐秋菊之落英.
3) 周敦?, ?愛蓮說?, 予謂菊 花之隱逸者也.
4) 宗會, ?菊花賦?, 동그란 꽃송이가 높다랗게 달린 것은 천극을 본뜬 것이요, 순수한 황색으로 잡색이 섞이지 않은 것은 후토의 색이요, 일찍 심어 늦게 피는 것은 군자의 덕이며, 서리를 뚫고 꽃을 피는 것은 굳세고 곧은 기상이요, 술잔에 꽃잎이 떠있음은 신선의 음식이다.(圓華高懸 準天極也 純黃不雜 后土色也 早植晩發 君子德也 冒霜吐穎 象頸直也 盃中體輕 神仙食也)

 

 

국화가 가지는 상징은 다양하겠지만 도연명에게서는 은일자로서의 상징 - 세상일을 모두 접고 이젠 시름마저 잊어버린 관조자로서의 이미지 - 으로 닿아오지만5), 王安石을 비롯한 宋代의 문인들에게서는 도덕적 상징으로 선비로서 가져야 되는 하나의 관습적 상징이 되었다.

 

국화가 갖는 은일적 상징과 도덕적 상징은 우리나라의 性理學者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唐宋의 영향을 많이 받은 조선조 문인들의 한시나 시조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선인들은 국화를 지조와 절개, 도덕적 완성자의 상징으로 ?揚하였다.

 

꽃은 인간 세상에서 可視的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한다.6)그리고 시 속에 투영되어 나타난 꽃은 시인의 창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손길에 의하여 다시 한 번 창조된 꽃은 생물로서의 꽃 이상의 의미를 갖는 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7)

사군자는 원래 物我一體의 자연관에 의해 자연물의 이상화, 의인화시키는 示方式에서 나왔다. 그것은 역사와 함께 예술화, 종교화, 문학화 되면서 단순히 매, 난, 국, 죽의 생태적 범주를 넘어 다양한 상징성의 의연과 내포를 지니게 되었다.8)

 

한시는 대략 사물에 기탁하여 흥을 일으키거나 의인화 수법으로써 비유를 하고 사물에 의지하여 뜻을 서술한다. 한자가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우리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한 이후, 우리 선인들은 영물시 가운데
매화시 다음으로 국화시를 남겼다고 한다. 이는 국화가 생활주변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꽃 가운데 하나인 이유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국화가 갖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고전 번역원의 자료실에 데이터 베이스되어 있는 『한국문집총간』에 들어있는 ‘菊’자만 1만 5천여 자가 넘는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국화를 소재로 한 다양한 문학작품을 남겼다는 것을 방증한다.

특히 우리 선인 가운데 국화시를 많이 남긴 사람은 고려의 牧隱 李穡, 조선의 四佳亭 徐居正, 退溪 李滉, 谿谷 張維, 茶山 丁若鏞 등이 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 문인들이 지은 국화시에 관한 연구 성과는 문학의 소재로 국화가 갖는 상징성에 비해 그 연구 성과는 매우 소략하다. 즉 고려시대 문인인 이색과 퇴계 이황에 의해 쓰여진 국화시에 관한 연구가 있고9), 다산 정약용과 그의 학단에서 국화의 그림자놀이를 즐기면서 지은 시와 李學逵의 화훼취미와 국영시 창작에 관한 연구 성과10)만 있을 뿐, 한시에 나타난 국화시에 대한 통시적 검토가 없었다.

 

따라서 본고는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국화를 소재로 하여 지은 우리 문인들의 시 가운데 도연명의 국화시를 차운하거나 상투적인 용사를 한 시를 제외하고, 국화의 상징적 의미를 드러낸 시는 ‘고결한 인격의 昇華物’로, 중양절에 여럿이 모여 국화주를 마시며 무병장수를 기원했던 내용은 ‘음주와 교유의 媒介物’로, 국화를 통해 가을의 느낌을 표현 것을 ‘가을 節序의 認識物’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5) 허경진, ?시에 나타난 국화의 의미?, 『연세어문학』 제12집, 1979, 9쪽 참조.
6) 문두근, ?韓國 詩에 투영된 꽃의 樣相?, 『국어문학』 제26집, 1986, 2쪽 참조.

7) 문두근, ?韓國 詩에 투영된 꽃의 樣相?, 『국어문학』 제26집, 1986, 1쪽.
8) 김병종, ?국화문화권의 텍스트 읽기?, 『국화』, 종이나라, 2006, 19쪽.
9) 김재룡, ?퇴계의 국화시 고찰?, 『우리문학연구』 제31집, 우리문학연구회, 2010.
김재욱, ?목은 이색의 시와 꽃?, 『고전과 해석』 제8집,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10.
10) 신익철, ?茶山과 다산학단의 菊影詩 창작과 그 의미 ? 『한국실학연구』 제16집, 한국실학학회, 2008.
   정은주, ?이학규의 화훼 취미와 菊影詩 창작?『인문과학』 제49집,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2.

 

 

2. 고결한 인격의 昇華物

 

우리의 선인들은 국화를 부귀영화의 상징보다는 세속적인 욕망을 멀리한 도연명의 국화로 각인되었다. 일찍이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귀거래했던 도연명은 이후 문인들의 삶의 이상형이 되었다. 그리하여 고관대작을 역임한 문인들도 한결같이 국화를 통해 도연명과 같은 삶을 추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11)

 

문인들은 공자의 用事行藏의 가르침에 따라 항상 이중성을 갖게 된다.
즉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면 자신의 도를 실천하여 국가와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임금에게 貶斥되어 벼슬길에서 물러나게 되면 귀거래하여 자연에 은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리하여 문인들은 벼슬을 그만둘 때에는 자연에 은거하면서 도연명처럼 집안에 국화를 손수 심어서 가꾸었다.
이는 국화가 세찬 바람과 된서리 속에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고 절개를 굳건히 지키는 지사나 충신의 상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자신의 지조를 드러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본장에서는 우리 선인들이 국화를 통해 자신의 고고한 인격, 절개, 忍苦등을 드러낸 시를 살펴본다.

 

11)김병종, ?국화문화권의 텍스트 읽기?,『국화』, 종이나라, 2006, 21쪽 참조.

 

다음의 시는 고려 후기 대표적인 문인 중의 한 사람이 이었던 李穀(1298~1351)의 ?十日菊?으로 중양절이 하루 지난 9월 10일 국화를 대하며 여기에 자신의 심회를 붙인 작품이다.

 

 

중추절이 자난 열엿새날 밤같이                    中秋十六夜
달빛은 더욱 휘엉청 밝구나.                         月色更輝輝
중양절을 하루 지난 오늘 국화는                   重陽十日菊
향기는 예전같이 여전히 은은하여라.             餘香故依依
세속은 오히려 유행에 부화뇌동하여              世俗尙雷同
시절만 지나면 관심을 갖지 않는다네.            時過非所希
나는 유독 청초한 이 꽃을 사랑하는 것은        獨憐此粲
만년의 절조 지킴이 내 마음에 꼭 들어맞음이라. 晩節莫我違
바람결에 서너 번 향내 맡고도 싶다마는          臨風欲三嗅
또 주위의 사람이 뭐라고 할까 두려워서          又恐旁人非
차라리 술잔 위에 꽃잎을 둥둥 띄워                不如泛美酒
얼큰하게 취하여 황혼녘까지 함께하리라.        昏昏到夕暉12)

 

 

시의 전반부는 중양절이 지난 후 뭇사람들의 국화에 대한 관심에 대한 내용이다. 즉 국화는 仲秋節이 지나고 중양절이 지나면 어느새 뭇 사람들의 관심 밖의 사물이 되었다. 시의 후반부는 화자가 국화를 대하는 모습이
다. 화자는 중양절이 지나 시들어가는 국화의 모습에 자신의 만년의 삶의 모습과 신념을 국화에 이입하여 드러낸 것이다. 즉 화자는 늙었어도 자신의 절조를 끝까지 꺾지 않고 지키며 살겠다는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
하여 화자는 비록 국화가 완상의 가치가 없어 속인들의 관심 밖에 있지만, 자신은 곁에 가까이 두고 남은 향기를 즐기려고 ‘술잔에 띄워 마시려한다.’ 고 변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臨風欲三嗅’는 두보의 ?芻虞歎?에 “堂上書生空白頭  臨風三嗅馨香泣”13)의 對句를 用事한 것이다.

 

이처럼 이곡은 ?十日菊? 시를 통해 국화를 지조, 절조를 상징하는 사물로 인식하고, 여기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자신도 국화와 같이 절조를 지키며 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12) 李穀,『稼亭先生集』 권14, ?十日菊?, 한국문집총간 3, 민족문화추진회, 186쪽.

13) 杜甫, 『杜少陵詩集』권3, ?芻虞歎?, 대만 중화서국.

 

 

다음의 시는 고려 말 문신이었던 鄭?(1309~1345)의 ?詠菊?이다.

 

나는 황금빛 국화를 사랑한다.                            我愛黃金菊
서리를 업신여겨 빛을 내나니                             凌霜有光輝
홀로 서 있으니 늦은 것이 더욱 좋아                    獨立晩更好
“홀로 꽃다움이 미약하다”고 누가 말했던가?         孰謂孤芳微
서릿바람 아무리 차고 매우나                             風霜雖凜冽
그 위엄도 또한 두려울 것 없어라.                       亦不畏其威
국화를 먹으면 늙음을 막는데 족할 뿐                  足以制頹齡
나의 굶주림을 구제하는 것은 아니니라.               匪獨救我飢14)

 

시의 전반부는 매서운 서리가 내린 속에 홀로 고고한 황금빛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국화의 모습을 칭찬하고 있다. 시의 후반부는 한여름의 뙤약 볕을 견디고 가을의 된서리 속에 핀 국화에 자신의 삶의 철학을 이입하여 드러내고 있다. 화자는 “서릿바람 아무리 차고 매우나, 그 위엄도 또한 두려울 것 없어라.”라고 하여, 당시 元의 간섭과 元의 꼭두각시가 되어 나라의 안위와 민생을 돌보지 않았던 附元勢力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으려고 상소했다가 도리어 울주[울산]로 유배당한 자신의 처지를 말한다. 기실 그는 울주의 유배지에서 “국화를 먹으면 늙음을 막는데 족할 뿐, 나의 주림 구제할 뿐 아니리라.”라고 하였듯이, 유배 중에도 오히려 泰然自若하며 장부의 기개를 잊지 않고 풍류생활을 즐겼다.

 

14) 徐居正 외, 『東文選』 권4, ?詠菊?.

 

 

다음의 시는 張維(1587~1638)의 ?눈이 오고 나서 몹시 추운 날인데도 여태 피어 있는 국화꽃이 그래도 볼 만한 점이 있기에 감흥에 젖어 읊어 보다?라는 제목의 시이다.

 

온갖 풀꽃 번창하다 이내 시드는데                 萬卉繁仍脆
홀로 담담한 향기 뿜는 그대 모습 기특하구나.  孤芳淡自奇
서리 온 뒤 처음으로 꽃잎을 펼쳐놓더니          冒霜初吐?
눈 맞고도 여전히 고운 자태 지녔구나.            經雪尙含姿
모두들 중양절 국화 감상 최고라고 떠들지만    共?重陽翫
세밑까지 두고 본들 그 또한 어떠하리.            因成歲暮期
초췌한 모습 너무 심하다고 미워하지 말라       莫嫌憔悴甚
한 쪽으로 주인과 뜻 맞으면 그뿐 아닌가.        偏與主人宜15)

 

이 시는 조선 중기 4대 문인 중 한 사람인 張維(1587~1638)가 시의 제목에서 밝혔듯이 눈이 내리는 겨울까지 시들지 않고 피어있는 국화를 보고 감흥이 일어 지은 시이다.

 

시의 전반부는 국화의 傲霜孤節을 찬양하고 있다. 국화를 제외한 수많은 꽃들은 서리도 오기 전에 모두 시들어 죽어버리지만 국화는 된서리 속에 피고, 이어 눈 내리는 겨울이 와도 여전히 시들지 않고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시의 후반부는 화자가 된서리에도 눈보라에도 꺾이지 않는 기상을 가진 국화가 사랑스러워서 세밑까지 가까이 두고 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국화는 서리와 눈보라에 꺾이지 않는 기상을 가진 식물로 인식하고 여기에 자신의 심회를 붙여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15) 張維, 『谿谷先生集』 권27, ?雪後寒甚 殘菊猶自可觀 感而有詠?, 한국문집총간 92, 민족문화추진회, 439쪽.

 

 

다음의 시는 張維와 거의 동시대를 살고 간 葛庵 李玄逸(1627~1704)의 ?서리 속에 핀 국화?라는 시이다.

 

된서리에 초목들이 누렇게 시들어 갈 때               霜嚴無物不?黃
혼자서 동쪽 울 밑에 때늦은 국화 따노라.             獨向東籬?晩芳
일찍 그윽한 자태 품고 농염함을 사양했고            夙蘊幽姿辭艶?
늦게 기이한 절조 이뤄 늦가을 홀로 빼어났네.       暮完奇操擢衰荒
꽃잎 아직 남았기에 도팽택이 진작 기뻐했고         猶存曾喜陶彭澤
옮겨 심는 게 늦었다고 두초당이 몹시 상심했지.    移晩偏傷杜草堂
본래 나는 티끌세상 밖의 뜻과 잘 맞아                 素我能諧塵外意
종일토록 유연히 그윽한 향기 스미는구나.            悠然終日襲馨香16)

 

위 시는 이현일이 자신의 둘째 형인 李徽逸(1619~1672)의 ?霜菊? 시에 차운하여 지은 시이다. 시의 전반부는 된서리가 내린 늦가을 수많은 초목들은 모두 시들어 누렇게 변할 때, 다른 초목과 다르게 고고한 자태로 꽃을 피운 국화를 칭송하고 있다.

 

시의 후반부는 국화를 너무도 많이 사랑했던 중국 晉나라의 도연명이 彭澤의 현령을 버리고 자연에 歸去來할 때 황폐한 고향길에서 자신의 맞이했던 국화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17)

이어 당나라의 두보가 安祿山의 난을 피해 사천성 성도의 浣花溪에 초당을 짓고 살면서 “뜰 앞의 감국화 늦게야 옮겨 심어, 푸른 꽃잎 중양절에도 따지 못하겠네.”18)라고 읊은 시를 용사한 것이다. 기실 두보는 이 시에서 소인이 득세하고 군자가 제자리를 잃은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미련에서 다시 물욕과 정쟁에 찌든 세상사보다는 자신의 고고한 절개를 지키며 그윽한 향기를 간직한 국화와 같은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16) 李玄逸, 『葛菴集』, 권27, ?霜菊?, 한국문집총간 127, 민족문화추진회, 367쪽.
17) 『古文眞寶』後集에 실려 있는 ?歸去來辭?를 보면, 도연명이 고향집 풍경을 “삼경은 황폐해 가지만 솔과 국화는 여전히 남았어라.(三逕就荒 松菊猶存)”라고 읊었다.
18) 杜甫, 『두시경전』, ?歎庭前甘菊花?, 대만 중화서국, 庭前甘菊移時? 靑?重陽不堪摘.

 

 

다음의 시는 송강 鄭澈(1536~1593)이 1566년(명종 21) 그의 나이 31세 때 이조정랑에서 함경도 암행어사로 遞職되어 함경도에 갔을 때, 함흥의 객관에 머물며 객관의 뜰에 피어있는 국화를 보고 지은 시이다.

 

가을의 끝자락 변방에 기러기 소리 애달픈데    秋盡關河候雁哀
돌아갈 날 생각하며 망향대에 오르네.             思歸且上望鄕臺
시월이라 함산의 국화는 다정한데                  慇勤十月咸山菊
중양절을 위함이 아니고 나그네 위해 피었네.   不爲重陽爲客開19)

 

화자는 鄭仁弘(1535~1623)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여러 번 遞職을 당하다가 함경도를 암행어사로 나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화자는 함흥의 객관에 머물며 서울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중앙으로의 복귀 소식은 오지 않고 어느덧 10월 초겨울이 왔다. 이에 남쪽으로 겨울을나기 위해 내려가는 기러기 떼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 더욱 마음만 아파온다. 그러다 우연히 객관의 한쪽 모퉁이에 겨울에도 여전히 피어있는 국화가 다정하게 닿아온다. 그리하여 화자는 국화가 ‘중양절을 위해 피지 않고 나그네인 자신을 위해 피었네.’라고 읊었다. 이는 국화가 자신의 처지와 같음을 암시한다.

된서리의 고통을 이기며 초겨울까지 피어있는 국화의 모습은 홀로 절개를 지키며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며 돌아갈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으로 置換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화자가 이 시를 짓고 서울로 복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의 정치가 새롭게 재편되어 화자를 미워하던 무리들이 정권을 잃고 물러나고 화자는 비로소 獻納?持平에 발탁되고, 이어 玉堂에 들어가 修撰이 되었다.

 

19) 鄭澈, 『松江集』, ?咸興客館對菊?, 한국문집총간 46, 민족문화추진회, 143쪽.

 

 

다음의 시는 병자호란의 국치와 당쟁의 격화로 말미암아 국력은 약화되고 민생이 도탄에 허덕이던 시기를 살았던 西溪 朴世堂(1629~1703)이 중양절을 맞이하여 지은 시이다.

 

푸른 꽃이 가절에 피지 않았다고 탄식마라         休嗟靑?枉佳辰
국화의 고절함은 응당 늦게 필수록 더욱 참되니. 爲晩高應晩更眞
뭇 꽃잎 다 떨어지기 전에 알 수 있으리             不待衆芳枯落盡
풍상 속에 누가 나의 정신을 도와줄 수 있으랴.   風霜誰與助精神20)

 

박세당이 가을 국화가 피기 시작하는 중양절이 왔지만 국화가 아직 피지 않자 杜甫가 읊었던 ?歎庭前甘菊花? 시의 뜻에 반대되는 의미로 희롱하여 지은 시이다.

 

시의 기구는 국화가 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있고, 승구는 이에 대한 변명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自問自答을 하고 있다. 즉 ‘탄식하지 마라.’라고 하여 마치 제3자에게 당부하듯 말하고 있으나,
기실 여기에는 화자 자신뿐 아무도 없다. 그리고 ‘늦게 필수록 더욱 참되다.’라고 自答을 한 것이다.

일찍이 두보는 “뜰 앞에 감국을 때 늦게 심은 지라, 푸른 꽃을 중양절에 따먹지 못하겠네.[庭前甘菊移時晩, 靑蘂重陽不堪摘]”라고 읊었었다.

 

시의 후반부는 화자가 국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자신의 삶의 철학과 의지의 표현이다. 기실 박세당은 병자호란과 당쟁의 격화로 정치적 불안정과 민생이 극도로 곤궁한 시대를 살았다. 여기에 더하여 당쟁으로 말미암아 두 아들을 잃는 가정적 슬픔을 경험하여 정치 일선에 진출하지 않고 재야에서 학문에 전념하여 학문 발전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선인들은 도연명의 시를 그대로 차용하여 시화하지 않고 국화의 생장과 개화를 직접 경험한 후에 도연명이나 두보의 시를 援用하여 자신의 시의 내용으로 用事하고 있다. 즉 독서를 통한 국화의 이해가 아닌 국화를 손수 가꾸면서 경험했던 국화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여기에 자신의 삶의 의지를 붙여 시화하고 있다.

 

20) 朴世堂, 『西溪先生集』권4, ?重陽日 盆菊未開 ?爲一絶 反杜意?, 한국문집총간 134, 민족문화추진회, 66쪽.

 

 

3. 음주와 교유의 媒介物

 

국화는 사군자 가운데 유일하게 꽃, 잎, 줄기, 뿌리까지 먹을 수 있는 식물이다. 우리 선인들은 이를 술과 차, 나물, 약으로 먹어서 邪氣를 쫓고 신선처럼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양화소록에 국화는 고려 충숙왕 때
전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미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국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문헌을 통해 국화에 대한 중국의 문화적 인식과 관념도 그대로 전해졌다.

즉 국화주를 마시면 장수한다고 믿었던 것은 옛날 하남성의 남양에 甘谷이 있고, 그 산상에 많은 국화가 자라고 있어 계곡 안의 30여 채의 가옥은 산상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기 때문에, 上壽는 120~130세, 中壽는 100여세, 下壽는 70~80여세 이르렀다고 한다.21)

그리하여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은 국화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중양절은 국화주를 마시는 것이 주된 행사였다. 그래서 중양절을 ?국화연?이라고 하였다. 즉 술잔에 국화를 띄워서 마시며 국화를 감상하는 것이다.

본 장에서는 가을철에 국화주를 마시며 국화를 감상했던 시를 살펴본다.

 

21) 박성철, ?日本古典詩歌文學에 나타난 菊花의 表現 분석?, 1999, 361쪽 참조.

 

 

다음의 시는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김부식이 지은 ?對菊有感?이다.

 

늦가을이 오자 온갖 풀 다 시들어 죽었는데    季秋之月百草死
뜰 앞의 감국만이 서리를 이기고 피었구나.    庭前甘菊凌霜開
풍상에 하는 수 없이 점점 시들어가도           無奈風霜漸飄薄
벌과 나비는 다정하여 아직도 빙빙 맴도네.    多情蜂蝶猶徘徊
두목은 취미산에 올랐고                             杜牧登臨翠微上
도잠은 쓸쓸히 흰 옷 입은 사람을 바랐다네.   陶潛?望白衣來
옛 사람들 생각하며 세 번 탄식하노라니        我思古人空三嘆
명월이 문득 황금 술병에 비춰 오누나.          明月忽照黃金?22)

 

『양화소록』에 의하면 국화는 고려 충숙왕때 원나라로부터 전해왔다고 하지만, 이미 신라시대부터 자생하는 국화가 있었으며 민간에서 널리 가꾸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김부식이 살았던 고려 중기에도 민간에서 화훼식물로 직접 가꾸었다.

 

시의 전반부는 화자가 뜰 앞에 심어 놓은 국화가 늦가을에 피고 이어 서리바람에 시들어가는 과정을 관찰한 객관적인 기록이다. 즉 늦가을 된 서리에 주변의 식물들은 모두 시들어 죽었는데, 유독 국화만이 이에 굴하지 않고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시의 후반부는 국화에 대한 단상과 국화주를 마시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이다. 즉 경련의 “두목은 취미산에 올랐고, 도잠은 쓸쓸히 흰 옷 입은 사람을 바랐다네.”는 당 나라 시인인 杜牧이 매년 중양절마다 “손님과 더불
어 술병을 들고 취미산에 올랐다.[與客携壺上翠微]”는 구절을 용사하고, 이어 도잠이 ‘매년 9월 9일이면 江州刺史인 王弘이 술을 보내주었는데, 이를 기다린다.’는 일화를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미련은 다시 현실로 돌아온 화자의 모습이다. 화자는 도잠이나 두목처럼 중양절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국화주를 마시지 못하는 현실을 속상해 하고 있다.

 

22) 徐居正 외, 『동문선』 권20, ?對菊有感?.

 

 

다음의 시는 이규보의 ?詠菊花?의 제2수이다.

 

봄의 힘을 빌리지 않고 가을빛에 피었기에   不憑春力仗秋光
그러므로 찬 꽃들이 서리에도 늠름하다네.   故作寒芳勿?霜
술 가진 사람 누군들 너를 버릴 수 있겠는가 有酒何人辜負汝
도연명만이 그 향기 사랑했단 말을 마라.     莫言陶令獨憐香23)

 

시의 전반부는 국화꽃에 대한 차별성과 그 특징에 대한 서술이다. 즉 꽃들은 대부분 봄날에 피지만 국화는 홀로 가을빛 아래 서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찬 기상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있다. 시의 후반부는 국화에 대한 뭍
사람들의 예찬이다. 즉 역사이래로 도연명만 국화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술을 마실 줄 아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국화가 피면 혼자서 마시거나 여럿이 모여 국화 꽃잎을 술잔에 띄워 마셨다는 것이다.

 

옛날 한 선비는 휘엉청 달 밝은 밤, 때맞추어 청할 벗들도 마땅치 않으면 국화분을 방안에 들여놓고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 국화분 앞에서 꽃송이마다에게, ‘그대 한 잔, 나 한 잔, 저 달도 한 잔’하는 식으로 술잔을 기울이다가 취하면 그 국화분 옆에 쓰러져 잠들곤 했다.24)고 한다.
그리하여 이규보는 그이 다른 시에서도 국화에 대해 “춘삼월이라 봄바람에 곱게 핀 온갖 꽃들이, 가을날 한 떨기 국화만 못하구나. 향기롭고 고우면서 추위를 견디니 더욱 사랑스러워, 은근한 정이 더욱 술잔 속에 들어오
네.”25)라고 하여 가을날에 국화를 보면 술 생각이 간절하다고 읊고 있다.

 

23) 李奎報, 『東國李相國集』 권14, ?詠菊? 2首, 한국문집총간 1, 민족문화추진회, 439쪽.
24) 최승범, ?국화의 어원과 관련어 풀이?,『국화』, 종이나라, 2006, 89쪽 참조.
25) 李奎報, 『東國李相國後集』권1, ?詠菊? 其二, 春風三月百花紅, 不及秋天菊一叢. 芳艶耐寒猶可愛, 殷勤更入酒盃中, 한국문집총간 2, 민족문화추진회, 139쪽.

 

 

 

다음 시는 조선 전기 대표적인 관료 문인이었던 서거정의 ?국화를 옮기면서 居昌君 愼 承善에게 부치다?라는 시이다.

 

삼삼의 삼짓날 오솔길에 국화 처음 옮겨 심었으니   三三小徑初移菊
구구의 중양절엔 국화주를 마실 수 있으리             九九良辰可擧杯
내가 오늘 아침 비 온 때를 틈타서 심었으니           我欲今朝因雨種
그대는 중양절에 거문고를 안고 와야 하네.            君宜當日抱琴來26)

 

시의 전반부는 3월 3일 삼짓날 국화를 옮겨 심으며, 9월 9일 중양절에 국화주를 마시겠다는 기대이다. 여기에서 ‘三三’은 3월 3일, 즉 ‘삼짓날’과 ‘오솔길’이라는 重義를 담고 있다. 즉 漢나라 은사였던 蔣?의 ‘三徑’과 도잠의 ?귀거래사?에 “세 오솔길은 황폐해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도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시의 후반부는 전반부와 같이 비오는 틈을 활용하여 국화를 심은 것은 중양절에 친구들과 만나 국화주를 마시겠다는 기대이다. 결구는 화자가 李白의 ?山中與幽人對酌?에 “나는 취해 자고 싶으니 그대는 돌아갔다가,
내일 아침 생각 있거든 거문고 안고 또 오게나.(我醉欲眠卿且去, 明朝有意抱琴來)”를 용사하여, 중양절에 마실 국화주를 담고 이를 감상하기 위해 친구인 신승선을 기다리겠다는 기대를 나타내고 있다.

 

26) 徐居正, 『四佳集』권31, ?移菊 寄居昌君愼公 承善?, 한국문집총간 11, 민족문화추진회, 30쪽.

 

 

다음의 시는 張維의 ?비 오는 날 국화를 감상하며 이웃집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갖다?라는 시이다.

 

차가운 비 추적추적 흠뻑 젖은 국화꽃     寒雨蕭蕭沾菊花
덜 익은 막걸리 더 기다릴 필요 있나.      濁?初熟不須?

술잔에 그저 술만 넘치도록 딸아 주구려  樽前但得盃長滿
오랜 객지 생활 집 생각 다시 안 나도록.  久客無心更憶家27)

 

시의 기구는 가을을 재촉하는 찬비 속에서 의연한 자태를 뽐내는 국화의 모습이다. 승구는 국화의 감상을 핑계 삼아 술자리를 펼친 장면이다.
아직 술이 덜 익었지만 국화가 있고 좋은 이웃 친구가 있으니 술은 좋고 나쁨을 따질 필요가 없다. 전구는 술잔을 주고받는 장면이고, 결구는 술을 마시는 이유이다. 화자는 오랜 객지 생활에 집 생각이 간절했다.

화자는 문득 국화꽃을 보고 올 한해도 다 지나가고 있음을 깨닫고 집 생각이 울컥 난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暴飮을 통해 客愁를 잊고자 한 것이다.

 

27) 張維, 『계곡집』권33, ?雨中賞菊?家小飮?, 한국문집총간 92, 민족문화추진회, 536쪽.

 

 

다음의 시는 ?翠軒 朴誾(1479~1504)이 容齋 李荇(1478∼1534)과 함께 국화를 감상하며 지은 시이다.

 

가을이라 용재의 집엔 술이 익었고         秋熟容齋酒
서리는 황국의 향기를 머무르게 했다.     霜留黃菊香
여기 와서 그 술에 얼큰히 취해              來成爛慢醉
제멋대로 적요장을 읊는다.                   浪詠寂寥章
이 흥을 오래 지속할 수 있다면              此興可能久
남은 생애를 어찌 다시 슬퍼하리.           餘生那更傷
남산으로 게으르게 돌아가는 새들은       南山倦歸鳥
지는 햇빛 속에 아물거리며 사라진다.     落日點微茫28)

 

시의 수련은 容齋 李荇이 가을날 국화를 감상하기 위해 미리 술을 담가두고, 서리가 내려 황국이 노랗게 핀 날을 잡아 친구인 화자를 초대한 장면이다. 함련은 화자가 이행의 집인 容齋에 와서 얼큰히 술에 취해 ?적요장?을 제멋대로 읊고 있다. 기실 화자는 이행과 한 살 연하로 태어나서 같은 마을에 살고 동문수학한데다 같이 벼슬하고 같은 죄를 받는 등, 함께 생활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평생의 知己였다.

하지만 화자는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개결한 그의 성격으로 극간을 서슴치 않아 연산군의 忌憚을 받았고 재상들의 미움을 샀으며, 결국 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시의 후반부는 화자의 순탄하지 않은 벼슬살이에 대한 넋두리와 앞날의 모습이다. 마치 詩讖으로 읽혀진다. 미련의 “남산으로 게으르게 돌아가는 새들은, 지는 햇빛 속에 아물거리며 사라진다.”는 화자가 자신의 미래 모습을 예견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화자와 李荇은 둘도 없는 평생의 지기였다. 그렇게 때문에 속마음을 모두 털어 놓을 수 있는 사이였다.

여기에서 ‘鳥’는 일반적인 새라기보다는 ‘힘없는 화자 자신의 모습’, 그리고 ‘落日’은 ‘연산군’으로, ‘微茫’은 ‘자신의 죽음’과 ‘연산군의 죽음’ 등 重義로 읽힌다.

 

28) 朴誾, 『?翠軒遺稿』 권3, ?容齋對菊 與擇之同賦? 其三, 한국문집총간 21, 민족문화추진회, 38쪽.

 

 

앞에서 밝혔듯이 가을날 국화 옆에서 국화주를 마셨다는 이야기는 굴원의 ?離騷?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국화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도연명은 “술은 온갖 근심을 제거하고 나이 먹는 것을 억제한다.”라고 하여 국화꽃을
술에 담가 먹었다고 한다. 이후 한자문화권에서는 9월 9일 중양절에 국화 아래에서 술동이를 두고 술을 마시는 일을 菊花樽이라고 하여 일상화된 행사였다.

 

우리 선조들은 국화를 감상하기 위해 국화주를 마시고, 국화꽃 감상을 핑계로 친구들과 교유를 하였으며, 또는 달밤에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국화를 감상하며 홀로 국화주를 마시며, 이때의 심회를 국화에 붙여 시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국화는 가을을 상징하는 국화와 음주의 배경으로 노래된 국화로 이중성을 띄어 그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

 

 

4. 가을 節序의 認識物

 

한자문화권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자연물, 특히 꽃과 같이 사람들과 친숙한 사물의 변화를 통해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사계절을 대표하는 사물을 四君子라고 하여 시나 그림의 중요한 소재로 삼았다.

즉 봄은 매화를 통해 인식하고 여름은 난초를 통해 표현하였으며 가을은 국화를 통해 절서를 인식하고 겨울은 대나무를 통해 그 상징으로 삼았다.

 

음력 9월을 九秋라고 부르는 것 외에도 국화라는 말을 넣어 菊月, 菊令, 菊秋라고 하였듯이 국화는 가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또한 가을의 이미지는 결실이라는 절기에 부합되어 완성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낙엽이 지고 만물이 시들어 죽듯이 죽음(死)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시인 묵객들은 가을을 통해 충만함과 공허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러므로 국화의 이미지는 가을을 대표하는 꽃답게 결실의 성취감과 죽음의 공허감을 동시에 갖고 있다. 즉 화자의 처한 위치나 심리상태에 따라 서로 다른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본 장에서는 선인들이 국화를 통해 가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다음의 시는 이규보의 ?국화를 읊다? 제 1수이다.

 

청제가 꽃 피우는 것 맡았거늘                    靑帝司花剪刻多
어찌하여 가을이 또 꽃을 피우려 하나          如何白帝又司花
서늘한 바람 날마다 불어오는데                  金風日日吹蕭瑟
어디서 따뜻한 기운 빌려다가 꽃을 피우는지 借底陽和放艶?29)

 

시의 기구는 화자가 인식한 계절의 순환과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이다.
즉 화자는 봄은 만물이 소생하고, 여기에 더하여 萬花가 꽃망울을 터트린다고 인식하고 있다. 승구는 가을에 꽃망울을 터트린 국화에 대한 경탄과 신비이다. 전구와 결구는 화자는 가을의 神인 白帝는 秋霜의 신으로 만물
을 시들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오히려 국화로 하여금 황금색의 꽃을 피우게 한 것에 대한 신비함에 대한 예찬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이를 “서늘한 바람 날마다 불어오는데, 어디서 따뜻한 기운 빌려다가 꽃을 피우는지”라고 경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을 국화에 대한 신비감에 대한 경탄은 그의 다른 시에서도 “국화가 아무리 가을에 핀다고 하지만, 이 같이 서리 내리는 늦가을이야 어찌 필 때랴! 아직도 맑은 향기 풍기며 곱게 피었으니, 어찌 차마 한 가지 꺾어 잔에 띄울 수 있으랴.”30)라고 거듭 드러내고 있다.

 

29) 李奎報, 『東國李相國全集』 권14, ?詠菊? 二首, 한국문집총간 1, 민족문화추진회, 439쪽.

30) 李奎報, 『東國李相國後集』 권5, ?雜菊皆盡 見名菊至九月向晦盛開 愛而賦之?,
黃花雖似與秋期, 及此霜深豈發時. 尙把淸香開艶艶, 一枝何忍損浮?, 한국문집총간 1, 민족문화추진회, 183쪽.

 

 

다음의 시는 고려 말 문인인 李穡(1328~1396)의 ?국화?라는 연작시의 제3수이다.

 

중추절엔 둥근 달 아래 그림자를 놀리고             中秋弄影月流空
시월엔 눈 속의 떨기에서 향기를 풍겨라.            十月吹香雪壓叢
풍광을 차지한 게 어찌나 크고 넓은지                占得風光何大闊
쇠한 늙은이 꽃을 보고 거듭해서 탄식하노라.      對花三歎有衰翁31)

 

李穡은 국화를 보고 계절의 변화 뿐만 아니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있다. 시의 기구처럼 국화는 8월 한가위 때에는 밝은 달빛 아래 무성함과 화려함이 넘쳐나고 있다. 이어 달포가 지난 10월 초겨울이 되었어도 눈 속에서 여전히 향기를 내뿜고 있다. 이제는 온 천하에는 국화만 있을 뿐 다른 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국화를 ‘九花’라는 별칭으불리기도 했다. 원래 ‘九’는 奇數 가운데 가장 큰 숫자이다. 이 ‘九’는 특별한 자리의 양수로 취급되어 緣起가 무궁한 숫자로 인식되어 있다.32)
즉 ‘九’는 쇠함과 죽음을 의미하면서도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화자는 국화가 눈 속에서 시들어가는 모습을 통해 한 해도 저물어 감을 인식하고, 나아가 자신이 늙어감을 탄식한 것이다.

 

31) 李穡, 『牧隱詩藁』권19, ?菊?, 한국문집총간 4, 민족문화추진회, 240쪽.

32) 조태성, ?時調에 나타난 국화의 심상?, 『시조학 논총』제27집, 2007, 274쪽 참조.

 

 

다음의 시는 조선 전기 문인인 서거정의 ?국화가 피지 않아서 서글픈 마음에 짓다?라는 제목의 시이다.

 

아름다운 국화가 금년엔 전년보다 더디어  佳菊今年開較遲
가을 정취가 동쪽 울타리에 아득하구나.    一秋情興?東籬
쌀쌀한 서풍은 도대체 무정하기만 해라     西風大是無情思
국화엔 들지 않고 귀밑털에만 들어왔네.    不入黃花入?絲33)

 

서거정은 국화를 소재로 한 많은 수의 시를 지었다. 시의 기구는 아름다운 국화가 더디게 피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리고 승구는 국화를 통해 가을 흥취를 느끼려고 날마다 동쪽 울타리를 찾지만 국화는 여전히 꽃망
울을 터트리지 않고 있다. 승구와 결구는 화자가 국화가 피는 가을이 왔건만 노란 국화는 피지 않고 세월만 지나 귀밑머리가 二毛간 된 자신의 모습에 대한 불만이다.

 

국화는 가을이라는 계절과 관련하여 ‘重陽花’라고 불리기도 한다. ‘重陽’은 ‘重九’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날은 음력으로 9월 9일을 뜻한다.陽의 기운이 거듭되어 최고조에 이르는 날이다.34)

이후 양의 기운은 점점 줄어들고 만물도 이에 따라 점점 시들어 간다. 그리하여 문인들은 시들어 가는 만물을 통해 자신의 노쇠함과 더불어 무상감을 느낀 것이다.

 

33) 徐居正,『四佳集』 권50, ?菊花不開 ?然有作?, 한국문집총간 11, 민족문화추진회, 86쪽.

34) 이상희?진태하, ?국화의 어원과 관련어 풀이?, 『국화』, 종이나라, 2006, 33쪽.

 

 

다음의 시는 조선 전기 신진사류를 영도하였던 문인인 金宗直의 ?약목현에서 손극겸이 화목을 잘 기른다는 말을 듣고, 서교수 지인과 남훈도 계명, 이생원 긍과 함께 그의 화원을 찾으니, 다복솔은 장막 같은데 국화 수십 종류와 난초 예닐곱 떨기가 있었다. 그래서 부들자리에 앉아 몇 잔 술을 기울이는데, 손은 홍시를 내어 놓고 자기 나이 81세라 하였다.?라는 긴 제목의 시이다.

 

좁고 낮은 땅에 여남은 집이 있고      十室卑湫地
한적한 동산은 서너 이랑 거칠구나.   閑園數畝荒
소나무는 누각의 한 기둥을 이루고    松爲一柱觀
국화는 백 가지의 향이 섞였다.         菊作百和香
작은 섬돌 틈의 난초는 이슬을 받고   小?蘭承露
헤진 울타리의 감은 서리 맞았다.      疏籬?得霜
주인은 그의 나이가 80이라면서        主人年八十
편안히 앉아서 가는 세월 아낀다.      燕坐惜頹光35)

 

시의 수련은 제목에서 밝힌 경상도 칠곡군 약목현에 있는 손극겸의 화원이 있는 마을과 화원의 모습이다. 10여 채의 민가가 좁고 낮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고, 거기에 있는 화원은 서너 이랑에 불과한 작은 화원이었다. 함련은 화원에 대한 자세한 부연설명이다. 화원에 있는 정자는 살아있는 소나무를 한쪽 기둥을 삼아 지었으며, 주변에는 수십 종의 국화가 온갖 향기를 내뿜고 있다.
전련은 함련에 이어 화원에 대한 추가 설명이다. 가을이 깊어 가면서 정자 아래의 섬돌 틈에 심어져 있는 난초에는 가을 이슬이 맺혀있고, 울타리 주변의 감나무의 감은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화자는 이러한 가을의 풍경
을 통해 한 해가 또 지나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면서 화자는 귀거래하고자 하는 마음이 절실해진다.

 

미련은 집주인인 손극겸의 삶의 모습이다. 화자를 초대한 손극겸은 나이가 80살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수십 종의 국화를 손수 가꾸며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 이는 손극겸이 위진남북조시대부터 中唐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壺中天地’, 즉 ‘호리병 속의 별천지’를 본떠서 아주 협소한 공간에 국화와 같은 작은 화초를 심고 가꾸며 이를 통해 江海와 같은 예술 공간을 꿈꾼 것이다. 화자는 이러한 손극겸의 삶의 모습을 자기화하여 자신의 삶의 指南으로 삼아 국화를 심고 가꾸며 유유자적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35) 金宗直, ?畢齋集 권13, ?若木縣 聞孫克謙善花木 與徐敎授 智仁 南訓導 季明李生員 兢 同訪入其園 有盤松如幄 菊數十種 蘭六七朶 遂坐蒲薦小酌 孫饋紅?自言年今八十一矣?, 한국문집총간 12, 민족문화추진회, 310쪽.

 

 

다음의 시는 李玄逸(1627~1704)이 함경도 종성의 유배지에서 지은 ?을해년 중구일, 愁州의 配所에 있던 차, 홀연히 地主인 使君 朴明義가 떨기로 핀 黃菊 화분을 보내 주니, 문득 방 안 가득 그윽한 멋이 풍겨 외로이
귀양을 사는 나로 하여금 유연히 東籬吟賞의 멋을 느끼게 하였다. 江州의 白衣送酒에 비긴다면 그 風致가 훨씬 낫다 하겠으니, 감탄하던 나머지 애오라지 서툰 말을 엮은 시편을 부친다.?라는 긴 재목의 시이다.

 

변방은 가절에도 보이는 풍경이 달라                 塞垣佳節異風煙
멀리서 동쪽 울타리를 생각하매 마음만 아득해라 遙憶東籬意?然
홀연히 강주의 좋은 선물 이르렀다는 소식          忽報江州好事至
노란 국화는 펄럭이는 흰옷보다 좋고 말구          黃花不?白衣翩36)

 

시의 전반부는 화자가 함경도 종성 유배지의 풍경이 고향의 植生과 달라서 국화꽃을 흔히 볼 수가 없었다. 화자는 1694년 4월 仁顯王后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趙嗣基를 伸救하다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서인 安世徵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圍籬安置되었었다. 그리하여 중구절을 맞이하였어도 국화꽃이 없는 아쉬움을 달래려고 고향의 집 동쪽 울타리의 국화를 상상하고 있다.

 

시의 후반부는 종성에 사는 박명의가 황국 화분을 하나를 보내주자, 이에 기뻐하는 화자의 모습이다. 이 두 구는 ‘중국 東晋의 陶淵明이 重九節에 술이 없어 동쪽 울타리 밑에서 속절없이 술에 띄울 꽃잎만 따고 있던 차에, 江州刺史인 王弘이 白衣를 입은 사람을 시켜 술을 보내왔다.’는 고사를 용사하였다.

화자는 ‘술을 기다리던 도연명의 심정보다 국화가 없는 유배지 종성에서 중양절에 황국의 화분을 받은 자신이 더 기쁘다.’고 하고 있다. 즉 화자는 국화를 통해 가을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한 해가 또 지나감을 아쉬워하며 객지에서 향수를 달랜 것이었다.

 

36) 李玄逸,『葛庵集』권1, ??重九日 在愁州棘裏 忽蒙地主朴使君 明義 ?致黃菊叢盆. 便覺幽趣滿室 使澤畔羈?. 悠然有東籬吟賞之趣 視江州白衣送酒風致 不?過之. 感歎之餘 聊呈拙語?, 한국문집총간 127, 민족문화추진회, 382쪽.

 

 

다음의 시는 조선 중기 퇴계 李滉(1501~1570)과 理氣 논쟁을 벌였던 奇大升(1527~1572)의 작품이다.

 

늦가을 온갖 꽃이 말라 죽으니      窮秋百卉死
이 서리 속의 국화를 감탄하네.     感此霜中菊
곱고 고와 자태를 머금고자 하고   鮮鮮欲含姿
아름답게 그윽함을 간직하고 있네.婉戀保幽獨
추위의 위엄도 어찌할 수 없네.     寒威無奈何
타고난 명이 본디 맑았기에          受命自淸淑
쓸쓸하게 점점 시들어 가니          蕭蕭漸向衰
애석해라! 조화가 빠르기도 하네.  惜哉大化速37)

……

 

위 시는 시의 제목처럼 철이 지나 ‘시든 국화를 보고 탄식’하며 지은 작품이다. 시의 전반부는 국화에 대한 예찬이다. 늦가을이 자나 온갖 꽃들은 말라 죽었지만 된서리 속에서도 홀로 고운 자태를 드러낸 국화에 대한 칭
탄이다.

 

시의 후반부는 추위에 어쩔 수 없이 시들어가는 국화를 보며 계절의 순환과 자연의 현상에 대한 무상감을 드러내고 있다. 화자는 계절의 순환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시들어 버린 국화를 통해 인간사를 드러내고 있다. 즉 자연의 순환에 저항하여 아무리 인위적인 노력을 해도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있다.

 

37) 奇大升, 『高峯先生續集』 권1, ?殘菊歎?, 한국문집총간 40, 민족문화추진회, 235쪽.

 

 

다음의 시는 張維가 지은 ?비가 온 뒤에 핀 자줏빛 국화꽃을 보며 고향집 뜰을 생각하다?라는 제목의 시이다.

 

비가 개자 담장 아래 활짝 핀 자주색 국화           墻根紫菊雨初開
홀연히 고향 집 울 밑에 심은 국화가 그리워지네. 忽憶故園籬下栽
더하여 동쪽 이웃집 옛날 시 친구가 그리워         更有東?舊詩伴
도리어 막걸리 잔도 마음대로 못 들겠네.            還應不放濁?盃38)

 

시의 전반부는 화자가 어느 客館의 담장 아래에 자줏빛으로 핀 국화를 보고 있는 장면과 국화를 보자 고향이 그리워지는 자신의 모습이다. 시의 후반부는 국화의 감상을 매개로 하여 고향의 옛 친구가 간절히 보고 싶어
도리어 술잔도 기울이지 못하는 화자의 모습이다. 이 시는 한시의 구도가 先景後情의 구도로 하여 景의 모습이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과 다르게 기구만 景을 묘사하고 나머지는 情으로 미감을 펼치고 있다. 이는 화자가 국화를 통해 옛날 고향생각을 떠올리고, 여기에 고향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화자의 모습을 극대화한 것이다.

 

38) 張維, 『谿谷集』권33, ?雨後紫菊花開 有懷故園?, 한국문집총간 92, 민족문화추진회, 534쪽.

 

 

한자문화권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자연물, 특히 꽃과 같이 사람들과 친숙한 사물의 변화를 통해 표현하였다. 국화는 음력 9월을 九秋라고 부르는 것 외에도 菊月, 菊令, 菊秋라고 하였듯이 가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또한 가을의 이미지는 결실과 죽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시인 묵객들은 가을을 통해 환희와 愁心을 동시에 느낀다. 그러므로 국화의 이미지는 화자의 처한 위치나 심리상태에 따라 성취의 환희와 시들어 감에 따른 愁心을 동시에 갖고 있다.

 

 

5. 結論

 

본고는 우리나라 한시에서 국화가 어떤 이미지로 인식되었는가를 살펴 보기 위해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지어진 시 가운데, 이를 ‘고결한 인격의 승화물’, ‘음주와 교유의 매개물’과 ‘가을 절서의 인식물’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국화는 가을을 대표하는 꽃으로서 외면적 자태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즉 가을 서리 속에서 꽃을 피우는 국화는 절개와 함께 은자를 상징한다. 국화가 문학의 소재로 사용한 사람은 굴원이 최초이다. 그 후 東晋의 陶淵明은 국화시인으로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宋나라 주돈이가 국화를 ‘은일자’라고 하여 국화의 이미지가 ‘은일’을 상징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왕안석을 비롯한 宋代의
문인들에게서는 도덕적 상징으로 선비로서 가져야 되는 하나의 관습적 상징이 되었다.

 

한자가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우리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한 이후, 우리 선인들은 영물시 가운데 매화시 다음으로 국화시를 남겼다. 이는 국화가 생활주변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꽃 가운데 하나인 이유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국화가 갖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국화가 갖는 은일적 상징과 도덕적 상징은 우리나라의 문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문인들은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이를 시화하고 있다.

 

첫째, ‘고결한 인격의 승화물’로 인식하였다.

유학의 영향을 받은 우리 선조들은 공자의 用事行藏의 가르침에 따라 항상 이중성을 갖게 된다. 즉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면 자신의 도를 실천하여 국가와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임금에게 貶斥되어 벼슬길에서 물러나게 되면 귀거래하여 자연에 은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리하여 문인들은 벼슬을 그만둘 때에는 자연에 은거하면서 도연명처럼 집안에 국화를 손수 심어서 가꾸었다. 이는 국화가 세찬 바람과 된서리 속에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고, 절개를 굳건히 지키는 지사나 충신의 상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문인들은 국화를 손수 심고 가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를 문학의 소재로 차용하여 자신의 고고한 절개, 지조 등을 표현하였다.

 

둘째, ‘음주와 교유의 매개물’로 인식하였다.

가을날 국화 옆에서 국화주를 마셨다는 이야기는 굴원은 ?離騷?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국화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도연명은 “술은 온갖 근심을 제거하고 나이 먹는 것을 억제한다.”라고 하여 국화꽃을 술에 담가 먹었다고 한다. 이후 한자문화권에서는 9월 9일 중양절에 국화 아래에서 술동이를 두고 술을 마시는 일을 菊花樽이라고 하여 일상화된 행사였다. 우리 선조들은 국화를 감상하기 위해 국화주를 마시고, 국화꽃 감상을 핑계로 친구들과 교유를 하였으며, 또는 달밤에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국화를 감상하며 홀로 국화주를 마시며, 이때의 심회를 국화에 붙여 시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국화는 가을을 상징하는 국화와 음주의 배경으로 노래된 국화와는 그 차별화의 경계가 매우 모호한 관계에 있다. 즉 국화와 달을 벗 삼아 취하도록 마시겠다는 뜻을 노래해 국화를 醉樂의 배경 또는 분위기 조성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셋째, ‘가을 절서의 인식물’로 인식하였다.

한자문화권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자연물, 특히 꽃과 같이 사람들과 친숙한 사물의 변화를 통해 표현하였다. 국화는 음력 9월을 九秋라고 부르는 것 외에도 菊月, 菊令, 菊秋라고 하였듯이 가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또한 가을의 이미지는 결실과 시들어 감[죽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시인묵객들은 가을을 통해 환희와 공허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러므로 국화의 이미지는 화자의 처한 위치나 심리상태에 따라 성취의 환희와 시듬의 공허감을 동시에 갖고 있다.

 

앞에서 밝혔듯이 우리나라 선인들이 남긴 국화를 소재로 한 시가 매우 많으나 아직까지 이에 대한 전문 논저가 없고, 개별 문인에 대한 연구도 소략한 것이 아쉽다. 서거정을 비롯하여 국화시를 많이 남긴 개별 문인의 국화시에 대한 연구는 후일의 과제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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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 2013. 7. 31

심사시작일 2013. 8. 6

심사완료일 2013. 8. 22

 

 

 

Meaning of Chrysanthemum in Sino-Korean Poetry in Korea

 

Lee, Dong-jae

 

Chrysanthemum is a flower representing fall and has not only beauty in exterior look but also a fixed image. In other words, it symbolizes a hermit with fidelity as a flower blooming in autumn frost. Afterwards, it has been a conventional symbol of morality that a classical scholar should have.

The symbolism of chrysanthemum as recluse and morality has made great effects on writers in Korea and they have reflected it in their poetry as follows.

First, they perceived chrysanthemum as ‘Sublimate of noble personality.’ Our ancestors affected by Confucianism grew chrysanthemum at home while living as a hermit in the nature when they left offices like Tau Yan Ming. It is because chrysanthemum has symbolized loyalty of loyal subjects and patriots to keep fidelity as showing its noble look in wild wind and frost. Additionally, writers not only grew chrysanthemum but also used it as a subject of their literature to express their npb;e fidelity and loyalty.

Second, they perceived it as ‘a medium of drinking and friendship.’The origin of drinking chrysanthemum wine beside chrysanthemum flowerbed in an autumn day tracks back to Iso(離騷). Afterwards, on Jungyangjeol (the ninthday of the ninth lunar month) people drink wine keeping wine container under chrysanthemum in Chinese cultural zone making it as an customary event called kukhwajun(菊花樽). Our ancestors drank chrysanthemum wine to appreciate chrysanthemum, interacted with friends appreciating chrysanthemum, appreciated chrysanthemum to deal with loneliness at the moon night, and wrote poems to express their feelings for chrysanthemum. Therefore, it is very difficult distinguish chrysanthemum symbolizing autumn from that as background of wind drinking.

Third, they perceived it as ‘a representative node order in autumn.’ In Chinese cultural zone, people usually express seasonal changes as changes in the nature such as flowers which are familiar with people. Chrysenthemum (Kukhwa in Korean) is the representative flower of fall calling the ninth lunar month as Kukwol, Kukryeong and Kukchu. Additionally, as autumn had images of harvest and being withering [death], poets and painters felt delight and hollowness together in fall. Therefore, the image of chrysanthemum has delight and hollowness at the same time according to the position and psychology of the speaker.

 

 

Keyword Chrysanthemum(菊花), Chrysanthemum poetry(菊花詩), TaoYanMing (도연명), recluse(隱逸), Chrysanthemum wine(菊花酒), autumn flower(가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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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帝 : 봄을 맡은 동쪽의 신(神)(?方之神) : 蒼帝

백제(白帝) : 가을을 맡아보는 서쪽의 신(神) (五方神?之一,??秋季)

적제(赤帝) : 여름을 맡는다는 남쪽의 신 (五方神?之一,管夏季的南方神?)

흑제(黑帝) : 오방신장(五方神將)의 하나. 겨울을 맡은 북쪽의 신(神)(五方神?之一,北方神)

 

육천 [ 六天 ]

①중국 고대 위서(緯書)에서 이야기하는 여섯 하늘. 천상계의 주재자인 유일 최고의 상제(上帝)와 춘(春)?하(夏)?토용(土用)?추(秋)?동(冬)의 오시(五時)의 생육 현상으로 드러나는 다섯 하늘을 합하여 육천이라고 하며, 각각 오행(五行), 오색(五色)과 연관하여 상제(上帝)?목제(木帝)?화제(火帝)?토제(土帝)?금제(金帝)?수제(水帝), 또는 상제?청제(靑帝)?적제(赤帝)?황제(黃帝)?백제(白帝)?흑제(黑帝)라고 부름.

또 각각의 하늘에 고유한 이름을 붙여, 청제(靑帝) 영위앙(靈威仰), 적제(赤帝) 적표노(赤?奴), 황제(黃帝) 함추뉴(含樞紐), 백제(白帝) 백초구(白招矩), 흑제(黑帝) 즙광기(汁光紀), 천황대제(天皇大帝) 요백보(耀魄寶)라고 했음.

②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욕계(欲界)의 여섯 하늘로, 사왕천(四王天)?도리천(?利天)?야마천(夜摩天)?도솔천(兜率天)?낙변화천(樂變化天)?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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