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팀 켈러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배운 신학교와 신학에 대해서 '여성안수에 대한 내용만 빼고는 다 동의가 된다."라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조용한 성품의 팀 켈러로서는 매우 강한 메시지를 담은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팀 켈러를 좋아해서 따라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여성안수를 하지 않는 개혁주의 신학교를 나왔지만, 여성 안수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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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성안수에 대한 논의들을 보면서 아쉬운 점은 개혁주의 신학교가 여성안수를 찬성하지 않는 것은 여성을 폄하해서도 아니고, 남성중심의 우월성을 가져서도 아니다. 개혁교회 안에서 정말 기쁘고 즐겁게 사역하는 많은 여성 사역자들도 많다. 그러나 마치 남성 우월주의처럼 몰아가는 것은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논쟁인듯 하다.
여성안수를 찬성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서 무엇을 말하는가하는 문제이고, 그렇다면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쪽에서 설득과 대화와 타협을 하려면 성경이 말하는 해석적 측면에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대화를 할 수 있어야 좋은 대안이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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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전제가 다르다는 것은 함께 인정하고, 서로가 100% 맞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으로 서로 대화하고 연구하며 구체적인 방안들을 논의할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쪽에서 말하는 내용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100% 근거라고 삼기 어려운 해석적 측면이 있다. 물론 여성안수를 찬성하지 않는 입장의 해석도 개인적으로 100%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여성안수를 이야기 하면서 나오는 구절중에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16장 7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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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6: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이 구절에서 등장하는 '유니아'가 여성인데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라는 표현을 유니아가 여성 사도 즉 여성 리더십이었다고 해석될 수 있다. 바울은 '사도' 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마다 사도들에게 좋게 여겨졌다기보다는 그룹의 구성원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안수를 찬성하지 않는 곳에서는 '사도들 가운데 유명한' 으로 사도들이 그들을 좋게 생각했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이 구절을 가지고 나는 여성안수를 반대하거나 찬성하는데 서로를 틀렸다고 주장할만큼 확실한 근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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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사기의 드보라를 통해 여성 리더십의 예를 말하기도 하지만, 사사기 문맥은 하강형 나선구조를 띄고 있기 때문에, 오른손에 장애가 있는 사람, 여자, 건달, 삼손 등으로 점점 그 당시 사람들이 없었다는 형편없는 시기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드러내주는 과정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드보라도 15장 드보라의 노래에서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자신이 여자인데 나올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스라엘중에 전쟁에 임할 남자들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한탄의 노래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구약의 여성리더십을 안수의 찬성 반대로 삼는 것도 서로 명확하게 근거로 내세울 수는 없었을 것같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여자는 잠잠하라..오직 복종할 것이요, 배우려거든..남편에게 물을지니.."라는 구절도 당시 문화적 상황에서 그 당시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해석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들도 있기 때문에 단순히 레위기의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지금 적용하지 않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는지는 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이것을 서로 맞다고 강하게 주장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입장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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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논의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디모데 전서 2장은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니리라"(딤전 2:11-12) 는 구절의 해석이 여성안수를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는 기준같은 구절이다.
또 이렇게 가르침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가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고 이어지기 때문에 단순히 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와 타락의 질서라는 근거로 여성의 가르침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우리를 어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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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안수를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이 나쁘기 때문도 아니고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남성중심의 우월한 지위를 누리고 싶기 때문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고 말고를 떠나서 성경이 말하는 바가 당시의 문화가 아니라 보편타당한 진리라면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디모데 전서 2장의 구절도 문자적으로 창조와 타락의 순서로 인해 하나님이 세운 질서라고 해석하게 되면 여성 안수를 찬성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 전서 구절의 '남자를 주관하는 것' 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성의 모든 가르침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고 '남자에 대한 지배권을 얻기 위해 가르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석할 여지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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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문법적으로 어떻게 해셕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법적 논쟁이 많지만, 사실 문법적 논쟁을 넘어서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상당히 엊갈리는 편이다. 이런 구절들에 대해 정말 100%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을 틀렸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복음의 겸손이 아닐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객관적이 될 수는 없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입장의 해석이 100% 진리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입장이라 하더라고 그것이 100% 성경적으로 맞다라고도 주장하기에는 다른 해석적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성안수를 찬성하지 않는 쪽에서는 찬성하는 사람들을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문화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으로 몰아가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찬성하는 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성경적 근거를 기초로 찬성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쪽에서도 그렇지 않는 보수 신학교와 사람들에 대해 무언가 잘못된 남성우월주의자처럼, 성경에 대해 잘 모르면서 고집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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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해석적 여지가 충분하고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사람의 판단의 몫일 것이다. 이것이 100% 진리라고 생각하기에는 명확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교리적 논쟁 중에서도 절대 타협하지 말아야 할 근거가 있는 교리가 있지만, 여성 안수에 대한 교리는 성경이 명확하게 근거를 밝히지 않기 때문에 논의해야 할 지점이 많은 것 같다.
나는 존 스토트의 의견이 100% 동의되지는 않지만 충분히 수용가능한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존 스토트는 BST 시리즈 <디모데 전서>에서 이 부분을 성경의 계시와 문화적 부분을 잘 조화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문자주의'와 '자유주의'의 양 극단을 배제하면서 '문화적 조바꿈'(Cultural Transposition) 이라는 해석적 틀을 취해야 하는데, 성경안에서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부분과 문화적으로 변화는 부분에 대한 구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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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어떤 부분이 변하지 않아야 하는 부분이고, 어떤 부분이 변해야 하는 부분인지에 대해 논의가 엇갈리면서 여성안수에 대한 찬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존 스토트는 디모데 전서에서 여성의 가르침에 대한 내용이 나오기 전에 등장하는 1) 남자들의 기도 (8절) 2) 여자들의 머리 장식 (9-10절) 3) 여자들의 복종(11~15절)을 함께 묶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여자들의 복종이라는 11-15절을 따로 떼어서 연구하게 되면 좀 더 문자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지만, 1) 남자들의 기도 2) 여자들의 장식의 문제와 함께 연결해서 해석하면 문자적으로 너무 치우치지 않지만 좀 더 문화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줄 수 있다. 1) 남자들은 거룩함과 사랑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보편타당한 원리이지만 성경대로 손을 반드시 들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문화적 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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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자들의 장식의 문제도 정숙함, 품위, 예의바름 과 선행으로 장식해야 하는 것은 보편타당한 진리이지만 의상, 머리 스타일, 보석등은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들일 것이다. 이 구절과 연결해서 여성의 공중예배에 대한 내용이 이어지기 때문에 '여자의 가르치지 않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보편타당한 진리는 조용함과 침묵이 아니라 권위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는 것인 것 같다.
그래서 조용한 것은 반드시 침묵으로 나타나야 하고, 권위를 발휘하지 않는 것이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 반드시 나타냐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존 스토트는 문화적 조바꿈의 원리에 따라 나타나는 구절이 바로 침묵과 가르침이고 보편타당한 원리는 배움 즉 순종과 주관하지 않는 것이라고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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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창조와 타락의 순서를 통해 여자들에게 말씀한 것은 창조의 질서 안에서 권에 대한 머리됨이지 가르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창조 질서를 지키면서도 가르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여성안수를 찬성하지 않는 쪽에서도 그것이 정말 100% 진리라면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신학교나 교단을 향해 이단이라고 정죄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서로 교류하는 이유는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근거가 100% 성경적이라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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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쪽에서도 문화적인 이유, 여성들의 피혜남성우월문화등으로 정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성경적인 근거를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내것이 맞다고 주장하기 보다는 여성 안수에 대한 구절들이 100% 성경적 확신이 없는 애매한 영역이 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타협안들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개혁주의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아무리 연구를 해봐도 여성안수를 찬성하지 않는 것이 100%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여성안수가 100% 성경적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말할 만한 근거도 부족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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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람들마다 자신의 주장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구절들이 많고,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이 다를 것이다. 좀 더 자신이 100% 맞다는 확신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타협안을 찾아가는 대화가 필요해 보이는 영역이다.
여성안수 뿐 아니라 방언에 대한 구절등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 지점들이 많은 것 같다. 그것을 무리하게 명확한 성경적 근거라고 주장하는 것도 우리를 어렵게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과 보수 신학에 대해서 무언가 문화적으로 성경적으로 폄하하는 주장들도 교만해보인다.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며 바른 해석들을 찾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좀 더 서로가 맞다는 주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여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의 이야기에 논의와 근거를 이해하는 귀가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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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북과 SNS이 우리를 지치게 하는 이유는 비난과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려고 상대방의 의견을 조롱하는 문화 때문이다. 나는 댓글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하나의 주장을 하면 내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마치 상대방을 비난하듯 댓글을 다는 것은 우리가 지양해야 할 문화인 것 같다. 세상의 방식은 그러하더라도 우리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SNS는 누군가를 비난하기에 좋은 소통의 창구임을 늘 명심하면서, 비판보다는 격려가 필요하고 누군가를 비판할 때는 미워하는 마음을 배제하는 것도 영성인 것 같다.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보수 주의자들을 향해 말하는 언어들은 동의가 되지 않고 예의가 없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입장도 마찬가지다. 격렬하게 교리적 논쟁으로 마치 사탄을 대하듯이 공격하는 것은 내가 바른 행동을 할지라도 그 의로움으로 형제를 정죄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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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서로를 향한 예의를 갖춘 대화가 필요하고 , 여성 안수의 문제는 성경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서로가 100% 맞다고 주장할 만큼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화 타협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 안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문제이지 외부적 압력에 의해서 곪아서 터지는 일들이 있어서는 안 될 것같다. 서로를 향해 열린 귀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첫댓글 서로 존중하는 입장에서 타협안을 찾아가는 대화가 필요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