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9. 주일예배설교
시편 119편 57~64절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과 친구가 되시라!
(나를 구원하시는 말씀, 시편 119편-ח편)
■ 우정은 사랑 못지않게 삶에 필요한 관계입니다. 흉금(胸襟)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힘든 일 중 하나가 마음속에 아픔이나 어려움이 쌓여갈 때입니다. 이럴 때는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그러므로 이런 답답함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행복합니다. 물론 털어놓는다고 문제가 다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살 것같은 마음이 드니 해결에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고 친구 숫자가 행복 지수를 좌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의 숫자와 행복의 지수는 상관이 크게 없습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흉금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행복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신앙 우정’이 필요하고, ‘신앙의 친구’가 중요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이유가 분명하다면, 우정을 나누고, 친구를 맺는 신앙의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잘 안내하겠죠?☺
■ 오늘 본문을 보면, 극명하게 대조적인 두 단어가 있습니다. 61절과 63절에 있습니다.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61절)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63절) 혹시 찾으셨습니까? ‘악인’과 ‘친구’입니다.
물론 악인도 친구가 있습니다. 악인들끼리 친구가 되니까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악인을 친구로 삼는 일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악은 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은 정상성에서 틀어져 나간 비정상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악인”과 “친구”는 극명하게 대조적인 개념입니다.
1.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말씀 나눔을 시작하면서 했던 질문에 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신앙 우정’이 필요하고, ‘신앙의 친구’가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악’ 또는 “악인” 때문입니다. 악은 신앙과 대척(對蹠) 개념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의와 선을 추구하는 삶이지만, 악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와 부도덕입니다.
이러한 악을 추구하는 자들과 그러한 악이 시편 기자의 고발처럼 신앙인들을 두루 얽고 있는 것입니다. 61절을 다시 볼까요?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악인들이 나를 줄로 얽어 매어도, 나는 주님의 법을 잊지 않습니다.”(새번역) “악인들의 올가미가 내 주위에 두루 있어도 나는 당신의 법을 잊지 아니하리이다.”(공동번역개정판) “Evil people may set a trap, but I obey your Law.”
이 상황은 악을 저지르는 분위기를 만드는 상황입니다. 악을 저지를 수밖에 없도록 옥죄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불의와 불법, 그리고 부도덕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악이 악인들입니다. 이러한 이들을 상대로 신앙의 지조(志操)를 지키고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입니다.
바로 이러한 현실이기에 ‘신앙 우정’, ‘신앙의 친구’가 필요합니다. 점점 촘촘하게 죄어오는 악을 견디고, 이기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우정이고 친구입니다. 신앙의 우정을 나누는 신앙의 친구로부터 악을 견디고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에 대항하고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신앙생활에서 신앙의 친구는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2. 그렇다면 우정을 나누고, 친구를 맺는 신앙의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어떤 기준으로 신앙의 친구를 사귀어야 할까요?
63절입니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나는 친구가 됩니다. 주님의 법도를 지키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나는 친구가 됩니다.”(새번역) “나는 당신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리고 당신 법을 지키는 자들과 한편이 되었습니다.”(공동번역개정판) “I choose as my friends everyone who worships you and follows your teachings.”
기준은 무엇인가요? ‘주님을 경외하는 것’과 ‘주님의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친구를 사귀는 기준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경외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법도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으로 신앙의 친구를 사귀고, 신앙 우정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인”의 악한 꾀에 걸리지 않습니다. 혹시 걸렸더라도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혼자서 할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악은 교묘하여 악인지 선인지 분간이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법도를 지키는 사람은, 악의 교묘함을 간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피할 능력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법도를 지키는 사람이 친구인 것은 다행이고 행복입니다.
■ 이렇게 신앙인의 우정은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법도/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돈독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과 상관없이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같은 종교를 신앙한다는 이유만으로 우정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를 다녀도, 같은 종교를 신앙해도 주님을 경외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외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태도는 백이면 백, 다 악에 얽매어있을 뿐만 아니라 악의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우정을 나눌 사이가 아니라 지도가 필요한 사이입니다.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말씀 지키며 사는 법을 배우는 지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우정’이란, 주님 경외의 자리에 함께 들어가고, 주님의 말씀 지키는 삶을 함께 살아가는 사이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이인 ‘신앙의 친구’는, 서로에게 몇 가지 신앙적 태도를 나누고 공유하는 것을 행복해해야 합니다.
1. ‘신앙의 친구’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을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57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59절입니다.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60절입니다.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사실 말씀을 지키며 사는 삶이 당연함을 알지만, 어떤 경우는 머뭇거리게 될 때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입니다. 이때 우정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더이상 지체하지 않고 신속하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용기를 북돋는 격려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 우정’입니다.
2. ‘신앙의 친구’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을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58절입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간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신앙 우정은 서로를 위한 기도에서 영적 시너지(synergy)를 냅니다. 혼자의 기도보다 둘의 기도가, 둘의 기도보다 열의 기도가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신앙의 친구끼리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악인이 밤새 묶은 악의 줄을 단박에 끊어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더욱 신나게 지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다운 ‘신앙 우정’입니다.
3. ‘신앙의 친구’는,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믿음과 용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61절과 62절입니다.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우리는 악에게 포박당했을 때, 좌절합니다. “이제 끝이구나. 여기까지가 내 신앙의 한계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인생의 밤중으로 들어갑니다. 이때 신앙의 친구의 신앙 우정이 발동해야 합니다. 주님의 법/주님의 말씀을 함께 기억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따라 행하시고 베푸셨던 의로우신 심판과 은혜로우신 선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신앙 우정’입니다.
4. ‘신앙의 친구’는, 온 땅에 충만하신 ‘만물의 주님이심’에 대해 찬송하고 교제해야 합니다. 64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온 땅의 주인이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인생의 밤중이 오면 온 땅의 주인이 밤중인 듯, 고통인 듯, 그런 생각에 빠져버립니다. 절망과 좌절의 시소(seesaw)를 탑니다. 이때 신앙의 친구의 신앙 우정이 필요합니다. 온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다시 붙잡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함께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함께 베푸신 은혜를 갖고 교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찬송 교제는 짓눌리던 영혼을 해방시키고 자유케 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찬송은 유행가가 따라올 수 없는 하늘의 힘입니다. 찬송은 클래식 음악이 넘볼 수 없는 하늘의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을 늘 가까이하시고, 찬송으로 함께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늘의 힘,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를 신앙의 친구와 함께 나눌 때 그 시너지는 배가 되고, 열 배 스무 배가 됩니다. 참으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신앙 우정’입니다.
■ 분명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주님 한 분만으로라는 말을 오해하면, 극단적 이기주의 신앙을 갖게 됩니다. 자기만 옳고, 자기만 신앙인인 것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이 아닌 신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신앙이 있다고 신앙의 상태가 늘 양호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 굴곡이 있는 것처럼 신앙에도 굴곡(屈曲)을 겪습니다. 신앙이 상승곡선을 그릴 때가 있지만, 하강곡선일 때도 있습니다. 바로 이때 매우 필요한 것이 신앙의 친구입니다. 신앙의 친구와 나누는 신앙 우정을 통해 신앙도 삶도 다시 안정과 안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혼자서만 신앙과 삶의 문제, 밤중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함께 할 신앙 우정을 만드십시오, 신앙의 친구를 사귀십시오.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과 친구가 되십시오. 그래서 이 하늘 나그네의 삶을 서로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끝날 주님의 품에 당당하게 안겼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