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균이는 카메라 기억의 명수입니다. 가령 슈퍼마켓가서 장을 봐오면 품목을 거의 정확히 기억하고, 어디에 두었는지 정확히 봐두며, 사온 품목을 다 소진할 때까지 재고를 머리 속에서 헤아립니다. 주로 식품에 국한해서 보이는 특징이지만 상당히 정확해서 언제 저걸 보았을까 의아할 때도 많습니다. 분명히 사가지고 왔는데 예상한 장소에서 보이질 않으면 뒤지고 또 뒤져가면서 찾으려 합니다.
완이도 카메라기억에 능한 편이지만 아직 전정회복이라는 과제가 풀리지 않았기에 자기가 당장 먹을 수 있는 몇 가지 품목들, 마이쮸 초코렛 요쿠르트 요플레 탄산음료 등에만 카메라기억을 가동시킵니다. 특히 이런 품목들을 특정공간에서 발견했을 때, 그 공간을 집중 공략하는 집요함이 있습니다.
냉장고는 완이의 빈번한 공략대상이 되곤해서 잠금장치가 필수입니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켜보는 사람만 없으면 눈에 띄는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마구 끄집어내곤 했습니다. 가령 요쿠르트를 공략했다면 하나씩 먹는 게 아니라 한 개를 제대로 다 먹지도 않았으면서 벌써 두번째 것을 까고있으며 세번째것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져서 내용물이 쏟아져 있기도 합니다.
이런 비체계적 행동은 백번 지적하고 혼내도 늘 아무렇지 않게 반복되곤 합니다. 그래서 자폐증이란 참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걸 왜 못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구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쩔 수 없이 강제제한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눈물겹지만 아침에 눈뜨자마자 뒤져서 가져온 마이쮸나 과자는 압류대상이고 요플레는 보충제 희석용으로 그 용도로만 각인시키며 (그럼에도 잠시 방심한 틈에 몇 개를 한꺼번에 먹어치우기도 합니다) 식사 전에는 먹을 것 찾아 다니는 행위조차 억제시키고 있습니다. 완이에게는 고달픈 일상이지만 꼭 필요한 작업이고 카메라기억을 인지기억으로 바꾸어가려면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 다분합니다.
오늘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2016년 분당 동원동 학교 운영시절 친자매들처럼 친분이 두터웠던 학부모들이 모두 아이들을 데리고 제주도에 와있다는 것입니다. 카페를 통해 제가 제주도에 있다는 걸 익히 아는지라 얼굴보러온다고 연락이 왔지만 제가 한가로이 수다떨 입장이 못되서 서귀포 '치유의 숲'에서 잠깐 보기로 했습니다.
훌쩍 커버린 아이들, 너무나 반가운 우리의 맘들. 특히 소식이 많이 궁금했던 윤 남매의 엄마를 보자 눈물날듯이 반가왔습니다. 참 많이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제주도 참 좋은 곳입니다.
반가운 안부묻기도 잠시, 다음을 기약하며 작별을 하고 아이들 데리고 치유의 숲 등산을 하는데... 택이의 보따리에 있어야 하는 안경이 차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도 제가 모른 척 등산을 시작했는데, 택이녀석 발걸음이 영 무겁고 진전이 꽤 느립니다. 아니나 다를까 안경타령 시작. 그 잡다한 물건으로 가득한 보따리 속에서 안경이 없는 걸 어찌 알았을까.
딱히 보따리를 들여다 본 것도 아닌데 신기하고 신기할 따름입니다. 카메라 기억은 장소와 사물의 위치 결합기억입니다. 특정 장면을 논리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찍듯 특정 목격장면을 사진처럼 찍어서 기억하는 것입니다.
카메라기억의 최고위는 코끼리입니다. 코끼리는 좌우 안구가동의 각도가 좁아서 앞만 보는 시각특징이 있습니다. 밝은 빛에는 약하지만 멀리보는 기능은 상당히 발달해서 먹이와 물을 찾아 수 백키로를 갔다가 정확히 되돌아 오기도 합니다.
택이 시각처리가 코끼리를 참 많이 닮아있습니다. 좌우 주변시각을 잘 가동하지 못하고 그 복합한 난삽물품 속에서 빠진 부분을 정확히 집어내는 것이 보통사람 눈의 기능은 절대 아닙니다. 물품이 아무리 하잖은 것이라도 추가되면 그 추가된 것까지 모두 카메라를 찍어서 저장소로 보내는 능력. 저장소의 용량을 저장강박을 통해 무한대로 늘려놓은 것이 아닐까. 작은 종이조각 하나까지 기억하는 이 카메라기억. 어서 인지기억으로 전환해야 저장강박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길을 걸으며 스치게 되는 수 많은 사람들을 기억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 중에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우연히 만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며, 혹시라도 나의 이상형을 보게되었다면 잠시 설레었던 그 감정을 기억하면 됩니다. 기억이란 이렇게 끊임없는 선택작업입니다.
그래서 오늘 문득 들었던 생각이 카메라기억과 저장강박의 연관성입니다. 태균이는 버릇처럼 카메라 기억을 여전히 하고 있지만 나름 절반은 인지적 기억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인지기억은 쓸데없는 것은 머리 속 기억저장소로 결코 보내지 않습니다. 완이의 카메라 기억은 안타깝지만 몇몇 탐닉거리에 국한되어 있어 사물에 대한 인식 확대가 참으로 요원합니다.
택이는 코끼리 기억법하고 참으로 닮아있는 것의 또다른 측면은 카메라 기억 외에 무한대의 기억저장소입니다. 바로 이 무한대의 기억저장소가 저장강박을 뒷받침하기에 그 품목을 꿰뚫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택이의 안경타령이 점점 심해져서 다시 차로 돌아가야 하는 때에, 발걸음이 빨라진 택이를 따라 돌아가는 길... 막 차에 도착했을 때 후두룩 후두룩 갑자기 굵은 소나기가 퍼붓습니다. 오메, 택이덕에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습니다. 오늘 못 끝낸 치유의 숲은 조만간 다시 시도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돌아오자마자 공사관련 의논도 해야되고, 아이들 저녁도 해먹여야 하고 정신없이 보내고 한가해질 무렵에 받은 택이맘의 카톡내용... 택이가 갑자기 한글베끼기를 시작했다는 기적같은 이야기, 아침에 늦어지는 선생님을 기다리며 제 차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고... 기적은 존재할겁니다, 분명히. 택이가 인지기억들을 받아들일 때 거짓말처럼 저장강박에서 놓여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첫댓글 택이씨 글씨도 이쁘게 씁니다. 매일 소소한 기적이 일며 감사를 알게 합니다. 완이가 고쳐지면 그것도 엄청난 일이 되네요. 대표님 더위에 무탈하시기 바랍니다.🙏🍒
아, 이게 이렇게 생각이 가능하군요. 저는 늘 문제가 된다고만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 연결이 되어지니 대표님의 관찰력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
카메라 기억이란 용어는 처음들어 보네요
우리 아이도 무엇이든 한번 보면 기억하고 심지어 책꽂이에 많은책들 중에도 중간에 하나만 비어도 금방 알고ᆢ
그리고 모든 것을 한번 눈으로 스캔 하면 머리 속에 기억 하더라고요
이제 서야 지인을 통해 카페를 알았지만 많은것을 알게 되어 감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