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유법
내가 근무하는 서울 중앙여고 학생들은 나보고 “고릴라같이 생겼다.”고 말하곤 해요. 학생들이 나를 표현하려고 나와 비슷하게 생긴 동물을 빌려 왔습니다. 이럴 때 원래 표현하려는 대상(김권섭)을 원관념이라고 하고, 그 원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빌려 오는 대상(고릴라)을 보조관념이라고 합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처럼’, ‘인 듯’, ‘인 양’, ‘~같이’ 등의 매개어로 연결 짓는 비유법을 직유법이라고 합니다. 직접 비유한다는 뜻이지요. 정지용은 직유법을 애용한 시인입니다. 그는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바다가 이리떼처럼 짖으며 온다”, “하늘이 함폭 나려앉어 / 큰악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와 같이 무생물인 원관념에 동물인 보조관념을 연결함으로써 동적인 이미지를 그려냈습니다. 여러분에게 널리 알려진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도 직유법이 돋보입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르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하지만 ‘~한 듯’ 이라는 말이 나타난다고 해서 모두 직유법은 아닙니다.
지혜는 병이 다 나은 듯햇다.
이 문장에서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를 설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은 직유법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추측을 담은 문장입니다. 직유법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분명히 나타나 있고, 그들이 ‘인 듯’, ‘처럼’, ‘같이’ 등의 매개어로 연결되어 있는 수사법이라고 기억하세요.
32 통사 구조 반복
‘통사’ 를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통사(統辭)
생각이나 감정을 말로 표현할 때 완결된 내용을 나타내는 최소의 단위. 주어와 서술어를 갖추고 있는 것이 원칙이나 때로 이런 것이 생략될 수도 있다. 문장의 끝에‘.’, ‘?’, ‘!’ 따위의 마침표를 찍는다. ‘철수는 몇 살이니?’, ‘세살.’, ‘정말?’ 따위이다.
통사는 단어가 아니라 문장 단위를 말합니다. 즉 ‘통사구조 = 문장 구조’ 인 셈입니다. 예를 들어, 천상병의「귀천」은 3연으로 되어 있는데, 각 연의 첫 행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가 반복됩니다. 이런 것을 두고 ‘동일한 통사 구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33 함축적 의미
“내 짝 길동이는 돼지예요.”
학생이 옆 친구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했다고 가정해 봐요. ‘돼지’ 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멧돼짓과의 포유동물, 몸무게는 200 ~ 250킬로그램이며, 다리와 꼬리가 짧고 주둥이가 삐죽하다. 잡식성으로 온순하며 건강하다. 임신4개월 만에 8~15마리의 새끼를 낳는다.”고 나와 있어요. 이런 의미를 지시적 의미, 사전적 의미, 객관적 의미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 어머니가 저 말을 들으시고는 ‘아, 우리 아이 짝은 몸무게가 200킬로그램이 넘고, 다리와 꼬리가 짧겠구나.’하고 생각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길동이는 매우 비만한가보다.’ 이렇게 판단하겠지요. 아니면 ‘길동이가 좀 미련한 사람인가 보다.’ 고 짐작할 것입니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속성과 관련된 의미를 비유적 의미, 주관적 의미, 혹은 함축적 의미라고 합니다. 시어는 대체로 함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34 환유*제유
1_환유
‘환유’ (換喩 metonymy)는 meta(change, 변화)와 onoma(name, 이름)의 합성어인데, 사물의 이름이 그 사물과 관련된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하기 위하여 전이되는 방법입니다.
은유법이 유추 작용을 통하여 유사성을 찾아내는 수사법이라면, 환유법은 인접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인접성은 ‘속성’, ‘특성’ 과도 밀접히 연관되는 개념입니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를 읽어 볼까요.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4월”은 4・19 혁명을, “한라에서 백두까지”는 우리나라를 의미합니다. 전자는 시간적으로, 후자는 공간적으로 인접성을 지녔습니다. 이런 것을 환유라고 합니다. “청와대가 발표했다.”, “할리우드가 발칵 뒤집혔다.”는 표현도 환유이고요.
2_제유
‘제유’(提喩, Synecdoche)의 어원은 Synekdechesthai(함께 받아들이다)입니다. 제유는 어떤 것의 일부분으로 그 전체를 대신하는 표현 방법입니다. 제유법 또한 환유법과 마찬가지로, 인접성이나 논리적 연관성에 기초하여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유법이나 제유법은 의미가 같은 의미 영역이나 개념 안에서 전이됩니다.
몇 년 전 아시아에 몰아닥친 금융위기 이후 해외 두뇌 유출이 심각하다. 그는 그 일에 손톱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 데 의지하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느니라. 사람은 밥에 의지하여 그 생성(生成)을 돕고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여 그 조화(造花)를 나타내는 것이니라. (최시형, 「천지부모」)
신체의 일부분인 “두뇌”로 ‘사람’을, “밥 한 그릇”으로 ‘음식’을 대신햇네요. 이런 것이 제유법입니다.
35 활유법*의인법
‘활유법’은 무생물을 생물인 것처럼, 감정이 없는 것을 감정이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수사법입니다. ‘의인법’은 무생물이나 동물에 인간적 속성을 부여하는 표현 방법입니다. 의인법과 활유법의 차이는 인간적인 특성이 나타났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습니다. 활유법에서는 반드시 인간적인 속성을 부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 작품을 함께 볼까요.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로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김광섭,「산」)
산이 사람이 사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산봉우리로 올라가는 일이 일상 세계에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문학적 수사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것은 산에게 인간적 속성을 부여한 표현입니다. 즉 의인법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드는 게 인간만이 지닌 특성은 아닙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면 어느 것이나 다 그런 행동을 합니다. 이처럼 무생물인 산을 생물에 견주는 표현 방법이 활유법입니다.
의인화되는 대상이 사물에만 제한되지는 않습니다. 추상화된 관념도 의인화의 대상이 됩니다. 조지훈의 「병에게」에서는 병을 “자네”라고 부르며 의인화했고, 김남조는「봄에게」에서 봄을 해마다 빈손으로만 다녀가지만 참 어여쁘게도 생긴 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의인법을 활유법의 한 부분으로 보기도 합니다.
36 후렴, 조흥구, 여음
이 단어들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으로 표시한 내용은 내가 간단히 덧붙인 설명입니다.)
✔후렴(後斂)
①시(詩)의 각 절 끝에 되풀이되는 같은 시구.
②노래 곡조 끝에 붙여 같은 가락으로 되풀이하여 부르는 짧은 몇 마디의 가사.
「청산별곡」의 “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처럼 각 연의 마지막에 사용됩니다.
✔조흥구(助興句)
시에서 흥을 돋우기 위하여 운율 조성의 보조 수법으로 넣는 구. 우리나라의 민요, 고려가요, 별곡체 시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음악적 선율을 말로 옮겨 놓음으로써 시의 가요적 성격을 뚜렷이 나타낸다.
「가시리」의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는”에서 “나는”처럼 흥을 돋우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
✔여음(餘音)
국악 가곡에서 기악으로만 연주하는 전주곡이나 후주곡.
사전적인 의미는 위와 같지만, 이들 단어는 서로 뒤섞여 쓰이기도 합니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말은 ‘후렴’입니다. 국어교육학대사전에서 후렴으 ㄹ설명한 내용을 인용합니다. 내용이 다소 어려울지 모르지만, 차근차근 읽어 보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민요나 시에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내용적․형식적 요소로서, 일반적으로는 반복되는 요소가 각 절의 마지막에 놓이는 것이며, 그러한 요소가 없어도 시상의 전개에 지장을 주지 않는 여음(餘音)이라 불리는 것들 중에서 행이나 연의 끝에 있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후렴의 형식은 시대와 작품에 따라 매우 다양한데, 고대의 가요나 민요에서 특히 발달하였다. 집단적으로 부르는 노래의 경우, 노래를 혼자서 먹이는 선창자(先唱者)의 선창에 이어서 다중의 후창에서는 같은 내용이나 리듬을 함께 부르기 때문에 후렴은 필수적이다. 근대에 오면서 특히 시의 경우 많이 약화되어 형식상으로 약간의 기능을 나타낼 뿐이다.
후렴은 음성 상징 효과의 의미로 시가의 분위기를 돋우고, 가창이나 음영(吟詠)을 더욱 흥겹게 하는 기능을 지닌다. 후렴에는 의미는 없고 음성 상징적 효과만 지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옹헤야”<보리타작 노래> 등의 가창적 후렴 -「가시리」의 “위 증즐가 대평셩대”-가있고, 이와는 달리 의미 있는 말로만 된 ‘조사적 후렴’-「정석가」의 “유덕하신 님을 여의겠습니다.” - 으로 나뉘어 진다.
고려가요에는 향가와는 달리 후렴이 발달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경기체가 「한림별곡」의 “긔 엇더하니앗고”가 대표적인 예이다. 「동동」의 후렴 “아으 動動다리”는 정확히 장마다 끝에 정형적으로 반복된다. 그 외에도 「서경별곡」, 「청산별곡」, 「가시리」, 「쌍화점」, 「정읍사」 등에 나타난다. 이러한 노래에서 후렴과 반복음의 관용은 민요적 상식이며, 성인 남성들의 타령이나 노동요에서는 노래의 장 끝에 반복된다. 민요의 후렴 형식이 고려 시대의 속요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통해 고려 속요가 민요의 정착임을 짐작케 해준다. 고려의 별곡에서는 이 후렴구를 여음구(餘音句) 또는 악기의 구음(口音)을 음사(音寫)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후렴은 시가의 형식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준거가 된다. 아울러 시가가 민요와 상관성을 지닌다는 점을 암시한다. 또한 현대시에 나타나는 후렴을 통해서 시가의 전통을 이해하는 단서로 삼을 수도 있다.
37 「귀천」에 나타난 화자의 태도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천상병, 「귀천」)
여느 문학 작품과 마찬가지로 「귀천」이라는 작품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평자에 따라서는 이 작품에서 말하는 “아름다웠더라고”를 반어로 봅니다. 즉 천상병 시인의 삶을 생각하며 시를 읽을 때 시인이 이 세상을 아름답다고 말할 리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천상병 시인은 죄도 없이 붙잡혀 가서 모진 고문을 당했고, 그 때문에 행려병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시인은 이 고난을 「그날은」에서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뜨거운 아이론(다리미) 밑에서 쫘악 펴지는 와이셔츠같이 심신이 철저하게 짓밟히고 말았던 것이지요. 이 사실을 근거로 해서 「귀천」에 접근하는 사람들은 이 작품이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고 이해합니다. 남달리 불행한 삶 속에서 고통을 당한 사람이 이 세상을 두고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닭이 없으니까요. 이렇게 본다면 이 표현은 반어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를 반어가 아니라고 해석합니다. 그들은 천상병이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는, 남달리 높은 정신적 경지에 오른 시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는 「소릉조」에서 남들은 다 고향을 찾아가는 추석에 자기는 고향인 부산에 가지 못한다고 고백하면서,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저승에도 갈 수 없다고 노래하는 시인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현실에 대한 분노, 적개심을 드러낼 법도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생각느니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이냐고 물을 뿐입니다. 그의 시인다운 면모가 현실에 대하 ㄴ비관보다는 현실적 고통을 극복해 낸 사유의 깊이에 있다고 평가한다면, 「귀천」을 반어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 천상병 시인이 쓴 다른 작품에서도 삶의 고통을 뛰어넘은 모습이 자주 발견된다는 근거가 이 견해를 뒷받침합니다.
시 작품을 설명한 글을 읽을 때는 필자가 어떤 관점에서 작품에 접근하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38 「문의 마을에 가서」 해설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가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을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고은, 「문의 마을에 가서」)
이 작품은 아무리 읽어도 시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하소연 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나도 고은 시인이 쓴 「이상 평전」, 「한용운 평전」을 읽으면서 내용을 이해하느라 고생한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시도 차근차근 읽어보면 시인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게 됩니다. 되도록 알기 쉽게 이 시를 해설해 보겠습니다.
이 작품은 고은 시인이 동료 시인 신동문의 모친 장례식에 참가했던 일을 계기로 창작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했다면 이 작품의 제목은 ‘문의 마을에 가서 (죽음을 보았다)’는 정도로 해석됩니다.
1연은 장례식에 가느라고 문의 마을에 간 경험을 표현했습니다. 문의 마을까지 이어진 “길”은 그 곳에서 다시 몇 갈래로 갈라져서 계속 뻗어 나갑니다. 그런데 이 길은 한 인간의 죽음을 경험하는 길이므로 적막한 길입니다. 또한 죽음의 길이기에 이 세상과 단절된 상태입니다. 이것을 서정적 자아는 “귀를 닫”았다고 말합니다. 그런 채로 이 세상의 길은 저 세상을 향해 뻗어 있습니다. “추운 쪽으로 뻗는”다는 표현이 이를 나타냅니다. 이 길을 우리가 살아온 삶의 과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걸어가는 존재니까요.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면 유족들은 고인의 유품을 태우는 의식을 치릅니다. 유품이 타면서 불길이 오르고, 그 재가 바람을 타고 고인이 살았던 마을 여기저기로 날립니다. 화자는 팔짱을 낀 채로 그것을 바라보면서 삶과 죽음이 가깝다는 인식에 닿습니다. 평소에는 잊고 지냈지만, 장례 절차를 치르는 동안 이승과 저승이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것입니다. 눈이 온 세상을 덮는 걸 바라보면서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고 묻는 음성은 그래서 더더욱 차분하고 진지하게 들립니다.
2연을 볼까요.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 한 죽음을 받는 것”은 죽음과 삶이 하나라는 인식의 표현입니다. 고인(古人)은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끝까지 사절하다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인기척을 듣고”는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였으므로 그는 저승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겠지요. 그렇게 몇 걸음을 가다가 “저만큼 가서 뒤돌아 봅”니다. 이런 모습이 실제로 눈에 보이지는 않아요. 서정적 자아는 마음의 눈으로, 상상의 힘으로 그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경험이 서정적 자아의 내면에 삶의 경건함을 심어 줍니다. 삶과 죽음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인식한 서정적 자아는 엄숙하고 겸허한 내면세계를 간직합니다. 자기를 비롯한 “모든 것은 낮”음을 깨닫는 것이지요. 이제 장례 절차는 모두 끝났습니다. 고인은 저승으로 떠났고,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거리가 놓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는 닿지 않습니다. 눈이 내리는 겨울날, 눈은 죽음을 덮고 서정적 자아를 덮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마저 덮어 버립니다. 화자는 문의 마을에 가서 죽음을 보았고, 삶과 죽음이 하나임을 체득한 사람입니다. 나는 이 작품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39 「벼」의 ‘햇살’과 ‘바람’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이성부, 「벼」)
학생들은 이 시를 두고 1연에 나오는 “햇살”이 긍정적인 시어인가 부정적인 시어인가를 물어 옵니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햇살’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햇살 화창할수록’이라고 했다면 긍정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하지만 ‘따갑다’라고 표현한 데 주목해야 합니다. 따갑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상태가 아닙니다. “햇살”이 ‘시련’을 의미한다고 볼 만한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햇살”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아야 시상의 흐름이 한결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즉 “벼”는 힘겨움이 닥쳐올수록 자기를 아끼고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서정적 자아는 “벼”에게서 이런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2연에서 “벼”를 “백성”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는 민중이 지닌 덕성을 예찬하는 사람입니다.
이번에는 3연에 나타난 “벼”를 주의 깊게 들여다볼까요. 벼는 어질고 현명한 존재입니다. 맑은 하늘을 보면서 서러움을 달랠 줄도 알고 불어오는 바람에 노여움을 삭일 줄도 압니다. 이를테면 자연의 질서를 따르면서 자기감정을 통제할 줄 아는 현명함, 그리고 분노를 참을 줄 아는 덕성을 모두 갖춘 존재가 “벼”입니다. 그러면서도 “벼”는 자기의 가슴에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고 있음을 잊지 않습니다.
문학 작품에서 ‘바람’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바람”은 일반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읽힙니다. 시행 배열을 눈여겨보면 이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설명하려는 뜻을 정확하게 나타내기 위해 3연을 산문처럼 바꾸어 보겠습니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벼는)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문장 구조로 보아 시어 “가을 하늘”과 “바람”은 동일한 기능을 합니다. 즉 “가을 하늘”과 “바람”은 “벼”가 스스로를 제어하도록 만드는 소재입니다. 그러므로 “바람”은 “가을 하늘”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대상은 아닙니다. ‘햇살’과 ‘바람’이 지닌 관습적인 의미를 극복한 것이 이 작품이 지닌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40 「산문에 기대어」 해설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을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 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 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송수권, 「산문에 기대어」)
이 작품은 3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분량으로 보면 1연보다 2연이, 2연보다 3연이 적습니다. 그리고 각 연은 누이에게 묻는 형식입니다. 1연과 달리 2연과 3연에는 그 질문이 도치되어 나타납니다. 마지막 연에는 “보는가” 대신에 “아는가”라고 물었고요. 이 시를 지배하는 것이 이 질문들입니다. 아래의 표는 이런 구조를 정리한 것입니다.
연 | 질 문 형 태 | 대 상 물 | 이미지 구 분 | 시간 |
1연 | 살아서 보는가 |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 | 죽음 | 과거 |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 | 재생 | 과거 | ||
고뇌의 말씀들 반짝여 오던 것 | 재생 | 과거 | ||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 | 재생 | 과거 | ||
산다화 건네이던 것 | 재생 | 과거 | ||
2연 | 살아서 보는가 도치법 |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 | 죽음 | 현재 |
누이와 내가 만나는 것 | 재생 | 현재 | ||
3연 | 아는가 도치법 | 눈썹 두어 낱이 이 못물 속에 비쳐옴 | 재생 | 현재 |
서정적 자아는 “누이”를 잃은 이입니다. 그는 죽은 누이를 부르는 것을 시상의 실마리로 삼았습니다. 살아 있는 화자가 죽은 누이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화자가 대화 형식으로 시상으로 전개함으로써 누이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을 효과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작품에는 “눈썹”이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눈썹은 사람의 인상을 좌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눈썹은 사람이 죽은 후에 가장 마지막까지 썩지 않고 남는 신체 부분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사실을 연결 지어 본다면, “눈썹”은 누이가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추억’을 의미합니다.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은 강물에 비친 가을 산을 묘사한 표현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강의 수면에 비친 산 그림자는 마치 눈썹처럼 생겼겠지요. 그러고 보니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습도 눈썹을 닮았습니다. 화자는 이 산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과거를 추억하고 있습니다.
1연에서는 누이가 살았을 적 자기와 함께 본 적 있는 추억을 되살려 냅니다. 과거 회상을 의미하는 ‘-던’을 반복한 것이 이를 말해 줍니다. 1연에 보이는 나머지 네 개의 질문은 이런 추억을 여러 가지로 변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소재를 모두 역동적인 심상으로 제시함으로써 죽음이 아니라 재생이나 부활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2연은 1연과 달리 누이에게 현재의 정황을 묻고 있습니다. 기러기가 강물에 내려놓고 간 눈썹(추억)은 지금도 내 눈앞을 떠돌고 있습니다. 즉 지금도 예전처럼 가을 산 그림자가 강물 위에 비칩니다. 화자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누이를 회상합니다. 조촐한 술잔을 마련해 놓고, 혹은 누이의 제사를 마친 후에 술잔을 마주한 채로 화자는 누이에게 말을 건넵니다. 이것은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데에 그치지 않습니다. 화자는 지금 누이와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잎새에 튀는 물방울같이 짧은 만남이지만, 그 만남은 아름답습니다. “누이”는 객관적으로는 죽었지만, 주관적으로는 화자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3연은 이런 사실을 집약해서 보여 줍니다.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서 비쳐 옴”을 누이도 알고 있는가 물었습니다. 여기서 ‘아느냐’는 것은 ‘추억하느냐’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즉 살아 있는 내가 죽은 누이를 회상하는 것처럼, 누이도 지금 나를 떠올리고 있는가 묻는 것입니다. 이 물음이 던지는 짙디 짙은 그리움이 독자의 가슴을 울립니다.
산문(山門)은 절의 문입니다. 제목에 산문이 들어 있다고 해서 이 작품을 불교적 의미로 이해할 당위성은 없습니다. 또 불교적인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불교와 관련이 깊은 단어가 사용된 데다가 누이의 죽음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이 작품은 흔히 「제망매가」와 비교됩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물’이 눈물, 강물, 못물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물은 죽음과 재생을 상징하는 원형적 심상입니다. 시상의 흐름으로 보아 눈물은 죽음을, 강물은 죽음과 재생을, 못물은 재생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물’은 이 작품의 주제를 형상화하는 데 더없이 적합한 소재였다고 생각합니다.
41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 나타난 화자의 태도는?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이 작품의 서정적 자아는 한평생을 노동자로 살아 온 사람입니다. 그는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는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강가에 나와 삽자루를 씻고, 담배를 피웁니다. 그리고 강물을 바라다봅니다. 그는 흘러가는 강물을 자기가 살아온 인생 여정과 동일시합니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 우리가 저와 같아서”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인생도 강물이 흐르듯 흘러왔으며, 강가에 황혼이 찾아드는 것처럼 이제 자신의 삶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음을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노동자가 등장하는 시는 부당한 현실에 분노하는 목소리를 담은 작품이 많았습니다. 이 시는 그런 일반적인 경향과 달리 자기를 성찰하는 자세를 담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널리 읽힙니다. 이 작품은 “스스로 깊어가는 강”물을 바라다보는 그윽한 시선이 매력적입니다.
그런데 화자는 그 강물을 “샛강 바다 썩은 물”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강물은 앞에 나오는 강물과 다소 이미지가 다릅니다. ‘썩다’라는 수식어가 지니는 의미 때문입니다.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 샛강 바닥 썩은 물에 / 달이 뜨는구나.” 이 표현을 두고 어떤 독자는 긍정적인 의미로, 또 다른 독자는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참고서마다 해설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단지 “샛강 바닥 썩은 물”만 떼어 놓고 본다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샛강 바닥 썩은 물”은 서정적 자아가 살아온, 혹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삶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그냥 물이 아니고 “바닥 썩은 물”이라고 묘사한 점을 주의해야 하겠어요. 정희성 시인은 노동자인 서정적 자아의 삶이 비극적이고 소외된 삶임을, 그가 어두운 현실을 살아왔음을 나타내려고 이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반면에 “샛강 바닥 썩은 물에 / 달이 뜨는구나” 까지 묶어서 이해할 때면 다소 긍정적인 이미지로 느껴집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시는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지만 이 어두운 분위기에 완전히 함몰되지는 않습니다. 비록 썩은 강물이긴 하지만 거기에 달이 뜹니다. 이 구절은, 희미하게나마 서정적 자아가 품고 있는 희망의 빛을 보여 줍니다. 만약 달을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파악하면 “썩은 물에 달이” 뜬다는 표현은 조금도 새롭지 않습니다. 따라서 시가 전체적으로 느슨해지고, 응축된 시상이 한꺼번에 무너져 버립니다. 시인들이 가장 꺼리는 결과가 이것입니다. 너무도 뻔한 표현을 완성하려고 시를 쓰는 시인은 없으니까요, 특히 이 시를 지은 정희성 시인은 작품 한 편 한 편, 단어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손질하는 시인으로 유명합니다.
“우리가 저와 같아서”의 “저”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저”는 달이거나 강물이겠지요. 그런데 “저와 같아서 /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라는 표현으로 보아 “저”는 ‘달’로 이해됩니다. 달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저절로 뜨고 집니다.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달은 뜨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서정적 자아는 자기가 달과 같아서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고 끝을 맺습니다. 가난한 마을로 돌아가는 일을 고달프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때가 되면 달이 떠오른듯이, 서정적 자아가 감내해야 할, 혹은 감내해 온 일 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런 견해에서 보는 사람들 역시 “달”을 긍정적인 의미로 파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