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3월28일 주님 만찬 성 목요일
[청주] 사랑은 지치지 않습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탈출 12, 1 - 8. 11 - 14
† 독서 : 1코린 11, 23 - 26
† 복음 : 요한 13, 1 - 15
오늘 전례
▦ 오늘은 파스카 성삼일의 첫날로,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이루어 주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다가왔음을 아시고 제자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또한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시며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몸과 피를 그들에게 내어 주십니다. 주님의 극진한
사랑이 드러난 주님의 만찬을 오늘 다시 기념하며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합시다.
주님 만찬 저녁 미사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이날은 교우가 참석하지 않는 미사를
드릴 수 없다. 적당한 저녁 시간에, 사제와 봉사자들을 포함한
지역 공동체 전체가 참석한 가운데 주님 만찬 저녁 미사를
드린다. 성유 축성 미사를 공동으로 집전하였거나 교우들의
형편 때문에 이미 미사를 집전한 사제들도 이 저녁 미사를
다시 공동으로 집전할 수 있다. 사목의 이유로 필요하면
교구장은 성당이나 경당에서 저녁때에 미사를 또 한 번
드리도록 허락할 수 있다. 저녁 미사에 참여할 수 없는
신자들만을 위하여 아침 미사 집전도 허락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특수 미사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드릴 수 없으며 주님
만찬 저녁 미사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신자들은
미사 중에만 영성체를 할 수 있고, 병자들은 아무 때라도 할
수 있다.
★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파스카 만찬’을 명령하신다.
곧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어린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날 밤에 그것을 먹도록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문설주의 피를 하나의 표지로 삼아 이집트의
맏아들과 맏배를 치시어 당신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실 것이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예식 때에 보여
주셨던 ‘성체성사의 제정’을 기억하고 이 예식을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순간까지 행하기를 촉구한다(제2독서).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신 수난 전날 저녁에
당신의 제자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그 안에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유다도 있었고,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을 의심한 베드로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모두를
예외 없이 사랑하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위하여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발이란 사람의 신체 가운데 가장 더러운
부분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는 것은 희생적이며 겸손한 사랑으로 그들 안에 있는
가장 더러운 죄악까지도 깨끗이 치우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처음에는 자신의 발을 예수님께 내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가장 더러운 부분을 예수님께 차마 보여
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려면 자신의 가장 더러운
부분, 자신이 가장 숨기고 싶은 부분까지 온전히 그분께 보여
드려야 합니다. 이는 마치 모세가 처음 하느님을 뵐 때에
신발을 벗어야 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탈출 3,5 참조).
내일 우리는 우리 죄를 씻어 주시고자 당신의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가장 더러운 부분까지
포함한 자신의 전부를 그분께 내어 드리지 못한다면 그분과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할 것입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사랑은 지치지 않습니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성모성당
2013년 다해 3월28일 주님만찬 성목요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 요한 13,1-15
사랑은 지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은 가슴을 애달프게 합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감당하기 힘든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 떠나기 전에 더 잘해 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의 헤어짐을 아시고 평소보다
더 간절히 그들에게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사랑은
어떤 생각이나 이론, 말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
행동이었습니다.
거창하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더러워진
발을 씻어 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면서 당신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발은 가장 더러운 부분입니다. 사랑이 큰 만큼
그곳을 닦아주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더러운 곳을 깨끗이 씻어주는 구체적
행위입니다.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씻어주는 것, 닦아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서 사랑을 하겠다고
하면 그는 평생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정체를 파악하고 난 뒤에 하느님을 믿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섬기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의 정체를 다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13,15)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언행일치의 삶으로 모범을
보여주셨으니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다 알아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안
만큼만이라도 실천하면 복이 옵니다. 그리고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았다면 아는 바를 미루지 말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고 하셨습니다. 바로 허리를 굽혀 발을 씻어주는 모습에서
그 일치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바닥으로 내려 오심은 곧 우리와 같은 처지에서 행하는
봉사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닦는 행위는 용서와 자비를
드러냅니다.
마리아가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며 사랑과 존경을 표현 하였는데 이제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그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하늘 같은 스승이
제자들의 발치로 내려 오셨고 그분께서는 용서와 자비,
사랑과 봉사의 행위가 계속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설정해 주시고 성체 성사를 통하여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주십니다. 성체는 당신의 살과 피를 몸소
내어 주시는 사랑 덩어리입니다. 그 사랑을 먹는 사람은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이 되어
우리를 풍요케 하십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비롯하여 다른 성사와 더불어 은총의
전달을 위해 성품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사제는 주님의
도구입니다. 당신의 살가운 사랑의 전달을 위해 사제를
선택하셨습니다.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성품의 소유자를 뽑아 당신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일을 하시기에 하느님의 능력이 더
간절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체성사와 더불어
성품성사가 제정된 날이기에 ‘사제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제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요한13,1)하셨습니다. 자신을 팔아먹는 제자 유다까지도
사랑할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밤에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을
만나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내 마음에 차지않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5) 따라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만큼 주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스승님께서 사랑의 길을 걸으셨으니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더 높게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모쪼록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버림과 받아들임, 그리고 새로운 관계
2013년 다해 3월28일 주님 만찬 성 목요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네>
요한 13,1-15
이번 병원 봉성체를 하다가 욕을 들어먹었습니다. 손발이
묶여 침상에 누워있는 치매 환자 자매인데 이렇게 말하면
좀 뭐하지만 악이 받친 눈빛으로 약간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모든 것을 거부하는 분입니다. 전에 머리에 안수를 해 주었더니
싫어해서 이번에는 머리에 손도 대지 않고 안수를 주는데도
저에게 욕을 하며 나오지도 않는 침까지 뱉었습니다. 축복을
해 주려고 하는데 마치 자신을 아프게 하는 줄 알고 몸을
비틀며 욕을 해 대는 것이었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하나도 하지를 않는 분인데도 욕을 하는 발음은 너무도
정확해서 조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봉성체를 면 치매환자들 중 그런 분들은 100명 중에 한 분은
그런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치매 환자들은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표현이 너무 적나라합니다. 물론 환자라 그러겠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기에 좋은 것을 주려는 데도 거부하는
것일까요?
인터넷에서 자신의 딸에 관해 쓴 사연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언니와 유치원 다니는 동생이 아빠에게
성탄카드를 선물했습니다. 그래서 아빠도 둘째 딸(구름공주)
에게 뭔가 줘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빠 : "우리 구름공주, 크리스마스 때 뭘 갖고 싶어?"
구름공주 : (단호하게) "응~ 난 산타 할아버지 선물 안 받아도
돼!"
어리둥절해 진 아빠가 다시 딸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 "왜? 그러면 언니(초등학생인 해님공주)만
산타할아버지께 선물 받을 텐데... 그러면 어쩌지?"
구름공주 : "그래도 괜찮아... (산타에게) 선물 안 받아도 돼."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내게 아이들 엄마가 힌트를
줍니다. 며칠 전부터 둘째 구름공주를 엄마 아빠와 따로
재우기 위한 시도(잠자리 홀로서기)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을 앞둔 겨울부터 혼자 잠자는 언니를 따라
같이 재우려는 엄마의 당근책이 바로 '크리스마스 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엄마는 딸아이에게 "엄마 아빠와 같이 자는 아이는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지 못하고 그냥 가신다"는 아주
무시무시(?)한 말을 전한 것. 이에 둘째는 이틀 동안 언니와
따라 잠을 잘 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부터는 새벽에
둘째가 엄마 아빠 방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러더니 요 며칠
전부터는 아예 "언니랑 안자!"하고 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 다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둘째 구름공주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아빠 : "언니만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 받으면, 구름공주 너는
속상하지 않겠어?"
구름공주 : "괜찮아~ 언니 학교 갔을 때 언니 선물 갖고 놀면
되니까!"
아빠 : "헐......"
구름공주의 결심은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구름공주 : "근데, 아빠... 산타 할아버지가 언니(에게) 선물,
두 개짜리 가져다 줬으면 좋겠다~"
아빠 : "..................."
[출처: OhmyNews블로그, 쫄쫄이 스타킹과 장딴지, 5살 딸이
산타의 선물을 거부한 이유]
참 귀여운 아이입니다. 선물을 받으면 부모님과 떨어져 자야하기
때문에 산타의 선물을 거부한 것입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
사귀고 있는데 자꾸 다른 남자가 선물을 준다면 그것을 계속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선물은 곧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 구별하지도
않고 무조건 거부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는 사람과의 관계를
원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당시 노예들이나 하는 일이었는데 주님이며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겸손이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랑을 보여주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아버지께로부터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아시고...”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주셨다면 정말 당신 이름을 제외하고는
하느님으로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즉, 사랑 자체인 성령님을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껜 사랑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즉, 그의 발을 씻으려하는 예수님의 호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겸손해보이지만 실상은 사랑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어려운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랑을 받는 것도
부담스러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받은
사랑을 나누어주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가는 더 엄청난 관계 속으로 빠져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하셨다면, 성모님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셨다면 아무 것도 이루어 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주 조금의 거부도
없이 받아들여야 완전한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좌 신부를 할 때 대축일 미사 복사 서느라고 고생한 복사들에게
맛있는 것 사먹으라고 돈을 좀 듬뿍 주었습니다. 다음 날 미사에
그들이 저에게 다가오더니 그 돈을 다시 내미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받아서는 안 되겠다고 자기들끼리 상의하고 다시 가져온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호의에 대해 마음이 상하기도
하였습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것 이면에는 나도 주기 싫다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길거리에서 천만 원을 아무 이유 없이
준다고 생각해 봅시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 큰돈을
받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받으면 줘야 하는 것이
삶이 이치인데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받고 또 무언가를
주어야 하는 관계는 매우 불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판공성사를 듣다보면 기도생활을 잘 못 했다는 말을 매우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러면 저는 “식사는 제 때에 하시지요?”라고
물어봅니다. 대부분이 기도는 걸러도 식사는 거르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려는 은총을 받아들일 시간을 내기
위해서는 식사를 거를 줄도 알아야합니다.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지만 아직은 그분과의 관계를 갖는 것이 세상의 것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가치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세상과의 관계를 위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무언가를
잃기 싫어서 그분의 축복을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모님과의 관계를 위해 산타의 선물을 거부한 아이처럼 관계에서
오는 더 큰 복을 위해 무언가는 포기할 줄 아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우리 역시 잘못된 잣대를 내밀어서는 안 됩니다.
친한 고등학교 친구가 있습니다. 그 당시 이 친구는 자기
부모님의 “공부해라.”라는 소리가 너무 지겹다면서 자기가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애에게 꼭 이 말을 하겠다고
했었습니다.
“얘야. 공부 그만하고 자라.”
얼마 전, 이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때의 일이 기억나서 “너 지금 네 딸에게 공부
그만하고 자라.”라고 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내가 그때 그런 말을 했었어?”라면서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말 해 보는 게 소원이다. 얘는 도대체 공부를 안 해.”
고등학교 때의 그 친구를 떠올리면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공부 그만하고
자라.”라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자신의 예전
모습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자기 역시 자기 딸에게
“공부해라.”만 외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내밀던 잣대와 딸에게 내미는 잣대가 다릅니다.
이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집니다. 요즘
어른들은 젊은이들의 예의 없음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고대에도 똑같이 있었다고 하지요. 어른의 잣대로만
판단하다보니 젊은이들이 도무지 마음에 들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잣대를 주님께로도 향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과 은총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내가 생각하는 불편함과 힘듦을
내세워 주님을 판단하고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지요. 이러한 모습에서 어떻게 감사의 마음이 나올 수
있겠으며, 어떻게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자신의 잣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요. 우리 역시 우리의 잣대로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부터 우리들은 파스카 성삼일을 보내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은 주님 만찬 미사로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성체성사를 제정해주셨고, 또 제자들의 발을 직접
닦아주시면서 사랑을 보여주셨음을 우리 모두 기억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잣대로 판단하고 단죄하시지 않고, 사랑의 잣대로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모두의 구원으로 연결됩니다.
우리 역시 잘못된 잣대를 내밀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잣대만을 내세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절망과 고통의 순간에서도
또 배반의 아픔을 겪을지라도 사랑의 잣대를 내세울 때,
주님과 닮아질 것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군자는 타인의 좋은 점을 말하고 악한 점을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소인은 타인의 좋은 점은 말하지 않고 악한 점만
말한다(공자).
소사본3동의 성가정상. 서로를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성가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양보와 배려
어제 운전을 하던 중에 갑자기 옆 차선에 있던 차가 끼어
들어왔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전혀 미안하다는
표시를 하지 않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입에서 저절로 욕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갑자기 끼어드는 차들이 참
많습니다. 또 예의 없이 운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화를 낸다면 누구 손해일까요?
사실 내가 화가 난다고 끼어드는 차를 쫓아간들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 차를 세워서 일장 훈계를 하면 그 사람이
과연 “네. 잘못했습니다.”하고 순순히 인정할까요?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인정하지 않는다면 서로 싸움을 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혼자 화내고 혼자 열 받고, 혼자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화가 난다고 화를 내면 결국 나만 손해입니다. 결국 상대방에
대한 양보와 배려는 사실 내 자신을 위한 양보와 배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양보와 배려를 행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일까요? 내 자신을 위한 양보와 배려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몸에 좋다고 하면, 못 먹을 것 같은 음식도 서슴지 않고 먹는
사람들이 많지요. 양보와 배려 역시 내 자신에게 그렇게
좋은 것인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사랑의 날, 성 목요일
2013년 다해 3월28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 -
요한 13장 1-15절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게 하셨다.”
<사랑의 날, 성목요일>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꽃 잔치입니다. 수도원 마당에,
등산로 초입에, 가까운 강가에, 미사 오가는 국도변에
벚꽃과 개나리가 만발했습니다. 찬찬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신마저 아득해지는 행복한 순간입니다. 이것도 잠시겠지,
하는 마음에 아쉬움이 크지만 세상의 이치가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언제나 절정은 잠시뿐입니다. 큰 기쁨은 한 순간입니다.
청초한 꽃봉오리의 순간, 화사한 만개의 순간은 찰라입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추억하는 일이며, 견뎌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드는 생각입니다. 오늘을 최대한 살아야겠다는 생각,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큰 의미를 부여해야겠다는 생각,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사랑할 시간이 없기에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해야겠다는 생각.
자연이 빚어내는 찬란한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든 생각입니다.
오래도록 들여다봐야 더 아름답다는 생각, 자세히 들여다봐야
더 사랑스럽다는 생각.
우리 인간끼리 주고받는 사랑도 마찬가지겠지요. 참사랑이
지니는 특징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지속성
여부, 항구성 여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지니는
밀도입니다. 참 사랑은 한 시간 두시간, 하루 이틀 하다마는
그런 사랑이 절대 아닙니다.
오늘 성 목요일은 사랑의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성목요일 전례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황공하게도 하느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
인간 앞에 무릎을 꿇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그 인간의 발을 씻어주시고 입을 맞춰주십니다.
인간 앞에 엎드리시고 인간의 발의 입을 맞추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랑밖에 모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알면 알수록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나름대로 안다고 자부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은혜로운 성 목요일 하느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좀 더 자세히, 좀 더 가까이서, 좀 더 오래도록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가까이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그에
비례해서 하느님의 큰 사랑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스런 작품인 이웃들도 더 가까이에서, 더
오래도록 바라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허물, 그들의 큰 과오, 큰 부끄러움이 아니라 그들의
가능성, 그들의 측은함, 그들이 지닌 맑음, 아름다움, 그들
안에 깃든 신성에 우리 시선을 고정시키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주님의 만찬미사
2013년 다해 3월28일 주님 만찬 미사
‘파바로티’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놀라운 성악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재능을 살리지 못했던 학생의 이야기입니다.
학생은 폭력조직에도 가담을 했고, 낮에는 학교에서 밤에는
폭력조직에서 지내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학생은
운명처럼 음악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선생님은 학생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폭력조직의 두목을 찾아가 학생을
놓아줄 것을 부탁합니다. 학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발목을
내어 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학생은 폭력조직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고, 선생님과 함께 성악 공부를 합니다.
학생은 노래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선생님은 학생이 더
넓은 곳에서 배울 수 있도록 외국에 있는 친구에게 학생이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합니다. 공항에서 학생은
선생님에게 큰 절을 합니다. 나중에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학생은 많은 관객이 모인 곳에서 선생님께서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드립니다.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저도 어릴 때, 잘못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중학교에 가기 전이었습니다. 저의 잘못을 알았던
담임선생님은 저를 위해서 선처를 부탁했고, 저는 무사히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담임선생님께서
저를 위해서 경찰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중학교에
가는 대신에 다른 곳으로 갔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고마우신 선생님이십니다. 운명처럼 선생님께서는
3년간 담임을 맡아주셨습니다. 4학년, 5학년, 6학년
동안이었습니다. 그런 경우는 무척 드문데 저는 그 선생님을
담임으로 모시게 되었고, 선생님께서는 저를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벌써 40년 전이니 선생님께서는 아마도
정년퇴임을 하셨을 것입니다.
내게 행복을 주는 제자, 내게 행복을 주는 선생님이 있다면
우리의 교육 현실은 이렇게까지 황폐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식을 알려주시기 전에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던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수업시간에 들었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여러분은 난 사람이 되기 전에 든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든 사람이 되기 전에 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많이 알고,
똑똑한 사람이 되기 전에 겸손하고, 남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2000년 전에 그런 분이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발을 씻어 주셨던 분입니다. 제자들의 겉모습 보다는
그 안에 숨겨진 가능성을 알아주신 분입니다. 권위를
내세우시기 전에 먼저 섬기는 삶을 보여주셨던 분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셨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갈릴래아의 촌사람들이었던 그 제자들 12명이
지금은 12억 명의 큰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많은 성장을 하였지만 내면에는 성장의 그늘이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함께 기도하는 가족이 적어졌습니다.
학생들은 학업 때문에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소외된 이들은 교회의
문턱이 높다고 이야기 합니다. 많은 예산을 들여서 화려한
성전을 건축하지만 그 성전에 그리스도의 향기는 점점
사라지려 합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내 발을 씻겨 주신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더
행복하다.’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는
내 인생의 걸림돌이 아니라, 나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디딤돌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우리 가는 길에 아침 햇살 비치면 행복하다고 말해 주겠네.
이리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때론 지루하고 외로운 길이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때론 즐거움에 웃음 짓는 나날이어서 행복하다고 말해 주겠네.
이리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의 사랑 모범이 세상을 진화
머슴이 하던 일, 종이 하던 일을 이제는 모두가 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멸시하던 시대는 이 사회에서 점점
사라져 갑니다. 아직 이 사회에서 고위층이나 특수층들은
그리들 하니 어이없지요.
인간애의 결여로 습관성 비인격 교만증으로 말라가는
인간들이지요. 집안일을 부부가 서로 나눠하며 사는 것
아름다운 변화 아닙니까? 바로 예수님의 사랑 모범이 세상을
진화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부산] 되돌아보기
신앙은 되돌아보는 것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당시에는 그냥 모르고 지나친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새롭게
발견하고, 깨닫고, 다시금 뉘우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아예
그 첫출발부터 그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과
부활 사건 후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과
행적을 되돌아보면서 그분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그러면서
그리스도교가 탄생했다. 피정을 뜻하는 영어 단어 리트릿
retreat도 ‘뒤로 물러서서 다시 살펴봄’이란 뜻을 가지고 있고,
종교 religion란 단어 또한 ‘다시 묶어낸다religare’를 그
어원으로 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신앙이란 늘 ‘되돌아 re-’
본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삶은 많은 부분이 신비에 둘러싸여 있다. 가끔씩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 신비가 모습을 조금 드러내기도 하고,
마지막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도 상당히 많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게 감추어져 있다고, 내가 모른다고 서두르거나
조급해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되돌아보게 될 때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지체된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그저 축성된 빵을
주님의 몸이라고 고백하는 용기를 지니고, 스승이 보여주는
본을 따라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의 삶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 홍경완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교수) -
◈ [기타] 소나무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3월28일 성주간 ‘주님 만찬 성목요일’ 복음묵상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코린토1서11,24)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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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일의 첫날인 오늘,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가
봉헌된다. 오늘의 두 번째 독서는 최후의 만찬 이야기가,
그리고 복음 말씀으로는 최후의 만찬 중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이야기가 읽혀진다. 읽을 때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체험한다. 우리 역시 나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내 생명을 나누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삶이
될까? 우리가 서로의 더럽혀진 발을 닦아 줄 수 있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신나는 세상이 될까?
성체성사의 가장 큰 의미는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어, 그분과의 일치를 체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분이 나를 위해 당신 살을 내어주셨듯이
나 역시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내 살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뒤돌아 볼 일이다.
당신께서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다. 발 자체가
더러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가며 생겨난
상처와 죄로 얼룩진 그 발을 닦아주시는 것이다.
오늘 사제들은 신자들 중,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열 두 사람을 선택해 제대 앞으로 초대하여
그들의 발을 씻어주고 그 발에 입을 맞춘다. 사제들은
그 순간 서품식 때, 제대 앞에 엎드려 하느님께 드렸던
약속을 떠올린다. 자신이 실천해야 할 삶의 태도가
바로 이런 것이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 각오를
다진다.
성목요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성체를 모시는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 생각해본다.
1. 성체를 모시기 전에,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지 의식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성체를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어떤 부분이
있다면 용기를 내어 신뢰하는 마음으로 고해성사를 청해야
한다.
2. 성체를 모실 때 필요한 마음의 태도는 단 두 가지이다.
첫째는 감사하는 마음이고, 둘째는 죄송한 마음이다.
이것만이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가져야 할 마음의
태도임을 기억해야 한다.
3. 성체를 모신 후에는 성체를 모신 자답게 몸과 마음을
움직이려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모심으로써 나 역시
작은 성전(聖殿)이 되었음을 의식하는 삶이 요구된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허무맹랑한 내맡김의영성
-이해욱신부
허무 맹랑한 내맡김의 영성
하느님이 자신을 창조하신 자신의 주(인)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배우자, 자녀, 재물 등)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며, 또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겨 드리겠다는 "맹세 수준의 굳은 결심"을 미사를
통해서 봉헌해 드리면, 자신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 되며, 또한 하느님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되어(하느님을 소유하여) 그때부터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갈라2,20)"을 살게 된다는, 소위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머리로 살아가는 지식이 아주 높으신
분들에게는 시뻘건 대낮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정말 "허무(虛無)"하기 짝이 없는
영성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 부족함과 죄스러움마저도
하느님께 내맡겨 드리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것이 虛와
無임을 깨닫게 되어 하느님만 바라게 되니까요.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참으로, "맹랑(孟浪)(네이버
국어사전: 하는 짓이 만만히 볼 수 없을 만큼 똘똘하고
깜직)"하기 짝이 없는 영성입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내
안에서 나를 통하여 작용하심이 너무 놀랍고 위대하고
오묘하시어 까무러칠 정도로 맹랑하기가 그지없는
영성이니까요.
누구나 이 허무 맹랑한 영성을 허무 맹랑하게 믿고
받아들이면, 허무 맹랑함을 체험하여 곧 허무한 "나의
뜻"을 버리게 되고 맹랑한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1테살4,3)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사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반드시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 것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함과
동시에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인정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위탁하여 사는 삶입니다.
자신이 현재 아무리 부족하고 결점이 많은 사람이라 하여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겨 살려는 굳은 결심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기꺼이 다 받아들여 주시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차지하시어 그 사람의 모든 삶을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주십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처럼,
하느님은 큰 아들이 아니라 작은 아들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루카15,29)라고 외치는 이보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루카15,18~19)라고 고백하는
이를 더 원하십니다.
스스로를 만족해하는 이는 결코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길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머리를 믿는 이는 결코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길 수 없습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맡길
자격조차 없는 무자격자만이 찾아 얻을 수 있는 참으로
허무맹랑한 영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자격자인 "저"를 허무맹랑한 삶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자격자인 "여러분"을
허무맹랑한 삶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허무맹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누가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을 허무맹랑한 영성이라
비웃어도 저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저는 더욱 더 허무맹랑한 삶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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