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33. 격추된 박립인 이 때 박립인은 서재에서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 보기에 그 녀석은 고명원의 아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 지 않으면 어떻게 내가 그에게 쓰는 수단을 참고 견디어 낼 수 있겠 어요?] 다른 한 명의 나직하고 굵은 음성이 들려 왔다. [립인, 너는 너무 자신하면 못쓴다. 조금 전에 나는 밀실에서 모든 것 을 엿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녀석에 대해서 의심을 떨쳐버 릴 수가 없구나. 만약 그가 정말 여느 사냥꾼의 아들이라면 그토록 침 착하게 너를 상대할 수 있었겠느냐? 더군다나 그의 말은 용기와 자신 감으로 차 있었으며 언제라도 손을 쓸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 그는 고명원의 아들 같다.] 박립인은 말했다. [그가 정말 고명원의 아들이라면 제가 고문해서 다그쳐 물었을 때 어 르신께서는 어째서 전음(傳音)으로 저지하셨나요? 그렇게 하지 않으셨 으면 저는 본궁의 십대형법(十大刑法)으로 반드시 공초를 받아 내었을 것입니다.] [아, 얘야!] 그 나직한 음성은 바로 박마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분명했다. [너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만약 그가 정말 고검남이라면 너 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네가 질투로 인해서 그를 죽이고 그 유일한 단서를 잃어버리게 될까 봐, 잠시 그를 감금하여 우 리가 언제든지 다시 물어 볼 수 있도록 조처한 것이다.] 박립인은 말했다. [그렇다고 하지만 나는 그 녀석의 그 건방진 태도가 견딜 수가 없어 서 그의 혈도를 짚을 때 재맥단근(栽脈斷筋) 수법을 써서 그의 몸을 암암리에 슬쩍 한 번 내려쳤지요. 한 시진 후에 그는 아마 꼴좋게 될 것입니다.] 박마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얘야, 너는...] 다음의 말은 그는 시검과 패현에 의해서 떠메어져 십여장 밖으로 나 아갔기 때문에 똑똑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검남은 이미 놀라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영남유객도 서재의 밀실에 몰래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박 립인은 진노한 끝에 무서운 수법으로 내 몸에 수작을 부려 놓았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찬 기운을 들이 마셨다. (박립인의 성격으로 재맥단근의 수법을 펼쳤다면 반드시 독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인데 어쩌면 나를 불구로 만들지도 모른다...) 불구라는 두 글자가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순간 그는 그만 섬뜩한 감을 금할 수 없었고 찬 기운을 들이 마셨다. (내가 어찌 불구가 되는 마당에 그가 멋대로 처리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그는 얼굴을 이쪽으로 하고 있었는데 눈을 돌려보니 기다란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복도의 천장 쪽에는 용이 조각되거나 봉이 새겨져 있었고 금과 옥을 박아서 놓은 것이 몹시 아름답고 우아해 보였다. 복도의 밖은 비스듬히 날아오를 것 같은 처마 끝이었는데 황금으로 만든 풍경이 불어오는 찬바람에 쨍그랑, 쨍그랑,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검과 패현 두 사람은 고검남을 떠메고 질풍과 같이 달려가고 있었 는데, 혈도를 잡힌 고검남의 몸이 갑자기 천근처럼 무거워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불어난 체중에 그들은 어리둥절해서는 두 손에 힘을 주 어 위로 쳐들었다. 그런데 막 기운을 쓰게 되었을 때 고검남은 이미 땅바닥에 내려섰다. 고검남의 행동은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땅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즉시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두 주먹을 맹렬히 바깥쪽으로 나누어 뻗 쳤다. 시검과 패현은 힘을 쓰는 순간에 두 손을 일제히 위로 쳐들어 가슴 팍을 완전히 드러내게 되었고 고검남이 사납게 내지른 두 주먹은 그 들의 늑골을 직통으로 후려치게 되었다.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나고 그들 두 사람은 처참한 비명 소리를 내지르며 입으 로 피를 토하면서 날아가더니 그 붉은 색 난간에 부딪치게 되었다. 난 간이 부서져 나가면서 그들은 마당으로 굴러 떨어졌다. 고검남이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그들은 땅바닥에 쓰러져 기절했는 데 늑골이 몇 대는 부러진 것 같았다. 그는 자기의 주먹질이 그토록 맹렬하고 위력적인 것을 보자 그만 어 리벙벙해졌다. 다음 순간 눈빛을 번쩍 빛내며 후원으로 달려가는 방향을 가늠하고 나는 듯이 줄달음쳤다. 그가 이렇게 달리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줄달음치 는 것으로 준마처럼 빨라 단번에 이장 남짓한 거리를 가로질렀다. 그 자신도 이토록 신속할 줄은 생각 못하고 있었다. 그는 체내의 힘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이와 같 이 한껏 줄달음을 치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유쾌해졌다. 마치 오래 축적되었던 정력이 이제서야 쏟아 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같았다. 줄곧 십여 장을 달려가게 되었을 적에 그는 다른 통로에 이르게 되었 다. 발걸음을 살짝 늦추고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 전에 궁 안쪽에서 갑자기 고막을 뒤흔드는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등뒤에서 호통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고가야, 너는 어디로 도망치려 하느냐?] 고검남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박립인이 복도 저쪽에서 나는 듯이 달려오고 있었는데 몸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옷자락이 펄럭이는 것이 마치 한 마리의 하얗고 커다란 새 같았다. 감히 더 망설일 수가 없어 고검남은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금루궁 안에는 집들이 산을 등지고 이곳 저곳 세워져 있었고 한 채의 집과 집 사이에는 복도나 통로가 이어져 있었는데 복도의 양쪽에는 화원이나 가산이 만들어져 있었고 꾸불꾸불한 길이 나 있었다. 통로의 안쪽에는 촛대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길이는 다섯 자, 세가 닥의 은으로 만든 원반 위에 세 자루의 하얀 초가 빛을 내뿜고 있었 다. 그렇기 때문에 촛불빛에 휘황하게 밝혀져 있어서 바깥쪽의 햇살 아 래처럼 밝았다. 고검남이 통로 안으로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통로 깊숙한 곳에서 급격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빛이 어른거리더니 두명의 단극(短戟)을 든 대한이 저쪽 통로에서 달려왔다. 고검남은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기다란 통로 안에 서서 그 두 명의 영남유객이 몸소 훈련시킨 철위(鐵衛)를 바라보았다. 앞뒤에서 적을 맞은 셈이라 그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눈길을 돌려 비스듬히 벽에 박혀 있는 그 한 자루의 길이가 다섯 치 나 되고 어린애 팔뚝만한 굵기의 촛불 받침을 보며 재빨리 생각했다. (저 두 철위를 쓰러뜨리고 도망치는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내가 이곳에서 그들에게 잡히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는 달려오고 있는 철위들을 후려쳐서 쓰러뜨릴 자신이 없었다. 그 러나 박립인과 그 두 사람 가운데서 고르라면 후자를 고르는 게 나을 성싶었다. 그는 손을 뻗쳐 그 초를 꽂아 놓은 받침대를 힘주어 위로 뽑았다 본래 그는 이와 같이 숙동(熟銅)으로 주조된 초의 받침대는 틀림없이 튼튼하게 벽 속에 못 박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기운을 한 번 쏟아내 자 그 구리로 만들어진 촛대의 다리가 쑥 뽑혀졌다. 오히려 너무 힘을 준나머지 발걸음을 뒤로 한 번 휘청거리며 옮겨 놓아야 했다. 그는 속으로 약간 놀라면서 자기의 힘이 너무나 큰 것인지 아니면 그 초의 받침대의 구리로 된 막대기가 튼튼하지 않은지 분간할 수 없 었다. 그러나 꼼꼼히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두 명의 철위는 이미 그와 일곱 자도 이르지 않은 곳에 이르러 있었다. 고검남은 깊이 숨을 들이 마시며 호통 소리를 내지르는 동시에 손에 뽑아 든 끝이 세가닥으로 갈라진 숙동으로 만들어진 촛대를 들고 앞 으로 내달았다. 호통 소리는 고막을 찢어 놓을 듯했고 그야말로 청천 벽력처럼 통로 에서 메아리쳤다. 두 명의 철위는 고검남이 먼저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 못했던 모양 으로 그 호통 소리에 흠칫 발걸음을 멈추고 고검남이 맹렬히 달려드 는 모습을 보고 약속이나 한 듯이 옆으로 피하면서 단극을 들어 막으 려고 했다. 창! 창! 한 쌍의 단극이 촛불을 후려치자 세가닥의 끝에 꽂혀 있던 세 자루의 초는 박살나서 땅바닥에 떨어지고 촛대는 아래로 다섯 치나 내려앉았 다. 고검남은 손아귀가 약간 얼얼해지는 것을 느끼고 상체를 살짝 앞으 로 구부리면서 속으로 약간 놀라 한 걸음 물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바 라보니 그 초를 꽂았던 세 가닥의 끝이 구부러져 있었다. [이 두 녀석의 팔 힘이 굉장하구나!] 그러나 그는 그 두 철위의 놀람과 의아함은 그보다 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단극을 휘둘러서 후려쳤는데 상대방의 그 구리로 된 막대기에 서 전해져 온 엄청난 힘에 충격을 받아, 단극이 한자 정도 퉁겨 올랐 고 시큰하면서 얼얼한 느낌이 손에서부터 온몸까지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고검남은 그들이 방어태세를 갖추고 공격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용기 가 솟아나 버럭 외쳤다. [받아랏!] 말과 동시에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며 촛대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있는 힘을 다해 휘둘렀다. 위잉...! 얼마나 힘차게 휘둘렀는지 촛대가 진동하는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두 철위는 본능적으로 단극을 내밀어 촛대를 막았다. 쨍! 쨍! 귀를 따갑게 하는 금속성과 함께 두 자루의 단극이 허공으로 날아올 랐다. 고검명 역시 그 충격에 촛대를 놓칠 뻔했다. 촛대는 중간의 두 군데가 움푹움푹 들어가 있었다. 고검남은 상대방의 단극이 날아가자 더 지체하지 않고 재차 촛대를 세차게 휘둘러 두 철위의 머리통을 후 려쳤다. 퍽! 퍽! 머리통이 깨져나가며 두 명의 철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 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고검남은 반드시 잔혹한 수단을 써야 했다. 대자연의 생존법칙은 잔혹 한 것이었다. 생존을 얻기 위해서 모든 동물들은 서로 잔인하게 죽였 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잔인하게 죽이고 죽이는 동물들 가운데 인류가 가장 끔찍하다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인류는 비단 손으로 사람을 죽일 뿐만 아니라 무력으로 사 람을 죽이며 심지어는 지혜를 써서 함정을 파 놓고 사람을 죽이기 때 문이다. 더군다나 죽음과 삶의 기로에 서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특 히 강호에 몸을 담은 사람들은 더욱 잔인하게 살인을 하곤 했다. 고검남은 속으로 한 가닥 씁쓸한 느낌에 젖어 들었다. (나는 끝내 사람을 죽이고 말았구나. 강호에 투신하기도 전에 내 손으 로 두 목숨을 죽이고 말았으니, 모든 강호의 사람들이 이와 같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시각은 그에게 더 이상 가망에 젖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통로 저쪽에서 박립인의 호통 소리가 들려 왔다. [고가야, 목숨을 남겨 놓아라!] 그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연신 울려 퍼졌다. 고검남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생명을 어째서 남에게 결정토록 한단 말인가? 나는 반드시 저항해 야 한다. 살아 남기 위해서 나는 부득이 다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 다.) 그는 마음을 다져 먹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박립인은 이미 통로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맹렬히 구리로 만들어진 촛대를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가 지나가는 곳의 촛불이 모조리 꺼져 버리고 통로 안은 이미 칠흑 과 같은 어둠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것은 그가 총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기다란 통로 안 에 촛불이 완전히 꺼져 버려, 적이나 자기가 모두 어둠에 휩싸이게 된 다면 박립인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경솔하게 앞으로 내달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박립인은 고검남이 어느 곳에 웅크리고 있다가 갑자기 암산을 해 올지 몰라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박립인은 통로로 뛰어 들었다가 고검남이 촛불을 마구 꺼버리는 것 을 보고 이미 그의 속셈을 짐작하고 신형을 급히 날려 밝은 촛불 아 래서 어둠 쪽으로 뛰어 들었고 그 즉시 몸을 웅크리고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정말 교활한 녀석이구나. 어둠 속 통로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갑자기 암산을 하려고 하지만 나는 너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바짝 귀를 곤두세웠으나 어떤 인기척을 들을 수 없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그는 후닥닥 몸을 솟구치며 몸을 날려 급히 나아갔 다. 조용히 십여 걸음 나가다가 그는 벼락같이 옆으로 달려가며 오른손 을 휙 쳐들었다. 가벼운 음향이 울려 퍼지면서 그의 손에 쥐어졌던 섭 선의 모든 부챗살이 격사(激射)되었다. 쉭! 쉭!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열두 대의 부챗살은 전체 통로의 면적을 가득 메우다시피 했다. 박립인은 고검남이 통로 안에 엎드려 있다면 그의 이 비망천목(飛芒穿 目)이라는 절기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고 내다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검남이 촛불을 꺼뜨린 후 통로에 머물지 않고 달려나 간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둠이 휩싸인 통로에서 널따란 마당으로 나서자 그는 쏟아지는 햇 살 아래 눈을 가늘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햇살이 비치는 곳에 십여 명의 궁중 무사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뜰 저쪽의 월동문(月洞門) 안에서 벌떼처럼 달려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고검남을 보자 부르짖었다. [저쪽이다! 저 녀석이 바로 저쪽에 있다!] 수십 명의 무사들이 질풍과 같이 달려왔다. 고검남은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실로 저토록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 목숨 을 버릴 수는 없다.) 일시적인 인정 때문에 죽음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겠는가? 미풍이 살랑거리면서 불어오자 처마 끝의 풍경이 쨍그랑, 하고 울었 다. 고검남은 눈길을 들어 흘깃 높이 이장 남짓한 처마 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차라리 지붕 위로 올라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산골짜기에 나는 저만한 높이를 뛰어 올랐으니 한번 시험해 보자.) 그는 털끝만치도 경공제종지술(輕功提縱之術)을 몰랐다. 그러나 그는 구리로 만들어진 촛대를 들고 앞으로 몇 걸음 내달았다가 구리로 만 들어진 막대기로 땅바닥에 한 번 찍고 두 손을 놓았다. 그러자 그의 몸은 붕 하니 떠올랐다. 그는 전력을 다해 몸을 위로 솟구쳤는데 자기가 그렇게 높다랗게 솟 아오를 줄은 몰랐다. 그의 몸은 마치 날개가 달린 것처럼 휭! 하니 솟아올랐고 삽시간에 처 마의 높이보다 더 높이 오르게 되었다. 파란 유리 기와가 바로 그의 발 밑에 있었다. 그는 숨을 내쉬며 윗몸을 앞으로 구부리면서 비스듬히 저쪽 기와 위 에 내려섰다. 그의 힘은 너무나 세찼기 때문에 그의 건장한 몸이 지붕 위에 내려서 는 순간 우지끈! 하는 소리가 몇 번 나면서 그 파란 유리 기와들이 짓 밟혀 몇 조각이 나고 말았다. 고검남은 무척 기뻤다. 그토록 높은 지붕 위로 올라섰기 때문이었다. 몸을 똑바로 세우자 그는 고개를 돌려 땅위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 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우쭐해서 웃었다. [하하하...!] 그 한 가닥 웃음이 그의 입가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그는 박립인이 통로에서 달려 나오며 호통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멍청한 것들 같으니. 눈을 멍청하게 뜨고 사람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 있었느냐?]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검남이 땅바닥에 드리운 그림자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의 비쩍 마르고 훤칠한 몸이 벼락같이 솟아올라 지붕 위쪽으로 뛰 어 올랐다. 그 뛰어 오르는 자세는 우아하면서도 신속했다. 고검남은 조급해서 촉망중에 두 손으로 지붕 위에 깨어진 기왓장들 을 주워 들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잇달아 휘둘러댔다. 열 몇 조각의 깨어진 기왓장들이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박립인에게 쏜살같이 쏘아져 나아갔다. 박립인은 고검남의 내력이 그토록 웅후할 줄 몰랐다. 암기를 쓰는 특 수한 수법을 모르는 것 같았으나 그와 같이 세찬 힘은 그를 깜짝 놀 라게 만들었다. 그는 몸이 공중에 떠 있었기 때문에 피할 길이 없어서 소맷자락을 휘둘러 세찬 소맷바람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세찬 바람은 바로 금루 궁의 무극강기(無極强氣)인데 본래 가장 훌륭한 호신진기(護身眞氣)였 다. 그러나 그 열 몇 조각의 기왓장들은 그와 같은 한 겹의 강기를 뚫 고 지체없이 쏘아져 나아갔다. [악!] 한 마디 처참한 비명 소리와 함께 박립인은 깨어진 몇 개의 기와 조 각에 얻어맞고 즉시 선혈을 온몸에서 흘러내리며 허공에서 아래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십여 조각의 깨어진 기와 조각은 고검남이 온힘을 다해 내던진 것이 고 그의 몸속에 갈무리되었던 수십 년의 진력이 실린 것이었다. 그러 니 박립인이 촉망 중에 펼친 무극강기로 어떻게 막아낼 수 있었겠는 가? 몇 조각의 깨어진 기왓장들이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었으나 다른 몇 조각의 깨어진 기왓장들이 무극강기를 뚫고 박립인의 몸에 적중된 것 이었다. 삽시간에 유리 기와 조각들은 그의 몸속으로 파고들었고 선혈 이 샘솟는 듯 흘러내려 그의 옷자락을 붉게 물들여 놓았다. 그의 몸은 공중 위에서 한번 부르르 떨더니 햇살 아래 그 준수한 얼 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면서 급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그는 오른손을 재빨리 품속에 집어넣어 무엇을 꺼냈고 옷자 락을 펄럭이며 허공에서 순간적으로 멈칫하는 것 같았다. 바로 그와 같이 멈칫하는 순간에 그는 오른손을 급히 휘두르게 되었 는데, 그 순간 따가운 햇살 아래 두 가닥의 붉은 그림자가 그의 떨어 지는 몸과는 반대로 위로 치솟아 올랐으며 붉은 빛을 반짝이며 커다 란 호선을 그리더니 고검남에게로 쏘아져 갔다. 고검남은 자기가 뿌린 두 웅쿰의 깨어진 기왓장이 박립인을 후려치 게 되어 상처를 입힌 줄 몰라 일순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박립인의 몸이 아래로 떨어지고 붉은 그림자가 번쩍이며 마치 두 마 리의 커다란 박쥐처럼 날개를 펴고 그에게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그가 흠칫할 때 그 두 폭의 붉은 빛 부채는 세찬 바람을 싣고 이미 급격하게 자기에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는 황망히 몸을 엎드렸다. 왼쪽의 한 자루 조그만 부채는 그의 머 리 위를 스칠 듯 날아가면서 그의 상투를 잘라버렸고 오른쪽의 작은 부챗살은 갑자기 쓱 내려오더니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부챗살이 마 치 한 자루의 예리한 칼처럼 그의 오른쪽 등을 찔렀다. 그 예리한 부채 끝이 튼튼한 그의 등안으로 삼푼 정도 박혀 떨어지 지 않았다. 고검남은 한 차례 시큰거리며 얼얼하면서 고통스러운 느낌을 받아야 했다. 고검남은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며 두 발로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지붕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졌다. 반자 정도 미끄러지게 되었을 적에 그의 두 발은 이미 지붕의 기왓장에서 떠나 아래로 떨어지려고 하고 있었고 그의 상반신은 처마 끝에 걸려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는 등뒤의 갑작스런 고통을 참고 열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힘주어 지붕 위를 내려쳤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열 손가락은 일제히 기왓장 아래에 있는 나무 판자 에 박히고 그는 아래로 미끄러지는 몸을 지탱하게 되었다. 깊이 숨을 한번 몰아쉬게 되었을 적에 등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이미 옷자락을 적셔 놓았고 방울져 널따란 뜰로 떨어졌다. 눈처럼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판 위에 한 송이의 화사한 붉은 꽃이 핀 것 같았고 따가운 햇살 아래 유난히 시선을 자극했다. 가슴속의 경악을 억누르고 고검남은 강철로 만들어진 갈고리 같은 손을 잇따라 교차하여 들었다가 내리면서 위층의 지붕 옆으로 기어가 서야 두 손을 멈추었다. 그의 두 가닥 비스듬히 치켜올려진 검미는 잔뜩 찌푸려졌다. 그는 지붕 위에서 앉아서 잠시 숨을 고르고 난 뒤에 즉시 몸을 일으 켜 위쪽에 있는 지붕 위로 걸어 올라갔다. 두 겹으로 된 지붕 위쪽으로 올라가자 비교적 평탄해서 그는 발밑을 돌 볼 필요 없이 발걸음을 빨리 할 수 있었다. 그 지붕을 타 넘자 앞쪽에 한 채의 높다랗게 솟아 있는 하얀 누각이 나타났다. 그 한 채의 누각은 이쪽 지붕보다 훨씬 높은 편이었으며 삼, 사층은 되는 것 같았고, 누각의 옆에는 붉은 꽃을 조각한 난간이 있었고난간 안쪽은 폭이 겨우 일장쯤 되는 조그마한 평대(平台)가 있었다. 평대 안쪽 벽에는 커다란 창문이 하나 있었고 창문에는 가느다란 대 나무로 엮어 만든 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드리워진 대나무 발 옆에는 하나의 새장이 걸려 있었고 새장 속에는 한 마리의 붉은 부리에 초록색 깃털을 가진 앵무새가 앉아 있었다. 햇살 아래 그 하얗고 조그만 누각은 아늑하고 평화스러운 느낌을 안 겨 주었다. 마치 지친 사람에게 가장 훌륭한 안식처라도 될 것처럼... 고검남은 머리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등에 난 상처가 따가운 햇살을 받자 타서 갈라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그는 그 조그만 누각을 보자 자연히 그 쪽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그 금칠을 한 새장 속의 앵무새는 한창 졸고 있다가 고검남이 유리 기왓장을 밟아 깨트리는 소리에 깨어나 고개를 쳐들고 동그란 눈을 들어 고검남을 한 번 바라보더니 나래를 치며 부르짖었다. [옥낭(玉娘), 사람이 왔어! 사람이 왔어!] 고검남은 입가에 한 가닥 미소를 떠올리며 난간으로 기어올라 평대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그 앵무새는 고검남이 평대까지 들어오자 다시 불렀다. [옥낭, 사람이 왔다. 영영(玲玲)은 무섭다. 영영은 무섭다.] 고검남은 쓸쓸히 웃었다. [영영, 무서워 말아라. 나는 너를 해칠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나무 발이 젖혀지면서 조그만 얼굴이 창문 밖으로 내밀어졌다. 그녀는 고검남의 안색이 창백하고 헝클어진 머리에 반쪽의 옷자락이 피로 물든 것을 보자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하지 못했다. 고검남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는 엷은 자색의 난간을 붙잡고 일어서려고 했으나 두 발에 맥이 쭉 빠져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한 번 바둥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휘청거리면서 창문 쪽으로 가 창틀을 붙잡고 나직이 말했다. [나는 상처를 입어서 멀리 갈 수 없기에...] 그 소녀는 놀라 멍청해졌다. 그제야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고검남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몸을 날려 방안으로 들어섰다. 수많은 꽃들이 활짝 핀 듯한 두터운 융단 위에 서서 미처 집안의 가 구들을 돌아보기도 전에, 어느 덧 하얀 그림자가 안쪽에서 달려나오더 니 사뿐사뿐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고검남은 대뜸 눈앞이 활짝 밝아지며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매냉설은 고검남의 그와 같은 낭패한 모양을 보자 얼굴에 경이롭기 이를 데 없다는 빛을 띄우고 아연해서 물었다. [당신은... 당신은 어째서 이 모양이 되었죠?] 고검남은 쓸쓸히 웃었다. [불초는 고검남이오. 지금 금루궁에서 나를 죽이려 하고 있소...] 그의 심신은 극단으로 긴장되었다가 매냉설을 만나자 대뜸 이완되었 다. 거기다가 심하게 피를 흘린 상태에서 더 지탱하지 못하고 말을 끝 내지 못하고 융단 바닥에 기절해 쓰러지고 말았다. 매냉설은 고검남의 등뒤에 깊이 박혀 있는 작은 부채를 바라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가 어째서 이토록 악독하지? 어린 하인까지도 용서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녀의 눈에 연민의 빛이 반짝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쭈그리고 앉아 고검남의 상처 언저리의 혈도를 짚었다. 그리고 난 후 손으로 탁 자 위의 놓인 꽃을 수놓은 손수건을 집고 시녀를 불렀다. [소봉, 왜 멍청하게 서 있느냐? 빨리 이 사람을 부축해서 내 침대에 눕히도록 해라.] 소봉이라 불린 시녀는 줄곧 멍청하게 고검남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매냉설의 부르는 소리를 듣자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입을 열었다. [뭐라고요? 그를 소저의 침대에 눕히라고요? 이건, 소저...] 매냉설은 얼굴을 굳혔다. [못 들었느냐?] 소봉은 감히 고집을 피우지 못하고 재빨리 고검남의 앞에 가서 그를 끌어당겨 등에 업었다. 그녀는 꽤나 힘이 좋은 듯, 그렇게 큰 사람을 업고서 신속하게 움직여 안쪽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매냉설은 정신을 가다듬고 몸을 흠칫하더니 어느 덧 한 마리의 하얀 제비처럼 창문으로 달려나가 평대 위에 섰다. 그의 앵무새는 무척 놀란 것처럼 끊임없이 나무로 만들어진 홰 위에 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종알거렸다. [영영은 무섭다. 영영은 무섭다.] 매냉설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영영 착하지. 영영 두려워하지 말아라.] 초록색의 깃털과 붉은 주둥이를 가진 앵무는 나래를 치더니 덩달아 입을 열었다. [영영은 착하다. 영영은 착하다.] 매냉설은 담담히 웃으며 칠흑 같은 눈동자를 영영의 그 파란 깃털에 서 옮겨기와 지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니 띄엄띄엄 핏방울이 멀리서부터 이쪽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더군다나 난간 옆의 하얀 평대 위는 핏방울로 얼룩진 것 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쭈그리고 앉아 손수건으로 평대 위의 핏자국을 닦았다. 그리고 몸을 훌쩍 날려 파란 유리 기와 지붕 위로 올라섰다. 그녀의 그 가냘픈 몸매는 가볍게 지붕에 서더니 예리한 시선으로 사 방을 한 번 훑어보았다. 이 때 궁안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으나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 라가 쫓아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궁안 경비가 삼엄하구나. 최근에 박숙(朴叔)께서 남에게 얻어맞아 상 처를 입은 나머지 운기행공해서 상처를 치료하느라고 세 분의 총교련 (總敎練)들이 옆에서 호법을 해야 하지만, 나머지의 철위들만 하더라도 삼십 여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다 어디 갔을까?] |
|
첫댓글 즐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