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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흔 번째 아침에 시작된
마지막 악장 —
등장인물
윤재원 (尹在元) ─ 일흔 살의 전직 지방법원 판사. 평생 법조문의 언어로 세상을 재단해 온 사람. 오늘 그의 생일에 무언가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박순남 (朴順南) ─ 윤재원의 아내. 결혼 사십오 년 차. 남편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가장 조용하게 알아채는 사람.
이명호 (李明浩) ─ 마을 작은 경로당의 관리인. 전직 목수. 손에 못 자국이 가득하고 말이 없다. 재원이 처음으로 '남을 위해' 찾아가는 사람.
정은지 (鄭恩智) ─ 이명호의 손녀. 스물두 살 대학원생. 음악을 전공하고 있으며, 소설의 마지막 악장을 여는 피아노를 친다.
목사 김형수 ─ 마을 교회 담임목사. 마가복음 16장 15절 말씀으로 재원의 내면에 불씨를 놓는 사람.
제1장 / 강물의 세 굽이
― 일흔 번째 아침 ―
10월의 새벽 다섯 시, 윤재원은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잠에서 깨는 방식이 달랐다. 평소처럼 알람이 끌어당긴 것이 아니라, 무언가 안에서부터 밀어 올린 것 같은 깨어남이었다.
방 안은 어두웠다. 창문 너머로 아직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회칠한 석고의 미세한 균열들이 세월처럼 퍼져 있었다. 얼마나 오래 그 균열들을 보아 왔는가.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그 균열들이 지도처럼 보였다. 지나온 삶의 지도.
오늘은 그의 생일이었다.
칠십 번째.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관절이 낮은 소리로 항의했다. 창가 쪽 서랍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수십 년 전부터 새벽에 혼자 쓰는 습관이 있었는데, 오늘만큼은 펜을 들고도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강물에는 굽이가 있다.
그 생각이 먼저 왔다. 수첩에 적기 전에 가슴 안에서 먼저 형태를 갖추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강물처럼 떠올렸다. 판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시절, 고등고시를 준비하며 쌀밥을 아껴 먹던 그 방, 어머니가 보내준 사과 한 박스를 받고 한밤중에 울었던 일. 그 시절 그는 오직 하나만을 향해 달렸다. 자신. 자신의 이름. 자신의 미래. 남의 사정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들어올 여유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들어오더라도 외면했다. 그것이 살아남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그다음 굽이는 판사복을 입은 삼십 년이었다. 이해관계가 달라졌다. 법정은 나 혼자의 공간이 아니었다. 피고인도, 원고도, 국선 변호인도, 방청석의 노인도—그 모든 사람이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나를 위해서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위해서이기도 한 판결. 그것이 두 번째 굽이의 문법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세 번째 굽이 앞에 섰다.
법복은 이미 벗었다. 법원은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세상은 그가 없어도 돌아가고 있었다. 어린 판사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예전의 그처럼, 치열하게. 그는 그것을 서운하게 여겨야 하는지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새벽빛이 창문 아래에서 희게 번지기 시작할 때, 그는 수첩에 세 줄을 썼다.
0세에서 35세: 나만을 위한 삶.
35세에서 70세: 나와 남 모두를 위한 삶.
70세 이후: ?
물음표.
그는 그 물음표를 한참 바라보았다. 오늘 처음으로, 이 물음표가 빈 공간이 아니라 가능성처럼 느껴졌다. 칠십 년을 살고도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 있다는 것—그것이 두렵지 않고, 이상하게도 설레었다.
부엌에서 소리가 났다. 박순남이 냄비를 올리는 소리였다. 아내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미역국을 끓였다. 사십오 년 동안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재원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겨 왔다. 오늘 처음으로,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수첩을 덮고 일어섰다. 부엌으로 걸어가면서 물음표 뒤에 올 답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오늘 그것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평생 남에게 판결을 내리며 살아온 사람이 오늘은 스스로에게 판결을 내리는 날인 것 같았다.
✦ ✦ ✦
미역국의 냄새가 복도까지 흘러나왔다.
"오늘도 일찍 깨셨어요."
순남이 등을 보이고 서서 말했다. 몇 해 전부터 생긴 둥근 어깨. 재원은 그 어깨를 오래 바라보았다.
"국 끓이는 냄새에 깼어."
"거짓말." 순남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웃었다. "국 올리기 전에 이미 일어나 계셨잖아요. 수첩 꺼내는 소리 다 들렸어요."
그는 식탁 의자에 앉았다. 아내가 그 앞에 미역국을 놓았다. 흰 그릇에 담긴 진한 국물. 참기름 향이 올라왔다.
"칠십 살이야." 재원이 말했다.
"알아요." 순남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요?"
"그래서." 그는 숟가락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순남은 잠시 남편을 바라보았다. 사십오 년을 살았지만 그 말을 이런 새벽에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늘 알고 있는 척하는 사람이었다. 판사의 표정으로, 판사의 어조로. 오늘 그 얼굴이 조금 달랐다.
"천천히 드세요. 미역 많이 넣었어요."
그것이 아내의 대답이었다. 재원은 그 대답이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충분했다. 때로는 국물 한 그릇이 긴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이 있었다.
창문 너머로 어둠이 물러가고 있었다. 경상도 어느 소읍의 좁은 골목길에 가로등 하나가 껐다. 새벽이 아침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순간이었다.
제2장 / 목수의 손
― 남을 위한 첫 발걸음 ―
오전 열 시, 재원은 외투를 걸치고 나섰다.
목적지는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걷기로 했다. 오 분쯤 걸었을 때 발이 알아서 방향을 잡았다. 마을 동쪽 끝의 경로당 쪽이었다. 그가 판사로 있을 때 몇 번 들른 적이 있는 곳이었다. 법원 이름으로 성금을 전달하던 일이었으니, 그것도 나를 위한 일의 일종이었다—판사의 이미지를 위한.
경로당 앞마당에는 낙엽이 쌓여 있었다. 감나무 한 그루가 잎을 거의 다 버렸고, 끝에 붉은 감 세 개가 남아 있었다. 버려지지 않은 것들의 빛깔로 달려 있었다.
마당 한쪽에서 빗자루 소리가 났다. 이명호였다.
이명호. 재원은 그 이름을 몇 달 전에 들었다. 경로당 관리인. 전직 목수. 허리가 안 좋아서 큰 일은 못 하고 관리일을 보고 있다고 했다. 당시에는 흘려들었다.
"이 선생."
재원이 불렀다. 이명호는 빗자루질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일흔셋의 얼굴이었다. 주름이 깊고 눈이 작았다. 못 자국이 가득한 손이 빗자루 자루를 쥐고 있었다.
"아, 판사님."
"퇴임했어요. 그냥 윤 씨라고 해요."
이명호는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의 눈빛에 어리둥절함과 경계가 섞여 있었다. 전직 판사가 혼자 찾아와서 '그냥 윤 씨'라고 부르라는 것은 그의 경험 어디에도 없는 일이었다.
"들어오시죠."
경로당 안은 작고 따뜻했다. 구석에 전기 온풍기가 돌고 있었고, 창가에 화분 두 개가 있었다. 재원은 이 공간이 이렇게 생겼는지 처음 알았다. 성금을 전달하던 날은 현관 앞에서 악수만 하고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명호가 물을 끓였다. 둘은 탁자 앞에 마주 앉았다.
"무슨 일로." 이명호가 물었다. 질문이 아니라 관찰에 가까운 어조였다.
재원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한순간 막막했다. 목적지도 없이 걸어왔다는 말이 맞았지만, 그것은 어른들의 대화에서 허용되지 않는 종류의 말처럼 느껴졌다. 그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이 선생 혼자서 여길 다 관리하시죠?"
"예."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해드리겠습니다."
침묵이 왔다. 이명호는 녹차 한 잔을 재원 앞에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오래 생각하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책장이 삐걱거려요." 이명호가 말했다. "못 하나 빠졌는데 내 손이 이래서." 그는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엄지손가락 관절이 굵고 굽어 있었다. 목수의 세월이 축적된 손이었다. "못 박는 건 할 줄 알지만 이 손으론 힘이 안 들어가요."
"제가 해드릴게요."
이명호는 그 말을 한참 바라보았다. 말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판사님이 못질을?"
"못질 정도는 합니다." 재원이 말했다. 그리고 묘하게도, 그 말이 부끄럽지 않았다. 평생 법전을 다루던 손으로 망치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 어색했지만, 어색함보다 무언가 더 큰 것이 있었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무게감 같은 것.
망치는 이명호의 창고에 있었다. 못도 있었다. 책장은 열람실 안쪽 구석에 있었다. 재원은 책장 뒤에 쪼그려 앉아 못을 찾아냈다. 한쪽 연결 부위가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는 못을 잡고 망치를 들었다.
첫 번째 타격은 빗나갔다.
두 번째는 못머리를 맞았다.
세 번째에 못이 들어갔다.
책장이 더 이상 삐걱거리지 않았다.
이명호가 책장을 한 번 흔들어 보고 말했다.
"됐네요."
그것이 전부였다. 칭찬도 없었고 감사 인사도 길지 않았다. 그런데 재원은 그 짧은 말을 들으며 오랫동안 경험하지 못한 종류의 것을 느꼈다. 판결 후에 오는 만족감과는 달랐다. 그것은 인정의 쾌감이었다. 이것은 다른 것이었다. 더 소박하고, 더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불었다. 감나무의 마지막 세 개 감이 흔들렸다. 재원은 그것을 올려다보다가, 망치를 들었던 손의 감촉을 기억했다. 차갑고 무거운 것. 그런데 그 무게가 좋았다.
제3장 / 기쁜 소식의 실체
― 마가복음 16장 15절 ―
그 주 일요일, 재원은 예배당에 앉아 있었다.
작은 교회였다. 마을 주민 육십여 명이 출석하는 곳. 재원이 신앙을 가진 것은 은퇴 직전 무렵이었다. 아내 순남을 따라 나가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형식이었다가 어느 날부터 형식이 아니게 되었다. 무엇이 바뀐 것인지 그는 지금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오늘 목사 김형수가 읽은 말씀은 마가복음 16장 15절이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설교는 길지 않았다. 김 목사는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구절을 읽고 잠시 침묵했다가 이렇게 말했다.
"복음은 언어가 아닙니다. 복음은 삶입니다. 여러분이 매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누군가에게 기쁜 소식이 됩니다."
재원은 그 말을 들으며 수첩에 적어두었던 물음표를 떠올렸다. 삼 일 전 새벽에 쓴 그것.
70세 이후: ?
어쩌면 답이 여기 있었다. 말의 형태가 아니라, 목수의 책장에서 발견한 무게감의 형태로. 나에게는 이익이 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이익이 되는 일. 그것이 '기쁜 소식'의 실체일 수 있었다.
예배가 끝나고 교회 마당에서 김 목사를 만났다.
"판사님, 오늘 얼굴이 다르시네요."
"다릅니까?"
"뭔가 결심하신 분의 얼굴입니다."
재원은 잠시 생각했다가 말했다. "결심이라기보다는 방향을 바꾼 것 같습니다. 강의 굽이처럼요."
김 목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은 굽어야 바다에 이릅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리고 그날 저녁 밥을 먹는 동안에도. 순남이 찌개를 더 떠주면서 물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강의 굽이."
"또 그 얘기." 순남이 웃었다.
"당신은 내가 이상하게 보여요?"
순남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남편을 보았다. 사십오 년을 보아온 얼굴인데 오늘 조금 낯설었다. 좋은 종류의 낯섦이었다.
"이상하긴요." 그녀가 말했다. "그냥 좀 어려보여요."
재원은 그 말에 웃었다. 그것이 그날 가장 긴 대화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제4장 / 기록되는 사람
― 영상통화와 웃음 ―
다음 주 화요일, 재원은 이명호를 다시 찾아갔다.
이번에는 목적이 있었다.
경로당 안에 컴퓨터가 한 대 있었는데, 이명호는 그것을 거의 쓰지 않았다. 관에서 보내준 것이라고 했다. 박스를 뜯은 흔적도 없이 구석에 있었다.
재원이 제안한 것은 이것이었다. 이명호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기록하는 것. 목수로 살아온 사십 년의 이야기. 이 마을에서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고, 이름 없이 살아온 한 사람의 기록.
"그걸 왜요." 이명호가 물었다. 거부감이 아니라 진짜 모르겠다는 어조였다.
"이 선생 손에 있는 이야기들, 사라지면 안 되니까요."
이명호는 한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굽은 엄지손가락, 못 자국들, 세월의 지층이 쌓인 손바닥.
"내 손에 이야기가 있다고요?"
"있어요." 재원이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하면서,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 자신도 처음으로 완전히 확신했다.
영상은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재원이 촬영하고, 이명호가 이야기했다. 처음에 이명호는 카메라를 의식해서 말이 짧았다. 삼십 분쯤 지나자 익숙해졌는지, 결혼 초에 아내를 위해 만들어준 옷장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낮아지고, 느려지고, 무언가가 녹아 들어오는 것처럼.
"나무를 고르는 게 제일 어렵지요. 좋은 나무가 좋은 가구가 되는 게 아니에요. 적합한 나무가 적합한 가구가 되는 겁니다."
재원은 그 말을 듣다가 손이 멈추었다. 녹화 중에 말이지만 혼자 조용히 생각했다. 적합한 나무. 나는 어떤 나무였는가. 그리고 지금은 어떤 가구가 되어야 하는가.
두 시간의 촬영이 끝났다. 이명호의 손녀 은지가 마침 들어왔다. 그녀는 화면에 담긴 할아버지를 보더니 잠시 눈을 감았다가 말했다.
"할아버지 목소리가 이렇게 부드럽다는 거, 처음 알았어요."
이명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만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 안에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재원은 그 웃음을 카메라 안에서 조금 더 찍어두었다. 이 장면이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집에 돌아와서 그는 촬영한 영상을 다시 보았다.
화면 속 이명호가 웃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 가장자리에, 촬영자인 자신의 모습이 창문 유리에 살짝 반사되어 보였다.
그도 웃고 있었다.
언제부터 내 얼굴이 저렇게 환해졌나.
그는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대답이 이미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5장 / 성령의 기쁨
― 이제사 너가 뭘 좀 아네 ―
일주일이 지났다.
재원은 매일 무언가를 했다. 아직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경로당 마당의 낙엽을 쓸었다. 이명호 대신. 이명호의 허리가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아무도 보지 않았다. 재원은 그것이 오히려 좋았다.
어느 날 아침에는 동네 편의점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장바구니를 힘겹게 드는 것을 보고 집까지 들어드렸다. 할머니는 처음에 손사래를 쳤다. 재원이 "이 동네 사는 윤 씨입니다"라고 말하니 그제야 짐을 내밀었다.
그 짐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돌아오는 길에 어깨가 쑤셨다.
그런데 이상했다.
몸은 무거웠는데 마음이 가벼웠다.
그날 저녁 그는 수첩을 폈다. 그리고 물음표 뒤에 처음으로 문장을 썼다.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고, 남에게 이익이 되는 삶.
칠십 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 그는 그 문장 아래에 작은 괄호를 치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 길이 맞는 것 같다.)
그 무렵 그는 내면에서 무언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설명이 어려웠다. 신학적 언어로 말하자면 성령의 임재였고, 일상의 언어로 말하자면 아침에 눈 뜨는 것이 기다려졌다. 전에는 하루가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하루가 채워져 있었다. 자신이 채운 것이 아니라 어떤 외부의 힘이 채워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기쁜 거지."
혼잣말을 했다. 순남이 옆에서 들었다.
"기쁜 거요? 무슨 좋은 일 있어요?"
"딱히 좋은 일은 없어. 그냥." 그는 웃었다. "그냥 기쁜 것 같아."
순남은 한동안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조용히 말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같네요."
재원은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이 정확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성령님께서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이제사 너가 뭘 좀 아네."
재원은 그 말을 상상하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판사로 살아온 삼십 년, 그 엄숙했던 삶 뒤에 찾아온 것이 이것이었다. 고요하고 가벼운 기쁨. 대가를 바라지 않는 행동이 주는 일종의 자유.
다음 날 아침, 이명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판사님, 손녀가 그 영상 편집했다고요. 한번 보러 오시겠어요?"
재원은 외투를 걸치며 생각했다. 나는 이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사람은 기다리는 것이 있을 때 가장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
제6장 / 피날레
― 마지막 악장의 첫 음표 ―
경로당의 작은 방에 셋이 모였다. 재원, 이명호, 그리고 이명호의 손녀 은지.
은지가 노트북을 펼쳤다. 화면에 영상이 열렸다.
이명호의 손이 먼저 나왔다. 은지가 그렇게 편집했다. 말보다 먼저 손이 나왔다. 굵고 굽은 손가락들, 못 자국들, 목수의 세월이 새겨진 손. 그 위로 천천히 이명호의 목소리가 깔렸다.
"나무를 고르는 게 제일 어렵지요. 좋은 나무가 좋은 가구가 되는 게 아니에요. 적합한 나무가 적합한 가구가 되는 겁니다."
이명호가 화면 속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재원은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자신의 삶이 처음으로 기록되는 것을 목격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영상이 끝났다. 십사 분짜리 영상이었다.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은지가 먼저 웃었다. 입술을 다물고 눈으로만 웃는 방식이었다. 이명호가 그다음에 웃었다. 재원도 웃었다.
그 웃음들이 작은 방 안에 잠시 머물렀다가 창문 틈으로 빠져나갔다. 10월의 빛 속으로.
"잘 됐네요." 이명호가 말했다. 그것이 전부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은지가 말했다. "저 이걸 더 발전시키고 싶어요. 이 마을에 이런 분들이 또 계실 것 같아서요. 할아버지처럼 평생 이름 없이 사신 분들."
재원이 은지를 바라보았다. 스물두 살의 눈이었다. 그 눈 안에 그가 칠십 살이 되어서야 발견한 것이 이미 들어 있었다. 젊음의 특권이 아니라 젊음의 놀라움이었다.
"같이 하면 되겠네요."
재원이 말했다. 은지가 고개를 들었다. 이명호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제가 찾아다닐 테니까, 은지 씨가 편집하고. 이 선생은 소개해주시고."
그것이 계획의 전부였다. 거창하지 않았다. 예산도 없었고 이름도 없었다. 그러나 세 사람은 그것이 시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작은 늘 그렇게 작았다.
✦ ✦ ✦
돌아오는 길, 재원은 혼자 걸었다.
하늘이 높았다. 10월의 하늘은 다른 달과 달리 한 발짝 뒤로 물러선 것 같은 높이였다. 그 아래에 서면 자신이 작아지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는 걸으면서 생각했다.
피날레라는 말은 끝이 아니었다. 오케스트라에서 피날레는 가장 마지막에 오지만, 가장 격렬하고 가장 충만한 악장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선율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끝이면서 완성이었다.
칠십 살. 그는 이제 피날레 악장에 들어선 것이었다.
첫 음표는 목수의 책장에서 박은 못이었다. 두 번째 음표는 할머니의 장바구니였다. 세 번째는 이명호의 목소리가 화면에 담기던 그 순간이었다. 그 음표들이 모여 악장이 되고, 악장이 모여 곡이 되면—그것이 그의 남은 삶이 될 것이었다.
집 앞에 도착하니 순남이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무언가를 사러 나가려던 참이었는지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같이 갈까요."
재원이 말했다. 순남이 잠시 그를 보았다.
"예?"
"시장. 같이 가요."
사십오 년 결혼 생활에서 재원이 먼저 시장을 따라가겠다고 한 것은 처음이었다. 순남은 잠시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했다. 그리고 장바구니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럼 이거 들어요."
재원은 장바구니를 받았다. 가벼웠다. 오늘은 아직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가벼움이었다. 그는 그 가벼움이 좋았다. 앞으로 무엇이 담길지 모른다는 것도 좋았다.
그들은 나란히 골목을 걸었다. 칠십 살의 남자와 예순여섯 살의 여자. 오래된 두 사람이 처음 걷는 것처럼 걸었다.
10월의 빛이 골목 끝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 ✦ ✦
저녁, 재원은 다시 수첩을 폈다.
칠십 번째 생일에 쓴 물음표 옆에, 오늘 날짜를 적고 한 문장을 더했다.
피날레는 끝이 아니다.
피날레는 가장 충만한 악장이다.
그 악장이 지금 시작된다.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에 가로등 하나가 켜졌다. 작고 흔들리는 빛이었다. 그런데 그 작은 빛이 골목 전체를 어둠으로부터 조금 밀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지도 몰랐다.
빛은 크기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했다.
그는 그것을 칠십 살이 되어서야 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