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웅 사장(69)은 인터뷰 전날 싱가포르 출장에서 돌아왔다고
했다. 싱가포르 상그릴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3박4일 일정으로
열린 국제 원자재 관련 포럼 참석차 다녀온 출장이다. 유럽재활용
협회(BRI)가 주최한 이 국제 행사에 세계 각국의 1,600여 명이 참
가했고 스크랩(쓰고 남은 비철금속) 및 기계설비의 국제 원자재
동향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오고갔다고 한다.
동남아에서 열린 국제포럼인 만큼 우리나라 재활용업계 관계
자들도 50명 이상 참가했는데 이들 가운데 BRI 정회원은 서 사장
을 포함 3명에 불과했다. 그가 BRI와 미국재활용협회(ISRI) 정회
원으로 각각 가입한 것은 이미 10여 년 전이다. 비철금속 재활용
업계의 산 증인이라고 할 만큼 오랫동안 몸담아 온 그의 통찰력은
대단하다. 서 사장은 “미국의 AID 자금으로 수입 업무를 하던 시
절부터 지금까지 현역에서 뛰는 사람은 저 혼자일 것”이라며 자
부심을 내비쳤다.
반도호텔 무역 조수로 시작
1942년 12월 31일 생인 그는 서울 만리동에서 태어났다. 6.25 피
난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3년 늦게 초등학교 3학년에 재
입학했다. 고학하다시피 하면서 시청 앞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 캐세이 엑스포트(Cathay Export)라는 외국인회사에서 아
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당시 캐세이 엑스포트는 비철금속 무역 업무를 주로 하던 회사
였다. 어깨 너머로 배운 영문 타이프로 한국은행 외국부의 외환
업무를 보러 다니면서 무역에 눈떴다. “불과 18살 때였죠. 영문 타
자기도 별로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외환 업무도 우리나라에서 단
한 곳, 한국은행 외국부에서만 취급했습니다. 고객들 수출입을
대행하면서 ‘무역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됐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전쟁의 상흔이 깊어 너무 가난했고 산
업 기반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비철금속의 경우 알루미늄과 연,
아연 등을 모두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1964년까지도 정부 보유 외
환(KFX) 자금이 없어 미국의 무상 원조 자금인 AID 펀드를 활용해
야 했다고 한다. (서 사장은 반도호텔 내의 사무실로 출근하다 박
정희 전 대통령과 차지철 부장이 5월 16일 아침에 시청 앞 광장에
서 있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6.25와 4.19, 그리고
5.16을 겪었으니 역사의 산 증인이 아니겠느냐고 그는 말했다.)
“AID 자금으로 미국 레이놀드 메탈로부터 알루미늄 빌릿 33톤
을 수입해 공급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산업용 원자재 공급이었
습니다. 그 순간의 기쁨은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1960년대 말 해외 원자재 시세 제공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한국국제통신공사(KIT)의 전보와 우체
국 서신 왕래로 국제무역을 했다. 그나마 외국계 대행회사와 통
신사 간에는 텔레프린터 시설이 본·지사 간 연락망으로 사용됐
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는 텔렉스 자격증을 따기 위해
모스부호도 배웠다.
1964년 제대 후에는 캐세이 엑스퍼트의 후신(後身)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한금속에서 비철금속 오퍼를 하기 시작했다. 동양강
철, 남성경금속 등이 미국 회사와 기술제휴를 할 때 신한금속이
중개 역할을 했고, 실무를 돕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운 것
역시 서 사장의 소중한 기억이다.
1960년대 말부터는 우리나라의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스
크랩을 우리나라에 대거 들여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신한금속을 통해 해외 정보를 수집해 국내 업체들에게 제공했다.
“1966년부터 합동통신사로부터 런던금속거래소(LME) 가격과 뉴
스를 기업들에게 매일 전화로 제공했습니다. 1972년부터 텔레프
린터 시설을 활용해 각종 해외 정보를 제공한 것도 큰 보람이죠.”
인천 보세창고 임대해 사업 시작
서 사장은 신한금속에서의 현장 경험을 살려 1986년 해성교역(지
금의 해성비철)을 설립했다. 업종은 그가 오랫동안 몸담아 왔던
비철금속 무역대리점이었다. 공장이 따로 없어 인천 국제보세창
고를 임대해서 썼다. 사업을 시작할 때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임대 빌딩에 본사 사무실을 두고 있었지만 지금은 자택을 개조해
1층은 사무실, 2층은 자택으로 쓰고 있다.
수십 년 동안 무역대리점사업을 해 온 그는 “무역대리점업계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만 하더라도 제품을 몇몇 특정 업체에만 요청해 구매했는데
한국은 무역대리점이라는 특수한 업종 덕분에 국제 입찰 형식의
구매 효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물건을 가장 저렴한
가격에 구매해 국내에 공급함으로써 기업과 국가에 엄청난 이익
을 가져다준 셈이죠.”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우리나라도 국제화에 눈을 뜨게 됐
고, 서 사장은 본격적으로 수출에 나서게 된다. 경제성이 있는 비철
금속과 스크랩을 수입하는 한편 가공해도 경제성이 없는 품목은 중
국, 인도 등에 내다팔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에서 싸게 수입한 스크
랩을 우리 기업들에 공급하고, 쓰고 남은 스크랩은 다시 해외에 수
출하는 방식이었다. 비철금속 수출입을 주 업종으로 해성교역은 꾸
준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몇 십 년간 거래한 업체들이어서 수출하
는 데 특별한 애로는 느끼지 못했습니다”라고 서 사장은 말했다.
장애인 복지사업에도 큰 관심
한편 서 사장은 2005년까지 ‘외도(?)’를 하면서 다른 일에 더 관심
을 쏟기도 했다. 바로 장애인 복지 관련 사업이었다.
1971년에 태어난 장남 강석이 2살 되던 해 자폐증이란 진단을 받고 난 후였다.
당시는 자폐증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로, 서 사장은 자폐아
를 둔 부모들과 정보를 교환하다 197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정기
적인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부
모회’ 창립멤버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1992년에는 사회복
지법인 ‘계명복지회’를 설립해 관련 질환을 앓고 있는 자녀들의 장
래를 준비하는 데 앞장섰다. 이러한 공로로 1999년에는 국민포장
을 수상하기도 했다.
서 사장은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경영에 나섰고 해성교역의
외형도 빠르게 커지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1천만불 수출탑을
수상했고, 5년 후인 지난해에는 2천만불 수출탑을 받았다. “실제
로 지난 한 해 동안 수출한 금액은 3,000만 달러 가까이 되는데 연
말 실적이 포함 안 돼 2천만불 수출탑에 그쳤습니다”라고 서 사장
은 아쉬워했다. 수출 지역도 초기에는 중국과 인도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유럽, 미국, 동남아 등으로 다변화되고 있다.
비철금속과 스크랩 수입 물량이 크게 늘어나고 있지만 경영적
인 측면에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국내외 시장 상
황 모두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워낙 자원
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입만 하면 공급할 곳은 어디든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수많은 업체들이 전 세계에 연락망을 구축하고
있어 경쟁도 심해졌고 수요 업체들의 다양한 요구를 들어줘야 하
는 등 갈수록 전문화되고 있습니다.”
설비투자로 부가가치 높여
해성비철의 지난해 매출은 200억 원에 그쳤다. 2009년 330억 원
에 비하면 크게 줄어든 실적이다. 중국인과 동포가 만든 합작회
사들이 난립하면서 시장에 큰 혼란을 초래한 것도 매출 감소의 한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서 사장이 현재 공장이 위치한 경기도 화
성시에 부지 포함 50억 원에 달하는 설비투자를 한 것도 이 때문
이다. “공장을 설치해 스크랩의 품질을 높여 국내 업체에 공급하
고, 인건비도 안 나올 정도로 진짜 경제성이 없는 것은 수출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전 세계적으로 자원 파동이라고 할 정도 아닙니까? 특수금속
가운데 텅스텐 카바이트는 1톤에 3,000만 원, 탈탄은 1톤에 5억
원이나 합니다. 몇 년 전에 구리 가격이 1톤에 100만 원이었는데
지금은 10배가 올랐어요. 그런 상황이니 스크랩이라도 최대한 가
공해서 쓸 수 있는 것은 쓰도록 해야죠. 단순한 무역대리점 업무
만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설비투자가 필요 없었겠죠.” 서 사장은
또 “정책적인 측면에서 보다 탄력적인 환경 규제 정책이 필요합니
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의 지원 부족으로 경제성이 없어
수출하는 품목도 있고, 경제성이 있는 품목도 소량일 경우 (국내
에서 쓰지 못하고) 수출해야 할 경우가 자주 생깁니다”라며 아쉬
워했다. 스크랩은 철거 물량과 개인이 소량 수집한 물량으로 구분
되는데, 주로 무자료 거래로 이뤄지는 산업적 특성을 정부가 나서
서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국가의 재산인 폐자원 활용이 비효율적
일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서 사장이 경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직원들 간의
화목이다. 직원이 20여 명에 불과하지만 월남인, 중국인 등 현지
인들이 상주하는 만큼 사무실을 가족적인 분위기로 조성하기 위
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직까지 현직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축복받은 기분이라는 서
사장은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을 진심으로 존경합니
다”라고 말했다. 또 “지금까지 해 온 대로 비철금속 원자재를 원
활하게 공급하는 데 한 몫을 하겠습니다”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