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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구세주 救世主
늑대가리와 팽이가 들고 오는 막대기를 바라보며, 중부와 한준은 ‘오늘 죽었다’ 라고 속으로 각오 覺悟를 단단히 한다.
곧, 험악한 고신 拷訊을 당할 처지니만큼 비장한 마음속 다짐이다.
그때,
“모두 거기서 뭣들 하고 있소?”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온다.
모든 사람이 족제비의 상처를 치료하는데 정신이 없어, 곁에 다른 사람이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석양을 등지고 나타난 자는 검은 갈기의 갈색 말을 타고 있는 건장한 장정과 회색 갈기의 흰 말을 탄 소녀였다.
“엇! 석 아저씨”
이중부와 한준이 동시에 큰소리를 지른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보고는 아주 반갑게 인사를 한다.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다. 지옥에서 구세주 救世主를 만난 느낌이다.
석양 夕陽에 눈이 부셔, 역광 逆光 때문에 말과 인물의 형체만 겨우 파악할 수 있는 악조건 惡條件임에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도,
이 난국 難局을 벗어나려면 석늑 아저씨뿐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작용했으리라, 그러니 석양의 역광 逆光으로 비추어진 노을 속의 형체만으로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나타난 사람은 석늑이다.
석늑도 이중부와 한준을 알아보고 얼른 살갑게 인사를 받는다.
“어, 자네들이 여긴 어쩐 일이지?”
그런데 두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다.
둘 다 봉두난발 蓬頭亂髮에 안면 여기저기 스친 상처들과 부어오른 면상, 너덜너덜해진 흙투성이 옷…. 말이 필요 없다.
상당한 고초 苦楚를 겪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오전에 금성부의 대장간에서 보았던 씩씩한 용사의 기상 氣像은 오간 데 없다.
장내 場內를 휘둘려본다.
마치,
소년들을 이 지경까지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누가 이토록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궁금한 듯이 둘러본다.
순간, 갈색 머리가 석늑의 눈에 들어온다.
“엇! 설 공자”
갈색 머리도 그제야 석양 속의 석늑을 알아본다.
“어, 집사님, 여긴 어쩐 일이 신지요?”
“성내 城內에 볼일 보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인데, 여긴 우리 동네 박달촌 아닌가?”
오히려 되묻는다.
“아 참, 그렇죠, 집사님 댁이 여기서 멀잖군요”
“그건 그렇고, 내 소형제 小兄弟들이 여기 있는데 어쩐 일이지?”
갈색 머리 정도의 무공이 아니면, 중부와 한준을 저 지경까지 만들 사람이 없다는 걸 아는 석늑, 추궁하듯이 묻는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팽이와 늑대가리는 각자 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를 슬그머니 땅바닥에 내려놓는다.
이미 석늑과 소년들이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본 갈색 머리, 속으로 ‘아차’하는 마음이 든다.
“여기 소형제들과 잘 아시는 사이 같군요?”
“그러네, 오늘 오전에도 금성부 金城府에서 청예 소공자 小公子와 함께 작설차 雀舌茶를 마셨지”
오전까지도 멀쩡하던 소년들이 지금 왜 저 꼬락서니냐? 라는 추궁이다.
그러면서 흉노족의 우두머리, 즉 너희들이 하늘같이 우러러보는 상전 上典댁에서 소공자로부터 차 대접을 받았던 대단한 신분이란 걸 은근히 내비친다.
‘그런 대단한 소년들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갈색 머리 네가 아니냐?’라는 의미다.
석늑의 이야기를 들은 갈색 머리와 소년들의 얼굴이 졸지 猝地에 하얗게 변한다.
‘저 소년들이 금성부의 소 공자님과 차를 같이 마시는 사이라고’ 갑자기 푸른 하늘이 노란색으로 채색 彩色되어 버린다.
갈색머리 일행들의 얼굴 표정이 급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석늑은 결정타로 한마디 더 던진다.
“저기 소형제와 금성부의 소공자는 서로 말을 놓고 지내며, 씨름도 같이하며 지내는 친한 동무 같아 보이던데….”
갈색 머리의 입이 열리는 듯하다가 옆으로 돌아간다. 무엇인가 말을 해야만 하는데, 적절한 어구 語句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자 석늑은 한마디 더 보충한다.
땅에 떨어진 이중부의 철창을 손으로 가리키며
“어, 저 철창도 오전에 청예 소공자가 직접 손 봐주는 것 같던데~~”
석늑이 하는 이야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사실이다.
내막은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그러나 듣는 사람들 처지에서는 엄청난 일들이다.
특히 갈색 머리에게는...
갈색 머리는 ‘아, 이... 이건…사실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왜냐하면,
갈색 머리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슝노의 천부장(千夫長 : 천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직책)을 지낸 대단한 내력 來歷을 가지고 있다.
초원을 떠난 산동의 흉노족은 지금까지 중원에서 투후부의 통솔을 받고 있었다.
그때에는, 천 부장이나 만 부장이 실권 없는 형식적인 명칭에 불과하였지만,
이제는 좁은 우리에서 벗어나, 넓은 야지 野地로 뛰쳐나온 야수 野獸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형식적이었던 호칭이 이제는 실체적인 모습을 갖출 것이다.
깊은 물 밑, 검은 바위 아래 웅크리고 있던 잠룡 潛龍이 드디어, 수면 위로 솟구쳐 튀어나왔다.
이제는 자신의 종족과 부족을 재결집시켜야 한다.
갈색 머리 ‘설태 누차’도 무예를 열심히 수련해 온 것도 천부장 직책을 이어받기 위함이다.
천부장이 되면 공적에 따라 만부장 萬夫長으로 승격도 가능해진다.
직책별 호칭, 그대로 천부장에서 만부장 (소왕 小王)으로 등극 登極 하려면, 기본적으로 수백, 수천 명의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만 한다.
그 경쟁에서 유리한 조건이 왕부 王府의 호위무사 護衛武士 출신이다.
왕부의 호위무사로 수년간 근무한다면 그 사람의 인성이나 자질, 충성도 등이 자연스레 검증 檢證되는 자리다.
그때 조직이 팽창하며 만부장 자리를 새로 만들거나, 아니면 기존의 만부장의 유고有故로 자리가 비게 되면 우선적으로 호위무사 출신의 천부장이 만부장으로 임명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호위무사는 조직 내의 인맥 人脈이 형성되는 가장 중요한 위치다.
천부장의 자녀 중, 한 명은 특별한 하자 瑕疵가 없으면, 음서제 蔭敍制로 천부장의 지위를 그대로 상속받게 된다.
그러니 모든 천부장의 자녀들은 천부장이 된다는 전제조건 前提條件 하에, 왕부 王府의 호위무사가 되고자, 각고 刻苦의 노력을 경주 競走한다.
그러니 백부장 百夫長과 일반 지원자들 외에도 호위무사가 되려고, 희망하는 천부장의 자녀들이 부지기수 不知其數다.
가령 천부장의 아들이 다섯 명이라면, 다섯 명 모두가 호위무사가 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힘을 쓸 것이다. 자식 중에 호위무사로 임명되는 아들에게 천부장 직위를 세습 世襲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불문율 不文律이다.
그만큼 왕부의 호위무사가 되는 길이 어렵고도 험난하다.
호위병은 직책명 職責 名. 그대로 왕을 측근에서 호위하는 것이 주 임무이므로, 우선 무술 실력이 탁월하여야 하고, 출신성분과 인성을 따져 보아야 한다.
그 어려운 왕부의 호위무사가 되고자, 갈색 머리는 이제껏 열심히 무예를 갈고 닦고 있었다. 자신의 1차 적인 인생 목표를 왕부의 호위무사가 되는 것으로 정했다.
호위무사가 되면 천부장이 되기 쉽다.
호위무사 출신이 천부장이 되고 나면, 드디어 일인지하 만인지상 一人之下 萬人之上의 말 그대로, 소왕야인 만부장이 될 가능성이 보인다.
모든 흉노의 무사들이 꿈꾸는 마지막 단계. 소왕야 小王爺 만부장 萬夫長.
왕부 내에서도 금청예 소공자가 총명하여, 남달리 심지 心志가 깊고 기질이 활달하다는 소문이 자자한바, 갈색 머리도 금청예 소공자를 차기 次期의 주군 主君으로 모실 것을 내심 內心 생각하고, 여러 통로를 통하여 소공자와의 대면 對面을 청탁 請託하였으나, 여태까지 아직 소식이 없었다.
천부장인 부친의 힘은 빌릴 수 없다.
왜?
부친은 다른 아들과의 경쟁 관계인 한 아들만 편애 偏愛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친은 자식들 경쟁의 심판관 역할이다.
다른 자식이 천 부장 자리 경쟁을 포기한다는 의사를 명백히 표명하기 전에는 어느 쪽의 손을 먼저 들어 줄 수는 없다.
그러니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토록 만나기 어려운 왕부의 소공자를 하필, 저 소년들이 친구로 사귀고 있다니,
청예 소공자의 친한 동무를 저토록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았으니, 그것도 내 손으로 직접….
‘아~ 아니다, 이건 아니야.’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 일이 꼬여도 확실히 잘 못 꼬였다.
갈색 머리, 뇌가 복잡해지니 표정도 어벙해지며,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가로젓는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해법이 없다.
대안이 서질 않는다.
그러자,
갈색 머리의 난감해하는 표정을 눈치 빠르게 파악한 한준.
갑자기 큰 소리를 내 지른다.
“아이코” 하더니 그 자리에서 뒤로 누워버린다.
장내의 모든 눈길이 한준에게로 쏠린다.
한준은 누운 자세에서 갈색 머리에게 마지막으로 창 자루에 심하게 맞은 부위 즉, 왼 발목을 양손으로 거머쥐고는 “아이고 아야~” 뒤늦게 비명을 크게 내지른다.
이중부도 장단을 맞추어 준다.
절뚝거리며 아픈 다리를 더 크게 절며, 한준에게 다가간다.
“많이 아파, 어디 보자”
한준의 하의를 종아리까지 걷어본다.
그러자 왼 발목 바깥쪽이 시퍼렇게 퉁퉁 부어있다.
창 자루에 정통으로 맞은 한일자(ㅡ) 표시가 가로로 선명하게 그어져 있다.
지금도 계속 부어오르는 상태다.
이를 바라보는 갈색 머리는 대경실색 大驚失色한다.
석늑도 말에서 내려 한준에게 다가간다.
“어, 발목이 왜 그래?”
“창 자루에 맞아서 그래요”
“누가 그랬지?”
“저기 갈색 머리요”
석늑이 갈색 머리를 바라본다. '한준의 말이 사실이냐?' 고 묻는 눈빛이다.
“...”
갈색 머리는 어쩔 줄을 모른다. 죄를 지은 범죄자의 모습이다.
마치 포도청 捕盜廳에서 범죄자를 심문하는 풍경이다.
잠시 후,
“햐~ 이를 어쩐다….”
석늑은 고뇌 苦惱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이중부와 한준을 보고는
“자네들, 내일 금성부에 가기로 약속한 것을 며칠 미루면 안 되겠나?”
“...”
실은 쌍방이 약속한 것은 아니다.
김청예의 일방적인 초청이다.
가면 좋고 가지 않는다고 해도, 아무도 욕할 사람 없는 가벼운 인사치레 초청이다.
그런데 석늑은 옆 사람들이 듣기에는 두 소년과 금성 왕부의 소공자가 아주 중요한 약속을 한 것처럼 얘기한다.
그러나 갈색 머리에게는 석늑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자신의 심장을 파고드는 기분이다.
갈색 머리는 자신의 갈색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느낌이다.
현재 상황이 이젠, 함구 緘口만으로 사건이 해결될 일이 아니다.
누워있는 한준과 이중부에게 다가간다.
“소형제 많이 아픈가?”
이놈 저놈이 갑자기 소형제로 변신 變身한다.
“아야, 아 아~ 야”
한준 소형제는 더 큰 소리로 비명을 계속 지른다.
이중부는 ‘이렇게 아픈 걸 여태까지 어떻게 참았을까?’ 감히 내색 內色은 못 하고 속으로만 이죽거리며, 자리를 옆으로 옮겨 치료할 공간을 내어준다.
갈색 머리는 주위의 동생들을 둘러보며, 비전 祕傳의 처방전 處方箋을 외친다.
“약쑥 듬뿍 뜯어와”
졸지에 약쑥 조달 담당자가 되어버린 개구리와 불곰, 부드러운 약쑥을 한 줌씩 가져온다.
갈색머리는 품속에서 날카로운 단도 短刀를 꺼내, 한준의 부풀어 오르는 발목을 세로로 살짝 그어 조그만 상처를 낸 후, 응혈 凝血된 검붉은 피를 짜낸다.
자해 공갈단 自害 恐喝團들은 자신의 팔에 칼이나 날카로운 병 조각 등으로 자해할 때 절대로 신체의 가로 방향으로는 긋치 않는다.
왜?
주요 혈관은 신체의 생긴 모습 그대로 혈류 血流가 흐르기 때문이다.
가로로 자해하면, 흥분한 상태에서 자칫 동맥 動脈이나 굵은 혈맥 血脈이 끊어질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단, 배는 가로로 긋기도 한다. 다른 신체 부위에 비해 복부 腹部 는 지방 脂肪 층이 두터워 굵은 혈관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일단, 신체에서 붉은 피가 나오고, 그것으로 인하여 공포 분위기만 조성하면 된다.
조폭이나 자해 공갈단들은 이를 이용하여 시각적 視覺的인 전시 展示 효과를 최대한으로 노린다.
어혈 瘀血 즉, 죽은 피를 빼야 상처 부위가 빨리 치유되고 회복된다.
그리고, 약쑥을 비비고 찧어 환부에 바른 후, 얼른 자신의 앞 적삼을 찢어 상처 부위를 동여맨다.
그리고 “소형제들 아까는 몰라보고 실수했네, 미안하네”하며 멋쩍은 표정으로 사과한다.
그리고는 석늑을 바라보며 송구 悚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우리 동생들이 소형제들에게 당한 걸 보고, 화가 치밀어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설 공자! 나한테 미안해할 것 없어요, 소형제들 상처가 염려될 뿐이지.”하더니 이 중부와 한준을 보면서
“아마 며칠은 거동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 소형제들 내일은 금성부의 소공자, 모레는 십칠 선생님 등 계속 사람들을 만날 중요한 약속이 있는 것 같은데~~”
말 뒤 끝을 계속 흐린다.
갈색 머리는 한준의 바지를 걷어 올려, 약쑥으로 처방 處方한 발목을 바라보며 말없이 머뭇거리고 있다.
또 다시, 석늑의 말이 느릿하게 이어진다.
“저 몰골로 사람들 대면하기도 어려워 보이고….
또, 상처 부위가 보아하니 상당히 아플 것 같은데~~.
치료하려면 의원에도 몇 날 며칠 다녀야 할 것 같고….
몸조리에 한동안 신경을 좀 써야 할 것 같은데~~”
계속 '고…' '데~~'로 혼잣말처럼 길게 이어간다.
이를 옆에서 듣고 있는 갈색 머리, 설태 누차의 이마에 진땀이 난다.
좀 전까지, 두 사람을 상대로 창 자루를 거꾸로 들고, 사방팔방으로 마구 휘저을 때도 땀 한 방울 안 흘리든 갈색 머리, 석늑의 몇 마디 말에 얼굴은 사색 死色이 되고, 이마엔 진땀을 흘리고 있다.
석양에 비친 갈색 머리카락 덕분에 땀방울이 무지개색으로 아롱져 보인다.
갈색 머리의 머릿속은 바깥의 무지개색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온갖 삼라만상 參羅萬像의 색깔들이 현란스럽게 요동치고 있다.
‘아~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식의 대화는 고문이다.
아주 지능적인 뇌 고문이다.
신체에 가하는 물리적 物理的 육체적인 고통보다, 두뇌 頭腦를 압박하고 혼란 混亂시키는 정신적인 고문이 더 아프고 괴롭다.
갈색 머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괴로운, 뇌 고문 腦 拷問을 당하고 있다.
상대방은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라’ ‘어떻게 해 달라’는 식의 요구조건을 먼저 제시하지 않고,
‘네가 알아서 해결책을 제시해 보라’는 식으로 은근히 압박 壓迫을 가하고 있다.
석늑은 마치, 고단수 해결사 解決士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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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작가분은 조폭이나 해결사 출신인가요?
너무 리얼합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