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사(菩提寺) / 전통사찰
- 경북 경주시 배반동
통일신라 때 처음 절이 세워졌지만 절에 대한 기록이 없다.
통일신라 때 보리사는 남산에 기거하는 절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다고 한다.
1980년대 비구니들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비구니 사찰답게 깔끔하다.
오후 5시가 까까운 시각에 들른 탓에 전각 안은 보질 않았고 석불좌상만 자세히 봤다.
마애불도 근처에 있지만 찾다가 포기하였다.
범종각
대웅전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보물
- 경북 경주시 배반동, 보리사 경내
불상 높이 2.44m, 대좌 높이 1.92m, 보리사지석불좌상이라고도 하였다.
대좌와 광배(光背)를 모두 갖춘 완전한 불상으로 본디 법당에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노천에 드러나 있다.
광배 윗부분에 금이 가고 대좌도 깨진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보존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큼직한 육계(肉髻)가 표현된 나발(螺髮)의 머리에, 얼굴은 장방형으로 양감이 풍부한 편은 아니지만,
가늘게 뜬 긴 눈, 오똑한 코,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듯한 입 등이 조화를 이루며 묘사되어 있다.
얼굴은 신체와 다른 돌로 이루어졌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게 보인다.
좁아진 듯한 어깨에 가슴은 건장한 편이지만 평평하게 처리되어 석굴암본존불에서 느껴지는 탄력과 긴장감은 많이 줄어들었다/
(인터넷-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수정)
첫 느낌, 프랑스 배우 알랭 드롱이 떠올랐다. 매우 잘생긴 얼굴이며 잔잔한 미소는 감탄이다.
그리스 석상을 보는 듯한 느낌, 기분이 좋다.
광배 뒷면 불상은 잘 보이질 않는다. 보존처리를 하면 깔끔하게 보이겠다.
약사여래좌상 1구가 선각(線刻)되어 있다.
이런 수법은 밀양 무봉사 석조여래좌상(보물)이나 경북대학교 소장 광배 등에서 희귀하게 나타나는 예이다.
보리사 마애석불을 찾아 나섰지만 20여 분 헤매다가 포기하였다. 날이 어둡지 않았으면 포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음에 다시 와야겠다. 근처 망덕사지 당간지주가 있는데 이것도 지나쳤다.
경주 사천왕사지 당간지주 / 경북 유형문화유산
- 경북 경주시 배반동
경주 사천왕사지 / 사적
- 경북 경주시 배반동
『삼국유사』 문호왕 법민조(文虎王 法敏條)에 기록에 건립 설화가 있다.
삼국통일 직후인 679년(문무왕 19)에 창건, 건너편 망덕사(望德寺)보다 5년 앞서 건립되었다.
675년(문무왕 15) 당나라의 50만 대군이 신라를 침공하자, 이를 막기 위하여 이곳에 채백(彩帛)으로 가사(假寺)를 만들고
초목(草木)으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 명랑법사(明郞法師)가 12명의 명승과 함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자
교전(交戰)도 하기 전에 풍랑이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가라앉았다.
가사(假寺/임시 사용)에 절을 짓고 사천왕사 이름을 짓고 국찰(國刹)로 삼았다. 삼국통일 후 처음 지어진 절이라 한다.
『고려사』에는 문종 때에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도량을 27일간 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사찰이 유지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김시습의 시 「유금오록(遊金鰲錄)」을 통해, 15세기 후반 경 이미 민가(民家)로 변해버렸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여러 차례 수습 조사하였으나 전체 가람배치와 녹유소조상의 배치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확인되었다.
2024년 10월 25일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