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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장하는 사람 / 열왕기상 14:1-20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어디를 가든,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사는 것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것보다 더 큰 복입니다. 이것은 매우 귀한 복입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가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축복을 받고, 평생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을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다윗처럼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않았습니다. 여로보암은 매우 악독했습니다. 그는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저버리는 매우 악한 왕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신 말씀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10~11절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버리되, 거름 더미를 쓸어 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하셨나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저주를 받지 않고, 백성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장례식을 하고 무덤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절하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아비야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뜻을 품었기 때문에, 저주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비야는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통곡하는 가운데 장례식을 했습니다. 아비야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뜻을 품어, 저주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비야가 어떻게 행동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추측할 뿐입니니다. 아비야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뜻을 품은 것만으로도,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을 가진 것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 어떤 상황에서든, 무슨 일을 하든지, 매 순간 우리의 마음 상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좋은 생각을 하는가, 고약한 생각을 하는가에 따라, 복을 받을 수도 있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가짐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뜻을 항상 품고 살아야 합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의 관심은,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종교 체제를 갖추어 유지함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에게 붙들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남쪽이든 북쪽이든 이스라엘이 종교적, 행정적인 체제를 갖추어서, 탄탄한 국가로 번성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여로보암도 르호보암도 아니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믿는다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의 관심은,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산당을 세우고, 제사장을 세우고, 제사를 드렸지만, 그 모두는 이스라엘의 믿음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도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을, 사자에게 죽게 하심으로써,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 자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여전히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누구든 자원만 하면, 그가 보통 사람이라고 해도 제사장을 삼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씀은 말씀대로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성도는 언제나 말씀에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하고, 말씀이 계시하는 진리의 길을 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곧 참된 교회라면, 목사든 성도든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말씀이야 어떻든 내가 다스리는 나라가 부강해지면 된다는 것은, 결국 여로보암과 같은 죄만 만들어 낼 뿐입니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만들었든 만들지 못했든, 그는 자신이 만든 종교 체제로, 이스라엘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그 죄가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를 보면, 교회가 부흥만 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분위기입니다. 무엇을 하든 교회 부흥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고, 교회가 부흥만 되면 모든 것이 옳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말씀도 교회 부흥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외면해 버립니다. 이러한 것이 말씀을 외면한 여로보암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처럼 말씀을 외면하고,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않는,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이 듭니다. 이 일은 13:34절의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는 내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곧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를 병들게 함으로써, 여로보암의 집이 하나님 앞에 끊어져 멸망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비야가 병들고 죽게 되는 것은, 아비야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아비인 여로보암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13절 “온 이스라엘이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에서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이렇게 말한 것처럼, 여로보암 집에서 여호와를 향한 선한 뜻을 품고 산 사람은, 아비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아비야를 병들게 하시고, 죽게 하시는 것은, 아비야의 죽음을 통해서, 지금 여로보암 집이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인가를 보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여로보암은 자신이 어떤 상태인가를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아비야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선지자에게 그 아내를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로보암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것으로 인해, 여로보암 집이 끊어져 멸망 받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리고 그 증거물로, 하나님께 선한 뜻을 품고 살았던 아비야를 병들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병든 아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로보암의 이러한 어리석음과 상관없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도 내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살피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식이 장래 어떻게 될 것인지, 내가 하는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관심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보지 않는 여로보암의 어리석음은, 선지자 아히야에게 아내를 보내는 일에서도 드러납니다. 2-3절 “여로보암이 자기 아내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들이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그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말한 사람이니라. 그대의 손에 떡 열 개와 과자와 꿀 한 병을 가지고 그에게로 가라. 그가 그대에게 이 아이가 어떻게 될지를 알게 하리라.” 여로보암은 왜 자신이 직접 선지자를 찾아가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고 아내를 보내면서도 왜 변장을 시켜서, 자신의 아내임을 감추려고 하는 것일까요? 아히야는 11장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빼앗아, 여로보암에게 줄 것임을 예언했던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여로보암이 아내를 아히야에게 보내는 것은,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 능력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이 직접 가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지금 자신이 아히야가 권고한 말씀에, 순종하는 길에서 멀어져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내를 보내면서도,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아보지 못하게 변장을 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신의 아내임을 알게 되면, 분명 좋은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변장을 합니다. 변장하는 것이 인간의 주특기입니다. 자신에게 약점이 되고, 불리할 수 있는 모습은 감추고, 유리한 거짓된 모습으로 타인 앞에 나서고자 합니다. 윤리와 도덕도 변장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인격과 도덕을 갖춤으로써 자신의 악을 가리고, 선한 자로 세상에 나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조폭의 두목이 교도소에서 믿음을 가졌다거나, 출소한 후에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들려오지만, 얼마 후에 또 들리는 것은, 또 다른 일로 인해 구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도 좋은 일도, 자신을 가리는 변장의 일환이었을 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변장이 그들에게만 있는 일이겠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자신을 가리는 것은, 인간의 주특기임으로, 모든 사람들이 변장을 하면서 살아감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목사도 성도도 서로에게 자신의 신앙이 좋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꾸며대는, 거짓된 행동들이 곧 변장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에 오직 한분에게는, 인간의 그 어떤 변장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서도 그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로보암의 아내가 변장을 하였고, 더군다나 선지자 아히야는 나이로 인해,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변장을 한 여로보암의 아내를, 도저히 알아 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히야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 여로보암의 아내가 변장을 하여, 아비야가 어떻게 될 것을 물으러온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그에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아히야 선지자는 6-12절에서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다윗의 길을 따르지 아니한 여로보암의 악에 대해 책망을 하고, 아이가 죽을 것에 대해 예언을 합니다. 결국 여로보암이 아무리 자신을 감추려고 해도,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런 분임을 알았다면,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 최선일까요? 그것은 자신을 가리지 않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자신을 가리지 않는다면, 나타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을 어기고, 악을 행하며, 순종하지 아니한 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에게 있을 것을, 회개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여로보암은 이것을 아비야가 병든 것에서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악한 길로 가고 있는 자신의 현재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찾지를 않습니다. 아비야가 병든 일에서도, 아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만 알고자 할 뿐이지, 하나님이 아비야를 통하여,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떠함을 보이고 계심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14-16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위에 한 왕을 일으키신즉, 그가 그 날에 여로보암의 집을 끊어 버리리라. 언제냐 하니 곧 이제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쳐서,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 같이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그의 조상들에게 주신 이 좋은 땅에서 뽑아, 그들을 강 너머로 흩으시리니, 그들이 아세라 상을 만들어,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음이니라.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그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하였음이니라 하니라.”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이런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래를, 아비야의 죽음에 담아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한 뜻을 품고 살았던 아비야의 죽음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셨던,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받아야 할 우리의 실체를 보게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자신의 구원을 바라볼 뿐,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신의 본 모습을 보지 않습니다. 마치 자신만큼은 말씀에 순종하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 것처럼, 불의의 길을 가는 자신을 인정하지도, 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변장술에 능한 사람들이 변장된 자신의 모습만 바라볼 뿐, 변장된 모습 안에 감추어진 실체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하면서도, 회개가 없고 애통이 없는 것입니다. 회개도 애통함도 없으니, 그 입에서 나오는 은혜도 거짓된 것일 뿐이고, 따라서 은혜로 맺어지는 열매도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있다면 다만 인간의 노력에 의한, 도덕적 실천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으로,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스스로 교회라고 하는 모임은 많되, 참된 교회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변장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의로 여기는 옷을 입어서, 자신을 가리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속을 보시는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어떠한 자인가를 낱낱이 파악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참으로 고집스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사자에게 죽고, 늙은 선지자가 죽은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하고, 자신이 죽거든 그 뼈 옆에 자신의 뼈를 두라고 유언을 하면서, 자신이 말씀을 가볍게 여긴 죽어야 할 자임을 깨닫는 사건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되어 진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가 십자가 앞에 나온다는 것은, 그러한 고집이 꺾이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저주 아래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씀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지독한 고집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저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 죽으셨노라며, 십자가를 즐길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변장을 지우고, 정직한 자신의 모습 그대로 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부끄러움을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변장한 모습으로 세상을 활보하면서, 자신의 본모습을 세상이 보지 못한다는 것으로, 안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말씀 앞에 정직한 그가 성도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고, 회개와 애통함으로 주님께 나오는 그가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회개와 애통함이 곧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아비야는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은, 죄악이 가득한 곳이었지만, 그는 부모님처럼 변장 뒤에 숨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정직한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거보다 생활이 나아졌기 때문에 좋은 옷을 입고, 머리 단장을 하고, 여자들은 여러 겹의 화장까지 하고, 멋지게 꾸미고 다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이 온갖 더럽고 추악한 죄악으로 가득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는 외모도 단정하게 해야 하지만, 외모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3:27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거짓된 변장이 있다면 그것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정직한 모습으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내 안에 더러운 것을 떨쳐버리고, 겉과 속이 정결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숨기는 자는 용서하지 않지만,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멋지게 단장을 하고, 변장을 해서 멋있는 사람인 양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우리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변장을 벗고 회개해야 합니다. 변장을 벗고 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서 회개하고 죄를 버려야 합니다. 나쁜 습관과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비야 왕자가, 집안 모든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가지 않고, 홀로 의의 길로 간 것처럼,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여로보암에게 주시는 경고가 우리의 경고가 되고, 우리의 거울이 될 수 있도록 깊이 돌아보게 하옵소서. 나는 기도도 할만큼 했다고 버티고 고집 부리지 말게 하옵소서. 나는 예배도 드렸다고 버티고 있지 말고,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여로보암과 그 아내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거울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삶의 경험을, 은혜의 기회로 활용하는 지혜를 갖게 하옵소서. 그것이 질병이어도, 역경이고 실패여도, 또는 절망이어도 믿음으로 활용하면, 그래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진솔하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은혜의 기회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기회를 붙잡아 영생을 잃지 않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