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35,4-7ㄴ; 야고 2,1-5; 마르 7,31-37
+ 오소서, 성령님
무더웠던 여름이 점차 지나가고 아침에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기도 하고, 라디오에서는 비발디의 사계 중 가을이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무더운 나라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뜨거움’이라는 주제는 고통과 연관될 때가 많고, 이에 비해 ‘시원한 물’이 구원의 상징으로 묘사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로 예언하는데요, 좋은 땅을 사막으로 만들어 버린 인간의 교만이 무너지고 하느님의 구원이 꽃피는 새로운 세상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오는 광경을 예언하고 있는데요,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는 예언은,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느님 말씀에 귀를 막아 유배를 떠났던 백성이, 이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보고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못하는 이의 혀가 환성을 터뜨리듯’ 이제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업적을 전하게 됩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인해 완성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해 주시는데요,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예언했다면, 예수님의 치유는 온 인류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주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온 인류의 해방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1800년 뒤 우리나라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는데요, 천주교를 처음 접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그야말로 ‘눈먼 이들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의 귀가 열리는’ 체험을 하셨습니다. 말못하는 이가 환성을 올리듯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순교자 성월을 맞아 작년과 마찬가지로 주일에 한국 성인들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 하는데요, 오늘은 최양업 신부님의 어머니 복녀 이성례 마리아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이미 들어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오늘은 최양업 신부님께서 쓰신 편지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1821년 청양 다락골에서 태어나신 최양업 신부님은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36년, 열다섯 살의 나이에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는데요, 불과 3년 뒤인 1839년, 기해박해로 고국에서 아버지가 순교하시고 이듬해 어머니도 순교하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들어온 최양업 신부님은 사목활동 틈틈이 스승 신부님들에게 라틴어로 편지를 써서 조선교회의 일들을 알리셨습니다.
남아 있는 열여덟 통의 편지 중 여덟 번째 편지가 가장 긴데요, 왜냐하면 여기에서 당신 부모님의 순교 이야기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당신의 사목활동에 대해 보고한 후, 순교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삼천리 강토를 아름답게 꾸민 수많은 순교의 꽃 중에서 어느 꽃다발을 먼저 신부님께 보내드릴까요? 자식된 도리로 보나 신부님의 관심사로 보나 저의 부모님께 대하여 우선 말씀드리는 것이 당연한 줄로 압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부모님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복녀 이성례 마리아는 여섯 아들을 두었고, 그중 맏이인 최양업 토마스를 신학생으로 봉헌했습니다. 부모님은 박해를 피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가난과 굶주림 가운데 산속으로 방황하기를 몇 년간 거듭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 칭얼거리면 이성례 마리아는 예수님과 성모님, 성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가시던 이야기와,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오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식들에게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주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마을 사람들을 권고하여 의연금을 거두고 그들과 함께 50리 떨어진 한양으로 올라가 순교자의 시신을 찾아 매장해 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자기 마을 신자들에게도 순교를 준비시킬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여 날마다 신자들을 모아놓고 열성적인 말로 격려하면서 용감히 순교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어느 날, 날이 밝기 훨씬 전에 포졸들이 문밖에 와서 주인을 찾자, 프란치스코는 때가 왔음을 알고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였습니다. 이성례 마리아는 아침밥을 지어 포졸들에게 차려주었고 프란치스코는 장롱에서 옷을 꺼내어 포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입혀 주었습니다.
아침을 먹은 후 어른부터 아이까지 40명이 넘는 남녀 신자들이 포졸들에 의해 한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때는 7월이라 찜통 같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길을 가는 내내 이 행렬을 보고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불쌍하다고 혀를 차며 한숨 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다섯 동생도 감옥에 갇혔는데, 큰동생 야고보는 열네 살이었고 막내동생은 두 살이었습니다. 야고보는 곤장을 맞고 고문을 당하다 정신을 잃고, 의식이 없는 가운데 배교하겠다는 말을 하고 풀려났습니다.
40일 동안의 모진 고문 끝에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9월 12일, 서른네 살의 나이로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편 두 살짜리 막내아들과 함께 수감되었던 이성례 마리아는, 살이 찢어지고 팔다리가 부러지는 고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를 직접 인용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육체적 고문 외에도 가장 큰 마음의 고통은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였습니다. 갓난아기가 젖을 달라고 하는데 젖은 안 나오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데 먹일 것이 없어서 아기는 엄마의 눈앞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꿋꿋이 버티었지만, 남편이 모진 고문 끝에 죽고, 어린 것이 더러운 감방에 축 늘어져 누운 것을 보며 마리아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곤장에도 칼에도 용맹하였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살덩이와 핏덩어리들이 더럽게 흩어져 있는 감옥에서 마리아는 마음과는 달리 거짓말로 배교한다고 한마디 함으로써 현세적, 영신적 구원을 함께 도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배교하는 말을 하고 감옥에서 풀려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자하심으로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다시 구제하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마리아가 배교하여 풀려나 집에 가 있는 동안에 맏아들 최 토마스가 마카오에 보내져 라틴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탄로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마리아는 상급 재판소인 형조로 이송되었습니다.
거기에 갇혀 있던 신자들이 마리아에게 배교를 취소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 말에 감동되어 마리아는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재판관 앞에서 자기의 배교를 용감히 취소하였습니다. … 여기서 마리아는 자기의 아기가 기아와 비참으로 말미암아 눈앞에서 죽는 끔찍한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
마리아는 형조에서 세 차례의 고문을 당한 후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당할 날이 가까워오자 야고보를 불러 마지막 훈계를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들 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도록 타일렀습니다. …
마리아는 야고보에게 형장에 따라오지 말도록 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나이 어린 야고보는 고아로 남겨질 어린 세 동생을 거느리고 살아야 될 처지에 있었는데, 자신이 형장에서 그 어린 야고보의 모습을 보고서 모정에 끌려 약해지고 마음이 흔들릴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모정에 눈물짓는 어머니에게 영생의 작별 인사를 하고서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야고보는 감옥의 사람들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를 조심스럽게 지켜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다른 6명의 증거자들과 함께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로 형장에 이끌려 나아갔습니다. 마리아는 휘광이의 칼을 받고 1840년 1월 31일에 서른아홉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이제 편지를 마치면서 경애하올 모든 신부님들께서… 저와 저의 가련한 신자들을 위하여 항상 기도 중에 기억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지극히 미약한 조선 대목구의 교황 파견 선교사 최 토마스 올림.”
저는 이 편지를 읽으며, 당신의 부모님의 순교 소식을 전하는 최양업 신부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머니께서 풀려나셨지만, 자신을 신학생으로 봉헌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붙잡히고, 그로 인해 막내 동생에 이어 어머니가 순교하셨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요.
최양업 신부님은 부모님께서 순교하신 지 10년 뒤 조선에 들어오셔서 11년 6개월 동안 전국 127개가 되는 교우촌을 다니시며 6천 명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시느라 해마다 7천 리씩 걸으셨고, 결국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와 비슷한 나이인 40세의 나이로 선종하셨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땀의 순교 이면에는 먼저 부모님의 피의 순교가 있었습니다. 아들의 첫미사도 함께 드리지 못하고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하셨던 부모님의 헌신과 봉헌이, 그리고 동생들의 희생이, 어떤 때는 하루에 40킬로미터의 길을 걸으며 전국을 다니셔야 했던 최양업 신부님의 발걸음마다 배어 있는 듯합니다.
제가 캐나다에 있었을 때, 신자가 아닌 분들이 한인 성당 사무실에 찾아와 자녀를 가톨릭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가짜로 천주교 신자라는 증명서를 떼달라고 부탁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이 부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보고 ‘세상이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200년 전에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증명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가끔 ‘만일 내가 박해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나도 순교할 수 있었을까?’라고 물어보고는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순교성인께서 지금 태어나신다면 어떻게 사셨을까’하는 것입니다.
이성례 마리아께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사는 이 동네에 살고 계시다면, 어떻게 사셨을까요? 그것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진정 순교 성인을 본받는 길이 될 것입니다.
103위 순교성인에서 제외되셨던 이성례 마리아는 2014년, 한국을 방문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시복되셨습니다.
복녀 이성례 마리아여, 저희도 입이 열려, 어떤 처지에서도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복녀 이성례 마리아
출처: 당고개(용산) 순교성지 - 이성례 마리아 (1801 ~ 1839) (danggoga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