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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1편 16절-18절: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6절: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주님은 마음을 찢지 않고, 통회 자복하지 않고 짐승만 잡아 제사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다윗이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은 제사하는 자가 짐승을 잡아서 드리기만 하면 이미 지은 죄를 다 사함을 받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은 바꾸지 않고 죄를 지을 적마다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주님이 세상사람들처럼 삼겹살을 좋아하셨다면 다윗은 이런 기도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 짐승을 잡아드렸을 거다.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번제’란 자기 전폭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인간 자기의 주관성을 가지고 자기 뜻을 따라 사명감으로 하나님께 몸을 바치겠다고 하는 것은 번제의 정신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정신 사상은 받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나 대신 죽으셨으니 내가 당신을 위해서 죽으리이다’ 라고 하면서 종교적인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하지 말고 ‘너나 똑바로 만들어져라’ 라고 하신다. 안 만들어진 상태에서 ‘주님이 나를 위해 죽어 주셨으니 나도 그 은혜에 감사해서 주님을 위해 죽겠습니다’ 라고 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우리로 그 은혜를 갚아달라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게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는 교만이 가득한 희생은 받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은 ‘네가 만들어져라. 내 마음을 좀 닮아라. 내 정신을 좀 닮아라. 내 인격과 성품을 닮아라’ 이거다.
주님을 위해 희생 봉사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속의 가치판단과 평가성이 분명해야 한다. 소위 사명자라고 하면서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하겠다는 사람을 보면 가치판단 평가성이 세상 쪽 인간 쪽으로 많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함으로 나의 봉사심을 상대방이 알아서 감화 감동이 되어서 예수를 믿지 않겠느냐?’ 하는 사고방식이다.
이런 생각으로 안 믿는 사람들을 위해 희생 봉사를 하면 그들은 내가 봉사하는 그 열매만 따먹고 더 달라고 하지 예수는 믿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거나 심심하면 예수 믿는 사람을 부른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가 좋아서 예수 믿는 사람을 부르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잘 해 주니까 부르는 거다.
성경에 ‘안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너희 선행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선행’이란 사람을 깨우치는 것을 말한다. ‘아, 사람은 이렇게 사는 거로구나. 이게 나를 만드신 창조의 목적이구나’ 이런 걸 깨우쳐 주는 게 선이다. 그런데 이건 없이 목욕시켜주고 머리 감겨주고 하니까 이게 좋아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욕은 안 할 것이고, 인간의 어떤 정이 좋아서 교회에 나올 수는 있겠지만 기독자의 일반적인 아름다운 선행을 따먹기만 하지 참 예수는 안 믿는다. 이런 사람은 정말로 예수님의 정신 사상이 좋아서 믿는 게 아니다. 진리로 인해 정신 사상이 바꿔지지 않는 한 예수를 믿지 않는다.
우리 주님은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 대하여 당신의 온전함을 다 드렸다. 평생 동안 하나님께 전 인격, 전 생애를 다 드렸다. 이것이 번제다. 평소에 전 인격 전 생애를 다 드리고 살았다는 의미로서 마지막에 십자가에 번제로 드려진 거다. 이 이치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게 번제냐? 하나님의 온전함을 입어나가는 것이 번제다. 자꾸 입는 거다. 하나님의 것으로 자꾸 입으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 이게 하나님 앞에 드려진 번제다. 제물이 바로 된 희생의 제사는 하나님의 온전함을 입어나가는 거다. 옛사람의 자기 주관성이 죽어나가면서 새사람, 즉 하나님의 성품이 입어져 나간다. 이게 제사다.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것이 제사다.
17절: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상한 심령을 구별을 해야 한다. 교회에서 흔히들 사회적으로 왕따 당하고 얻어맞고 가난하게 살면서 마음이 상한 것을 본 절에서 말하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는데 성도의 상한 심령은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 나오지만 모르면 일반 세상적인 상한 심령이 나오게 된다.
그러면 성도의 상한 심령이 무엇이냐? 첫 번째는 죄 아래 죄에 넘어진 상태, 즉 진리신앙이 뭔지 알지 못하면서 사명감으로 주님을 위해 일을 한다고 하며 시간낭비, 물질낭비, 노력낭비, 일생을 낭비하며 자타의 이룰구원을 망치고 사망성공을 이뤄놓는 게 죄에 넘어진 상태인데, 이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신앙정신 사상에서 깨달아지는 거다. 자기의 이런 상태를 깨닫고 마음 아파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다.
두 번째는 세상원망 남 원망하며 살아온 것이 죄에 넘어진 상태인데, 우리 기독자들은 원망이 있을 수 없다. 그 이유가 뭐냐? 세상 모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 되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서 고치고 고치고 영특한 자로, 총명한 자로, 지혜로운 자로 자꾸 만들어지면 되는 거다. 세상을 원망하고 남을 원망하는 것은 다 죄인데, 이것을 깨닫고 마음 아파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다.
세 번째는 자기의 옛사람 부패성적인 주관적인 교만으로 사는 것이 죄에 넘어진 상태요, 네 번째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비진리의 신앙으로 살아온 것. 잘못 배우고, 잘못 깨닫고, 잘못된 정신의 신앙으로 살아온 것이 죄에 넘어진 상태인데,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마음 아파하는 것이 상한 심령이다. 이것뿐이겠느냐? 내가 참 나를 알지 못해서 내가 나에게 속고, 내가 남에게 속고, 내가 또 남을 속이면서 산 것도 다 죄인데, 이런 걸 생각을 하니 하나님 앞에 마음이 아픈 것이 상한 심령이다.
세상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마음이 상하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실수이던 아니던 간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면 일반적으로 자기 마음이 아프다. 그 다음에는 내가 도둑을 맞거나 사기를 당하거나 해서 물질에 손해를 봤을 때 마음이 상한다. 그러나 성도는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 사상 면에서 자꾸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짓을 하며 살다가 말씀을 깨닫고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았구나’ 할 때 마음이 상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신앙의 세계에서 하나님 앞에 마음이 상한 것은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도 속이 상하는 게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의 아픔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못 살고 못 선 것을 깨닫고 보니 ‘아차’ 하면서 속이 아려지는 거다. 우리는 좀 더 나아가서 우리의 속에 하나님의 것이 없는 것, 그러니까 사랑이 없다든지, 지식이 없다든지, 구별력이 없다든지, 진실성이 없다든지, 그래서 미움성만 가득 찼고, 욕심만 가득 찬 이런 것을 깨닫고 마음 아파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자기의 속에 하나님의 것이 없는 것을 한탄하는 상한 심령을 가져야 주님께서 이 상한 심령을 멸시치 않는다고 한다. 멸시치 않는다는 것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마음이 상한 것과, 하나님 앞에 신앙 면에서 마음이 상한 것을 구별하면서 나에게 하나님의 것이 없는 것을 깨닫고 이것을 마음 아파하며 채워나가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진리 지혜지식을 많이 받게 되면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손해를 주지 않게 된다. 우리는 일반적인 손해도 안 줘야 되겠고, 자타의 신앙 면에 손해를 주어서 마음이 상할 일을 하면 안 된다. 자기만 부지런하고 자기만 바로 하면 자기에게는 그만큼 손해는 없어진다.
상한 심령의 일반적인 뜻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혔을 때 마음이 아픈 것을 말한다. 이런 일반적인 뜻은 안 믿는 사람들도 자기 양심적으로 다 안다. 일반적으로는 주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잘못했을 때 상한 심령이 된다. 즉 주로 다른 사람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나 신앙 면에서는 자기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때 마음이 상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안 아프게 하는 거냐? 자기 속에 하나님의 것을 많이 집어넣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는 않고 사람의 마음만 기쁘게 하면 이건 인본주의 사고방식이다. 이건 하나님 앞에 잘리는 거다. 미움을 받는 거다. 징계를 받게 되어있다. 이제 상한 심령이 뭔지 알았느냐?
멸시치 않는다는 것은 도움을 주겠다는 건데, 상한 심령이라야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한 심령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이런 심령을 가지려면 인간의 수준 이상으로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린아이는 어른의 생각을 못하듯이 우리가 늘 인간의 생각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의 생각으로 올라갈 수가 없다. 우리는 성경을 깨닫고 자기의 생각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
18절: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시온’은 ‘높은 봉우리’라는 의미요, ‘예루살렘’이란 ‘평화의 터’를 의미한다. 다윗이 참회의 기도 후에 주님의 은택과 축복으로 예루살렘이 튼튼히 서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거다. 이것을 계시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택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선의 나라가 서게 해 달라는 거다.
17절에서는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하는 상한 심령이 주님의 은택으로 하나님의 고차원적인 인격으로 온전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들어있고, 18절에서는 17절 말씀의 사상 위에 신앙사상을 굳게 세워달라는 거다. 그러니까 17절과 18절의 말씀에는 우리가 어떤 통회 자복을 해야 한다는 게 들어있다. 다른 말로는 ‘어떤 제사라야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이다’ 라고 하는 게 들어있다. 일반개념은 18절에 안 들어간다.
통회 자복하는 심령이 어떤 거냐? 앞에서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을 몇 가지 말을 했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마지막의 상한 심령이다. 즉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과 인격, 그러니까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이나 하나님의 선 사랑 거룩 진실이나, 하나님의 의나 주권성이 내 속에 없구나’ 하면서 마음 아파하는 심령이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이런 게 내 속에 없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값을 하겠느냐? 어떻게 천국백성으로서 고상한 도덕성이 나오겠느냐? 안 나온다. 그러니 인격적 차원에서 안타깝고 마음이 아픈 거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심령을 보고 도움을 주시는 거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믿어갈수록 하나님의 고차원적 성품과 인격이 쌓여져야 한다. 나는 이게 쌓여질 수 있는 설교를 하는 거다.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 없어서 통회 자복하는 신앙사상을 가진 성도가 계속적으로 진리정신으로 번창하기를 원하는 기도다.
성경에 보면 제사의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레:4:1 이후로 보면 번제나 화목제나 소제 수은제 속죄제 건제 속건제 등이 있는데, 개인적인 제물과 전체적인 제물이 있다. 또한 레1:3 이후로 보면 자발적으로 드리는 재물이 있는가 하면 요구되는 제물이 있다. 또 본문의 17절에는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가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의 은택을 입어 구원의 일이 완성으로 이뤄져서 드리는 공의에 합당한 제사가 번제다. 옳은 것으로만 드려진 번제라.
주님께서는 당신의 삶 전폭을 이런 번제로 드렸다. 주님의 일생이 전적으로 옳은 것으로만 하나님께 다 드려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는 안 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게 번제냐? 자기를 주님의 성품으로 만드는 것이 자기를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리는 거다. 이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번제다.
성도가 예수님의 것으로 되는 것, 옳은 것으로 되는 것, 이렇게 살아진 것. 하나님께서는 이런 걸 받으신다. 그런데 착각을 하는 목사님들이 많고 교인들이 많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고 하니까 인간 자기가 잘못해서, 자기가 어리석어서 얻어맞고서 ‘아버지, 나 두들겨 맞았습니다’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마음 아픈 것을 해결해 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상한 심령이 아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 의의 사람으로 되어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들어가고, 받으신 바가 되고, 면류관이 들어가는 거지 자기가 죄를 지어서, 어리석어서, 자기가 못나서 고통을 당해놓고서 마음 아파하면 이것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살다보니 혹 손해가 나는 것은 주님이 알아서 채워주시기도 하고 알아서 처리를 하시는 거다. 그런데 자기가 어리석어서 손해를 봐놓고 ‘하나님, 좀 봐주십시오’ 하는 건 하나님 앞에 해당이 안 된다. 하나님의 지혜지식으로 들어가서 하나님 것으로 만들어져서 그 다음에 수입을 잡아나가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번제는 하나님의 것을 잘 받는 거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많이 받아서 받아진 그것으로 자기 속이 만들어질 때 자기의 언행심사가 하나님 앞에 바른 것으로 나가는 것이지 자기 속에 세상 것으로 잔뜩 들어서 자기의 언행심사가 나온다면 인간 등 두들겨주고 등 긁어주고는 하겠지만 하나님과는 끊어진 거다. 자기가 가진 것이 바르다면 진리이신 주님과 밀착이 되어야지 밀착이 안 된 상태에서 주님을 위해 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인간 자기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값진 존재냐? 성도의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다. 예수를 믿지 않고 구속을 받지 않은 영혼은 지옥에 가면 수두룩하다. 그래서 영혼 자체가 귀한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