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하나, 군림(君臨)하지 말고 군림(群臨)하라.
원장실로 보고를 하거나 결재를 받으러 와본 직원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겠지만, 나는 하루에도 열몇 번씩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내려와 보고도 받고 결재도 했다. 어김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 나오려는 나에게 "원장님, 그저 한마디만 드리면 됩니다"라며 애써 나를 자리에 도로 앉혀준 몇몇 직원의 배려를 제외하곤 언제나 직원들과 눈높이를 맞춘 상태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결코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 덕에 질문도 할수 있었고 어느 정도 의견 교환도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사장이나 실장이 편안한 의자에 않아 불편하게 서 있는 부하직원을 올려다보며 지적도 하고 지시도 내린다. 나는 이런 눈높이의 불균형이 실제로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손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옛날 우리 임금님처럼 높은 옥좌에 않아 호통을 칠 수 있으면 권위가 설지 모르지만, 부당한 지시를 받거나 욕지거리를 듣는 직원이 오히려 내려다보는 상황에서는 자칫 역효과가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높이를 맞추면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으로 하여금 주인 의식을 갖게 하는 훌륭한 효과도 덤으로 기대할 수 있다.
권위를 얻는 길에는 두 갈래가 있다. 스스로 드러내며 취하는 권위와 남들이 마음으로 떠받들어주는 권위는 질적으로 다르다. 지위가 높으면 권위는 자동으로 따라온다. 지위가 높다고 권위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본인이 열등의식의 소유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렇게 얻은 권위는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 상황이 바뀌면 새벽 안개처럼 허무하게 사라진다. 가진 자와 높은 자는 무조건 미안해야 하고 더 허리를 굽혀야 한다.
방황하던 대학 시절 나를 학자의 길로 인도해준 책이 있다. 196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생물학자 자크 모노 (Jacques Lucien Monod)가 쓴 <우연과 필연(Le hasard et la necesitc))이 바로 그 책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들이다." 책 서두에 인용된 데모크리토스(Democritos)의 말처럼 우리 삶의 희로애락도 전부 우연과 필연의 산물이다. 어쩌다 지금은 약간 사회적 성공을 얻어 과분하게 대접받으며 살지만 나는 내 과거를 잘 기억한다. 내가 이만큼이나마 성공한 데에는 엄청난 운이 작용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보면 중요한 삶의 길목마다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나준 의인들과 예기치 못한 상황 반전이 있었다. 그 여러 삶의 길목 어디에서라도 자칫했더라면 나는 어쩌면 지금 노숙을 한다 해도 억울해하기 어렵다. 나의 과거는 나를 철저히 겸허하게 만든다. 나는 어쩌다 운 좋게 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게임의 룰에 잘 적용했을 뿐이다. 만일 전혀 다른 룰이 지배하는 사회였다면 처절하게 낙오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남을 깔본 적이 없다. 단 한순간도 내가 남보다 잘났다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노력하고 살았지만 내 삶에 풍성하게 내려진 우연의 축복에 그저 한없이 고마울 따름이다.
칼라하리사막을 중심으로 수렵채집 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부시먼(!Kung Bushmen) 부족을 연구한 캐나다 인류학자 리처드 리(Richard Borshay Lee) 박사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처음으로 찾아뵙는 족장에게 연구를 할 수 있게 허락해줘 고맙다는 인사로 선물을 하나 드렸단다. 그런데 그 후로 방문하는 집마다 자신이 선물한 것과 똑같은 물건이 있었다. 처음에는 누구나 갖고 있는 걸 선물해서 족장이 자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나보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부시먼 문화에서는 혼자만 좋은 걸 갖고 있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수치라서 마치 뜨거운 감자처럼 계속 다른 집으로 건네준 것이란다.
남보다 너무 많이 가진 건 결코 자랑이 아니다. 한정된 자원 을 공유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혼자 지나치게 많이 움켜쥐고 나누지 않는 것은 사회적 동물로서 창피한 행동이다. 이렇게 애기한다고 해서 내게 이제는 사라진 공산주의자라고 낙인찍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나는 남보다 많이 갖거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영 불편하다. 그렇다고 남의 지배를 받기는 싫지만.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소유라는 게 없는 세상/ 당신이 상상할 수 있을지/ 욕심을 내거나 배고플 필요가 없는 곳/ 형제애/ 모든 사 람이 모든 세상을 공유하는 걸 상상해보라)."
존 레넌(John Lennon)이 애타게 노래하던 세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세상은 군림(君臨)이 아니라 군림(群臨)으로 유지된다. '임금 군(君)' 곁에 온순한 양(羊)들이 둘러서면 졸지에 '무리 군(群)'이 된다. 우리 사회는 얼마 전 바로 이런 '양들의 군림(群臨)'을 뜨겁게 경험했다. 세상 모든 조직이 다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국립생태원은 원장이 홀로 군림하며 끝고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국립 생태원은 원장이나 본부장들 또는 실장들의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그곳에서 일하고 그곳에 뼈를 묻을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의 것이다. 모두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당당하게 군림(群臨)해야 한다.
3년 2개월 동안 나는 한시도 이를 잊은 적이 없다. 두뇌 하나가 두뇌 열 또는 백을 능가할 수는 없다. 지금은 어쩌다 가끔 세계적 석학이라는 분에 넘치는 소개를 받으며 살지만 나는 바닥을 기어본 사람이다. 대학 입시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 나라에서 태어나 나는 두 번이나 낙방한 경험을 갖고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른바 '제2지망' 제도 덕에 간신히 서을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원했던 학과가 아닌지라 거의 4년 내내 열등감으로 똘뜰 뭉쳐 살았다. 나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미국 유학 생활로 정말 운 좋게 거듭난 사람이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가 진정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품어본 적이 없다. 나는 대가 약하다는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자랐지만 세상을 이만큼 살아보고 난 지금은 주변에서 확신에 차 있는 사람들을 보면 측은하기까지 하다. 세상 모든 사소한 일에까지 자기 생각이 뚜렷하고 그대로 되지 않으면 못 견뎌 하는 사람들은 더 넓고 큰 세상을 품지 못한다. 나는 내 생각이 틀렸고 남이 옳을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며 산다. 그래서 카리스마가 없다는 애기를 늘 들으며 사는 모양이다. 카리스마로 팍 찬 두뇌 하나가 유연한 두뇌 여럿의 집단 지능을 이길 수 없음을 나는 너무나 잘 안다. 나는 카리스마 없는 리더로 살기로 했다.
숲에서 경영을 가꾸다 중에서
최재천 지음
첫댓글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https://youtu.be/YkgkThdzX-8?si=Nh8SmyuP1rWjudRC
PLAY
존 레논의 Imagine 함께 듣고싶네요^^
카리스마로 팍 찬 두뇌 하나가 유연한 두뇌 여럿의 집단 지능을 이길 수 없음을 나는 너무나 잘 안다. 나는 카리스마 없는 리더로 살기로 했다.
최재천 교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 분입니다.
좋은 책, 권해 주셔서 우리 모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