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만 고유한 것에 정신이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여 부실한 나를 여태껏 온전히 지켜 준 그것, 비록 투명하고 빛나는 정신이라 한들 시시때때로 요동치는 세상에서 안녕할 수만은 없으리라. 숱하게 날뛰고 졸아들고 난 분분 하는 세월 속을 허박한 몸과 사생 동고 하느라 정신도 진이 빠지지 않았을까.
몇 주 전 토요일이었다.
저녁 미사 시간까지 30분 가령 남은 시점에 서둘러 동네 옷 수선집부터 들렀다. 옷을 찾기로 약속한 시간을 훌쩍 넘겨 재촉한 걸음이다. 한데 재봉틀 앞에 머리를 박고 있던 아주머니가 고개를 들며 묻는다. “옷 맡겼어요?”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고, 오전에 가게 문을 열자마자 와서 맡겼다. 내일은 휴일이라 오늘 꼭 완성해 주십사는 내 청에 저녁 6시로 약속했었다. 그걸 그새 까맣게 잊었단 말인가. 아파트 동네에 새로 문을 연 가게인데 그동안 종종 찾았던 곳이라 낯익은 얼굴이다. 옷 모양과 색깔과 수선 의뢰한 부분을 읊어 대자 기억을 되살린 아주머니는 한참을 뒤져서야 수선된 원피스를 찾아냈다. 허허, 아무래도 정신이 평온하게 거할 집으로서의 그녀 몸은 현재 ‘지나치게 바쁨’이 틀림없다. 미사 시작 15분 전이다. 내 걸음도 급해졌다.
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다행히 5분의 여유가 있었다. 단 5분이라는 순간이 그토록 고맙고 넉넉할 줄이야. 찌는 날씨에 옷 수선집에서의 작은 소동으로 얼굴이며 몸이 끈적대어 찬물이라도 덮어쓰고 싶었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간신히 성당으로 발길을 이끈 내 마음이 성가 연습을 하고 있을 뿐 자리가 텅텅 비었다. 아직도 미사 준비를… 그러니까… 아차차! 저녁 미사는 7시가 아니라 7시 30분이었지……. 덕분에 청아하게 울리는 성가 소리로 온몸의 열기를 식히는 휴식의 시간을 덤으로 얻었다. 그러면서 떨쳐지지 않는 허허로움도 함께했으니 하아, 하느님은 공평하시다.
지난주 무슨 요일이었던가.
외출에서 돌아와 아파트 공동 현관문을 열려는데 비밀번호가 아리송했다. 숫자판을 암만 들여다봐도 생각이 날 듯 말 듯, 진땀을 흘리며 이 숫자 저 숫자, 이리 누르고 저리 눌러도 문은 열리지 않고 틀렸다는 신호만 삑삑, 울려 댄다. 오류가 잦을수록 기억은 산산조각 나면서 늪으로 가라앉는다. 하는 수 없이 관리실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고하고 읍소한 끝에 잊어버린 숫자를 살려 냈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20층 버튼을 눌러 놓고서야 문득 생각이 난다. 비밀번호를 스마트폰 메모장에 저장해 두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나 왜 이러지? 더위 먹었나? 엘리베이터 거울 안으로 들어간 내 얼굴과 마주 보며 어이없어 웃었다.
이번 월요일의 일이다.
〇〇문화회관 합창 수업에 가기 위해 일찍 서둘렀다. 전철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 동안 읽을 책과 악보들을 가방에 챙겨 담으면서 기분은 상승 곡선을 그렸다. 고운 음률에 마음의 나래를 한껏 펼친 다음 스케줄로는 점심 약속도 해 둔 터다. 흥얼흥얼 허밍을 머금고 가벼운 스텝으로 연습실에 당도했는데 어라, 문이 잠겼네. 공연 관계로 연습실을 변경하는 일이 종종 있긴 하지만 이번엔 기별도 없었다. 사무실로 직행했다. “합창은 수요일인데예~”
여직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왠지 아득히 들려왔다. 그래, 이건 내 정신이 아니야. 분명 아니야. 무엇에 홀린 게야. 몹쓸 무언가의 농간이야. 내 정신이라면 행여 장난으로라도 나를 이리 방치해선 안 되잖아 사무실 문을 밀고 나오자 날씨마저 햇볕이 내리쬐다가 시꺼먼 구름이 덮이다가 빗방울이 오락가락, 갈피를 못 잡는다. 어지럽다. 아, 하느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낮겠나이까?
요즘 내게서 자주 깜짝거리는 시그널은 분명 정신의 위험을 알리는 적신호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약간 애매하고 모호하지만, 그렇더라도 어떤 기준에 의해 구분되어 존재한다. ‘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가 ‘정상’의 사전적 의미라면, 내 정신은 지금 그 ‘영역과 경계를 무람없이 넘나듦’이라고 자가 진단을 내린다. 자신도 모르게 휘청휘청 양쪽 영역을 넘나든다는 것은 위험천맘한 일 아닌가. 깊은 혼란에 사로잡혀 예기치 못한 고난이 뒤따를 수도 있겠다.
의식이 한 꺼풀쯤 동결된, 망각이라는 죄 아닌 내 죄를 더 들추어 볼까. 좀 거창하게 비약하면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에다 남 북이 극단의 대치 체제인 시점에서도 그 사실조차 잊고 산다. 한편에선 핵무기 운운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다른 쪽에선 용감하게 웃고 떠들고 마시고 노래하고 드잡이를 하는 국민의 한 사람이요. 평화를 지극히 사랑하는 선민 중 한 사람이다.
집 근처 보건소를 찾아 처음으로 치매 검사를 받아 보기로 했다. 너무 기초적인 검사여서 실망스럽긴 했으나 결과는 양호하단다. 하지만 방금 혈압약을 먹었다, 안 먹었나, 미심쩍은 기억력과 한심한 정신계(精神界)를 스스로 감지한다. 세월 따라 기세를 확장해 갈 대책없는 건망증을 나더러 어찌하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행보는 태연히 go go다
첫댓글 염 작가님 어려운 상황도 참으로 재미지게 풀어내셨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