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제4회 / 이명자)
온 누리에 울긋불긋 로사우 강물에 단풍이 물들어 마약 중독자들을 물속으로 유인하듯
현란한 색깔들의 향연이 끝나가고 내가 절약, 또 절약해오던 돈이 떨어져 나갈 무렵이었다.
겨울의 문턱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지상의 모든 것들을 공중으로 채 날리 듯 찬바람이
씽씽 불던 날이었다. 짐을 꾸리는 케빈을 나는 싸늘하게 지켜보고 서있었다. 어리석은 중독자들의 정해진 수순을 케빈은 일찌감치 밟고야 말았던 것이다.
나는 항시 내 외모에 신경을 쏟았다. 아침세수는 정성스레 했고 첫 수업이 시작하기 전 나는
내 눈이 촉촉이 빛을 발하도록 안약을 넣었다. 훗날 생각해보니 치 떨리도록 영악한 짓을 오랫동안 나는
해냈던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쪽 누구의 DNA를 더 많이
내 몸속에 지니고 있어서일까? 아니 일체의 의문은 삼가야겠다. 한
인생의 생애에 허리가 휘도록 쌓여가는 역사를 좀 더 지켜보아야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인데.
짐을 싸기 하루 전날 케빈은 내 주의를 무시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행동은 의젓하게 외모는 깔끔하게 눈은 초롱초롱 빛나도록(한창
빛나는 눈을 지니고 있어야 할 시기가 아닌가 말이지.) 수시로 참견했건만 케빈은 자신이 숨기고 있는
돈이 바닥나기 전 거창한 끝을 한번 맛보고 싶어 했다. 거창한 끝. 그
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중독자들. 그것은 절벽으로 떨어지는 바로 미터 생사를 담보로 하는 한꺼번에 와장창
피우거나 들이 마시거나 삼켜버리는 마지막 행위. 케빈은 들떠 있었고 요령도 없었다.
전 전날. 토요일이었다. 토요일마다 슬그머니 나타나 학교를 기웃거리는 얼굴껍질이 두꺼운 사내, 그는
영락없는 마약 판매상이었다. 다른 일은 죽어도 하지 못하는 인간. 자신이
꼭두각시인 것도 모르고 하이네처럼 어슬렁거리며 이 머나먼 시골산천까지 기어 들어와 피어나기도 전인 새싹들의 주변을 망쳐놓는 인간. 그 인간에게 케빈은 지니고 있던 돈을 모두 털렸다. 학교의 감시가
느슨한 그날 케빈은 어리석었다. 요령 불능이었다. 혼자 몰래
어디서 얼마큼 집어 삼켰는지 초점 없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입에는 게거품을 질질 흘리며 방방 뛰며 ‘나
죽는다.’고 소리 내지르고, 그런 난리는 이 학교가 생긴
이래 처음이었다는 후문이었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케빈의 주위에 모여든 기숙사생들은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우왕좌왕 했고 나는? 그 곳을 슬그머니 피해버렸다.
병신 같은 자식 때문에 행여 라도, 나는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대가리속이 물기 하나 없이 얼마나 말라버려서인지 냉혹한 어떤 것이 나를 그렇게 시켰을 것이다. 응급실로 실려 간 케빈은 하루 동안 혼수상태였고, 깨어나기 무섭게
케빈은 학교에서 쫓겨났다. 증거가 여기저기 케빈의 주머니 속에서 삐져나와서 경악한 선생들은 단호했다. 당연했다. 잃어버린 한 마리 말썽쟁이 양보다 보나마나 케빈이 왜
저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는 양호한 학생들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양호한 학생들 속에 끼일
필요가 넘쳐났다. 만사 용의주도하니까. 그런 내 자신이 매우
흡족했다. 케빈은 멋도 모르고 흥청거려서 앞길이 구만리인데 벌써 싹둑 자신의 팔자가 잘려나갔으니까 말이지. 케빈은 이제 막 어린아이에서 틴에이저로 몸만 탈바꿈한 불안전한 사고를 지닌 상태에서 초년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케빈에게 명복을..... 아니 내가 무슨 말을 지껄이지?
긴장을 풀고 다시 정신 차려 말하자.
케빈 너의 앞날에 자유와 평화가 깃들어라.
가을에 학기가 시작하여 꼭 반나절 밖에 안 된 것 같은, 입학하여 찬란한 봄이 오는 소리도 듣지 못한 케빈은 변명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씽씽 불어대는 겨울찬바람의
등에 떠밀려 가차 없이 학교에서 쫓겨났다.
눈은 떴지만 아직 온전한 정신으로 되돌아오지 못한 케빈을 아직 온전히 몸을 추스르지 못한 케빈을 말이지.
학교에 뿌려질 해악을 두려워한 처사였을 것이다. 나는 떠나는 케빈의 곁을 슬쩍 지나쳤다.
지나치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무슨 짓을 했느냐고 물었다. “크렉. 팍킹 크렉이.....” 아직 온전히 깨어나지 않은 케빈이 히죽 웃으며 속삭였다. 케빈의 몸속에 아직도 진을 치고 남아 있는 크락의 대꾸였다. 자동차의
뒷좌석에 앉은 케빈은 딱 한번 뒤돌아보고 떠나갔다.
유명한 사립학교의 첫해의 수난이었다. 케빈. 내가 케빈의 정신구조를 소상히
알기도 전에, 케빈이 어떤 말 못할 이유와 어떤 말 못할 변명을 지니고 있어 그렇게 쉽게 무너졌는지
어린 나이에.
어쩌다 잠 못 드는 밤중에 나는 케빈의 얼굴을 떠올려 봤다. 아-그러나 무정한 것은 기억이었다. 그저 작은 몸집 하나가 눈앞에 어른거릴
뿐, 야박한 기억이었다. 가만 가만 기다려 봐 떠오른다. 떠올라. 그래야지.....
케빈은 학교가 시작하고 열흘이나 지난 후에 로사우 학교로 전학해 왔다. 키는 작고 얼굴은 하얀 아이. 백인치고는 매우 작았다. 키가 작으니까 몸체도 작았다. “너희들과 한반이 되어 기분 째지게 좋아.” 케빈의 인사말이었다. 그리고 나와
케빈은 한 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우리들, 중독자들은 개처럼
냄새를 맡고 남들은 꿈에도 알아볼 수없는 어떤 빛을 서로의 눈 속에서 알아본다. 징그럽지 않은가.
못된 것만 알아본다니. 고로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친해진다는 것은 우정이 결코 아니다. 몰래 숨어 함께 마약을 탐닉하며 눈앞에 펼쳐지는 흐물흐물
거리는 세계가 자신들이 지향하는 아주 멋들어진 세계라고 오버하는 것 그러면서 킬킬대는 것..... 등등이었다.
다만 그 뿐이었다. 그러니 내 기억이 더딜 수밖에. 마약중독의
생태는 이유나 변명이 존재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일컬어 악마의 영역이라고 해야겠다.
케빈은 나의 역사 속으로 깊이 묻어져 버렸고 나는 케빈의 종말로 인해 더욱 조심성이
늘어났다. 그리고 밤은 깊어갔고 한 해가 말썽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랬을까. 물론 아니지. 말썽은 나의 내면에서 오랫동안 죽치고 있었다. 나의 조심성이 워낙
질겼기 때문에. 그러나 기어코 깊이 잠들어 있어야 할 말썽이 얼굴을 드러냈다. 얼굴을 드러내기 바로 직전의 쾌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옳은 것일까. 도가니
속에서 펄펄 끓는 흥분 그래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우수한(?) 성적표의
대가로 아버지로부터 짤막한 편지와 그에 상응하는 용돈을 받게 되었다. 죽치고 있던 말썽의 소지는 펄펄
끓는 흥분 때문에 봉투속의 돈을 먼저 움켜잡았다. 쥐꼬리만 한 용돈을 한 달을 살아남기 위해 쪼개고, 쪼개고 가르고, 갈라서 애지중지 복용하던 마리화나와 코케인을 원
없이 피워볼 수 있는 찬스가 눈앞에 도래해 있는데, 먼저 튀어 나오는 욕망을 너라면(나라도.) 어이 잠재울 수 있겠는가.
아버지의 편지는 구겨져 침대 속 어딘가에 쑤셔 박아졌고, 악마는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하고 있었다. 나도 미쳤지. 그 동안의 조심성을 미련 없이 팽개치다니. 다행이 습관은 참 예쁜
것이었다. 얼굴 두꺼운 마약 판매상 사내에게 한손은 잡혔지만 다른 한손은 역시 조심했다. 우선 조금만 샀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즐길 만큼 즐겼다. 온전히 우리들의 날인 일요일에만. 마약에 취해 하루 종일 꼼작도
하지 않고 침대 속에 누워 있어도 아무도 날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허술한가.
나의 룸메이트 다니엘이 나를 수상히 여겼다. 나의
숨소리를 들어 보려는 것인지 자신의 귀를 내 가슴 가까이 대보기를 하루 종일 몇 번이나 했다. 나는
세고 있었다.
여섯 번이나 똑 같은 자세와 표정이었다.
그의 표정은: 도대체 짚어 넘기지 못하는(애가
자는 거야 뭐야?) 자신의 의문에 괴롭다는 듯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곤 했다.
그만큼 나는 용의주도했다. 인생은, 나 같은
인생이라도 각자가 지니고 있는 마음이란 것이 키 크듯이 자라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구십 구 프로 마약에 찌들어 있던 그날 그나마 살아 숨 쉬고 있던 나는 일 프로의 내 건전한 마음속에 한줄기 전류가 흐르는 걸 느꼈다. 전류는 분명 다니엘로 부터였다. 따뜻했다. 그 전류를 따라가고 싶다는 의욕이 불같이 솟아올랐다.
때를 같이하여 다니엘의 한손이 나를 흔들었다. 아침도 거르고 점심도 걸렀으니 당번처럼 돌아가면서
식사 때 학생들을 담당하는 선생 눈에 띠어 저녁식사까지 거르면 내가 위험하다고 엄포를 놓았다. 선생이
나를 수상히 여길 것이 분명하다는, 고집이었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자신이 사실 데로 말해 버릴 것이라는, 것이 위험하다고 했다. 내 정신이 번쩍 눈을 떴다. 주저 없이 나는 다니엘의 말과 손짓에
이끌렸다. 그 순간 나는 마약 장이가 아니었다. 마음이 뿌듯하게
기지개를 켜는 느낌이었다. 마약의 잔재들이 황망히 내 몸속을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분명 느꼈다. 그런데 반쯤 몸을 일으키자 미쳐 빠져 나가지 못한
마약의 잡것들이 남아있어 나는 다시 마약의 포승에 묶이고야 말았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서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릴 수도 없었다.
정신이 번쩍 눈을 떴다고는 했지만 찰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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