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우리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오늘 아주 훌륭하고 또 영감 있는 귀한 찬양 우리 하나님께서 참으로 받으시고 기뻐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 파리 선한 장로교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또 기뻐하시는 교회인 줄 알고 있는데 이 귀한 교회에서 오늘 주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파리 선한 장로 교회를 통해서 이 파리와 또 프랑스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까지 이 선교적인 지평을 넓혀가는 복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아멘
제가 물을 조금 자주 먹더라도 양해하십시오. 예 눈도 마르고요. 목도 잘 말라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봉독한 이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초청을 받아서 마르다라고 하는 여인의 집 거기는 마리아도 함께 있었고 또 나사로라고 하는 오라비도 함께 하는 그런 집이죠. 여기에 초대를 받아서 우리 예수님께서 들어가셨습니다. 아마 이 마르다나 마리아는 이미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줄 알고 주님께서 말씀을 가르치는 곳곳마다 따라다녔던 정말 예수님의 찐 팬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자기 동네를 지나가신다니 당연히 집으로 모셔서 정말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을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초청을 했는데 당연히 그 시대에 예수님 혼자만이 아니고 예수님과 동고동락하고 있는 12 제자까지 함께 초대된 셈이 되니까 그 대단한 인원이 들어온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런 예수님과 그 일행들을 대접하려면 이만저만 분주하고 또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데 동생인 마리아가 그 남정네들이 앉아 있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함께 있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바로 발치 앞에 앉아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있단 말이죠. 그랬더니 이 마르다가 언니인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직접 이렇게 눈짓을 한다든지 옆구리를 찌른다든지 너 당장 나와 뭐 이럴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투정을 좀 부려요. 그만큼 친근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고 또 자신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넓으신 분인 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치기 어린 투정처럼 예수님에게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도 그렇게 이야기하죠.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십니까?
왜 내 동생이 내가 일 혼자 하도록 내버려 두세요 동생에게 좀 이야기하셔서 나와서 언니를 도우라고 좀 해주세요.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친근감 약간의 애교 섞인 그래서 내가 주님을 위해서 지금 얼마나 바쁜지 알아요. 이런 것을 조금 드러내는 그런 표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가벼운 이야기에 우리 예수님이 너무 심각하게 반응을 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니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지만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 해도 돼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그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우리 예수님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웃으면서 그래 내가 조금 이따가 이야기할 테니까 마리아야 너 나가서 언니 도와라 이렇게 하면 그냥 쉬울 이야기인데 우리 예수님이 정색을 하시고 마르다야 마르다야 니가 많은 것을 인하여 근심하지만 두어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 해도 돼. 지금 마르다의 마음은 정말 10가지 20가지 또 그 당시 거기에서는 아마 코스 요리 같은 거였을 거예요.
전식도 있고 뭐 번식도 있고 그렇게 열심히 지금 장만을 하고 있는데 한 가지라니요. 그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셔서 어떻게 보면 분위기가 좀 굳어질 수 있는 그런 상황을 연출하셨습니다.
왜 그러셨겠어요?
여러분 당시의 마르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 그리고 이 내용을 성경에 기록하여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중요한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겁니다.
주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뭘까요? 마르다의 그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그 정성을 모르겠습니까? 그 수고를 모르겠습니까? 그리고 그 응석을 받아주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좁은 분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정말 좋은 편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듣는 이 수용적 태도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씀하는 거예요.
사실 마르다에게 조금 더 엄중하게 따져보면 약간의 지적할 점은 있어요. 사실 마르다가 마르다는 음식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예수님을 말하자면 자기가 조종하는 형이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사실 우리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으로 오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뭘까요? 그분은 말씀이세요?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 말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지금까지 말씀해 오셨던 우리 말씀이신 예수님이에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어요. 왜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을 구원하는 방편은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즉 약속이에요.
구약 옛날에 하신 약속, 신약 새롭게 하시는 약속 복음 무엇입니까?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이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고 경청할 뿐만 아니라 수용하여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며 순종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거예요. 지금 주님께서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마르다는 자신이 만난 걸 만들었으니까 예수님 말씀하는 것 좀 멈추고 그것 보다가 내가 열심히 이 장만한 이 음식을 좀 맛있게 먹어주시고, 그리고 너 정말 수고했다 너 맛있게 만들었다 이 칭찬 좀 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그 속에 섞여 있겠지요.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해하면서도 우리 주님조차도 조정하려고 하는 때때로 우리가 하는 봉사라든지 이런 일들을 할 때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혹은 교회를 위하여 하는 일이지만 그 일을 하다가 보면 그 일의 완성도를 좀 높이고자 하는 그런 생각 때문에 때때로는 이 자신의 일의 완성도를 높이지 못하는 방해가 있으면 거기에 대하여 불평도 하게 되고 좀 짜증을 내고 하는 일들이 교회 속에 얼마든지 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너나 할 것 없이 죽어요. 늙고 병들고 죽고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성경이 명백하게 말씀해 주는데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있지요. 그것은 어정쩡한 것이 아니라 천국 아니면 지옥이에요.
만약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그런 비참한 인간에게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게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내적 자세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다니면서 신앙생활하고 봉사하는 것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봉사만 눈에 보이고 일의 완성도는 눈에 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 내적 태도가 전혀 점검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몰라요. 성경에 보면 엘리사 시대에 나한 장군 그 나병 환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죠. 그때 그 나병 환자인 나만이 엘리사에 대한 그 소문을 듣고 엘리사의 집을 찾아옵니다. 그 절차의 복잡한 것은 있었습니다만 다 생략하고 드디어 엘리사의 집에 왔는데 성경에 보게 되면 거기 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대장군이니까 그리고 나병 환자 때문에 어쩌면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아주 위험을 갖추어서 그래서 찾아왔는데 그 문 앞에 와서 이제 사람을 보내서 내가 왔다고 소문 듣고 왔고 나병을 치유받기 위해서 엘리사라고 하는 선지자는 아주 위대한 선지자니까 나를 고쳐줄 수 있으리라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왔습니다고 해서 이야기를 전했는데 세상에나 이 엘리사가 자기 얼굴은 보이지도 않고요.
사환인 게이사이를 보내가지고 이 게이사라고 하는 그 사람이 와서 이야기를 전해주는 거예요. 우리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요단강에 가서 요단 강에 가서 7번 씻으면 깨끗하게 어린아이 피부처럼 나음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래요. 그랬더니 나만이 얼마나 화가 납니까?
내 생각에는 그가 쫓아나와서 자기를 영접하고 내 상처 위에다가 손을 흔들면서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내 병을 치료해 줄 줄 알았더니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우리나라에는 요단강보다 훨씬 좋은 강물이 얼마나 많은데 요단강에 가서 씻어서 나을 것 같으면 차라리 우리 나라 아람 나라에 가서 강에다가 내가 씻겠다 하고는 화가 나서 돌아갑니다.
그럴 때 부하 장수 한 사람 이야기하죠. 장모님 더 어려운 거 시켜도 하셨을 거 아니에요 강에 가서 일곱 번 씻는 거 못 할 일 없잖아요. 음 그렇구나. 참 누군가의 의견에 대하여 수용적인 사람이에요.
소문도 그래서 듣고 온 사람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그걸 접고 요단강에 가서 정말 7번 씻었더니 놀랍게도 하나님의 역사로 깨끗하게 다음을 입었단 말이에요. 얼마나 감격하고 기뻤겠어요 그 불치의 병 나병에서부터 나음을 입은 이 나만이 너무나 큰 감동을 입고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다시 엘리사를 찾아왔는데 이때는 엘리사가 그를 만나줘요. 엘리사 앞에서 이야기합니다. 이제는 내가 천지의 하나님은 신은 오직 야훼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내가 이제 깨달았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하면서 예물을 드립니다. 너무 고마우니까. 그래서 일국의 대장군이니까 얼마나 많은 예물을 준비했겠습니까?
그 예물을 드리는데 그때 엘리사가 하는 말입니다. 내가 섬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니와 나는 결단코 받지 않겠다. 아무리 권해도 받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만 하는 이야기가 그렇다면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제가 이 곳에 있는 흙을 몇 술에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면 제가 고국에 돌아가서도 오직 야훼 하나님에게만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감격의 이야기를 하고 드디어 그는 돌아서 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 모습을 이렇게 관찰하고 있었던 사람이 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의 사완입니다. 여러분 그의 사환이 그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나는 반드시 쫓아가서 무엇인가를 받아내고야 말리라. 자기의 스승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내가 받지 않겠다라고 한 그 말을 받아서 나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거니와 나는 뒤쫓아가서 무엇이든지 받아내고야 말리라.
사람의 마음이 어쩌면 이렇게 완악하고 완고할 수 있을까요?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사를 통하여 전해졌고, 엘리사가 자신의 사환에게 이야기해줘서 자신이 그 이야기를 전한 장본인 아닙니까?
누추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생님에게 주시고 그 선생님이 자신에게 전해준 그 말대로 요단강에 가서 7번 씻어라 했더니 정말 씻어서 깨끗하게 해서 돌아왔다라고 하면 감격의 폭풍이 일어나야 되지 않습니까?
오 하나님 나 같은 것도 사용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해야 할 그 상황에서 조롱하듯이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나는 반드시 쫓아가서 무엇인가 받아내고 말리라.
엘리사를 모시면서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겠어요? 엘리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기사와 이적을 얼마나 많이 보았겠어요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줄 모르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일어나지 아니하는 사람, 그 말씀에 어떤 결단도 도전이 없는 사람,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는 사람, 말씀에 감동하고 결단하는 사람을 오히려 조롱하는 사람 말씀으로 말미암아 눈물 흘리고 은혜 받는 사람에게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양 하는 사람 그런 사람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어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나 예수 믿어요라고 한마디 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램프 요정처럼 꼼짝 못하고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나 예수 믿어요. 한마디 해놓으면 현재를 어떻게 살든 전혀 상관없이 반드시 구원하실 수밖에 없는 램프 요정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 예수님을 믿어요라고 하는 언젠가 자기도 기억하지 못할 그 옛날에 한마디 했던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 있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지금 살아계시는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과 함께하며 그렇게 살아내는 이 삶 전부를 일컬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닙니다. 마귀가 역사하고 있고, 저도 여러분도 그 속에는 악한 본성들이 있어서 이 악한 것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괴물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짐승도 튀어나옵니다.
여러분 어떤 날은 제법 괜찮지만 조금 건드리면 그의 약점을 조금만 건드리면 형편없는 것들이 막 튀어나오는 존재가 우리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우리로 하여금 이 악한 것이 우리를 계속하여 지배할 수 없도록 역사하시는 말씀인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수용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지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되고 감격적인 삶으로 살아내게 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이렇게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하는 것.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압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모여서 노래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 자리에 우리 주님이 함께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역사하여 주셔서 우리가 찬양하는 그 찬양에 성령이 함께하실 뿐만 아니라 천군 천사들이 화합하는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찬양인 것을 우리는 압니다.
왜요? 크리스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주일날 여기 나와 있습니까? 취미 생활입니까? 더 재미있는 곳을 찾아서입니까?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는 우리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가 소수가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주님께서 반드시 약속해 주신 그 약속의 말씀이 있기에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뿐만 아니라 이 예배의 자리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주의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말씀 그 자체도 아니고 기록된 성경 말씀도 아니지만 기록된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하여 선포되는 그 말씀 가운데도 성령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여 주셔서 듣는 사람들은 많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소망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책이 되고 그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특별히 이렇게 이국 땅에 살고 있는 또 공부하기 위하여 오신 분들도 있겠고, 이민 와서 살고 계시는 분들도 있겠고, 또 주제원으로 잠시 있다가 돌아가시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마는 거룩한 주일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다라고 하는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요즘 한국당에 우리 크리스천에게는 끔찍한 유행병이 돌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 것이기 때문에 예배의 자리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는 그런 문화 풍조 말입니다. 교회가 타락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교회는 사람 냄새가 나기 때문에 나를 실망시키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는 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그리스 찬이다. 성경에는 그렇게 말씀해 주는 것이 한 구절도 없습니다.
교회가 부족하면 나의 부족함으로 아는 것이오. 교회의 허물은 나의 허물이 되는 것이고, 나도 부족하고 너도 부족한데 주의 이름으로 부르는 그 자리에 우리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으로 인하여 사람 냄새나는 우리들이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성은 밑으로 가라앉고, 그래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서로에게 좋은 점을 보며 좋은 믿음의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그렇게 서로를 격려하며 신앙생활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내적인 태도가 과연 어떠한지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동하고 감격하며 요즘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사람 보면 나도 옛날에는 그랬어.
나도 옛날에는 그랬는데 그 뒤에 남는 느낌이 뭐예요?
그거 다 말짱 소용없어. 옛날에 나도 첫사랑으로 열심을 냈다가 현재 누군가가 열심을 내는 사람을 보면 내 가슴을 치며 나의 열심히 현재적이 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수용성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에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런 수용성이 아주 뛰어납니다. 탁월합니다. 여러분 다윗의 경우도 그랬고 요셉의 경우도 그랬고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다 그랬어요.
여러분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수용성 즉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 그런 내적인 태도가 없다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해도 위로를 받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소망을 이야기해도 그게 소망이 되겠습니까?
전날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가 다음 이제 리더가 되어서 큰 일을 맡아서 진행해야 할 터인데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할까 두려워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실 뿐이에요.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처럼 너하고 함께 하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 말씀이 그에게 힘이 되고 능력이 되었단 말이에요.
왜요?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그의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이게 믿어지고 지금 내가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지금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내가 저 대적자들과 싸워야 할 때 주님이 나에게 힘을 주신다. 왜 주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만일 이런 내적인 태도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은 아무리 위로의 말씀을 해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참 안타까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사울이죠. 다윗과 비교해 볼 때 사울은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이 사울에게 해주신 약속의 말씀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그런 태도가 그에게는 결여되었습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이 오히려 복 없는 사람으로 굴러 떨어져 버리고 말지요.
한 사람 이야기를 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성경에 아주 아주 뛰어난 믿음의 사람 아사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사 왕 이야기예요. 이 아사라고 하는 이는 얼마나 얼마나 이 믿음이 처음에 좋았던지, 그의 윗대들이 정말 형편없는 그런 길을 갔는데도 불구하고 아사는 왕이 되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아주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은혜를 주었어요. 그런데 위기가 한번 찾아오지요. 구스에서 100만 대군이 쳐들어와요. 그 100만 대군 상상해 보십시오. 그 당시에 아사에게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50만 가까운 정말 강한 군세를 가지고 있기는 했습니다마는 100만 대군하고 맞서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아산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전쟁터에서 이제 나아갈 때 저쪽에 어마어마한 군세 앞에 자신들은 그의 절반도 되지 아니하는 그런 군세로 지금 싸우기 직전에 그가 하나님 앞에 하는 기도가 성경에는 기록이 되어 있어요. 추억 같아요.
하나님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서 우리를 굽어 살펴보아 주옵소서 이 약한 자가 주를 의지하오니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렇게 전쟁터에 나아가 100만 대군을 무찌르는 그리고 어마어마한 전리품을 거두게 되는 내용이 성경에 기록이 됩니다.
믿음의 사람이죠. 그런데 세월이 좀 흘러요. 100만 대군을 무찔렀다라고 하는 이런 소문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모든 것이 평안하고 번성하는 그런 세월이 좀 지나고 난 다음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완고해졌습니다.
말씀이 귀에 안 들어오는 사람이 되었다 그 말이에요. 어떤 이야기가 들려왔느냐 하면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랍 나라하고 연합을 해서 이제 쳐들어오기 위해서 이제 대단한 라마라고 하는 곳에 진지를 구축한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요. 그랬더니 이 아사 왕이 옛날하고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골몰하더니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동원해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아랍 나라 왕에게다 편지를 보내고 이렇게 합니다. 왕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예물을 보내오니 그래서 그 성전 안에 있는 예물까지 바리바리 쌓아서 군에 보내주면서 이스라엘 왕과 맺었던 언약을 파기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면 이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맺었던 조약을 파기해버리고 이스라엘의 다른 이런 이 성읍들을 공격을 해버립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왕이 라마에서 요새를 건축하다가 말고 화들짝 놀라서 거기에 수많은 장비들을 그냥 고스란히 내버려 둔 채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렸어요.
북왕국 이스라엘로 이 라마라고 하는 곳은 남한국하고 국경 지대에 있었단 말이에요. 거기에 그것을 건축하기 위해서 남겨두었던 그 많은 건축 자재들을 전부 다 접수했어요. 그리고는 뻑깁니다. 나 지혜롭지 나 외교 정말 잘하지 나 뛰어나지 사람들이 많이 칭찬했을 걸.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왔어요. 아사 왕이요. 하나님 앞에서 망령되이 행하였습니다. 만일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였더라면 저 아람의 군대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에 붙였을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어려움이 있을 것이오 하면서 회개할 것에 대해서 촉구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오히려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 그 선지자를 그만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일을 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것을 힘과 능력으로 삼았던 사람이 마음이 교만해지게 되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지혜로 했다라고 하는 것을 광고하고 싶고 그렇게 칭찬받고 싶고 영광 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가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 자기의 듣기에 좋지 않은 말을 하니까 그만 그 선지자까지 감옥에 가두어요.
더 놀라운 건 이 사람이 나중에 발에 병이 들었어요. 발에 병든 그 사소한 병이 점점점 중병이 되어 가서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한 줄을 기록해 줍니다. 의사에게는 구했으나 여호와께는 구하지 아니하였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현재의 우리의 열심도 믿음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 그 진지함이나 그런 경험이나 그것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이 강하므로 우리의 더러움이 정결함으로 우리의 게으름이 부지런함으로 계속하여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산다고 하는 것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수용하고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그런 삶의 자세는 사랑하는 여러분 이국 땅도 여러분에게 기회의 땅이 될 것입니다. 전날에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에스더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살면서 이제는 신앙에 대하여 진지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업수이 여기고 말씀을 귀에 듣는 일에 대하여 집중하지 아니하며 마음에 담아두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 알고자 하는 거룩한 노력이 없는 그런 삶을 이 땅에서 살 때 여러분들은 더욱더 힘들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힘들다고들 합니다. 마귀가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모든 것이 쉬워지고 가벼워지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를 어렵게 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그렇게 살아낼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보장인 것입니다.
어느 곳인들 무슨 상관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파리에서 프랑스에서 여러분들이 얼마 동안 신앙생활을 하든지 혹은 여기서 뼈를 묻게 되든지 간에 이 파리 선한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여러분의 믿음을 견고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에스더처럼 또 요셉처럼 그렇게 환경을 정복하며 살아내게 하는 그런 능력을 경험하며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