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전통미가 담긴 특산품인 한산모시는 섬세하고 단아함은 물론 청하한 멋이 있어 모시의 대명사로 불리는데요. 오늘은 서천 여행길에 방문한 한산모시 전시관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한산모시 전시관
한산모시 전시관은 지하 1층과 지상1층, 2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지하에는 과거 옛 우리 조상님이 직접 입었던 모시옷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지상에는 한산모시의 특징을 보여주는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주소: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충절로 1089
※ TEL : 041-951-4100
※ 관람안내: 3월~10월(하절기) ->10 : 00 ~ 18: 00
11월~ 2월(동절기) ->10 : 00 ~ 17: 00
※ 전시관은 마감시간 30분전까지 입장 가능
※ 관람료: 무료
※ 관람해설은 5일 전까지 사전예약 필요. 월요일(해설사 휴무)이나 시티투어 진행시 불가
※ 예약안내: 종합관광안내소 041)-950-4542
※ 편의시설
-휠체어, 유모차 대여 및 물품 보관함: 방문자센터
-모시 판매장, 특산품 판매: 홍보관
-디저트 카페: 공예마을
한산모시전시관에는 한산모시의 역사와 가치, 모시의 수확부터 모시짜기, 모시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세히 알아 볼 수 있는데요. 또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대한제국과 근대까지 모시로 만든 복식 20점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삼국·통일신라시대부터 현대까지 한산모시의 발달과정과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제14호로 지정되기까지의 기록도 살펴볼 수 있는데요. 한산모시는 전통기술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합니다.
모시는 오랜 기간동안 이용되어 온 직물로서 통일신라 경문왕(재위 861∼875)때 당나라에 교역품으로 모시를 보낸 기록이 있다고 해요. 삼국시대에는 제작기술의 발달로 세포(細布)가 대량으로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30승(升)에 이르는 저삼단(紵杉段)을 당나라에 보낼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고품질의 모시를 제작하는 등 최대 15승의 모시를 제작한 중국에 비하여 제직기술이 절정을 이루었다고 해요. 이로 인해 모시는 대표적인 특산직물로 자리매김했다고 합니다.
요선철릭은 허리부분에 여러 줄의 횡선을 장식한 옷인데요. 말을 탈때나 사냥할때 편리하도록 허리 아래부분을 주름치마형태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섬세하고 고운 모시뿐만 아니라 제직기술이 다양화되어 화문저포(花紋紵布) 사저포(紗紵布)등의 기록과 사저교직(絲紵交織)으로 제직된 유물이 확인되는 등 특별한 품종의 모시가 제작되었다고 해요. 고려시대에 모시는 인삼과 더불어 중요한 교역물품으로 활용되었고 왕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상하 구분없이 가장 일반적인 의복의 재표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문헌에는 남성과 여성 모두 귀천에 관계없이 백저포릋 많이 입었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유물은 없지만 황저포, 홍저포, 백황저포, 백황홍저포 등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고 해요. 이로인해 당시 황색과 홍색 등으로 염색한 모시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단령은 깃이 둥근 포로 관리의 시복, 상복 등으로 착용되었다고 해요. 앞이 짧고, 뒤가 긴 전당후장형으로 출토 당시 본래의 분홍색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깃에는 단추를 달아 여미게 하였고, 앞 뒤길에 달려있는 무가 서로 연결되지 않고 븐리된 형태라고 해요.
액주름은 겨드랑이 아래에 주름을 잡은 형태로 단령, 답호, 철릭안에 받침 옷으로 입었다고 합니다. 앞길이가 뒤보다 5cm정도 짧은 전당후장형이고 깃과 겉섶은 이중으로 구성된 이중컬컷, 이중섶의 형태라고 하네요.
철릭은 상의와 하의를 따로 구성하여 허리에서 연결시킨 포라고 합니다. 왕의 행차를 수행할때나 외국의 사신으로 파견될때, 국난을 당했을때 입었다고 해요. 유물은 좌우의 소매가 분리되어 매듭단추로 탈부착하는것이 특징이고, 고름은 간접부착형으로 길게 고리를 달고, 옷고름을 따로 만들어 걸어 묶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중치막은 직령깃에 넓은 소매와 양옆에 트임이 있는 세자락 포인데요. 외출복이나 의례복으로 착용했다고 합니다. 도포나 창의의 받침옷으로 세조대를 매는 방식인데요. 유물은 이단하가 좌의정 시절에 입었다고 전해지는데 17세기 중반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상의와 하의를 잘 연결한 옷으로 기본형태는 변함이 없으나 시대에 따라 상하의 길이나 깃, 소매, 고름, 주름 등이 변한다고 합니다. 특히 상의와 하의의 비율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상의가 짧아진다고 하는데요. 유물의 상하 비율은 1: 1.95로 하의가 길고 주름의 간격은 3cm정도 된다고 합니다.
심의는 조선시대 유학자의 법복으로 평상시에도 즐겨 입었고, 관례복은 물론 수의, 제복 등 다양한 용도로 착용했다고 해요. 심의의 상은 12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1년 4계절, 12달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검은선을 두른 것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공경을 뜻한다고 하네요.
조선시대에 모시는 관복, 제례복, 갑옷, 일상복 등 귀천에 관계없이 다양한 복식에 사용되었는데요. 문헌기록에서 모시는 섬세도, 색 등에 따라 다양하게 확인되며, 이전과 달리 항라(亢羅)로 제직된 모시가 새롭게 등장했다고 합니다. 육의전(六矣廛)에는 모시를 전문으로 팔던 저포전(苧布廛)을 중심으로 유통이 활성화되었는데요. 조선시대에는 한산과 임천이 모시를 공납하는 대표적인 지역으로 처음 등장했다고 합니다.
대한제국과 근대에는 의복제도가 간소화됨에 따라 모시를 사용한 복식의 범위가 축소됐다고 합니다. 이후 신분제도가 해체되면서 계층에 따라 규제되던 복식의 제도도 변화되어 상류층뿐만아니라 다양한 계층에서 세모시를 의복의 재료로 사용했다고 해요. 또한 시장과 교통의 발달로 모시의 거래가 활성화 되었으며, 세모시의 대표적인 생산지로 한산모시의 명성이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전통베틀과 개량베틀의 모습입니다. 두베틀의 구조는 크게 차이나지 않아 보이는데요. 개량베틀은 사용자들에게 좀더 편리하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모시는 오랜 기간동안 이용되어 온 직물로서 일명 저포·저치라고도 하며, 모시나무가지를 꺾어 그 껍질을 벗긴 것을 재료로 하고 있는데요.
통일신라 경문왕(재위 861∼875) 때 당나라에 보낸 기록으로 보아 외국과의 교역품으로 이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시풀은 다년생으로 뿌리쪽 줄기가 황갈색으로 변하며, 밑의 잎이 시들어 마를 때 수확을 한다고 하네요.
보통 1년에 3번 정도 수확하는데 5월∼6월초, 8월초∼8월하순, 10월초∼10월하순이며 두번째 수확한 모시가 품질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
건지산의 전설과 한산모시의 유래도 알아보았습니다. 한산은 고대부터 모시 생산지로 유명했다고 해요. 한산에서 모시가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시대 한 노인이 약초를 캐기 위해 건지산에 올라가 처음 발견하게 되었으며 이를 가져와 재배하게 되면서 모시 짜기의 시초가 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다고 합니다.
서천에서 한산모시가 발달하게 된데에는 자연적인 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해요. 서천은 연평균 높은 기온과 다습한 환경, 적절한 통풍 등 모시의 재배와 제직에 적합한 지역적·환경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서천·한산·임천의 땅이 모시 가꾸기가 알맞아 전국에서 모시를 재배하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라고 하네요.
1454년 (단종 2)에 저술된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모시를 생산하는 지역으로 거론되고 있을 정도로 서천은 모시와 관련된 역사가 깊다고 합니다. 또한 예종(1469) 때 한산과 임천 지역에서 생산되는 생저가 토산품 공물로 상정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품질이 우수한 모시를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해요.
한산모시는 우리나라의 미를 상징하는 여름 전통옷감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아 제작기술을 보호하고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충남 서천군 한산 (韓山)에서 만드는 한산모시는 예로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서 품질이 우수하며 섬세하고 단아하여 모시의 대명사로 불리어 왔다고 해요.
모시는 보통 7새에서 15새(보름새)까지 있는데 10새 이상을 세모시라 하고 숫자가 높을수록 고운 최상품으로 여깁니다. 1새는 30㎝ 포폭에 80올의 날실로 짜여진 것인데요. 모시는 습도가 모자라면 끊어지기 쉬우므로 더위에도 통풍이 안되는 움집에서 짜야 하고, 바람이 불거나 비오는 날에는 일을 할 수가 없다고 해요. 근래에는 염소표백을 하여 흰 모시를 만들기도 하며, 섬유공업의 발달과 함께 수요가 줄어들어서 이 지방의 모시짜기 기술도 점차 쇠퇴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시관에서는 돋보기로 옷감을 직접 보며 비교해 볼 수도 있는데요. 한산모시 명품은 12승으로 한 폭에 승수 880올 이상인 모시를 말한다고 합니다. 한산모시는 명품 12승, 특품 10승, 상품 9승 5모, 중품 8승 2모 /4모/5모 네 종류가 있다고 하네요.
선조들이 모시를 염색하는데 사용한 염료와 매염제와 염색한 모시도 전시되어 있어 살펴보았습니다. 홍색계열의 염료는 홍화, 소방목, 꼭두서니를 염료로 사용하고, 매염은 백반이나 무매염을 했다고 해요. 홍색은 남방읊의미하는 색으로 화(불)에 해당하며 계절은 여름에 상징한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벽사를 막아준다고 해서 벽사의 색으로 많이 사용했는데요. 염료가 고가인 관계로 세종때는 금기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흑색계열의 염료는 먹, 상수리나무, 숯, 오배자, 진피 등을 염료로 사용했는데요. 흑색은 겨울을 상징하며, 조선시대에는 흑단령을 관복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민가에서는 흑색계열로 염색한 치마와 함께 소색 저고리를 착용했다고 합니다.
청색계열 염료로는 쪽풀, 계장초 또는 닭의 장풀, 붓꽃 등이 있으며, 그중 쪽풀이 대표적이라고 해요. 쪽풀은 동방을 의미하는 색으로 목에 해당되며,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예복과 관복등을 비롯하여 민가에서도 많이 사용되던 색이며, 쪽색, 아청색, 감청색, 옥색, 유록색 등 다양하게 표현되었다고 해요.
황색계열염료로는 치자, 황백, 울금, 황련, 괴화, 대황 등이 있으며, 치자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가장고귀한 색으로 인식이 되어 황제를 상징하는 색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갈색계열의 염료로는 감, 정향, 밤나무, 상수리 나무 등 대부분 나무껍질, 줄기, 열매에서 추출했는데요. 다른염료에 비해 주변에서 쉽게 재료를 구할 수 있어 서민들의 일상복에 많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한산모시를 제작 과정>
제작과정은 재배와 수확, 태모시 만들기, 모시째기, 모시삼기, 모시굿 만들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모시짜기, 모시표백 순입니다.
수확한 모시풀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속껍질로 태모시를 만드는데요. 이를 물에 네 번 적셔 햇빛에 말린 후 물기와 불순물을 제거(바래기) 합니다. 태모시를 하루쯤 물에 담가 말린 후 이를 다시 물에 적셔 이로 실의 올을 하나하나 쪼개는데 이것을 모시째기라고 한다고 해요 태모시의 품질과 모시째기의 숙련도에 따라 모시의 품질이 좌우돼 가장 어려운 과정이라고 합니다.
모시째기가 끝난 저마섬유 한 뭉치를 '쩐지'라는 버팀목에 걸어놓고 한올씩 빼어 양쪽 끝을 무릎 위에 맞이어 손바닥으로 비비는데요. 이렇게 연결시켜 실을 만들어 광주리에 차곡차곡 쌓아놓는 과정을 모시삼기라고 한다고 합니다. 모시삼기의 과정은 실의 균일도를 가름하는 과정으로 한산의 모시삼기기술은 우수해 균일도가 일정하다고 해요.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실을 체에 일정한 크기로 서려 담아 노끈으로 열 십(十)자로 담아 모시굿을 만든다고 합니다.
모시날기 과정은 모시를 짜기위해서 필요한 날실을 준비하는 과정인데요. 직물의 길이와 폭, 섬세도 등에 따라 날실의 길이와 올수가 정해집니다. 넓은 공간에서 2명이상이 작업을 하는데요. 10개의 모시굿에서 '젖울대'의 구멍으로 실끝을 통과시켜 한 묶음으로 한 후 날틀에 걸고 한필의 길이에 맞춰 날실의 올수를 맞춥니다. 실의 굵기에 의해 한 폭에 몇 올이 들어갈지 결정하는 과정으로 10개 이상을 세모시라고 하고 숫자가 높을수록 고급품이라고 합니다.
바디끼워 새몰기 과정은 올 사이를 고르게 조절하기 위해 바디를 끼우고 새를 앞으로 옮기는 작업인데요. 날실의 올수에 맞춰 준비한 바디의 살 사이마다 2올씩 끼워주게 됩니다.
다음은 모시매기 과정으로 바디에 끼워진 날실을 도투마리와 끄싱개에 말아 고정시키는데요. 콩가루와 소금을 물에 풀어 만든 풋닛 가루를 뱃솔로 묻혀 날실에 골고루 먹여 이음새를 매끄럽게 하고 왕겻물로 말리면서 도투마리에 감는 과정입니다. 이때 날실이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뱁댕이를 중간중간에 끼워가며 도투마리에 감는다고 해요.
씨실꾸리감기 단계는 위사로 사용되는 씨실꾸리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꾸리는 틀을 이용하여 씨실꾸리감기를 하는데요. 모시를 나는 작업과 매는 작업은 모시 직조과정에서 날줄을 매는 작업이지만 꾸리는 모시굿을 씨줄로 사용하는데 알맞게 모양을 만드는 작업으로 이 과정입니다. 모시굿 20개가 한필의 원사량이 된다고 해요.
모시짜기 과정에서는 날실이 감긴 도투마리를 베틀의 누운다리 위에 올리고 바디에 끼운 날실을 빼어 2개의 잉아에 번갈아 끼웁니다. 다시 바디를 끼워 '매듭대'에 매고 말코에 감아 날실을 팽팽하게 감은 채 베틀의 쇠고리채를 발로 잡아 당겨서 날실을 벌려 손으로 준비 된 씨실꾸리가 담긴 북을 좌우로 엮어 모시를 짜면 됩니다.
마지막 단계는 표백과 다듬질로 콩풀을 빼고 표백하는 것을 마전이라고 하는데요. 과거에는 잿물에 삶아 햇볕에 말려 표백했으나 현재는 화학약품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생모시는 콩풀을 제거하여 자연스럽게 색깔을 살린것이며, 백모시는 하얗게 표백한 것을 말한다고 해요. 표백 후에 풀을 먹여 손질한 후 밟아서 큰주름을 없애고 다름이질로 마무리하면 됩니다.
그동안 한산모시는 비싼 고가품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분들을 곳곳에서 만나기도 했는데요. 오늘 전수관에서 한산모시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고 나니 이제 비싸다는 말을 못할 것 습니다.
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한산모시 홍보관으로 향했습니다.
한산모시는 2003년 2월부터 등록을 위한 준비를 시작해 가공단체 구성 및 품질특성을 객관화 했는데요. 오랜시간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2006년 12월 한산모시 지리적표시품 제 25호로 등록해 생산이력관리시스템을 통해 한산모시를 인증하고 있다고 하니 꼭 필모시 태그 확인후 구매하시기 바랍니다.
한산모시전시 판매장에는 모시로 요즘 트렌드에 맞춘 디자인의 한복과 드레스, 생활복, 아동복 등 한산모시로 만든 옷들이 전시되어 있네요. 옛것을 고집하지 않고 요즘 트렌드에 맞춰 만든 의상 하나하나 모두가 정말 고급스럽고 멋스러웠습니다.
모시는 다른 섬유 직물에 비하여 통풍성이 월등하고 습기의 흡수력과 발산 속도가 빠르다고 합니다. 특히 한산의 모시풀은 대부분 백저마로 섬유가 가늘고 순백색을 띠며, 광택이 많아 가는 실 방적에 적합하다고 해요. 한산모시로 만든 옷은 질감이 까슬까슬하며 입을수록 윤기가 지속되며 결이 지극히 부드럽고 섬세해 잠자리 속 날개 같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모시를 활용한 소품과 공예품도 판매하고 있어 선물용으로 구매해도 좋을것 같습니다. 한산모시로 만든 머리띠, 머리핀, 브로치는 공예작가들이 직접 만들어서 판매하는데 선물용으로 인기가 좋다고 하네요.
한산모시관 앞 도로 건너편에는 한산모시 공예박물관에서는 디저트 카페도 즐길수 있고, 나만의 한산모시 주얼리, 모시팔찌, 모시반지, 모시 브로치, 머리끈, 차받침, 12가지 매듭 브로치, 실버 반지 만들기 등 이색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주말에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뜻깊은 추억을 만들고 싶다면 한산모시관과 공예 박물관에 방문해 이색체험을 해 보길 추천합니다.
한산모시마을 관람을 마치고 신성리 갈대밭으로 향했습니다. 신성리 갈대밭은 금강과 서해 바다가 만나는 지대에 형성된 갈대밭으로 우리나라 4대 갈대밭 중 하나로 꼽힐 만큼 넓은데요. 특히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드라마 '킹덤' 등 여러 영화, 드라마의 촬영지로 활용될 만큼 경관이 아름답고 친숙한 공간입니다.
햇볕을 받은 금강은 윤슬이 보석처럼 빛나고, 맑고 청명한 하늘엔 겨울철새들의 군무가 장관을 이뤘는데요. 신성리갈대밭은 겨울철에 고니, 청둥오리 등 철새의 군락지이기도 하여 자연학습, 출사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신성리 갈대밭에서 봄을 재촉하는 찬바람에 몸을 맡긴채 가만히 눈을 감고 갈대의 바람소리를 들어 보았는데요. 귓가를 맴도는 갈대의 몸짓과 바람소리가 어우러져 겨울 소나타를 연주하는 것만 같습니다. 신성리 갈대밭은 계절별로 여름에 푸른 빛을 띠는 등 각기 다른 색깔과 매력 뽐내고 있어, 미묘하게 다른 갈대의 바람 소리를 느껴 보는 것도 좋을것 같네요. 또한 갈대숲에서 서식하는 갈게(갈대밭에 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를 관찰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라고 하니 호기힘 많은 아이들과 갈게를 잡아봐도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