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일 (가해)
이사야 35,1-6ㄱ.10 야고보 5,7-10 마태오 11,2-11
2022. 12. 11.
주제 : 내가 보여야 하는 올바른 자세
(토요일, 저녁미사 시작에 할 소리)
오늘 미사에는 지난 5월 초순부터 신앙인의 길을 준비했던 분들에게 세례식을 하는 예절의 시간이 있습니다. 오늘 미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예비신자라는 이름으로 불렀지만, 오늘 미사의 중간에 세례식을 거행하면, 이제는 우리와 같은 신앙인으로 함께 한다는 의미로 형제라는 표현으로 부를 것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다고 말하고, 사람들이 서로 축하할 일이고, 먼저 신앙인으로 살기 시작한 분들도 면목동성당의 신앙인의 공동체를 아름답고 멋있게 만들면 좋겠습니다. ***********
세상에 있는 어떤 공동체에나 같은 규정이 적용되기 마련이지만,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잘사는 일은 어렵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규정을 생각하면 쉽지 않다고 할 일이지만, 거기에다 하느님의 뜻을 배우고 익히고 헤아리며 세상에서 실천하는 일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오늘은 올해 대림절에 맞이하는 세 번째 주일이고 자선주일로 기억하자고 교회공동체가 권고하는 날입니다. 자선(慈善)이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위치에 산다고 생각하여,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고,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나누어줄 것을 권고하는 행동’입니다. 내가 땀을 흘렸고, 내가 힘들게 살면서 벌어들인 것들인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받는 대가가 없이 나누는 일은 분명히 어렵고도 힘든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만든 결과가 나에게 이익이 되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만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 것이라고 말할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으로 살면서 내가 가진 것을 내어놓고 나누면서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삶에 좋은 영향을 만드는 자선이라는 행동을 드러내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여긴다면, 그런대로 쉬울 수는 있습니다만 우리가 그 일에 얼마나 충실하게 참여하겠습니까? 혹시라도 나는 세상에서 받고 또 받아야 만족할 사람이고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해도 만족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판단은 다를 것입니다. 그런 의도를 드러내며 사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자기의 것을 대가가 없이 나누는 자선을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들은 이사야 예언자가 선언한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실현하실 메시아가 오셨을 때,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그 모습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귀에 들려오는 장밋빛 희망이 섞인 소리는 정말로 현실이 되는 일이 가능할까 하고 묻게 하면서도 내 삶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좋겠다고 생각할 내용입니다. 이런 장밋빛 소리는 세상에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내 삶에 즐거움과 희망을 주신다는 얘기일까요?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말씀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떤 자세로 들어야 하겠습니까? 이 일이 나의 삶에 이루어지게 하려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언자는 광야와 메마른 땅이, 사람처럼 들을 귀가 있는 사람으로 여겨서, 그들에게 기뻐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처럼, 생명이 자랄 바탕이 되는 물을 찾기가 힘든 사막에서 원하는 때에 꽃을 피우는 일은 기대할 일일까요? 하느님의 힘이 우리를 찾아오신다면 걱정하지 않고 그 실현을 기대하지만, 사람의 처지를 먼저 생각한다면 어디에서 그 가능성을 말하겠습니까?
눈이 먼 사람의 눈이 열리고, 듣지 못하던 사람의 귀가 열리며,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하지 못하던 사람의 혀가 풀려서 환성을 터뜨리는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실현될 놀라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면 세상이 그렇게 바뀌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면 그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질문을 자꾸만 반복합니다만, 그 일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서 나더러 누리라고 양보하는 세상은 아닙니다. 내가 협조해야 하고, 내가 참여해야 그 일이 조금이라도 실현될 세상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선구자로 살았지만, 자기가 이루어진다고 선포한 일들이 시간이 미루어진다고 느끼게 되자,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보내어 묻게 했습니다. 우리의 세상에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질문하게 했습니다. 이 소리는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의 나라에 살 수 없을 만큼 엉터리로 살았다는 뜻일까요? 그 말을 마태오 복음서에서 듣는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내용보다 잘살고 있다고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까요?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하늘나라에서 가장 크고, 큰 인물’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우리가 질투의 마음을 가지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세상이 좋은 곳으로 바뀌는데 내가 협력할 일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좋을 일입니다. 오늘이 대림3주일이니,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을 말하는 때가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진짜로 우리에게 기쁨이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적당한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자세를 배우고 익혀서 실천한다면 좋은 결과는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