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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은 필자가 군포시 중앙도서관 문예창작실 초대 즉, 제1기 입실작가로 있을 때,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취재한 기념사진으로 취재 기자가 필자를 가리켜,
"수리산이 보이는 창작실에서 창작에 몰두하고 있는 소설가 김상락 씨."
라고 필자를 위로, 격려코자 높여준 기사이다. 또한 군포시 중앙도서관 문예창작실은 기존 도서관장을 철거하여 건립한 청사로 대한민국 시군구 청사로는 최초의 작가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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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명치유신을 단행한 왜놈, 쪽발이 놈들의 조선 군사력 시험 도발인 운양호 사건(운요호 사건)의 후폭풍인(후속조처) 강화도 조약과 문호개방(개항) 후, 봉건적 착취와 외세의 침투에 저항하는 임오군란(임오군사봉기, 임오군변, 임오봉기)과,,,,,,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선 역사상 최초의 정치적 혁명인 갑신정변을 실록 장편 역사 소설로 다루는 봉기의 화승총과 삼일천하 저자로 역사 소설가 여서(汝西) 김상락이다.
여서는 필자의 아호로 충무공 이순신의 자 여해(汝諧)와 필자가 역사의 인물 중에서 가장 존경하고 조선왕조 5대 명재상의 한 분이시며 임진왜란 초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중용돼 국난 극복에 헌신,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의정까지 역임했지만, 단아한 선비로 평생을 청백리의 삶을 산 풍원부원군 유성룡의 호 서애(西厓)를 참조했다.
도체찰사는 국가 전쟁, 변란, 비상 사태 때 삼정승(삼의정) 중에서 임명하는 임시직이지만 군정과 서무 등을 총괄하는 막중한 임무이다.
병서에 밝고 야전병을 지휘해 본 재상이 우선적으로 기용되는데 뭣보다 장졸들과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운 정승을 뽑아야 국난극복의 첩경이다.
필자는 자신있게 말한다 조선 최고의 도체찰사는 응당 류성룡이고 가장 오만방자 겸 무능한 도체찰사는 인조 때 병자호란을 맞아 도체찰사가 된 천하의 겁쟁이 중에 겁쟁이 김류(金瑬 1571~1648)였다고,,,,,,
단, 김류는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과 함께 충주 탄금대에 몸을 던져 순절한 김여물(金汝沕-金汝岉 1548~1592)의 외아들이었다. 김여물이 문과로 출사했지만 병서에 밝고 무예 또한 출중하여 의주목사(정3품 당상관)를 역임했다.(비록 송강 정철의 건저의 사건 즉 세자책봉 문제 때 실각하여 의금부에 투옥돼 있었지만,,,)
또한 김여물은 담력이 좋고 지략, 무략이 엄청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군졸들이 믿고 따르는 충직한 성격의 아까운 충신이었다.
그런 김여물의 충정을 아들 김류가 문지르는데 기틀(?)을 마련했고, 손주 김경징(金慶徵 1589~1637)이 강도도검찰사(江都都檢察使 강화도 수비대장 정2품)의 신분을 이용(?)하여 조부의 숭고한 헌신을 날강도(强盜)처럼 가차없이 밟고 힘차게 문질러 버렸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아직 도체찰사가 뭔지를 모르고 아무렇게나 내뱉는 역사 관련 석학들이 많이 있는데, 특히 고종과 대한제국 시절에도 도체찰사가 밀지로 기용돼 왜놈, 쪽발이 놈들을 때려잡았다고 한다.
오호통재(嗚呼痛哉). 시일야방성대곡, 통석의 념 등 턱도 아닌 기록, 주장 등도 숱하게 많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카페 제목으로 정확하게 부연하겠는데, 한마디만 덧붙이면,,,,,,
"진짜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으로만 역사를 나불대는 인간들이 득세해서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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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시청 밥상머리 북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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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필자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실록 장편 역사 소설로 다루는 봉기의 화승총과 삼일천하를 집필, 탈고하여 출간한 곳은 "군포시청 밥상머리 북카페"였다. 이에 대하여는 부연이 필요한데,
군포시, 군포시청은 책읽는 군포의 일환으로 시청 청사 출입구에 조그만한 문고가 있었는데 2011년 10월 31일 그곳을 좌우와 미니 2층으로 확장, 수리하여 개관했다.
명칭은 앞에서 말한 군포시청 밥상머리 북카페이고 이 북카페는 대한민국 시군구 청사로는 최초의 북카페이며 군포시청 북카페, 군포시 북카페, 밥상머리 북카페" 라고도 부른다.
필자는 군포시청 밥상머리 북카페 개관 첫날 07시부터 밤 10시까지 북카페에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실록 장편 역사 소설로 다루는 봉기의 화승총과 삼일천하의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필자가 군포시청 밥상머리 북카페에서 집필할 때 김윤주 군포시장과 군포시청 공무원들은 필자가 좋은 작품을 낼 수 있도록 "성원, 격려, 애정" 등을 쏟아부었다.
특히 군포시청 책관련 부서 모 팀장은 필자가 밥상머리 북카페에서 작품활동을 하는데 조금의 불편이라도 덜어주고자 무던히도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모 팀장은 필자가 군포시를 대표하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역사 소설을 출간해 줄 것을 진실로 바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모든 역량을 발휘해 필자를 위하여 극진히 극진히 진력, 또 진력했다.
거기에다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한 북카페 모 공익요원도 필자에게 조금의 힘이라도 되어 주기 위하여 나름대로 동분서주, 좌충우돌(?)했다.
비단 군포시청 공무원 이외에도 필자가 군포시를 대표할 수 있는 역사 소설을 출간해 줄 것을 간곡히 기원하며 물심양면으로 힘써주고 도와주신 많은 군포시민들이 열화와 같은 성원도 무척 뜨거웠다.
필자는 많은 군포시민들의 뜨겁고 열화와 같은 성원에 가일층 힙입어 만 7개월(2011년 12월 30일 어머님 장례로 하루 휴무)의 대장정 끝에 군포시청 밥상머리 북카페에서 봉기의 화승총과 삼일천하의 원고를 집필, 탈고하여 출판사에 채택돼 출간하게 되었다.
봉기의 화승총과 삼일천하의 출간은 책읽는 군포시, 책나라 군포시에서는 최초의 역사 소설이며, 시군구 청사 북카페로도 최초로 출간된 역사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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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필자 선친 김진화 재일학도의용군 겸 무공수훈자 국가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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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부연키 전, 재일학도의용군(在日學徒義勇軍)이란? 1950년 6, 25 전쟁 때 해외 유학생 동포로는 세계 인류 역사상 최초로 고국 전선에 자원 입대한 642명의 학도들을 가리킨다.
이들 642명의 재외 유학생들에는 조국의 부름도 없었고, 병역의 의무도 없었지만, 풍전등화, 누란지계, 백척간두에 선 고국을 구원키 위한 구국의 일념으로 분연히 봉기하여, 제1차에서부터 제8차에 걸쳐 나무어 모국으로 들어왔다.(1967년부터 전원 국가유공자 정규 공헌 3급 예우와 배우자까지 연금 및 수혜 승계)
필자 선친 김진화(金珍和 1932,10,19~1972,6,5)는 동경 대학교 1학년에 유학 중인 당시 17세로 당시 재일학도의용군 중에서 최연소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즉, 제1진 82명이 출전할 때 함께 험준한 현해탄을 건너와 조국 전선에 자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 수호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인생을 송두리째 바쳤다.
필자는 재일학도의용군의 아들로 탄생(?)한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가령 진실로 내세가 있다면 다시 아버지의 자식으로 탄신(?)하기를 간곡히 간곡히 바란다.
아버지께서는 비록 단명(1972년 필자 10살 때 작고)하여 아들을 보살펴주지를 못했지만 다음생에서는 장수하여 자식을 극진히 극진히 보살펴줄 것을 확신.(필자에게는 김진화의 아들이라는 자체가 대통령, 국무총리, 교황보다 더 높은 벼슬이며, 세상의 가장 큰 부귀영화와 행복이다.)
재일학도의용군들의 조국 전선 자원 참전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자원 입대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때 자원 입대한 이스라엘 유학생들보다 무려 17년이나 빠른 자원 입대였다.
또한 이스라엘 유학생들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후원에 힘입어 모국으로 들어왔으며 거기에다 개전(開戰) 6일만에 아랍 연맹국이 이스라엘에게 항복까지 해버렸다.
고로, 이스라엘 유학생들이 고국으로 들어와 훈련소에는 입소했지만 전선에 배치돼 전투를 치른 적은 결단코 없었다. 모두 영웅호칭과 함께 학교로 바로 복귀했고, 특혜도 엄청났는데 조선으로 환산하면 개국 1등 공신 이상의 어마어마한 예우였다.
그렇지만 재일학도의용군들이 꺼져가고 쓰러져가는 고국을 구원코자 험난한 대해를 건너왔지만 정부의 무관심과 냉대였다. 모두 전선에 투입돼 생사를 넘나드는 3년의 전쟁도 치렀다.
그 3년 교전 중, 재일학도의용군 150명은 약관의 꽃다운 나이에 피어보지도 못한 자신의 고귀한 피를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라에 뿌리며 홀연히 산화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재일학도의용군들의 숭고한 헌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기는 커녕 철저히 외면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죽든, 병신이가 되든, 넝마주이가 되든, 정신이 어떻게 되어 환청(幻聽)을 듣고 어디론가 사라지든 안중에도 없었다.
재일학도의용군들이 1967년 국가유공자로 인정될 때까지 국회와 국회의원들의 목숨을 건 반대로 무려 14년의 세월을 눈물과 비통, 통한, 회한의 나날로 얼룩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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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가입 인사 후, 첫 게시글인데 임오군란 갑신정변 중에서 이재선의 역모 사건, 이재선 추대 사건, 이재선 모역에 관해 간략하게 피력하겠다. 카페, 블로그는 너무 길고 창황하면 사족.
참고로 필자의 봉기의 화승총과 삼일천하 저서에도 이재선의 역모 사건을 소제목으로 13페이지의 분량으로 다룬바 있다. 카페와는 좀 차이가 나지만,(아래 그림)
(이재선의 역모사건, 이재선 추대 사건, 이재선 역모, 이재선 모역 등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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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선의 역모 사건"
때는 조선 고종 18년 1881년 7월 어느날 형조참의와 승지를 지낸 안기영(安驥泳 1819~1881)이 운현궁을 방문해 흥선대원군에게 인사를 드린다. 뭐, 통상적으로 운현궁을 방문하는 것이지만 민씨 일파의 감시는 여전히 만만치 않는 상태였다.
10년 섭정에서 물러난 흥선대원군은 오늘도 운현궁 아재당(我在堂)에서 난을 치는 소일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고 삼복 더위라 찌는 듯한 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난초를 그리는 흥선대원군이었다.
인사를 마친 안기영은 은밀하게 흥선대원군에게 아뢰기를,
"대원위 합하, 이재선(李載先 1842~1881) 서방님을 추대키 위해 소인들이 준비를 하고 있으니 합하께서도 알고 계셔야 하므로 이렇게 아룁니다."
불문곡직 대원군의 벽력같은 소리가 아재당에 울린다.
"네 이놈, 썩 물러가지 못하겠는가."
라며 흥선대원군은 천,하,장,안 심복들에게 명하여 안기영을 강제로 운현궁에서 끌어내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심복들에게 지시하기를,
"저놈이 다시 운현궁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에는 자네들의 목이 달아날 것이야."
흥선대원군의 진노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섭정 10년과 퇴임 9년이 지났지만 흥선대원군이 이렇게까지 진노한 사례는 극히 드문일이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아재당에 문을 닫고 혼자 중얼거리기를,
"이놈들아, 네놈들의 그런 아둔한 대가리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운현궁을 물러나온 안기영은 흥선대원군의 그런 정도의 행동은 자신들의 거사를 어느 정도 묵인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권정호, 이철구 등과 함께 시답잖은 반역(?)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재선은 흥선대원군의 소실 계월성의 아들로 고종에게는 이복형이고 이 무렵 별군직(別軍職)에 있었으며 어느 누구로부터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더 쉽게 말하면 흥선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로 인간 불출이였다. 이재선을 완은군(完恩君)이라고 부른다.
안기영이 비록 1866년 병인양요 때 출전하여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를 따르는 군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군자금도 넉넉한 형편도 아닌 일개 시정 잡배나 진배없는 위인들이었다.
그래도 안기영은 권정호, 이철구, 강달선 등과 함께 군사를 모집하고 거사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나름대로 동분서주했다. 급기야 안기영은 자신의 집과 전답 등도 모두 처분해 군자금을 마련하기까지 했다. 덩달아 권정호, 이철구, 강달선 등오 모두 가산을 처분해 거사를 성공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안기영은 광주 유수부(廣州 留守府 종2품 관아)의 관할인 남한산성 정9품 장교 이풍래(李豊來)까지 이재선 역모 추대 사건에 포섭하는 성과를 올렸다. 유사시 이풍래가 남한산성에서 동원할 수 있는 군사는 실제 10명도 안 된다. 아니, 뭐, 남한산성을 총괄하는 광주 유수를 어디 호구로 알아서 되겠는가.
참고로 광주의 통치를 보면 광주 목사(牧師 정3품)는 광주의 행정을 맡았고, 수어청 수어사는 남한산성의 군권을 총괄하는 2원 체계로 늘 마찰을 빚어왔다. 그후 광주부를 부윤부로 승격시켜 종2품의 외관(外官)이 수어청 수어사를 겸직케 하여 지휘체계를 갖추었다. 그래도 미흡한 점이 있어 정조대왕께서는 1795년 광주 부윤부를 유수부로 격상시켜 경관(京官)의 종2품 광주 유수가 수어청 수어사를 겸직토록 했고 임기도 2년으로 정하여 지휘계통을 확립했다.
그럼, 안기영, 권정호 등은 어떻게 거사(?)를 하려고 했는가에 대하여 좀 살펴보면,
"그들은 우선 신식 무기로 무장한 후, 8월 경기도 향시인 초시 때 과거장으로 잠입한 후, 유생들을 선동하여 흥선대원군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척사토왜를 외쳐 그들이 최우선적으로 봉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군대를 3군으로 나누어 제1군은 왕궁을 공격해 국왕을 폐위하고, 제2군은 척신과 탐관오리 등을 때려 죽이고, 제3군은 왜놈 공사관을 공격하고 별기군 교련장을 습격해 무기를 탈취해 궁궐로 진격한다."
이런 등의 턱도 아닌 거사 내용이었다.
안기영의 역모는 초장부터 차질을 빚었는데 우선 경기도 향시가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들은 신식 무기는 고사하고 화승총, 창, 칼, 활 등의 기본적인 무기도 구입하지 못한 맨주먹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다 결정적으로 광주 남한산성 이풍래 장교는 거사 성공의 희박성을 느끼고, 8월 28일 의금부에 안기영, 권정호, 이철구 등의 역모를 고변하게 되었다. 판의금 부사의 보고를 받자 고종, 민비 등은 대경실색했고, 중요 대신들은 모두 입궐하여 대책을 논의하게 되었다.
대궐은 즉각 비상사태로 접어들면서 포도청과 무위영, 장어영 등의 장졸들이 달려와 대궐을 새카맣게 애워쌓다. 그리고 군사들은 모두 무장하여 운현궁도 포위했고, 안기영, 권정호, 이철구, 강달선 등 주모자 30여 명을 모두 체포하여 형틀에 꽁꽁 묶었다.
(참고로 이 무렵 조정은 기존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수어청, 총융청 등의 5군영을 해체하고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축소 개편돼 있었다. 또한 조선 최초의 신식군대로 불리는 별기군도 창설되어 한참 조련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추국청이 설치되고 판부사를 지낸 판돈령부사 한계원(判敦寧府事 韓啓源 1814~1882)이 위관으로 임명되자 마자 안기영, 권정호 등 30여 명의 죄인들은 곤장이 부러지도록 매를 맞았을 뿐만 아니라 살점이 곤장에 떡떡 붙어 부러지도록 얻어 터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속히 사형을 당하는 게 되레 나은 편이었다.
죄인들의 입에서 역모 사실이 모두 밝혀졌다. 그 중에는 이재선을 끝까지 보호하는 입도 있었고, 이재선을 역모에 끌어들이는 답변도 있었다. 그러나 운현궁 즉 흥선대원군까지 역모에 개입됐다고 입을 놀리는 죄인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이재선은 의금부에 자수했다. 처음에 이재선을 서간(西間, 가벼운 죄인)에 수감돼 위관과 묻고 답하는 심문 형태로 조사가 시작됐다. 그러자 중신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이재선을 남간(南間 대역 모반 등 중죄인 수감하는 곳)에 수감시켜 혹형과 고문을 가해서라도 전모를 밝히라고 강력히 주청했다. 임금도 처음에는 형식적으로 중신들의 주청을 물리쳤지만, 결국 9월 5일 어명을 내리는데,
"서간에 구금되어 있는 이재선에게 형구(刑具)를 채워져 남간에 수감하고 엄중 문초토록 하시오."
이제 의금부 관원들은 이재선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주리틀기를 당한 이재선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비록 흥선대원군의 서출로 태어났지만 여태껏 살면서 매를 맞고 살지 않았던 이재선이었다.
주리틀기에 이어 시뻘겋게 달군 쇠창살이 이재선의 허벅지를 마구 지져댄다. 고통을 못이긴 이재선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흐~흑, 아버지, 살려주세요, 흑~흑, 아버지 살려주세요."
라며 비명과 함께 이재선의 눈에는 눈물이 줄줄줄 흘러나왔다. 추국장에서 듣고 있던 흥선대원군의 친형 흥인군 이최응이 분노하며 지껄인다.
"아~아니, 저, 저, 저놈이 대원위에게 아버지라니, 감히 첩의 자식 주제에 저런 당장 쳐죽여도 시원찮을 놈 같으니라고,"
따지고 보면 조카인데 이렇게까지 야박해서 되겠는가. 이최응은 탑전으로 달려가 고종에게 아뢴다.
"전하 지금, 대역죄인의 수괴 이재선을 문초하고 있지만, 판돈령부사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이재선을 선하게 문초하고 있어 모든 진실을 밝혀내기에는 미흡합니다. 전하의 어명으로 위관을 교체해 주실것을 간곡히 호소합니다."
뒤이어 중신들도 한계원이 역모의 수괴인 이재선을 철저히 조사치 않는다고 하여 양사를 동원해 탄핵했다. 급기야 9월 7일에는 추국 위관이 한계원에서 영의정을 지낸 영돈령부사 홍순목(領敦寧府事 洪淳穆 1816~1884)으로 바뀌었다. 실상 홍순목과 한계원은 모두 흥선대원군의 계열 인물이지만 민비 정권에도 소중하게 쓰이는 관료들이었다.
추국장은 물론이고 조정 어느 신료도 이재선을 옹호하는 관료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 흥선대원군의 친형 흥인군 이최응은 이재선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데 앞장섰다.
의금부 남간에 갇혀 항쇄와 족쇄로 채워진 채 얻어터질대로 얻어터진 이재선의 신체는 너덜너덜했다. 사형 집행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그냥 내버려 둬도 얼마가지 못하는 몰골이었다. 그렇지만 대역 죄인을 치죄하는 추국장에서 그런 인정 따위가 통하겠는가.
계속되는 위관의 심문에 이재선은 끝까지 자신이 혐의를 부인하며 말하는데, 너무나 애초롭게 보인다.
"대감, 대감께서도 알잘 고 계시지 않소, 이 사람이 어디 인간 축에나 드는 사람입니까. 저는 서자의 신분으로 하루 세끼 배불리 먹고 사는 것만으로 전하의 은혜가 하해와 같은데, 어찌 감히 꿈에라도 역모의 마음을 먹겠습니까."
사실 이재선의 말이 틀린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올가미에 걸려든 역모의 수괴(?)가 어찌 빠져나가겠는가.
대궐은 온통 역적들의 신음소리와 그들이 고문을 받으며 흘린피와 찢겨져 나간 살과 시뻘건 불에 태워진 살점 등의 냄새가 진동했다. 2달여 가까운 고문과 혹형, 죄인들의 자복 등으로 이제 추국청은 폐지되고 최종 대역죄인들에 대한 처분만 남게 되었다.
10월 26일 안기영, 권정호, 이철구, 강달선 등 30여 명은 능지처참을 당했고 그 중 7명의 주동자 급의 머리는 군문에 효수(梟首)했다. 그리고 이재선은 임금과 형제라는 이유로 제주목으로 유배되었다.
그러자 모든 대신들이 또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이재선의 사사를 극렬하게 주청한다. 임금은 관료들의 직언을 물리쳤다. 중신들은 이제 퇴청도 하지 않고 이재선의 사사만을 죽기살기로 아뢴다. 밤이 깊어도 신료들은 농성 형태로 이재선을 죽이고자 외쳐된다. 모두 민비의 눈치를 보느라 앞다투어 고한다. 다음날 다시 어명이 내려진다.
"제주목에 유배된 이재선을 사사하라."
아니, 뭐, 제주목까지는 고사하고 아직 한양도 채 벗어나지 못한 이재선의 압송행렬인데, 벌써 죽음의 어명이 내려졌다. 이재선의 사사를 윤허받은 중신들은 민비가 내린 두툼한 은자로 기방에서 3박 4일을 질퍽하게 보냈다.
제주목으로 압송된 이재선은 이미 민비가 보낸 사약을 벌컥벌컥 마시고 한많은 인생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민비와 민씨 일파들은 운현궁을 더욱 감시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재선 역모 사건 고변자 이풍래는 광주 남한산성의 중군(中軍 정3품, 육군중장 급)으로 승차하였다.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인 경국대전에도 기록돼 있지만 역모를 고변하는 자는 신변 보호는 물론이고 반드시 논공을 행하도록 돼 있다. 이풍래처럼 비록 처음에는 가담했다가 거사의 성사가 희박해져 밀고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풍래의 관한 기록은 더 이상 존재치 않고 있다.
(참고로 이재선을 죽이는데 앞장서서 크게 공헌한 이최응이 영의정으로 승차했다. 흥선대원군과 흥인군의 반목은 극에 달했고 6개월 뒤 봉기한 임오군란에서 극명하게 갈라지는데, 흥선군은 군졸들에 의하여 추대를 받았지만, 흥인군 이최응은 병졸들에게 맞아 고환이 터진 후,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지는 죽임을 당했다.)
이재선의 역모 사건을 토왜반정 음모사건이라고도 부르며 지금의 역사에서도 갑론을박이 분분하지만, 조선 왕조 역사상 역모 사건 중에서도 무척 어리벙벙한 모반사건이었으나 그 후폭풍의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한가지 덧붙이면, 운형궁의 준동을 봉쇄하려고 혈안이 돼 있는 민씨 일파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된 흥선대원군의 잔당들이었다.
민씨들로는 결국 앑던 이가 빠지듯 시원했고 그들의 독무대 세상이 되었으나, 결국 이듬해 임오군란이 터지면서 민씨 정권은 붕괴하고 조선은 청나라, 일본, 서구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엄청 급속도로 망해가는 지름길로만 바짝바짝 걷게 되었다.
(임오군란이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청나라 군대에게 무참하게 진압되면서 조선은 일제 36년 노예생활 전초전으로 원세개(袁世凱 1859~1916. 위안스카이)의 13년이라는 매서운 무단 통치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의 시·원임대신 중,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원세개 놈에게 귀싸대기 한 두번 안맞아 본 관료들이 과연 몇 명이었겠는가.)
이재선의 역모 사건에 관한 기록은 이외에도 많지만 양서 1권까지는 되지 않는다. 다만 임오군란이 발발하게 된 배경과 2년 뒤 잉태할 갑신정변의 거사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익혀야 할 사건이다. 비단,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뿐만 아니라 근대사를 연구하는데 간과해서는 결코 안될 역사적 사건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편에는 "성리학" 에 관하여 10회로 나누어 피력하겠다. 이재선의 역모사건, 이재선의 추대사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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