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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장 1-6절. 바울이 밀레도에서 가이사랴까지 여행함
1절.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en we had parted from them and had set sail, we ran a straight course to Cos and the next day to Rhodes and from there to Patara;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Ὡς δὲ ἐγένετο ἀναχθῆναι ἡμᾶς, ἀποσπασθέντας ἀπ’ αὐτῶν,
after then it happened to have sailed we, having been parted from them
직역하면 ‘그 후에 우리가 항해하게 되었고, 그들을 작별하고’란 뜻입니다.
‘우리가 항해하게 되었고’(ἐγένετο ἀναχθῆναι ἡμᾶς)에서 앞의 동사(ἐγένετο)는 부정과거이고(it happened) 뒤의 동사(ἀναχθῆν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이고(to have sailed), ‘작별하고’(ἀποσπασθέντας)는 부정과거 분사 수동태(having been parted)입니다.
바로 고스로 가서
εὐθυδρομήσαντες, ἤλθομεν εἰς τὴν Κῶ,
having run directly, we came to the Cos
직역하면 ‘바로 직행하여 우리가 고스로 갔다’란 뜻입니다.
‘직행하여’(εὐθυδρομήσ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이고(having run directly), ‘가서’(ἤλθο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came)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τῇ δὲ ἑξῆς εἰς τὴν Ῥόδον, κἀκεῖθεν εἰς Πάταρα·
on the then next (day) to Rodes, and from there to Patara
동사가 없으나 적절한 번역입니다.
1. 사도행전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면, 1-12장은 예루살렘 중심의 교회, 13-20장은 바울의 선교 사역, 21-28장은 바울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사도행전의 세 번째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에서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한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에베소 교회 고별 설교를 끝으로 바울이 선교한 사역을 마감하고, 21-28장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체포되고, 로마로 이송되어 재판받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유난히 바울의 재판 장면이 자세히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설립한 내용은 결과적인 것만을 다루고 있는데 반하여,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체포되고, 로마로 가서 재판받는 과정은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사실 교회의 설립에 대한 내용이 중심이라면, 바울이 체포당하고 재판받고 로마로 호송되는 사건들은 교회 설립과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체포되고, 천부장 재판(22장), 산헤드린 공회 재판(23장), 벨릭스 재판(24장), 베스도 재판(25장), 아그립바 재판(26장)이라는 5회 재판을 자세히 기록하고, 로마로 호송되는 과정(27-28장)도 자세히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2) 어떻게 보면, 예루살렘 교회(1-12장), 이방인 교회(13-20장) 부분은 서론이고, 바울의 재판이 본론이라는 느낌이 구조상 들게 됩니다.
심지어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마저도 바울의 재판을 위한 서론으로 기록되었다는 생각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데오빌로 각하에게 기록한 목적이 바울의 재판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3) 즉 데오빌로는 바울의 재판을 담당한 변호사인데, 바울의 재판과 기독교를 이해시키려고, 데오빌로에게 예수님의 기독교를 이해시키고, 유대교인이 어떻게 기독교를 핍박하고 바울을 고소했는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이 바울이 로마 감옥에 도착한 것으로 갑자기 끝난 것도 데오빌로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해서부터는 잘 알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에게는 누가복음의 예수님 사역과 사도행전 1-12장에서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행전 13-20장의 이방인 교회에 대한 기록이 중요하게 생각될지 모르나, 실상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으로 볼 때는 앞부분들은 모두 서론격이고 사도행전 21-28장이 결론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황제에게서 재판받는 것은 앞에 5번 재판받은 재판의 상고심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루살렘에서 천부장 재판(22장)과 산헤드린 공회 재판(23장)은 지방법원에서 1심 재판받은 것에 해당하고, 가이사랴에서 벨릭스 재판(24장)과 베스도 재판(25장)과 아그립바 재판(26장)을 받은 것은 고등법원 재판받은 것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최후로 로마에서 황제의 재판을 받은 것은 대법원 판결을 받은 것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재판을 볼 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1-20장은 바울의 재판을 위한 서론적인 이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은 궁극적으로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변증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에 대해서 교회에 보낸 글들인 갈라디아서, 로마서 등 바울 서신 대부분은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 변증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 당시에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별이란 대단히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재판이 그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2. 바울은 밀레도 해변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작별한 후에 일정을 빨리 재촉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밀레도에서 배를 타고 70킬로 떨어진 고스 섬에 가서 일 박을 하고 이튿날 로도로 갔습니다.
이 고스 섬은 의학의 아버지 히포클라테스의 고향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히포클라테스는 의학 학교를 세워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3. 바울은 이 고스 섬에서 하루 밤 잔 다음에 남쪽으로 85킬로 배를 타고 가서, 로도 섬에 도착했습니다.
이 로도 섬의 린도스 항구에는 바울이 도착했다는 곳에 바울의 기념 교회가 조그맣게 세워져 있습니다.
이 로도 섬에서 바울은 동쪽으로 소아시아 육지에 있는 바다라 항구로 건너갔습니다.
이 바다라 항구는 지금은 수심이 얕아서 배를 정박시키지 못하지만, 바울 당시에 범선은 여기서 정박하여, 육지인 소아시아 루기아 지방 사람들을 배에 태우는 항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바다라 항구에서 베니게로 가는 배를 갈아탔습니다.
4. 지금까지 드로아에서 바다라까지 타고 온 배는 비교적 풍랑이 잔잔한 곳을 지나왔기 때문에, 작은 배로 여행해도 위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다라에서 베니게까지 가는 배는 풍랑이 심한 곳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바울 일행은 바다라에서 큰 배로 갈아타야 했습니다.
이번에 바울이 바다라에서 구브로 옆을 지나 두로까지 가는 데는 풍랑으로 인해 고생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가이사랴에서 구브로를 지나 로마로 항해할 때는 구브로 부근에서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서 죽을 뻔했습니다.
이처럼 바다라에서 구브로 옆을 지나 두로로 항해하는 것은 풍랑이 거세기 때문에, 좀 더 안전한 큰 배로 갈아타야 했습니다.
5. 바울은 바다라에 상륙해서 베니게로 가는 배를 타지 않고, 선교여행 출발지인 안디옥 교회에 가서 선교 보고를 하고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고달픈 몸을 편히 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안디옥 교회는 1차 선교여행 출발지이며 (행 13장 1-3절), 1차 선교여행의 종착지였습니다(행 14:26).
그리고 안디옥 교회는 2차 선교여행의 출발지이며(행 15:36-41), 2차 선교여행의 종착지였습니다(행 18:22).
뿐만 아니라 안디옥 교회는 3차 선교여행의 출발지였습니다(행 18:22).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당연히 안디옥 교회에 가서 3차 선교여행의 결과 보고를 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바다라는 안디옥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바다라에서 육지에 상륙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디옥 교회로 가지 않고, 다시 배를 타고 예루살렘 쪽으로 갔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때 바울은 바다라에서 가까운 안디옥 교회에 가서 선교 보고도 하고, 환영도 받고, 육신도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왜냐하면, 당장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야 하고, 또한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안일함보다는 복음 전도를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칠 철저한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천성을 향해 가는 길에 창검을 꽂지 말고 앞으로 앞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교회가 부채에 시달리면 교회를 떠나가지만, 남은 성도님들은 기도하며 헌신 충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절.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having found a ship crossing over to Phoenicia, we went aboard and set sail.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καὶ εὑρόντες πλοῖον διαπερῶν εἰς Φοινίκην,
and having found boat passing over into Phoenicia
‘건너가는’(διαπερῶν)은 현재분사이고(passing over), ‘만나서’(εὑρ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found) 단순한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타고 가다가
ἐπιβάντες, ἀνήχθημεν.
having gone on board, we set sail
직역하면 ‘승선하여 우리가 항해했다’는 뜻입니다.
‘타고’(ἐπιβά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gone on board)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을 가리킵니다.
‘가다가’(ἀνήχθη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set sail) ‘항해했다’는 뜻이고, 단순한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1. 바울이 바다라에서 내려서 육로로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도 있었지만, 거액의 연보 때문에 강도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가이사랴에 상륙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배 안에서는 바울 일행이 숫자도 비교적 많았기 때문에, 강도의 위험이 적었습니다.
베니게라는 지명은 두로와 시돈 지역을 합친 지명입니다.
원래 두로와 시돈은 형제국이고, 둘 다 과거에 바알 우상 숭배로 유명한 곳입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고향이 시돈이고, 친정 아버지는 엣바알이었는데, 바알의 제사장 겸 왕이었습니다.
이 두로와 시돈은 해상 무역으로 한 때는 지중해를 주름 잡았던 곳입니다.
에스겔 27-28장에는 두로가 해상왕국으로서 누렸던 부귀영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로와 시돈을 합하여 베니게라고 하는데, 오늘날 역사책에는 ‘페니키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옛날 페니키아 언어는 쐐기 문자로 유명합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해상 무역을 하면서, 장사하기 위해서 페니키아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이 페니키아 문자가 그리스와 로마로 전달되어서,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영어로까지 발전되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이 지역에까지 가서 전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21-22.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래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 들린 딸을 치료해달라고 하자 예수님이 직접 가셔서 치료해주셨습니다.
마가복음 7:26.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그리고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세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전도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자, 심판 때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더 의롭다 함을 받으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3절.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en we came in sight of Cyprus, leaving it on the left, we kept sailing to Syria and landed at Tyre; for there the ship was to unload its cargo.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ἀναφάναντες δὲ τὴν Κύπρον καὶ καταλιπόντες αὐτὴν εὐώνυμον
having sighted then the Cyprus and having left it on the left
‘바라보고’(ἀναφάν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sighted) 과거의 사실을 가리키고, ‘왼편에 두고’에서 동사(καταλιπόντες)도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left) 바울 일행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항해하고 있었는데, 구브로를 왼편에 두고 지나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수리아로 항해하여
ἐπλέομεν εἰς Συρίαν,
we kept sailing to Syria
‘항해하여’(ἐπλέομεν)는 미완료과거로서(we kept sailing) 수리아를 향해서 계속 항해해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두로에서 상륙하니
καὶ κατήλθομεν εἰς Τύρον·
and we landed at Tyre
‘상륙하니’(κατήλθο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landed) 두로에서 상륙한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ἐκεῖσε γὰρ τὸ πλοῖον ἦν ἀποφορτιζόμενον τὸν γόμον.
there for the ship was being unloading the cargo
직역하면 ‘왜냐하면 거기서 배가 짐을 풀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짐을 풀려함이라’(ἦν ἀποφορτιζόμενον)에서 앞의 동사는 미완료과거로서(was being) 계속 행동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뒤의 동사는 현재분사로서(unloading) 하역 작업하고 있는 것을 가리켜서, 둘을 합하여 ‘짐을 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1. 구브로를 바라보고
(1) 바울은 구브로 섬에 들르지 않고,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원래 구브로 섬은 사도행전 13장에 말씀한 대로,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 때 첫 번째로 전도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박수 엘루마를 저주하자 엘루마가 순식간에 장님이 되어버린 곳입니다.
그러자 구브로 총독이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을 믿었던 곳이 바로 구브로 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얼마나 구브로 섬에 가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이 구브로 섬을 바라보기만 하고, 그냥 지나가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네, 그것은 바울이 바나바와 싸웠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행전 15장 36-41절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2차 전도 여행에 데리고 갈 것인지 여부를 놓고,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생질인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섬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이 구브로 섬은 바나바의 고향이었기 때문입니다(행 4:36-37).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가 가 있는 구브로 섬에 들르지 못하고 그냥 바라만 보고서 지나갔습니다.
이 때 바울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우선 과거에 마가의 문제로 바나바와 심히 다툰 일이 후회되었을 것입니다.
바나바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마가를 용서하고 다시 기회를 주었어야 할 것인데, 바울 자신이 너무 옹졸했다는 후회도 했을 것입니다.
(2) 한편 이처럼 바울이 실수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실수도 선하게 사용하셔서, 바울이 북쪽으로 가서 결국 구라파 그리스 반도를 전도하게 하신 섭리에 대해 감사드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많은 이방인 교회들을 설립하고, 거금의 구제 헌금까지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현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교차된 감정을 가지고 구브로 섬을 바라보면서 옆으로 지나갔습니다.
2.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1) 바울은 수리아 지방의 안디옥 교회도 들르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가서 선교 보고도 하고, 선교여행으로 인해 피곤한 몸도 편히 쉬고, 마땅히 선교여행의 출발지인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이처럼 사명 감당하려는 바울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 합니다.
(2) 바울은 구브로 섬 곁을 지나 남쪽으로 배를 타고 가서, 두로 항구에 상륙했습니다.
이 구브로 섬 사람들은 두로와 시돈 지역민과 무역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브로 섬 동쪽에 있는 안디옥 교회에도 들르지 않고, 두로 항구에서 상륙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거금의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다라에서 두로로 가려면, 구브로 서쪽으로 내려가야 직선 코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장 3절에서 구브로를 왼쪽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했다고 했습니다.
이 두로는 커다란 무역항인데, 이곳에서는 많은 짐을 풀어야 하기 때문에, 바울 일행도 두로에서 내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두로 항에서 배가 일주일간 정박하는 동안 두로에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심한 선교 사역을 하면서도 쉬지 못하고, 예루살렘 교회로 구제 헌금을 가지고 가는 바울의 모습을 애정을 가지고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님들도 주님께 충성하시고, 주님의 놀라운 동행과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4절.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fter looking up the disciples, we stayed there seven days; and they kept telling Paul through the Spirit not to set foot in Jerusalem.
제자들을 찾아
ἀνευρόντες δὲ τοὺς μαθητὰς,
having sought out then the disciples
‘찾아’(ἀνευρ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sought out) 제자들을 확실히 찾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ἐπεμείναμεν αὐτοῦ ἡμέρας ἑπτά·
we remained there days seven
‘머물더니’(ἐπεμείνα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remained) ‘머물렀다’는 뜻이고,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οἵτινες τῷ Παύλῳ ἔλεγον διὰ τοῦ Πνεύματος μὴ ἐπιβαίνειν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who to the Paul kept telling through the Spirit not to go up to Jerusalem
직역하면 ‘그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성령을 통해서 계속 말했다’는 뜻입니다.
‘계속 말했다’(ἔλεγον)는 미완료과거로서(kept telling) 계속 말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올라가지 말라고’에서 동사(ἐπιβαίνει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입니다(to go up).
1. 바다라에서 두로로 온 배는 커다란 화물선이기 때문에, 짐을 푸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배가 짐을 푸는 일 주일 동안 곧바로 두로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갔습니다.
배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몹시 피곤을 느끼기 때문에 항구에 도착하면 우선 몸부터 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두로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제자들부터 찾아보았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란 바울이 과거에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일 때, 바울 자신 때문에 흩어졌던 그리스도인들이 두로까지 피난 와서 세운 교회가 바로 두로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래서 바울은 두로 교회에 찾아가서 과거에 그들을 핍박했던 일을 회개하고 용서를 빌고 싶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무섭게 핍박했던 바울이 이방인들을 전도해서 많은 교회를 설립한 사실을 보고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을 당하고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다시 용서를 빌 기회가 없을 것이므로, 몸이 피곤해도 두로 교회에 찾아가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을 것입니다.
2.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 하더라
두로 교회에 있는 그 제자들은 믿은 지 오래 되었어도 성령 충만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는 성도들이었습니다.
즉 33년에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했고, 지금은 57년 오순절 무렵이므로 성령 체험한 지가 벌써 25년이 되었는데도, 두로 교회 성도들은 아직도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두로 교회를 설립한 후에는 25년 전 사울의 핍박 같은 박해도 없으니까, 안일하게 신앙생활 할 것도 같은데, 환난 때나 평안할 때나 변함없이 기도 생활 잘하여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로 교회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바울이 두로 교회 성도들의 권면대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순탄하게 더욱 전도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권고가 있었어도, 자신의 의지대로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결단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로 교회 성도들은 과거에 자신들을 무섭게 핍박했던 바울을 사랑하고 아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만일 아직도 과거에 바울의 핍박을 용서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었을지라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결박과 환란 당하는 것을 고소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로 교회 성도들은 바울 같은 죄인도 용서했기 때문에,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고, 또 바울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때, 성령님의 감동과 충만과 은사를 맛 볼 수 있습니다.
5절.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en our days there were ended, we left and started on our journey, while they all, with wives and children, escorted us until we were out of the city. After kneeling down on the beach and praying, we said farewell to one another.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ὅτε δὲ ἐγένετο ἐξαρτίσαι ἡμᾶς τὰς ἡμέρας,
when then it happened to have completed we the days
직역하면 ‘우리가 여러 날을 완전히 지낸 일이 있은 후에’란 뜻입니다.
‘완전히 지낸’(ἐξαρτίσαι)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이고(to have completed) ‘일이 있는’(ἐγένετο)은 부정과거로서(it happened) 둘을 합하여 ‘완전히 지낸’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떠나갈새
ἐξελθόντες, ἐπορευόμεθα
having set out, we kept journeying
직역하면 ‘떠나서 우리가 계속 여행했다’는 뜻입니다.
‘떠나서’(ἐξελθ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이고(having set out), ‘우리가 계속 여행했다’(ἐπορευόμεθα)는 미완료과거로서(we kept journeying) 계속 여행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προπεμπόντων ἡμᾶς πάντων σὺν γυναιξὶ καὶ τέκνοις, ἕως ἔξω τῆς πόλεως,
accompanying us all with wives and children, as far as outside the city
직역하면 ‘성문 밖까지 그들이 처자들과 함께 우리를 동행하니’라는 뜻입니다.
‘전송하거늘’(προπεμπόντων)은 현재분사로서(accompanying) 계속 동행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καὶ θέντες τὰ γόνατα ἐπὶ τὸν αἰγιαλὸν, προσευξάμενοι
and having bowed the knees on the shore, having prayed
‘무릎을 꿇어’에서 동사(θέ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bowed) 모두 다 겸손히 단호하게 무릎을 꿇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기도하고’(προσευξάμενοι)도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prayed)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일 주일간 두로 교회에 머문 것은 선교여행에서 비교적 오랫동안 머문 셈입니다.
바울 일행은 두로 교회 성도들과 믿음 안에서 친교를 나눈 후에 두로 교회를 떠나 예루살렘 교회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두로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환송하기 위해서 처자식들까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했습니다.
이것은 두로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만일 두로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고, 과거에 자신들을 때리고 가두고 가족과 친척을 죽인 데 대해서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처자식까지 함께 나가서 바울을 전송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로 교회 성도들은 그 동안 바울을 완전히 용서하고 오래전에 잊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도 서슴없이 바울을 사랑으로 전송했던 것입니다.
정말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고, 겉으로만 용서한 척한다면, 처자식들은 용서 안 한 것을 다 알기 때문에, 처자식들은 절대로 바울을 전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로 교회 성도들은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들도 바울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온 가족들이 진심으로 헤어짐을 아쉬워하면서 바울을 성문 밖까지 전송했던 것입니다.
2.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1) 강가나 바닷가에서 기도하는 풍습은 유대인들의 전통이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 시대에 나일강을 기적으로 건넌 후 백성들이 나일 강가에서 찬양하고 기도했습니다.
에스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에스라 8:21).
바울도 빌립보 전도할 때 강가에 나가서 기도할 처소를 찾았습니다(행 16:13).
에베소 장로들과 밀레도 해변에서 기도했습니다(행 20:36).
그래서 두로 교회 성도들과 바닷가에서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바울과 두로 교회 성도들이 함께 기도한 것은 그들의 교제와 사랑이 인간적인 사랑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교제와 사랑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람만으로는 오래 가지 못하고, 영적인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참다운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부모와 자식이 사랑해도 신앙이 서로 맞지 않으면 참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사랑한다고 말로써만 사랑을 하고, 실제로 쓸 것을 주지 않는 사랑은 허무한 사랑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 사랑과 영적인 사랑이 겸비해야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바울과 두로 교회 성도들은 기도로써 자신들의 장래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즉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결박과 환란을 당해도,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두로 교인들도 바울을 기도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3) 그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분명히 환경적으로는 절망이었지만, 그때그때 하나님께서 위기를 해결해나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환난 중에도 많은 예루살렘 사람들과 천부장과 공회원들과 총독들과 아그립바 왕에게까지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6절.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 Then we went on board the ship, and they returned home again.
서로 작별한 후
ἀπησπασάμεθα ἀλλήλους,
having said farewell to one another
‘작별한 후’(ἀπησπασάμεθα)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said farewell) 서로 애정이 넘치는 모습으로 작별 인사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배에 오르고
καὶ ἐνέβημεν εἰς τὸ πλοῖον,
and we went up into the boat
‘오르고’(ἐνέβη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wen up) 단순한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ἐκεῖνοι δὲ ὑπέστρεψαν εἰς τὰ ἴδια.
they then returned to the own
‘돌아가니라’(ὑπέστρεψαν)도 부정과거로서(returned) 단순한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1. 바울과 두로 교인들이 기도하고 작별했는데, 참 아쉬운 작별이었습니다.
먼저 예수 안에서 참으로 용서와 사랑을 나누었고, 영적으로 말씀과 기도로 친교했고, 인간적으로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일주일간이었지만, 참 은혜스러운 시간들이었고, 헤어지기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각자가 맡은 사명이 있기 때문에 헤어져야 합니다.
두로 교회 성도들은 두로 교회를 맡아서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을 전달해야 했습니다.
특히 바울은 예루살렘의 높고 낮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명하게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함께 모여 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각자의 사명을 위해서 모였다가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두로에서 가이사야까지 가는 배를 타야 했고, 두로 교인들은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로 교인들과 바울처럼 믿음 생활 잘하셔서 서로 용서하고 기도해주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각자의 사명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령 충만하시고,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하고 복된 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