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 첫날 첫 수업을 풀강 때려버리는 미친 교수님과 함께 시작하는 참 행복한 하루. 끝나고 동방에 가보니 서현이가 대본을 보고 있었다. 이후 3시 수업 전에 잠깐 동방에 들렀는데 경빈이도 대본을 펼쳐놓고 있었다. 요즘들어 대본을 펼친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는데, 내일부터라도 강의시간이든 공강때든 대본을 좀 많이 펼쳐봐야 할 것 같다. 최근 연기가 붕 뜨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이유가 대본과 대사에 집중하지 않아서인 듯하다. 대사의 의미를 계속해서 곱씹고, 서브텍스트를 주구장창 붙이고 늘려나가야 깊이가 생기는 법인데, 연기만 잘하면 됐지 하는 오만한 마음으로 임해왔던 것 같다. 대본과 더더욱 친숙해지자. 사랑해 대본아. 나랑 평생 함께 해.
오늘의 게스트는 지원햄, 한솔, 윤희였다. 어딘가 잔뜩 경직된 엄변과 함께 첫 런이 시작됐다. 그러나 교수 독백 이후 지원햄의 요청으로 단호하게 컷. 우선 최근들어 갑작스레 들이닥친 슬럼프 아닌 슬럼프로 인해 전체적으로 톤이나 액팅, 감정 등이 어딘가 이질적인 면이 있다고 많이 느꼈다. 이를 칼같이 파악한 지원햄은 다들 너무 결과를 위해 과정 없이 움직이고, 대사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덧붙여 인물 별로 캐릭터성이 보이지 않는다고도 말해주셨다. 근래에 각자의 단점이나 실수를 보완하고자 피드백만을 계속해서 갈구하다 보니 긴장을 하게 되고, 몸도 굳고, 연기도 평소처럼 올라오지 않아 그런 것 같다. 배우끼리 연습 전에 일찍 모여 몸도 훨씬 더 풀어주고 해야 할 필요성을 많이 느꼈다. 배우훈련의 영향이 이렇게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구나 싶다.
굵직한 피드백을 여럿 주고 받고, 잠깐 쉬다 2차 런을 돌렸다. 조수는 쬬연출로 둔갑해 피드백 기록에 동참했다. 전체적으로 각자 어색한 부분이 생길 때마다 끊고 잡는 식으로 장면들을 뜯어고치고 재구상했다.
그러다 교주 독백 파트가 왔다. 사실 요즘 독백 파트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맨 처음 픽스를 받았던 그때의 그 감정들이 아니고선 이 장면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어색함을 많이 느꼈다. 연출님이나 다른 배우들의 요청 사항들을 이것저것 받다 보니, 분명 처음엔 스위치 켜지듯 착착 달라붙었던 대사들이 점차 이질적이고 멀게만 느껴져갔다.
결정적으로 대사 한 줄로 인해 멘탈이 나가버렸다. 이 대사만큼은 내가 생각하는 감정과 말을 뱉는 방식이 지당하다고 생각해왔던 대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 대사를 한번 다르게 뱉어보라는 연출님의 요청 하나가 이상하게도 독백 맨 처음 파트부터 머리속을 휘저으며 절대 절지 않았던 대사마저 절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연습 시작 이래로 두 번째로 멘탈이 박살난 순간이였다. 사실 나의 모자람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인데, 내가 너무 아니라고만 잡아떼는 것 같아 1차적으로 양준이에게 미안했다. 내 고집 때문에 시간을 버리고 있던 다른 배우들에게도 미안했다. 경솔한 행동이였다. 다른 방법으로 뱉어봐야 하느니, 부담 느낄 거 없다느니 오만 오지랖을 다른 사람들에게 부려놓곤 그 말들을 내가 지키지 못했다. 오늘 가장 멘탈이 터졌던 가장 큰 이유였다.
그치만 오늘은 견디고 극복해낼 수 있었다. 함께 하는 배우들 덕분이였다. 내가 멘붕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곤 다들 한마디씩 첨언을 해주었다. 그런데 그 첨언들은 내가 이전에 각자에게 해줬던 말들이였다. 힘든 상황에 빠진 나에게 내가 뱉었던 말들을 돌려주었다는 건, 그만큼 아이들에게 내가 해준 말이 많이 도움이 됐었기에 그랬던 거 아닐까 싶기도 해서 나름의 뿌듯함도 느껴졌다. 그래서 오늘처럼 지칠 때가 있더라도 배우, 그리고 배우팀, 그리고 공연팀 모두에게 의지하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공연팀 너무 사랑합니다 진짜...내일은 정신줄 꽉 붙잡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