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周瑜)와 소교(小喬)의 사랑
손책(孫策)과 주유는 같은 나이였고, 둘 다 소년영웅이었다: 대교와 소교의 두 자매는 모두 강동의 절색미녀였다. 주유는 소교를 얻었고, 손책은 대교를 얻었다. 영웅호걸과 절세가인의 만남이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천고가화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는 경극을 보다보면 제갈량은 항상 수생(鬚生, 老生)으로 분장하고, 주유는 소생(小生)으로 분장하는 장면이 나오게 되어, 항상 제갈량(181-234)이 주유(174-210)보다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실은 주유가 제갈량보다 6살이나 많다. 다만, 주유는 확실히 장수하지 못했다. 후세에 두 사람의 재주가 서로 필적하는 것을 가리켜, "일시유량(一時瑜亮)"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삼국연의>>에 나오는 주유가 임종시 하늘을 향해 장탄식을 하면서, "이미 유(주유)를 냈으면서, 어찌 다시 (제갈)량을 냈는지?(旣生瑜, 何生亮)"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실제로는 주유가 제갈량과 직접 접촉한 것은 거의 없다.
주유는 손책과 같은 나이인데, 주유가 서성(舒城, 지금의 안휘성 소속)에 살 때, 손책의 집과 이웃하며, 서로 왕래했었다.
건안7년, 조조는 손권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라고 압박한다. 대신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 손권은 원래 인질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주유만을 모친의 앞에 불러서 상의했다. 주유는 극력 인질을 보내는 경우의 폐해를 주장했다. 손권의 모친은 "공근(주유)의 주장이 옳다. 공근은 백부(손책)와 같은 나이이고, 한달을 늦게 태어났다. 나는 아들처럼 여기니, 너도 형처럼 모셔라." 그리하여 인질을 보내지 않는다. 이로써 볼 때, 주유는 동오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충성을 다했을 뿐아니라, 윤리상으로도 가까웠다. 손권의 모친은 바로 손견의 처인 오씨이다. 즉, 동오의 여주인이다. 손책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주공근은 영준하고 재주가 남다르다. 고(孤)와는 총각지호, 골육지분(總角之好, 骨肉之分)이다"
주유를 얘기하자면, 자연히 소교를 떠올리게 된다. 소동파의 <<적벽회고>>에 나오는 바와 같이:
멀리 공근이 살아있을 때, 소교가 처음 시집갔을 때를 생각하니..." 이 소교는 도대체 누구의 딸인가?
<<삼국지. 주유전>>에 따르면, 주유는 손책과 환성(皖城, 지금의 안휘성 잠산현 북쪽)을 점령했을 때, 교공(橋公)의 두 딸을 얻었는데, 모두 절색이었다. 손책은 스스로 대교를 가지고(納), 주유는 소교를 가졌다(納)". 당시 교(橋)와 교(喬)는 서로 통용하여 썼다.
당시, 손책과 주유는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배송지의 주석에 따르면, "손책이 주유에게 우스개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교공의 두 딸이 비록 유리(流離)하였으나, 우리 두 사람을 사위로 얻었으니, 충분히 기뻐할 만할 거다" 이 이교가 바로 절세가인이며, 강호의 영웅호걸을 알아본 것이다. 그녀들의 신분에 관하여는 계속하여 의문이 있다.
후한말에 교현(橋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양나라 수양(지금의 하남성 상구)사람이다. 관직은 태위까지 올랐고, 조조의 존경을 받았다. 죽은 후, 조조는 제문을 써서 제사지냈다. 나중에 이교는 바로 교현의 두 딸이라는 설이 있다. 심흠한은 "교공이라는 사람은 바로 태위 교현이다. 한나라제도에 의하면 삼공(三公)에 오르면 '공'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조익은 박학다식하면서도 정심한 것으로 이름났는데, 그의 <<교공묘>>라는 시에서 "살아서는 두주지계(斗酒只鷄, 말술을 마시면서 닭만을 안주로 하다)로 이름을 내더니, 죽어서는 두 딸이 영웅에게 시집갔네"라고 하였다.
소위 "교공"은 원래 존칭이지, 반드시 삼공(태위는 삼공중 하나이다)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노필의 <<삼국지집해>>에서는 손권이 장소를 장공, 정보를 정공이라고 부른 예를 들어 이를 반박한다. 장소, 정보는 삼공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교의 부친은 환현(皖縣)사람이어야 하는데, 교현은 수양사람이다. 아무 관련이 없다. 또한 "이교가 교현의 딸이라면, 조조가 교현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데, 동작대에서 일찌감치 취할 수 있었을 것이고, 백부, 공근이 이 두 절세미녀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재미있는 반박이고, 이치에 맞는 말이다. 이교가 만일 교현 태위의 딸이라면, 어찌 강동에 흘러들어오겠는가? 교현에게는 교우(橋羽)라는 아들이 있고, 관직이 임성상(임성은 지금의 산동제녕)에 이르렀다. 교우의 누이라면 절대 강동에 흘러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으로 교현은 영초3년(109년)에 태어나서, 광화3년(183년)에 사망한다. 75세까지 살았다. 그가 죽었을 때, 손책, 주유는 겨우 9살이다. 교현이 60세에 측실을 통하여 두 딸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나이가 손책, 주유보다는 훨씬 많아야 한다.
손책, 주유는 같은 나이이고, 소년영웅이며, 이교는 강동의 절세미녀였기 때문에, 후세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긴 것이다. 역대로 그들의 이야기를 읊은 시와 노래가 많다. 두목의 <<적벽부>>에서는 "동풍이 주랑을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동작대의 깊은 봄날에 이교는 갇혀 있게 되었을 것이다"라는 것이 유명하다. 사실 조조가 동작대를 만든 것은 적벽대전이후에다. 명나라때에는 "이교관병서도(二喬觀兵書圖)"를 주제로 한 시도 있다. 예를 들면, 고계, 탕윤적등이 있는데, 홍장(紅裝)보다는 무장(武裝)을 즐겨했다.
<<삼국지집해>>를 보면, "서주 회녕현에 교공정이 있는데, 현의 북쪽에 있고, 와 1리가 떨어져 있다. 오늘 정계에는 쌍계사가 있다." 왕사신의 <<어양시화>>에 따르면, "이교의 집은 잠산현에 있고, 삼조산에 가깝다. 그리하여 산곡시에서는 송죽이교댁, 설운삼조산(松竹二喬宅, 雪雲三祖山)이라고 읊었다. 지금 그 유적지는 창법사이다. 내가 환갑을 지나서, 시를 지었다: '눈썹을 가느다랗게 소나무처럼 정리하고, 환패는 성긴 대나무처럼 찰랑찰랑 소리를 낸다. 강동의 패기가 끊긴지 오래인데, 원래의 첫자리만 그냥 인간세상에 남아 있구나'"
원목도 <<주유묘>>라는 두 수의 시를 지었다. 주유는 파구에서 죽었다. 그리하여 후인들은 악양제1중학내에 소교묘가 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주유의 영구는 오나라로 돌아갔고, 손권은 그를 무호에 맞이하였다.
역사서에 의하면, 손책에게는 1남3녀가 있었다고 하고, 주유에게는 2남1녀가 있었다고 한다. 주유의 딸은 태자 손등(孫登)에게 시집갔고, 아들 주순(周循)은 공주에게 장가들었다. 주순의 동생 주윤(周胤)도 도향후에 봉해졌다. 이들은 모두 이교의 소생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교를 "납(納)"했다고 한 것이다. 손책과 주유의 정부인에 대하여는 정사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교만큼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소교와 주유의 이야기는 여러가지 시사에 많이 남아 있다.(고대인들은 조혼하였는데, 손책, 주유가 25살이 되어 이교를 '납'할 때까지, 본처를 두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것이다. 손권은 아직 왕도 되기 전에 이미 사씨, 서씨, 보씨의 세 부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