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의 빛 1
요한복음 풀이 4 .信天함석헌
어제는 간단하게 그저 성경을 펼치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걸 맘에 두시고 합시다. 그냥 죽 읽어가는 것보다는 그렇게 맘에 두시면서, 단, 내가 말했다는 거보다는 성경을 읽어가실 때에는 그 말 뒤에 깔려 있는 뭣이 어떻게 움직여서 이런 말들이 나오게 되나 그걸 생각해보도록 힘을 쓰세요. 그전에도 여러 번 말씀을 해서 다 들으셨겠습니다만 그래도 못 들은 분들을 위해서 말하고 싶은 거 있습니다.
성경에도 그 뜻이 있지, 없지는 않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말의 뜻이 다 나와 있지만 그걸 그렇게 분명하게 교훈적으로 지적을 해주는 그런 경우가 많지가 않기 때문에 그만 속 깊은 뜻은 생각을 못하고 가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본래 기독교만이 아니고 사람 역사를 첨부터 어떻게 우리가 다 그걸 알 수는 없지만 인간의 내려오는 역사를 첨부터 죽 생각을 해보게 되면 맨 첨에는 누가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있었는지 모르지요. 이 성경에서 하면 아브라함이라든지 좀더 올라간다면 에녹이라든지, 또 그보다도 더 올라간 아담이란 이름으로 표시 된 그런걸 보면 언제부터 시작인지 모르지요. 그래 그건 첨부터 그런 걸 거라 그러는 건데, 본래부터 그런 거지만 그게 또 밖의 사람이 살아가는 조건에 따라서 늘 그런 거 나온다는 거 하나는 아무래도 좀 생각을 해보시오.
그래 쉬운 말로 하면 구약「창세기」에서 신약까지 내려오노라면 그 가운데 앞과 뒤가 달라지는 게 많이 있잖아요? 그중에 제일 심한 걸 말한다면 모세 때는 “다른 민족들을 막 정복하고 들어가자” 그랬다든지 또 “잘못하는 놈들을 용서하지 말고 벌을 주라”든지 그런 말이 있는데, 신약엘 내려오면 그것과는 아주 다르잖아요.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생각을 아니하고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라니까 그대로 받아야지” 그렇게만 생각하면 문제가 있어요, 그러는 게 물론 또 좋은 태도지만. 그것만 생각을 하지 않고서 그걸 내가 이핼 해보려고 그러질 않고 받아 들여서 어제도 말했지만 남의 신앙을 남이 얻은 것을 받아들이려는 그 걸로만은 만족을 해선 진리를 알아가는 데 진전이 없잖아요?
지금도 하는 말이지만, 언제부터인진 모르지만 그걸 주욱 지금까지 어떻게 내려오는 걸 보면, 부득이해 이런 말 하는데, 우선 겉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차차 속알이 들어가는 거, 깨달아 들어가는 거라고 그렇게 말해도 누구도 아마 부인을 못할 겁니다. 혹은 다른 말로 하면 어린애는 날 때도 사람이지요. 사람이란 자기가 사람인지 모르면서도 벌써 짐승과는 다르게 사람 노릇 하는데,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땐 생각하는 줄도 몰라요. 또 우리가 보면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그러겠지만, 그애는 그러는 줄 알지도 못하고 그래요. 참 지경이라면 그게 참 정말 지경인데, 그러니까 노자나 장자 같은 이는 그 점을 아주 강조를 해요.
물론 노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고는 하늘나라 못 들어간다”(「마태복음」,18장 3절) 그런 것은 ‘소위’ 안다는 건 이렇게 갈라진 생각이 돼서, 뭘 안다는 것은 벌써 뭘 이렇게 대조해보고 또 비교해보고, 뜯어보고 그러는 건데, 그렇게 하면 겉의 그 지식으로는 느는데 속의 생명은 또 죽어버리는 일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그럭하지 않고 생명이 보다 높은 단계에 올라가나 하면 그건 못 올라가요. 그러니 이제 이 지구 위에 생명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게 사람에게까지 오는 데는 물론 무상한 수십억 년 되는, 그것도 또한 고난의 역사지요, 그런 걸 밟아왔지만, 사람이 된 다음에 사람의 마음속에 문제가 일어나서 그러던 것에 비긴다면 도리어 그전에 건 말이 안되리만큼 우리 맘에, 이 속에 든 걸 그건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고 그대로 나타낼 수도 없지요. 없지만 그래도 얼마나 문제가 많아가지고 지금 여기까지 왔나를 비교해보면 거의 외계에서 됐던 거기다 비길 유가 아닐 거예요, 아마.
그런데 그런 거를 그렇게 생각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어느 의미로 하면 사람이란 어제도 얘기했지만 평등으로, 꼭 같지 않으니까 잘난 사람 있고 못난 사람 있다 그 말입니다. ‘잘’이다, ‘못’이다 하는 건 보통말로 내가 합니다. 가령 훌륭하게 성인으로, 성인 자격으로 타고난 분도 있고, 또 보통 씨이라고 그럴까, 맘의 본래 바탈이야 좋은 바탈이지, 성인들과 틀림없는 같은 바탈이지만, 그걸 그렇게 분명히 인식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높으신 분들이 발견해내서 가르쳐주는 거를 후대 사람들은 그저 순종하고 “예” 고맙게 알고 그렇게 가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나 또 사람이 사람은 다 서로 이렇게 다르긴 달라도 나도 나로서도 그래도 생각하는 사람이라, 나도 내가, 사람의 근본이 여기 있는데 그러니까 이거는 전체로 보면 그중에 지도자 되는 사람도 있고 뭐 이렇게 우리 각 기관(器官)이 있는 모양으로 그런 게 있어서 그런 것이 하나로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게, 마치 정치적으로 하면 나라라는 게 있어서 나라 주권자 있고, 일하는 관리들 있고, 또 뭐 실업하는 사람들 있고 그러지만, 그것이 하나로 돼가는 모양으로 그러니까 그러려면 될 수록 그런 것이 잘 한데 어울려서 아랫사람들은 위엣 사람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잘 지켜가면 된다, 이제 그런 게 좋아요. 정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란 것도 역시 또 그래요.
그래 사람 살아가는 데 있어서 안팎을 나누어 생각한다면, 그래 동양 사상에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 안으로 하면 성인이고, 바깥으로 하면 왕이다란 말이 있지요. 옛날 있던 한문 말 보면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그래요. 예수님 같은 이, 거 빌라도 앞에서도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으니까, “당신이 당신 입으로 하는 소리요? 누가 가르쳐줘서 하는 소리요” 하고 되물었어요. 그래 빌라도가 “내가 알 수 있나? 네 나라 백성들이 너를 가지고 임금이라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라고 대답하니까 “그럼 왕이라면 왕이지. 그러나 그건 진리의 왕이지” 했어요. 이제 그러는 거, 안 세계, 정치로 되는 바깥 세계와, 이 종교로 되는 안의 세계 그래서 그게 다르긴 다르지만, 그 안의 세계에 있어서도 소질을 높이 타고난 분들이 또 역시 선각자 노릇 하는 것이고, 또 그 뒤의 사람들은 또 그렇게 따라가는 것이고 그런 것이 있어요. 사람은 그렇게 나 하나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사회적으로, 전체적으로, 역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니까. 그래서 아마 하늘나라라고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을 거예요. 절대로 예수님이 정치적으로 생각해서 무슨 그전의 다윗 모양으로 자기가 한번 통치를 이상대로 한다든지, 솔로몬 모양으로 하는 그런 생각은 안 하셨을 거예요. 그런 생각 안하는 데가 예수님의 지경이지만, 예수님의 그 지경까지 오게 되는 데는 그 동안에 얼마나 한 어려움이 있었겠소. 정치적으로 그런 것이 속에 들어가서 사람의 안으로 발전을 해서 여러 가지 인간의 괴롭고 슬프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그런 거 많지 않아요? 그런데 그럼 바깥 세계에서도 그렇고, 안 세계에서도 그렇고,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속에 철저한 깊은 생각을 할 수가 어디 있나요. 그러니까 아랫사람들은 윗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게 좋아요.
그래서 동양에서도 하늘이 선각자를 내면 먼저 깨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뒤떨어진 사람을 깨닫게 하고(使先覺 覺後覺) 먼저 안 사람으로 뒤떨어져 알지 못하는 사람을 알게 해준다(使先知 覺後知)고 해요. 그런 걸로 생각을 한다면 벌써부터 인간의 세상이란 훌륭하게 나신 이 있고, 아래 따라가는 사람 있고 그런 거요. 이제 그건 확실해요. 그런 걸 또 그런 줄로 알아야 돼요. 하지만 사람이란 역시 나대로의 속에 들어갈수록 그 생각하는 주체가 나니까 노상 기계모양으로 남들이 하는 것만 들으면 되느냐 하면 그건 안돼요. 그런 줄 우리가 잘 알지 않아요. 그런데 정치에 비기면 종교는 속의 나라지만 그 종교에 있어서도 그것도 또 그 담에 겉이 있고 그 속에 또 속이 있게 돼요. 그러니까 구약은 거기 비긴다면 아직도 겉의 세계고, 이 신약에 들어오면 영 말이 도무지 다르잖아요. 예수님을 ‘메시아’라 그러고 ‘평화의 왕’이라고 그러지만 그거는 다윗이나 솔로몬을 보고 하던 의미로 하는 건 아니지요.
동양에서도 공자님은 왕이라 그래요. 왕 돼본 일은 없지만 문성왕(文聖王)이라 그러잖아요? 왜 그런고 하니 이이는 세상을, 그걸 유교식으로 말하면 천운이 돌아가는데 그런 시대가 있기 때문에, 그 자격으로 하면 천하를 다스려가는 임금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지만 그렇게 못 되셨기 때문에, 실지로 무슨 정치적으로 임금이 된 일은 없다, 그러나 이이는 그전에 있은 어느 누구보다도 임금 될 자격이 있는 이다, 그렇기 때문에 속세상으로 된 문무왕이라 그러고, 왕으로 모시잖아요? 그래 그런 얘기는 불교에서도 있어 ‘안’으로 하면 석가는 부처님이지만, 그걸 정치적으로 하면 전륜성왕이라 그래요. 그래서, 땅 위에서 그런 이상적인 정치를 볼 수는 없지마는, 아쇼카 왕 같은 이는 어느 정도 그런 사람이라 그러는 말도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겸손하게 위에서 지도하는 분들이 가르치는 걸, 그것을 하나님이 보내신 것으로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다 하는 걸 알고 그대로 순종해가는 그런 태도가 있어야지만, 그 순종이란 것을 그저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저이는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니까, 보내신 분이니까 하는 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옳으냐 하면, 그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 데가 안타까운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될수록은 순종을 하기는 하지만, 정치적인 데서 하는 모양으로 “뭐 물을 것 없어. 백성이란 나가라면 나가고, 들어가라면 들어가는 거다” 그런 거 아니에요.
이거는 아주. 하긴 하지만 그걸 나도 그 뜻을 알아서, 뜻을 아는 것이 그것이 곧 순종이요, 따라간다는 것은 그 뜻을 완전히 그대로 이해하는 거요.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너가 날보고 선생님이라, 주님이라 그런다. 그렇다. 선생님이요 주님이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너를 친구라 그러지, 이때까지처럼은 안 그런다” 그러는 건 왜 그런고 하니, 종은 주인이 하는 걸 뜻을 모르지만, 겉으로는 참 순종을 잘해요. 그래서「히브리서」기자가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겉에 난 지도자로서 잘 순종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도 역시 순종하는 것을 배워서 ‘대제사장’ 자리까지 갔다(「히브리서」, 그장5~6절) 그런 말 합니다만, 그러니 처음에 알기 쉬운 겉의 세계가 있는데, 겉의 세계가 뭐냐 그러면 그것도 속이 나타나서 그런데, 그런데 그게 겉으로 나타냈으면 생각하는 마음을 다시 그 겉을 통해서 내가 난 그 자리까지 가야 돼요. 이 말이 좀 아시기 쉬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까 예수님에 오면 모세가 말하던 것과는 아주 다르잖아요? 다른 줄 알기 때문에 남들이 비난을 했고 또 그런 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난도 했고.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옛 사람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달라져요. 달라지면서도 또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러나 내가 모세의 율법을 폐하려는 건 아니다. 사실은 그걸 완성하려는 거다” 하셨어요.
그걸 이제 비유를 해 말하면 이런 거예요. 여러분, 요새 벼 이삭이 나오지요? 나올 땐 그 벼란 열매는 껍데기부터 나와요. 알이 없어요. 첨엔 이삭이 다 이렇게 나오지만 껍데기가 먼저 나오고, 그게 이제 여물이 차차 들어야 돼요. 그래야 비로소 벼가 쌀이 되는 거예요. 아무리 겉껍데기의 이삭이 다 이렇게 났어도, 여물이 못 들어서면 그건 곡식도 아니고, 먹을 수도 없고, 뭐 생명이 없는 거 아니오? 그러나 또 어찌 보면 그럼 정말 껍데기만 첨부터 나왔느냐? 껍데기만 나왔지만, 본래 껍데기만 나올 그때에 정말 요 생명 되는 거는 그때 벌써 거기 있어요. 그게 크지만 못했어요. 그게 알이 들어야, 차차 요렇게 토실토실 여물어 들어가야 알이 된단 말이오. 생명 전체를 그 식으로 설명을 할 수가 있을 거예요. 이제 모세가, 모세는 예수님 모습에 비하면 확실히 겉인 데, 그러니까「요한복음」에서도 그러잖아요? “율법은 모세한테서 왔지만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왔다.”(「요한복음」, 1장 17절)
그 은혜와 진리라는 건 속알인데, 속알이 들려면 수천 년 그 복잡한 역사과정을 거쳐와야 하는데, 그런 것이 그렇게 알이 들어서, 첨에 필 때는 그저 엉성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껍데기는, 구조는 다돼 있는 거요. 이제 알이 들어가는 그 동안의 복잡한 역사를 거치서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곳까지 가면 이제 거 알이 잘 든 셈이 아니오. 그럼 모세가 날 때, 하나님의 그 명령을 받았을 때에 제일 첨 제도로 “성전천막은 이렇게 지어라. 뭐 지파를 열둘로 갈라라. 그 가운데 레위 지파를 따로 둬라. 그건 종교를 담당한 것이니까 다른 직업을 가질 수는 없고 제사시키는 일만 해야 한다” 하는 그건「신명기」에 다 있는데, 예수님은 그런 거 말씀한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그건 아주 그때, 완전히 지능이 어림이 없지요. 하지만 그때 그 제도란 건 지금 우리가 봐도 놀라우리만큼 훌륭히 나오는 거예요. 수천 년 살아가는 동안에 나고 죽고 싸우고 화친하고 뭐 별별걸 그러는 동안에 벼가 알이 차차 들어가는 것 같아서, 이제 예수님 때에 와야 비로소 그때 정말 모습이 이렇게, 겉껍데기에 부합하는 속 알맹이를 보게 돼요.
그래 예수님은, 옛날 그런 걸 연구한 흔적이 남아 있는 건 없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아요? “내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다.” (「요한복음」, 18장 36절) 그럼 내 나라는 이 땅 위에 있지 않다고 해서 예수님은 이 땅의 일은 전혀 관계하지 않고 허공의 뭐를…… 그런 건 또 아니지요. 그리고 첨부터, 모세부터 그리스도의 알맹이는 또 있었지 없는 것은 아니지요. 없던 거를 예수님 때 와서 갑자기 쓱 만들었다든지 그런 건 아니지요. 그러니까 말하는 데는 모두 예수님도 “내가 아브라함 있기 전부터 있었다. 천지창조 전부터 있었다”(「요한복음」, 8장 58절) 는 걸 여기서, 이걸 쓰는 것도 ‘맨 처음 말씀’이 그거예요. 그게 언제 부터인가. 처음을 알 수 없어요. 하나님 있을 때부터 계셨지, 하나님과 같이 계셨지, 하나님 안에 있었다 그럴 수도 있고, 하나님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고. 더불어라고 하는 말,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같이 계셨다”(「요한복음」, 1장 1절)、‘같이’라는 그 말, ‘프로스톤 데어’는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하나님과 함께 있 었다, 마주하고 있었다” 하는 뜻도 있대요. 그러고 보면 그 번역이 어려운 말인데, ‘더불어 있었다’ 하나님과 ‘같이 있었다.’ 따로따로인가? 따로따로가 아니에요. 그럼 아무것도 다른 게 없는 하나인가? 하나는 아니에요. 하나님은 하나님대로고 ‘로고스’는 로고스대로예요.
어쨌거나 이런 말로써는 어차피 부족한데, 내가 왜 이런 말을 이렇게 길다랗게 하나 그러면, 이런 건 거 유대 사람들의 성격도 그렇고 해서 비교적 그런 거를 복잡하게 생각을 아니하면서 보통 알기 쉬운 말로 말해주는 거요. 구약은 더구나 그런 거요. 이 공관복음도 그런 데가 많이 있다고 할 수가 있어요. 하나 이「요한복음」같은 거는 거 굉장히 껍데기보다는 속으로 들어가서 이제, 그건 같은 제자들 중에서도 요한이 예수를 체험한 것은 또 다르단 말이오. 그러나 다른 예수는 아니오. 같은 예수지만 베드로가 본거라든지, 도마가 본거라든지, 바울이 체험한 거라든지 그런 것과는 다르게, 또 요한은 요한대로 보여주는 면이 있는 데 그런 면이 이제 정말 곡식이 요새 이렇게 해서 여물이 들고 입추가 되게 되면 이삭이 다 나와 알이 들게 되고, 이제 조금만 있으면 알이 정말 가을하게끔 되잖아요? “그런 모양으로 시대가 이쯤 되니까, 겉은 본래부터 있는 거지만, 겉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지만, 겉으로 보는 그 속에도 본래부터 알짬 되는, 예수님에게 와서야 밝혀지는 알짬 되는 것이 모세에게도 본래 있었지, 없지 않아요.
“내가 모세 율법을 폐하러 온 것 아니다.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 그렇지만 그래도 아주 분명히 말해준 건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걸 아주 분명히 깨치고 들어가요. 없애려고 하는, 정반대가 되는 그런 거는 물론 아니지만, 그러한 담에야만 그 근본을, 모세가 말하려고 했던 걸 말할 수가 있어요. 그럼 모세는 왜 그런 근본을 말 안했습니까? 그러나 그건 그럴 수도 있어요. 그것은 쉬운 말로 합시다. 예수님에 오면 절대 평화예요. “대적을 사랑하라” 그랬는데 모세는 그런 말 하지 않았잖아요? “네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마태복음」, 5장 44절) 그러나 성경 뜻을 잘 주의를 해보면 모세에게도 모세 말하려던 그때 하나님이나, 그 담에 “아들을 보내서, 나는 내가 아버지에게서 보고 듣는 것을 말한다”(「요한복음」,5장 30절) 한 예수님 말씀 하시던 그 하나님이나 다 한 하나님이지, 거기 뭐 착하고, 더하고, 낡고, 못하고 하는 그런 차이가 있을 리 있어요? 없지만 이 성경의 이 세계를 나타나오는 걸 보면 예수님하고 모세하고는 차이가 많이 있단 말이오. 많이 있는데, 그러려면 그때 아예 모세 때부터 사람들을 그렇게 속 깊은 정도를 가르치지 않고 그랬습니까 그렇게도 말할 수 있어요. 그 점에 여러분들이 이해하는 점이 있으라고 그래서 말씀드린 거예요. 나는 그런 것 때문에 어려웠던, 나의 지내본 것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또 그런 말이 나가서,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과 접촉을 해서, 우리 신앙을 위해서도 그렇고 또 그들에게 전도를 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말을 하려고 하면, 그런 점이 어려워서 그래요.
심지어는 다 열심히 믿고, 목사 노릇 한다는 분들도 말하다 보면 “성경 구약에 전쟁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라고 그랬는데, 왜 평화라면서 전쟁 반대합니까?” 그러지만 그건 제법 알면서도 모르는 거예요. 마치 그것은 가을에 쌀알이 토실토실하게 든 이걸 놓고, 이걸 말하자는 것인데, 이게 정말 진짜인데, “왜 모세 때는 벼알도 아무것도 안든 것을 가지고, 이것도 벼 아닙니까? 하는 것과 마찬가지요. 그거는 이 현상의 세계에 나오면 어쩔 수 없이 ‘과정’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점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부득이 그렇게 한 담에야 해결이 되었고, 한번 그렇게 생각을 한 게 있으니까 문제없어요. 이제 누가 뭐라 그러든지간에. 그러니까 모세 때는 모세 때 그대로가 좋아요. 왜? 그때 형편이 그런 거니까. 어린에 때는 우유를 먹이고 업어 기르는 게 가장 적당한 일이고, 큰 담에는 이젠 우유를 주지 말고 밥을 먹어라, 그리고 네 발로 걸어 다녀라 그럭하는 모양으로 하는 게 옳은 교육이고, 그런 모양으로 성경이란 거는 하나님 자리에서 보면 진보도 발전도 없어요. 영혼은 본래 완전한 것으로, 시간·공간이 없는 차원이에요. 그 이상의 말로 할 수가 없는 거니까. 하지만 현실의 우리 안은 왜 이렇게 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여기 우리에게서는 변천도 있고, 자람도 있고, 쇠하는 것도 있고, 그런 데 있으니까 그런 걸 통해서 이렇게 진리를 체득해가지 않으면 그만 어느 문제가 왔을 때 내가 그걸 이길 수가 없어져요.
쉽게 말하면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좋고 그 신앙 정도 그대로 이해해야 사랑하는 거지, 할머니에게 그걸 20세기의 이 역사를 말하는 거 그거 안돼요. 할머니는 지금 살아 있지만, 몸으로 있긴 있어도 마음으로 하면 20세기가 없는 이요. 이 속에 내적으로 체험을 못하고 있는 이들이니까, 그러면 우리 할 일은 떨어진 저 사람한테도 우리 20세기까지 온 이 역사를 체험을 시켜야 하느냐 싶지만, 그러는 거는 “할머니 그건 잘못이에요” 그럭하고 그걸 다 부정을 하고, 이걸 넣어주려고 하는 건데, 그러면 되나 하면 그렇게는 안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은 이걸 이해를 해줘야 된다, 말을 듣고 순종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해줘야 한다 그거예요.
한 10년 전에 영국 갔을 때, 퀘이커 모임 있을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케네드 볼딩이 말을 하면서, “지금 우리는 사랑을 하지만, 그저 사랑이 아니라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요. ‘사랑’이 있는데 ‘이해’라고 또 따로 말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하지만 그대로 지금은 사랑이라고 그래서만은 안돼요. 사랑도 하지만 이해를 하는 데까지 가야 된다는 것, 그것도 다 상당히 생각을 하는 데서 나온 말일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에 있는, 예수님의 얘기를 통해서 알게 된 사랑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고 그래도, 한마디로 예수님은, 성경은 사랑을 가르치는 말이지만, 그걸 설명을 해서 우리가 피차 알게 말을 하고 내 무슨 증거를 하고 그럴 때는 그 단어가, 겉으로 쓰는 그 단어가 달라질 필요가 있어요. 씨이란 얘기도 내가 그래서 합니다만, 민(民)이라면 그만이지 씨이라 그럴 필요가 있어요? 그게 그거인데, 하지만 지금에 와서 민이라 그러면, 지금 와서의 씨에 대해선 설명이 불충분해요.
그러니까 말이야 같은 이것도 다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 내용을 포함을 시켜서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있는 모양으로 이런 것인데, 이제 매양 신앙토론에 자꾸 잘 이해가 안되는 건, 그건 봄은 같은 봄이면서도 내적으로 체험을 하는 데는, 봉건시대에 있는 사람도 있고, 민주시대에 있는 사람도 있고, 세계가 하나 되는 이전 시대에 있는 사람도 있고, 연령으로 봐도 다른 것도 있고, 학문 받은 것으로 봐도 대체로 다르지만, 학문을, 현대학문을 하고도 또 어쩌면 생각이 봉건시대의 마음으로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말하기는 어렵다 이거예요. 그러나 그건 깊은 의미에서 하면 상관이 없는 거예요.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전번에도 우리 재작년에 박정희 씨 암살당한 다음 어느 지방의 할머니가 “나라의 주인을 죽이고 어떻게 하지” 그랬다고 그래요. 그걸 사람들이 들으면 그 할머닐 욕하고 비난하려고 할지 모르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 할머니는 그 할머니대로 진심을 말한 거예요. 나라의 주인을 죽이고 어떡하지? 그래 주인이란 건 할머니 생각에는 아직도 봉건시대의 그 할머니대로의 마음이 있으니까. 왜 그런고 하니 다 내적 경험의, 역사적으로 이때까지의 것을 몰랐어요. 그러니 그걸 이해시키려면 그 할머니의 하는 말을 “그렇지요. 나라의 주인 그러하지요” 그러하고 찬찬히 풀어서 설명을 해주면 반드시 그 할머니도 “아 그렇소” 하고 알아듣는 자리가 있을 거요. 그러니 그걸 그렇게 안하고 덮어놓고 “할머니 그건 잘못 아신 겁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소리 해가지고 되느냐 하면 안돼요. 이렇게 해서는 그 할머니를 건지지도 못하고, 그 할머니를 못 건진다면 결국 우리가 우리 사회 못 건지는 거고. 어떡하든 지극히 적은 사람 하나라도 건질 수 있는, 첨의 그 이상적인 자리에서 생각할 때의 건진 자리에 가지 않고는 건졌다고 할 수가 없잖아요.
구원이 뭐야? 구원 문제가 있지만, 그건 이제 문제가 안된다 그겁니다. 쉽게 말하면 개인 구원 생각만 해가지고는 ‘구원’의 의미가 없다 그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젠 우리 인간이 개인이 요건 ‘나’라 하는 그 지경을 훨씬 넘어섰어요. 몸은 그대로 있지만 우리 ‘속의 사람’ 이란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사회적이요, 역사적이요, 세계적인 그런 사람이지 그저 나 혼자라는 건 없어요. 2천 년 전의 그 시절로 갔으면 “그저 나라 살림하는 임금이야, 정치야 어찌 됐든지, 나는 나대로 조용하게 고요한 살림 속에서 하나님 믿어서 구원 얻으면 됐지” 그게 좋다고 그럴 수도 있어요. 그것도 구원은 구원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우리 살림이 벌써 어쩔 수 없이 서울서 사는 사람도 시골서 사는 사람 생각 안 할 수 없고, 그것만 아니라 세계에서 되는 일, 저 남아프리카에서 되는 일, 남미에서 되는 일을 우리도 알지 않고는 살림이 되지 않게 되어 있는데, 그런 점을 모르고 있어서야 어디 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구원이란 말이야, 그때 말이나 이때 말이나 다 틀림없는 구원이지만, 나로서의 사람이 훨씬 자랐기 때문이에요. 또 자랐다는 건 반드시 좋게 자라는 것만도 아니에요. 잘못되면서도 자라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생각하다가 수십 년 전에도 생각이 되었고 지금도 그 생각을 가집니다만. “우리는 앓으면서도 자라고 있다.” 앓고 있는 건 몸이 앓고 있지만, 애기는 몸이 앓는데도 불구하고 그 안의 애의 지성은 자라고 있잖아요? 그것만이 아니라 도덕성은 사실 그래요. 그러니까 병을 통해서, 병은 언제나 전혀 사람에게 반대되는 것만은 아니에요. 병도 역시 사람이 되게 하는 데는 그 역할을 하게 하는 점이 있어요. 그런 모양으로 어쩔 수없이 이젠 사회적이요, 역사적이요, 그래 다시 전체주의란 건 그런 건데, 그런 생각을 해야 되니까 그런 점을 생각하시는 데 혼동이 돼서 구약시대와 이것과 혼동이 돼서 하나님이 모세더러 명령하기를 “다 가서 정복하라” 그랬고, 그중에 더구나 “씨도 남기지 말고 전부다 죽여버리라”고 그랬다고 해서 그런 것까지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지금도 그럭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럴 수는 없어요. 아무리 열심히 문자대로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때 모세더러 죽이라 그랬으니까, 칼을 들고 들어가서 모조리 죽여버리는게 마땅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모조리 죽여버려야지 그대로 뒤서는 안됩니다” 그런 이론을 결론으로 내릴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런 결론을 만약 신앙생활에서 내린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어두워서, 몰라서, 성경을 바로 읽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그걸 바로 읽는다면, 성경에 씌어 있는 말씀 이거는 이렇지만 이 말씀은 이 글자로 있는 이 말씀은 이게 자라오지 않았어요? 이게 죽 자라온 것이니까, 그걸 우리가 알아들어야 돼요.
이미 일찍이 말한 거니까 어떻게 생각을 하실는지 모르지만, 또 반대가 되면 그건 안 들으셔도 괜찮아요. 나는 역사적으로 2천 년 전에 났던 예수가 문제가 아니라고 해요. 물론 그때 났던 이는 그때 났던 이 대로 자기 할 것대로 다했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요.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살다가 살다가 자기 할 것대로 할 수 있는 데까지 끝까지 하시다 가신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 속에 있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이 예수나, 외형적으로 2천 년 전에 나사렛에서 났던 이, 마리아에게서 나서 요셉의 가정에서 자랐던 이, 그가 아니고는 우리가 이 기독교가 뭐고 하늘나라의 진리가 뭐인지는 몰랐겠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가 우리 속에서 믿는 예수는 요렇게 기성품적으로 다 된 예수가 아니고 이게 자꾸 자라고 있는 예수라고 그래요. 우리 믿는 거는 나와는 별개로 여기 예수란 이가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인류 전체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총체적으로 들러붙어서 어느 한 형상을 만들고 있어요. 무슨 형상이냐고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잔 건데 그러는 가운데서 모세란 이의 형상이 조각이 된 적도 있고, 이사야 정도의 형상으로 된 적도 있고, 그것도 됐지만, 되고 없어진 거 아니에요. 그건 역사적으론 지나갔지만 지금도 살아 있는 거예요.
이거는 비유를 해도 비유가 어려워서 말하기가 어렵지만 그런 걸 좀 생각해보시란 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 앉아서 서로 불완전하지만, 알고 모르고 각가지가 있어서 우리 이 말과 같이 살아가는 것과 여기서 이 기도하고 생각을 하는 그걸 통해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 ‘하나의 그리스도’란 상, 그것이 차차 차차 조금 더 분명해져요. 그 자취는 처음부터 완전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아는 걸로 말하자면 저 산에 서서히 접근해가는 모양으로 접근해가면 갈수록 모양이 차차 달라지는데, 달라지는 것이 본래 모습에 가까이 가는 것이잖아요. 이와 같이 이 앞으로도 그 상은 얼마까지 자랄는지 몰라요. 이 지구가 다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상은 이날까지 하나님이오. 이 현상세계에서 표현했던 예수란 이 그리스도란 인격이 그것이 없어질 리 없어요. 한없이 그대로만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꾸만 자라갈 것이에요. 세상에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있을 뿐이오. 여기 “너요” “나요” 하는 사람들은 임시로 있을 뿐이지, 이것이 실제라 그럴 수가 없어요. 그 이전에 있던 그 하나가, 그 한 생명이라고 할까, 그 하나님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때는 아주 담대하게 하지 않아요, 왜? 성경책에는 뭐라고 말했나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도 신이라 그러지, 하나님이라 그러진 않는다. 그런데 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런다고 너희가 날 죽이려고 그러느냐”(「요한복음」, 10장 34~36절) 해주신 거 주의해 들을 필요가 있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럴 때는, 현실역사에 있는 이 문제가 나올 때는 시대가 달라서 그런 거다 하고 그 껍데기를 버리면서 속의 알맹이가 점점 들어가도록 좀더 높이 생각해야 돼요.
나는 젊어서 마음에 고민이 많았어요. 내가 열심히 믿는다고 그러다가, 과학이란게 발달되어 저쪽에까지 갔는데 나는 그걸 날 내버리고 물이 들어왔다가 저리로 다 나가고 나는 소라처럼 여기 남으면 어떡하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시대가 저렇게 달라져갔다는데 나는 태고적 신앙을 그대로…… 마음은 갸륵하지만, 그건 썰물이 다 나간 다음에 남아 있는 조개껍질이지, 어쩔 수 없다 그거예요. 그런 건 불행히 떨어진 거지 그럴 수가 없어요. 생명이란이 대행진이 가는데 그중에 지극히 적은 하나라도 떨어질 수 없지요. 그게 어느 여럿이 아니라, 말하자면 모든 세포가 한 사람의 몸을 이룬 모양으로, 괴테는 이 천지만물이란 뭐냐, 살아계신 하나님의 옷이다, 그 옷은 기성품이 아니라 만물이 한데 들러붙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옷을 짜고 있다 그랬어요. 그것도 비유가 좋은 비유 아니에요? 그럼 이 물질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까지도 달라붙어서 하나님을 좀더, 본래 있는 이지만 그걸 우리 생각으로 생각하고 다듬고 하는 동안에 그 모습이 이제 차차 차차 분명해져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겉으로 볼 때는 수천 년 전 때 말과는 다를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건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란 것이 예수님은 2천년 후에 있으면서도 “내가 모세 된 근본에서 같은 것이지, 반대 아니다. 나는 너희가 말하지만, 이렇게 말한다”(「마태복음」. 5장 39걸) 분명히 다른 말을 하셨으면서도, 다른 것 아니다, 근본에서 다 하나이다 하는 걸 말해 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하는 모양으로. 그렇게 되면 예수님에 관해서 아무 모순이 없을 거요. 그럴 게 아니오? 이러니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그런 말씀에 도달해볼 수 있을 건가 그것이 문제라 그 말이오. 그런데, 그건 다른 나라의 불교라든지 힌두교의 말을 빌어서 하는 것이 좀 좋아요. 현교, 밀교 하는 거.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성경에 다 있다는 건데 그걸 가르쳐주길 일반 사람들에게 분명히 알 수 있게 가르쳐줬더라면 안 그럴 건데 그걸 몰라서 흐려놓은 폐단이 있어서 그래요.
예수님이 보통 사람들에게 말하는데 “하늘나라가 뭔고 하니 농부가 나가서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돌짝밭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빠지고 어떤 것은 옥토에 떨어진다”(「누가복음」, 8장 5~8절) 하시지 않아요?
이처럼 사람들 수준이 서로 달라요. 그러니 예수님은 자기 마음 속에서 환히 알고 있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은 깊이로 직접 말해줘도 몰라요. 이해를 못할 줄 알아요. 그래 니고데모보고도 그러지 않았어요. “내가 땅의 것을 이야기해도 네가 모르거든 하물며 하늘 거를 말하면 네가 어떻게 알거냐.”(「요한복음」, 3장 12절) 구경은 하늘 거를 이해할 수 있는 자리에 가면 그 다음 것은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 알 건 뭔고 하니 우리가 이렇게 생각을 해서 안되고 그렇지만 적어도 한 번은 한 번만이 아니고 엄연한 의미에서 말하면 무한 번 탈피를 해야 하는 거지만 적어도 한 번은 크게 껍데기를 벗는 것이 있어야 한다 는 거요. 그것도 생각 못하는 분들이 많아요.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 얘기부터 주의해볼 필요 있다는 건 그래서 나온 말이에요. 거기 보면 니고데모가 오기는 왔지만, 겉으로는 상당히 신앙도 있고 지위도 있고 아는 것도 있지만 그러나 아직도 속으로 본다면 빈약한 것이니까 그 껍데기를 벗든지 해서 고쳐 나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고쳐 난다는 뜻을 알아듣지를 못했어요. ‘다시 난다’ ‘고쳐 난다’ ‘위로부터 난다’ 그 말인데, 그건 우린 이제 다 아니까 ‘영으로 난다’ 그러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아는 ‘영으로 난다’는 건 완전히 이해를 하고 있냐 하면, 말은 아는데 아직도 그걸 이핼 못하는 점이 많이 있어요. 한없이 파고들어가 껍데기를 벗고 벗고 그래야 하는 건데, 그래 니고데모만한 사람도 그걸 못했어요.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면 니고데모보다 아이큐도 떨어지고, 그만 못한 사람이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시대적으로 하면 우리가 훨씬 앞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각별히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래, 영으로 난다는 건 그렇지. 고쳐 나야지”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그건 나 개인으로는 이렇게 그릇이 크고 작고 차이가 있지만 시대 전체가 그렇게 됐기 때문이오. 내가 과학을 못 배웠어도 집에서 텔레비전을 놓고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만약 내가 그걸 만들어서 봐야 한다면 내가 어디 볼 수 있어요? 그러나 비록 나는 모르지만 그걸 발명하고 만드는 공장이 있어서 나도 가지고 와서 본다, 그러니 그 사람들하고 나하고 살림이 잘 밀접이 돼서 하나 된 살림이 되기만 하면, 그것은 내가 발명한 것이요, 내가 만든 것이요, 내가 본 것이 돼요. 그런데 내가 그런 걸 겉껍데기로만 갖다놓고 보니까 현대 사람 같지만 아직도 마음에 있어선 태고적으로 있는 할머니들이 있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우리 신앙에도 그런 게, 지층이 이렇게 뒤집혀가지고 한쪽이 올라가 뒤섞여 있는 지층단애 현상이 많이 있어요. 원래 거기 관해 예수님이 비유로 자주 자주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제자들보고 뭐라고 했는고 하니, “여러 사람들에게는 내가 비유로 말해주지만, 저 사람들은 들어도 못 듣는 다” 하셨어요. 들어도 못 들으니까 예수님이 “저 사람들은 내버리자” 그러진 않아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말을 그래도 비유로 비유로 해주지 않아요.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그 정도로만 두면 또 안되니까 그걸 까서 해석을 해주잖아요.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비유로 해주지 않고 직접 까서 해석을 해주는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 건데 지금 우리 자격이 그 말을 몰라요. 할머니가 전기가 뭔지 전자가 뭔지 컴퓨터가 뭔지 적외선이 뭔지 그걸 모르니까 부득이해서 그게 어떻게 된다 하는 것을 설명 할 때, 텔레비전을 과학적으로 설명을 해도 이해를 할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비유로 해서 한 거 아니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목적은 비유를 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자리엘 가야 돼요. 그러니까 마지막엔 제자들도 “선생님께서 있는 그대로 말해주니 우리가 참 좋습니다”(「요한복음」, 16장 29절) 했어요. 처음엔 말을 해도 “내 조금 있다가 갈 것이니 너희가 보고 싶어도 못 볼 것이요, 또 조금 있다가는 너희가 다시 보리라”(「요한복음」, 7장 33~36 절)란 것이 무슨 말일까 하고 몰랐었는데, 그러나 자세히 해서 마음이 밝아지면 이해할 수가 있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가 말할 때도 그렇고 다른 사람의 진리를 증거할 때도 그렇고, 그런 거 있는 줄 아셔야 돼요. 어떤 경우에는 비유로밖에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있어요. 나타나 있는 이 현상계밖에는 모르니까 부득이 그걸 비유해서 말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말을 들음으로 해서 가는 길이 있어요. 그런데 또 제자들에게 오면 훨씬 나아갔으니까 그런걸 할 것 없고 아주 까내놓고 진리 그대로를 말씀해주시는 그런 건데, 그런 점이 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그러는, 그건 기독교가 잘못이 아니라, 전해오면서 그걸 가르쳐주는 사람들이 자기네가 그 체험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저 “남이 이랬다”고 하는 것만 말해요. 그건 벌써 수천 년 전에 인류가 체험했다 그 설명인데 그 설명만 듣고 그 이상을 현실에다가 적용할 줄을 몰라요. 그런 점에 있어서 분명하게 말한 거는「히브리서」에 여러분들이 주의해볼 필요가 있어요.
「히브리서」쓴 사람이 유대 사람들한테 뭐라고 했는고 하니 “네가 아직도 종교의 초보를 반복하고 있다”(「히브리서」, 5장 12~14절) 했어요. 그럼 그 초보란 게 뭐냐하면 “죄 회개한다는 것과” “구원한다는 것” 뭐 이런걸 가지고 종교의 초보라 그랬어요. (「히브리서」, 6장 1~8절) 초보가 아니고 뭐냐 하는 건「히브리서」를 한번 보세요.「히브리서」는 독특한 책입니다. 바울이 쓴 게 아닌가 했었는데 학자들의 말로는 바울이 아닌 것도 거의 확실하다고 해요. 하여간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그이는 또한 특색이 있는 이입니다. 그러니까 새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있는데, 그도 세상에 계실 때에는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눈물과 탄식으로 기도해서 아들 된 자리까지 가게 됐다(「히브리서」, 5장 7~10절)고 했어요.
보통 말로 하면 예수님은 첫번부터 완전한 그리스도가 돼서 하늘로부터 똑 떨어져온 줄 알지만, 그 사람은 직접 사도였었는지 또 누구에게서 배운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예수님의 내면을 자기로서는 독특하게 본 것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무교회서 그랬나, 찌까모또 선생이 그랬나.「히브리서」를 가지고 ‘무교회 참고서’라 그런 말 한 적이 있습니다만,「히브리서」에 독특한 점이 있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이 기성품 모양으로 똑 떨어져서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자라고 자라서 되신 이라는 것을 얘기해요. 얼마나 하면 “눈물과 탄식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그랬겠어요. 그런 건 또 알고 보면 공관복음에서 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마나 안타까왔어요?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도록 기도했다 했고, 제자들보고도 어떻게 하든 깨서 기도하라고 했는데 자꾸 조니까 안타까와서 “그래 잠시 동안도 깨어 기도할 수가 없느냐”며 책망을 하시고 했다는 걸 보면, 그런 것이 예수님의 공로를 믿어서 천당엘 가려고 하는 것도 진리가 진리지만, 그것만을 자꾸 강조해놓으면 이제 벼알들을 생각은 안하고 이삭이 크다는 것만 자꾸 얘기하는 것 같은 거요. 이삭이야 물론 큰 이삭이지만, 알 못 든 이삭이 가을에 가서 무슨 곡식 노릇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 그 초보적인 말이라면 누구든지 처음부터 그거 알아들어야 돼요. 교리 들을 때부터, 성경 볼 때부터 알아야 하지만 그런 다음 어른이 된 것은 뭣이냐? 그 히브리 기자가 말하는 그건 “너희가 믿은 지가 여러 해가 되어서 굳은 음식을 알아야겠는데 너희가 상기도 젖으로 먹여야 되니 웬일이냐?”(「히브리서」, 5장 12절) 했어요. 이건 깨우쳐주는 말이요, 책망하는 말입니다. 이제 너희가 이만 했으면 자랐으니까 자기로서 판단하는 것이 있어야 할 건데 아직도 왜 그 모양이냐 그 말이에요. 그럼 장성한 사람이란 것이 뭐냐 그러면, 그건「히브리서」를 가서 보세요. 거기 보면 세상일에 부딪칠 때에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 지 판단할 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우린 다 예수님의 공로를 믿고 천국에 갈 줄 압니다. 그건 뭐 믿음의 원틀 되는 거니까 틀림없지만, 그건 그러면서도 현실문제에 있어서도 저 사람의 하는 일이 “옳습니까” “그릅니까”, 이 정치가 바른 정칩니까 잘못된 정칩니까. 세계에서 소련이 하는 일이 옳습니까 그릇됐습니까, 미국의 하는 정책이 어떻습니까 이런 것에 대해 판단할 줄을 모르면 그건 어린애 모양으로 우유만 먹고 있다든지 초보적인 것만 반복하고 있다는 거요. 그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걸 가지고는 구원이라는 자리는 있지만, 구원의 내용이 없어지고 만다는 거예요. 구원이 된다고 그런다면 일상 우리의 신변에 느끼는 거, 신문보도를 통해서 오는 거, 모든 일이 이것이 다 한몸인데, 이거는 나와 다른 게 없어요. 우리나라 사람과 다른 나라 사람이 실지로는 다른 게 없어요. 그러니까 아직도 우리가 “나는 몸이 이러니까 다행이다” 그러는 건 착각이고 “우리나라는 다행이다” 그건 착각이에요. 큰 나라, 작은 나라 할 것 없이 통틀어 이제 그 단계에까지 간 거니까 그런 것을 판단할 줄 알아야 왜요.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의 아들로 자랐으면 완전히 그런 것을 드러내는 것이 어디 있는고 하니 싸우는 이 세계는 서로 싸우는 판인데, 하나님 나라의 그 지경을 들어가면 그 대립이 있어서 싸우는 건 없을 거요. 없지만 적어도 그런 구경을 향해 가노라 하는, 역사적으로 있는 이 세상이란 것은 싸움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바가바드 기타』가 좋아요.『바가바드 기타』는 아주 여길 ‘쿠루 크쉐트라’ (Kuru-kshetra), 전쟁판이라고 그래요. 거기서 싸움이 있어요. 그 싸움이 뭔고 하니 선과 악의 싸움인데, 잘못 생각하면 “네거냐 내거냐, 네가 지배하느냐, 내가 지배하느냐” 그 싸움이지만, 구경을 따지고 들어가면 이 우주라는 게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이 살고 죽고가 있지만, 거기보다 높은 데 올라가면 정신의 세계, 영의 세계라는 데 가서, 어째 그런지 이 세계라고 하는 데는 선과 악의 대립이 있어서 그것은 어디서 나왔느냐는 말하기 어려워요. 물론 마지막에는 그거까지 아는 데 가야 하지만. 그래서 오늘 또 그 얘기를 하면 그전에 한 소리 반복이 됩니다만 그건 상당히 중요해요.
제자들이 “왜 본래 좋은 씨를 심었는데 왜 이렇게 나쁜 곡식이 났습니까?” 물으니 예수님이 “거, 밤에 도둑이 와서 그랬겠구나” 그러잖아요? 그건 아마 그때 풍속으로, 세상이 나빠서, 남의 밭에다 몰래 가라지 씨를 뿌리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뭐 지금이야 그 정도만이 아니지요. 남을 모함하려고 투서도 하고 공산당으로 몰기도 하고 별짓을 다 하지만 그전에는 소박하던 시절이니까, 미운 놈이 있으면 밤에 몰래 가서 가라지 씨를 팍 뿌리고, 그러니 “심기는 좋은 씨를 심었는데 왜 가라지가 났습니까?” 그랬어요. 그게 뭔고 하니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 했다고 하는데, 왜 이 세상에 악이 있습니까” 그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설명을 해주기가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밤에 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그랬구나”(「마태복음」. 13장 24~30절) 즉 밤에 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그런 모양으로 우리 이성으로는 설명은 못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런 게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살아가는 데 하나 알아야 할 것은, 물론 ‘살고 죽는 일’이 큰 문제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살고 죽는 문제는 다른 동물도 거기까진 갔어요. 어떡하든지 살아야하고 죽지 않으려는 단계까진 갔지만, 사람은 어느 단계까지 갔는고 하니, 선한 게 있고 악한 게 있는 그런 차원까지예요. 안다 모른다, 좋다 언짢다, 이 차원도 있지만, 분명히 이것은 선한 것이고 악한 것이고 하는 것은 인간에 올라와서야 벌어졌지, 동물에게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으로 산다고 하면서, 종교생활 안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돼요. 이제는 벌써 거길 갈 수밖에 없는 거요. 그걸 깨닫기 시작 한다면, 선과 악이 싸우는 이 틈에서 나도 분명히 한 사람으로 싸운다고 하는 것을 모를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춥고 덥고가 문제가 아니에요. 거기서 고민을 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오늘까지 해왔겠어요. 그러나 그보다 더한 건 이놈의 갈피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냐? 있는 줄 알지도 못했는데 왜 쓸데 없는 악한 생각이 나오나? 제자들을 놓고, 이때까지 말해주던 베드로를 놓고 “선생님, 그러지 마시오. 돌아가심 안됩니다”(「마가복음」, 8장 32절) 하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말했어요. 그러니 그런 것이 말로는 쉬운 것 같지만 얼마나 지독한 세계입니까? 예수님은 매정하다면 아주 단단히 매정한 이에요.
나는 내 성격의 큰 결점이 물렁해서, 이건 아주 큰 결점이에요. 우치무라 선생님 좋은 거는 아주 칼날 같은 분이라는 거예요. 허나 또 그래서 선생의 결점도 있지요. 하니까 사람이란 좋기 때문에 거기 결점도 있고, 또 나쁘면 나쁘기 때문에 좋은 점도 있고, 그건 말로 하기 참 어려운 건데, 그런 점이 어떡하면 부족한 걸 가지고도 좋게 될 수 있고, 이 좋은 걸 가지고 잘못될 수도 있는 걸 잘 알아서 해야 돼요. 이게 믿는다는 것인데,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씨’로 나왔다고 해도 언제부터인지 가라지 가라지보다는 깜부기가 나아요. 깜부기, 깜부기란 말 않는지 몰라도, 가라지란 건 조와 비슷한 곡식이면서, 조가 아닌 것인데, 그러니 이것보다는 깜부기로 보는 게 좋아요. 그래 일본 사람들은 ‘도꾸무끼’ (とくむき)라 그랬어요. 보리씨를 뿌렸는데, 깜부기는 보리 이삭이 나오면, 클 때까지는 다 똑같다가 이삭이 나와서는 그만 새까맣게 되고 말아요. 그건 본래 씨에 균이 붙었던 겁니다. 중가운데 들어간 것이 아니라, 농부가 씨를 뿌릴 때에 그 씨에 병균이 붙어 들어가서 그런 것이니까, 뭔지는 모르지만 이 우주창조의 맨 첫번부터 이렇게 되게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도 그겁니다. 하나님이 계신다, 그걸 로고스가 있다 그랬고, 그 로고스로 만물이 되었다, 만물이 된 그 로고스 속에 생명이 있다, 그 생명이 사람에게선 빛이다 그랬어요. 그 빛이란 여기 뭐 이런 빛이 아니라 양심의 빛이라 할까 그런 걸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빛이 어둠 속에 비치되”(「요한복음」, 1장 5절) 벌써 거기 어두워요.
그 어둠은 언제부터 있는지 몰라요. “빛이 어둠속에 비친다.” 빛과 어둠의 싸움인데, 성경에는 요한의 이「복음」도 그렇고,「묵시록」도 그렇고,「요한 1서」,「2서」,「3서」가 빛과 어둠의 싸움을 테마로 놓고 썼어요. 마음에 그 생각을 두고 봐가야 이해가 쉬워요. 우린 막연하게 그저 구경삼아 여길 왔다 하더라도, 그냥 구경이나 하러온 사람들 그거 다 소용이 없습니다. 괜히 돈이나 없애지요. 한다면 가령 동해안이면, 강릉이라면 어떠냐, 서울과 다른 점이 뭐냐? 뭐든지 자기의 뭣과 이렇게 보려고 하는 걸 정하고 봐야 보이는 게 있지, 막연하게 두리번거린 다고 보이느냐? 그건 아니에요. 거 무식한 사람들이 서울 구경하는 게 그래요. 보긴 많이 봤는데 “뭘 봤나?” 그러면 아무것도 본 게 없어요. 어디에 가니 무엇이 있더라 그런 소리나 했지 별거 없어요. 그러니까 천생 내가 어떻게 뭘 보자는 거냐? 단번에 내가 다 볼 수는 없고 어느 땐 어느 걸 보고, 그 도시의 건축이 어떻게 됐나 그런다든지, 사람 사는 살림 정도가 어떻다든지 뭘 보는 게 있어야 잘 알려지는 모양으로. 그런데 도무지 막연하고 이런 건 상기도 우리 눈이 열리지 못한 탓이에요. 물론 이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지만. 마음의 눈이 뜨이기만 하면, 어쩌면 볼 것도 그렇게 많고 들을 것도 그렇게 많아요!
그러니까 아까 하던 말로 어느 때 가서든 차원이 바뀌는 일이 있어야 해요. 그거는 상기도 내 마음에 그 점을 생각하지 못한 분들은 차원이 뭔지 몰라요. “뭐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 그럴 거 아니에요? 그럴 거요. 그렇지만 내가 이제 비유를 하나 하리다. 소년이 열다섯 열여섯 날 때까진 소년의 마음에 다름이 없지만, 일단 이성을 만나고 난 담에는 달라진다 말이에요. 그때 마음이 같소, 다르오? 같을 수가 없어요. 그런 모양으로 사람이 종교를 믿는다면, 거기서 뭣을 경험하게 된다면은 내게 무슨 문제가,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구원이다 뭐다 이러는 거는 이 생명이 자라날 때 새 차원이 열린 걸, 내가 거기 참여했는 걸, 구원에 확신이 있다고 해서 완성이 다된 것은 아니고 아직도 얼마나 나가야 하는지 모르는데, 그러니까 가면 “갈수록 태산”이라고 길은 더 험할는지 몰라요. 그럼 이걸 어떻게 가야 하느냐? 인심의 구조가 어떻게 구성이 됐느냐 이건 알아야겠는데, 그것도 모르 기 때문에 어렵다 그 말이에요. 그걸 세상 철학으로 말한다면, 사람들이 옛날부터 철학이라는 거 생각해요. 종교 있고 또 철학 있으니까 뭘 생각을 해왔는데, 생각을 할 수 있도록까지 해와도 우리 눈이란 게 얼마나 확실하게 볼 수 있고, 우리 귀라는 게 얼마나 확실하게 들을 수 있는지 그 생각은 못했어요. 우리 마음이라는 게 뭔지, 마음의, 심정의 구조가 어떻고, 심성을 안다면 어디까지 알고 들어갈 수 있는지 그건 영 생각을 못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늘이 어떻고 뭣이 어떻고 그것만 많이 토론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칸트란 사람에게 와서야 비로소 가만 있자, 도대체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주체가 문제다, 내 눈이 어느만큼 밝고, 귀가 어느만큼 들을 수 있는가 이게 문제다 했어요. 칸트는 철학을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끌어내려왔다, 그러잖아요? 높은 저게 좋은 거 같은데 문제는 사실 네 눈의 렌즈가 밝으냐 어떠냐예요. 그건 생각 안하고, 암만 보려고 그래도 가슴에 뭣이 가린 게 있는데 바로 될 수가 있어요? 사람의 눈이 여기 있지만, 속눈이 밝아져야 돼요. 속눈이란 것도 하나만이 아니고, 아까 하던 말을 다시 반복한다면 사람은 어느 때 가서는 새 차원을, 이건 정말 차원이 다른 것인데, 요새 학문적으로 말하면 그걸 이제 요즘 믿는 말로 한다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거다, 하나님이 내가 생각도 못 했던 거를 내게 좋은 걸 알려줬다고, 그런 것 가지고는 그럴 수가 없어요. 아주 쉽게 말한다면 지금도 그런 사람들 더러 있을 거예요. 오늘 어디 나가 일을 한다면 오늘은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는 걸 가지고 한참 생각을 하고 성경을 보고 해서, 거기 나오는 걸 읽어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다 하는 그것도 아주 없는 것보다는 나아요. 왜 그런고 하니 사람의 마음의 걱정은 결정을 못하는 데 있어요. 사람이란 그것이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딱 결정을 해야 하는데, 그게 그저 할까 말까, 그게 바로 의혹이에요. 그러니까 의심해가지고는 안된다는 거지요. 믿어야 된다는 거.
옛날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을 의심했어요. 점치는 게 많다는 건 그래서인데, 점 중에서 제일 많다는 게 뭔고 하니, 길을 가다가 두 길이 나오면 앞에 뭣이 있을지 모르지만, 요리로 갈까 조리로 갈까 하다가 돌을 던져보고 기울어지는 쪽으로 간다고 돌을 톡 던져봐요. 그건 내 의지로 하는 건 아니지만 “까짓거 그러자”라고 하고 나면 내 마음에 결정이 되고 났으니 문제가 없어. 이걸 요리 갈까 조리 갈까 하루종일 그러고만 있어선 뭐 할거예요. 그런 점도 옛날엔 어느 정도 필요 있었어요. 그거는 사람들이 내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깊이 못 듣던 때니까 그랬어요. 무슨 저기 것을 봐서, 저 별들을 봐 살별이 보이면 전쟁이 일어난다더라, 뭣이 이러면 나라에 괴질이 돈다더라, 이럭하면 전쟁에 이기겠다, 그걸로 해서 마음이 결정돼요. 결정이 된 담에는 의심이 없으니까 곧이 곧장으로 나가는 데까지 나갈 거 아니에요. 그럼 여론도 통일되고. 옛날에는 점 안 치고는 더구나 정치를 못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