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없는 땅
정리 김광한
“내가 교회의 십자가를 고정했을 때 400여 명이 하나같이 얼굴에 빛을 띤 걸 본 적이 있나? 나는 없어. 베아트리스라는 여자의 시체를 보고, 그렇게 한탄하고 슬퍼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나? 나는 없어. 요컨대 이곳은 누구나 다 가족이야. 형제자매라고. 나는 너와는 달리 교육은 하나도 못 받았다. 열여섯 살 때부터 남미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을 뿐이지. 그래도 알고 있어. 너에게서 들은 혁명에 관한 장광설보다 이곳에 가득 찬 빛을 훨씬 더 믿을 수 있다고. 교주님이 우리가 도착하면 축제가 시작된다고 했어. 나는 지금까지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서 위험한 짓을 많이 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여기 사람들은 우리를 기다렸어. 계속 고통받던 사람들이 말이야. 우리를 의지하는 사람들을 버려두고 몰래 도망칠 수도 없어. 이제부터 시작되는 축제에 나는 전력을 기울여보겠어.” - 2권 79쪽에서
가지 시로는 모래의 대지에 몸을 눕혔다. 단바 하루아키도 그 옆에 누웠다. 잠시 둘은 묵묵히 동쪽 하늘에 뜬 푸른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축축한 모래에 등이 싸늘해서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상쾌한 기분은 몇 년 만일까? 가지 시로는 누운 채 팔짱을 끼면서 물었다.
“그래서 어때, 자신은 있나? 마르티네스가 데려오는 베네수엘라 민족해방전선 생존자 20명 정도가 전투 능력이 얼마나 될지는 지금으로선 상상도 안 돼. 이곳 주민들은 벼락치기로 훈련해도 거의 도움이 안 된다고 보는 편이 좋고. 승산은 있나? 엘리손도가의 사병 놈들은 아마 살인 전문가뿐일 거다.”
“승산이 있든 없든 할 수밖에 없지.” - 2권 209쪽에서
방아쇠를 젖히자 소사음과 함께 총신이 작게 떨렸다. 7.62밀리탄이 연달아 발사된 것이다. 20발의 총탄이 그대로 연수를 뚫고 모래땅에 박혔다. 말무크의 후두부 밑 모래가 물들기 시작했다. 지하에서 솟아오른 듯이 원을 그리며 서서히 퍼져갔다. 가지 시로는 그 입에서 총신을 뽑았다. 말무크는 표면만이 까슬까슬 무기적으로 빛나는 의안 같은 눈으로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은 자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니 남쪽과 북쪽 바위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들 모래땅을 달리고 있다. 눈대중으로는 총 70명 정도였다. 가지 시로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단바 하루아키가 있는 곳을 향해서. - 2권 316쪽에서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최초의 1위 수상작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일본모험소설협회 대상 수상작!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야마모토 슈고로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등 상 일본에서는 내로라하는 대표적인 상들을 모두 석권한 후나도 요이치. 새롭게 출간되는 작품들마다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그는 ‘현대사 이야기꾼으로서 일본 활자문화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평과 함께 현재 일본 제1의 모험소설의 거장으로 칭송받고 있다.
『전설 없는 땅』을 통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최초의 1위 수상 작가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후나도 요이치는 모험소설 외에도 도요우라 시로, 소토우라 고로라는 필명으로 극화의 원작부터 르포르타주와 다큐멘터리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뛰어난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작가라기보다 제3세계의 아픔을 소설로 승화시킨 통찰력 있는 저널리스트로서도 높이 평가받는 후나도 요이치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면 과감히 작품을 접을 정도로 철저한 현장답사와 자료조사를 통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작품을 완성시켜나가는 것으로 유명한데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동파 작가와는 급이 다르다.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전설 없는 땅』은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의 국경지대를 무대로 제3세계의 현실을 그린 작품으로 출간과 동시에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최초의 1위, 제42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제7회 일본모험소설협회대상 등 3관왕을 휩쓸며 작가 후나도 요이치를 일본 문단의 전설로 만들어버렸다.
인간의 폭력과 차별로 얼룩진 허무한 역사의 뒤안길에
수많은 피와 눈물의 강이 가로지른다!
남미의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의 국경지대를 배경으로 그린 소설 『전설 없는 땅』은 그곳의 고갈된 유전지대에 묻힌 귀중한 미래자원 희토류의 독점 채굴권과 2,000만 달러를 둘러싸고 사나이들이 벌이는 살육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베네수엘라의 명문 엘리손도가의 당주 베르톨로메오 엘리손도는 고갈된 유전지대에 묻힌 희토류의 존재를 알게 되어 돈방석에 올라앉을 꿈을 꾸지만, 그의 밑에서 구박받으며 살아온 어리석은 큰아들 라몬과 정부 베로니카의 우발적인 살의로 목숨을 잃는다.
12년 전에 가출했던 둘째아들 알프레도가 돌아온 같은 날 같은 시각, 그는 단숨에 집안에서 일어난 모든 상황을 파악해내고는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넋이 나간 형을 살해한 뒤 엘리손도가의 새로운 당주가 된다.
이후 알프레도는 베로니카와 함께 희토류의 채굴을 위해 고갈된 유전지대에서 살고 있는 콜롬비아인 400여 명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지만 교주 막달레나 마리아를 향한 강력한 신앙심으로 뭉친 사람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결국 알프레도는 그들을 몰아내려고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하기 시작하는데…….
한편 칠레의 좌익혁명을 위해 살아가는 가지 시로와 혁명이나 투쟁에는 관심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단바 하루아키라는 일본...인이 각자의 목적으로 3년 전에 숨겨둔 2,000만 달러를 찾기 위해 고갈된 유전지대를 찾는다. 그곳에 살고 있던 400여 명의 사람들은 교주에게 내린 신의 계시를 듣고 가지 시로와 단바 하루아키 일행을 엘리손도의 손에서 구해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단바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힘겹지만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돕기로 결심한다. 순식간에 단바는 작은 공화국의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르며 엘리손도와 피 비린내 나는 전쟁을 선포한다.
사람은커녕 풀 한 포기 나지 않아 전설조차 생기지 않은 땅, ‘전설 없는 땅’에서 그저 ‘돈’만을 바라보고 모인 이들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가면서 새로운 전설의 한 자락을 기록해나가기 시작한다. 세상을 바꾸려는 혁명가부터 글을 모르는 난민까지, 제3세계에서 허덕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비정한 현실과 인륜을 무시한 채 처절하게 무너져가는 한 나라의 암흑사를 단적으로 그려낸 『전설 없는 땅』. 이상향에 목숨을 내던진 인간의 광기와 정열, 그 새로운 피의 역사가 전설 없는 땅에 아로새겨진다.
후나도 요이치는 제3세계의 아픔을
소설로 승화시킨 통찰력 있는 소설가다!
『전설 없는 땅』을 통해 바라보는 제3세계 속 인류의 모습!
서구 열강의 침략에 황폐화된 남아메리카. 그곳에는 에스파냐계와 포르투갈계의 백인과 그들이 노예로 쓰기 위해 데려온 흑인, 그리고 남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인종 물라토(mulato 남미의 백인과 흑인의 혼혈 인종)와 메스티소(mestizo 중남미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 인종)라는 새로운 사람들이 태어난다. 그곳에 게릴라라는 형태로 황인까지 가세하면서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의 국경지대에는 온갖 인종이 한 자리에 모인다. 작가는 인종들 간의 갈등을 묘사하기 위해 ‘국경지대’라는 무대를 활용했지만, 단순히 다양한 인종을 그리는 것에 머물지 않고 시몬 볼리바르(베네수엘라의 독립운동가), 살바도르 아옌데(칠레의 의사 출신 대통령), 더글러스 브라보(베네수엘라 정치가) 등의 실존인물을 작품 속에 녹여내어 현실성에 무게를 두었다.
후나도 요이치는 지배자의 권력구조 안에서 곪아가는 피지배자의 적나라한 모습, 즉 제3세계의 아픔을 인류의 비극이라는 형태로 소설로 승화시켰다.
『전설 없는 땅』의 상징적인 인물 바라빠와 막달레나 마리아!
콜롬비아에서 어머니의 강요로 몸을 팔다가 막달레나주에서 도망친 마리아는 신의 계시를 받는다. 막달레나주에서 온 마리아라서 막달레나 마리아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녀는 고갈된 유전지대에서 400여 명의 사람들을 이끌며 미래를 예언하고 작은 영혼의 공화국을 세우려고 한다.
단바 하루아키는 돈과 여자를 안기 위해서 하루하루 살아왔지만, 고갈된 유전지대에서 신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에게 바라빠라 불리는 등 추앙을 받으며 차츰 지도자의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 막달라 마리아(막달레나 마리아의 영어식 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최초로 보았던 창녀이자 예언자이고, 바라빠는 도적질을 하다가 붙잡혔지만 예수가 대신 자신의 죄를 짊어지고 사형에 처해지자 유대 민족주의의 지도자로 변모한 인물이다. 즉 단바 하루아키와 막달레나 마리아는 성경 속의 인물에서 그대로 차용해왔다.
후나도 요이치는 성경 속에서 등장하는 대표적인 캐릭터를 통해 또 하나의 새로운 소설을 구상하고 그 인물들이 그 작품 안에서 상징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 작품 해설
본래 모험소설은 ‘주인공인 선한 영웅이 몇 번이나 위기를 벗어나 나쁜 사람을 물리치며 대단원을 맞이한다’는 것이지만 후나도 요이치는 기존의 모험소설 정석을 벗어나며 이채를 발했다. 영웅도 착한 사람이 아니고, 자신의 믿음에 따라 배신 혹은 복수를 하면서 적을 물리치고 자신 또한 죽음을 맞지만 마지막에 웃는 이는 ‘민중’이라는 것을 그의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 후나도 요이치가 재현해내는 생생한 묘사의 무대는 근대사 속에도 무한이 묻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현대사에만 도전하며 자기 입장과는 무관한 역사 속에 안주하기를 고집스럽게 거부한다. 그 태도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에게 투영되어 있다. 독자의 공감을 부르는 주인공은 후나도 요이치 자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프리 저널리스트 에야 오사무
■ 역자 후기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 출간된 『전설 없는 땅』은 늘 제3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다큐멘터리와 르포르타주를 집필해온 후나도 요이치에게 큰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전작 『산고양이의 여름』(브라질), 『신화의 끝에서』(페루)에 이어 ‘남미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작품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제42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 제7회 일본모험소설협회대상까지 휩쓸며 1988년 출간 당시 독자는 물론이고 평론가들 사이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전설 없는 땅』은 그렇게 작가 후나도 요이치를 일본 문단의 전설로 만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