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17.부활 제2주간 토요일 강론>
<요한6,16-21>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16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우리는 예수님을 대할 때
동물성, 인성, 신성의 차원에서 다 대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동물성 인성을 지니셨음에도 불구하고 신성의 차원에서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성 앞에서 인간 에고의 반응은 두려움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빵을 많게했던 5,000명을 먹이신 기적 앞에 사람들은 환호하며 왕으로 모시려 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서둘러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내셨으며,
당신은 군중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당신은 아버지의 뜻을 물으셨겠지요.
아버지의 뜻을 입고 이제 그분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중의 왕이시니, 당신께서 대접을 받으시려 했다면 당연히 왕으로 남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왕이신 당신의 품위로 올려주시려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단 한 번으로 제사로 우리를 구속하신 사제의 품위로 올려주시려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시며, 말씀의 품위로 올려주시려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당신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과 말과 행동을 드러내시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뜻과 말과 행동을 그대로 하는 것이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길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포기할 것이
십계명에 걸려있는, 세상적 가치에 매여 사는 에고인 것입니다.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 10배의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엄마 뱃속에 계속 있게되면 아이와 어머니 다 죽게되지요.
우리의 에고가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은 세례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사는 몫이, 수련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악의 뿌리는 예수님의 빠스카로 점령이 되었지만, 예수님의 나라가 아닌 이 세상에서 아직도 세상적 가치에 매여사는 우리의 기도와 정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 안에서 당신의 구원을 성취하십니다.
그분의 배우자로서 당당하게 그분 앞에 설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해 우리를 격려해주시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주신
사제직으로 순간 순간을 예수성심께 봉헌하며,
왕직으로는 세상적 가치에 지지 않고 극복하고 일어서는, 즉 천상적 가치를 사는 왕직을 위해 순간 순간 세상적 가치에 대한 집착을 예수성심께 봉헌하며,
예언직으로 순간 순간 렉시오 디비나의 쪽지수행을 하듯 성서 말씀을 되뇌는 것입니다.
<John6,16-21>
16 When it was evening, his disciples went down to the sea,
17 embarked in a boat, and went across the sea to Capernaum. It had already grown dark, and Jesus had not yet come to them.
18 The sea was stirred up because a strong wind was blowing.
19 When they had rowed about three or four miles, they saw Jesus walking on the sea and coming near the boat, and they began to be afraid.
20 But he said to them, "It is I. Do not be afraid."
21 They wanted to take him into the boat, but the boat immediately arrived at the shore to which they were hea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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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감방이여 고맙소
러시아의 육군 장교였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소련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문서 날조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그 후 시베리아에 있는 정치 수용소로 후송되어 그곳에서 11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곳에 있던 죄수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으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는 그들과 함께 모든 참상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그는 정치 수용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으며 그로 인해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험을 하였다. 이후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The Gulag Archpelago)’ 에서 그. 수용소의 참상을 폭로하여 197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 책에서 솔제니친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감방이여, 고맙소.”
감방도 감사의 눈으로 보면 고마울 데가 있는 것이다.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것이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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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우리와 온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은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지나요?
사랑에 관해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도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678-679, 681-682]
“하느님은 어떤 영혼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영혼이 자기 스스로를 저버릴 뿐이지요. 모든 영혼은 제각기 자기 자신에 대한 심판자가 됩니다.”(야코프 뵈메(1575~1624), 신비가, 범신론자)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14,6)이시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지의 여부는 그리스도를 잣대로 결정됩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잣대로 해서 모든 인간과 사물, 생각과 사건에 관한 완전한 진실이 밝혀집니다.->157, 163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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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678 예언자들과(다니7,10; 요엘3-4; 말라3,19 참조) 세례자 요한에 뒤이어(마태3,7-12 참조) 예수님께서는 설교 중에 마지막 날의 심판을 예고하셨다. 그 때에는 각자의 행동과(마르12,38-40 참조) 마음 속의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루카12,1-3; 요한3,20-21; 로마2,16; 1코린4,5 참조). 그 때에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 고의적 불신이 단죄받을 것이다(마태11,20-24; 12,41-42 참조). 이웃에 대한 태도에서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거부했는지를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마태5,22; 7,1-5 참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말씀하실 것이다.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679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구속자로서 인간의 모든 일과 마음을 결정적으로 판단할 충만한 권한이 있으시다. 그분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 권한을 ‘획득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신판하는 권한을 모두 아들에게”(요한5,22) 넘겨 주셨다.(요한5,27; 마태25,31; 사도10,42; 17,31; 2티모4,1 참조). 그런데 아들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으며(요한3,17 참조)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294)/
주려고 오셨다(요한5,26 참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은총을 거절한 사람은 저마다 이미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며(요한3,18; 12,48 참조), 각자가 한 일에 따라 받을 뿐 아니라(1코린3,12-15 참조), 사랑의 성령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영원한 저주를 자초하게 된다(마태12,32; 히브6,4-6; 10,26-31 참조).
간추림
->681 세상 종말에 있을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께서 영광에 싸여 오셔서, 역사 안에서 밀과 가라지처럼 함께 자란 악에 대한 선의 결정적 승리를 이루실 것이다.
->682 영광스러운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셔서 마음 속에 감추어진 의향을 드러나게 하시고, 각자에게 그의 행업에 따라, 그리고 은총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한 것에 따라 갚아 주실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295)/
신앙과 지성
->157 신앙은 확실한 것이며, 그것이 거짓 없으신 하느님의 말씀 자체에 근거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인식보다 더 확실하다. 물론 계시된 진리들이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에 비추어 모(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1)/
호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자연적 이성의 빛이 주는 확실성보다 하느님의 빛이 주는 확실성이 더 크다”(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2-2, q. 171, a. 5,3um: Ed. Leon. 10, 373) “만 가지 어려움도 하나의 의심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존 헨리 뉴먼, ‘자기 생애를 위한 변호’(Apologia pro vita sua), c. 5, M.J. Svaglic 편 (옥스퍼드 1967), 210면)
신앙-영원한 생명의 시작
->163 신앙은 우리가 이 지상에서 순례해 가는 목표인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의 기쁨과 빛을 미리 맛보게 해 준다. 그때에 우리는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1코린13,12), “그분을 있는 그대로”(1요한3,2)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미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신앙의 축복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바라보지만, 그것은 장차 누리도록 신앙이 우리에게 보증해 주는 놀라운(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4)/
것들을 이미 소유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성 대 바실리오, ‘성령론’, 15, 36: SC 17bis, 370(PG 32, 132).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2-2, q. 4, a. 1, c: Ed. Leon. 8,44 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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