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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국의 보배 같은 유산 청백리(淸白吏)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재상(宰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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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求國)의 무신(武臣) 이순신 장군(李舜臣將軍)과 문신(文臣) 이원익 재상(李元翼宰相)
문장이 길므로 색상(칼라) 밑줄 친 부분을 선택하여 읽으셔도 문맥은 연결될 것입니다. 1592년 4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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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익(李元翼: 1547~1634, 향년 87세)
조선 후기 광명 지역의 대표적인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태종의 아들인 익녕군 이치의 후손이다. 무려 60여 년간 관직에 있으며 다섯 번의 영의정을 거친 뒤 늙고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고향인 현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선산이 있는 오리곡 인근에 돌아왔다.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기에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 이원익은 돗자리를 짜서 팔아 연명했다고 전해진다. 묘소는 광명시 소하동 1059-9번지[오리로 325]에 있다.
“나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으며 너무 부끄러웠다. 전쟁 예측도 못하고 그저 관리만 했으니 백성 앞에 죄인이니 내가 죽으면 나를 기념하지 말라”라고 자식에게 유언했다.
임진왜란 때 45세인 영의정 도체찰사 이원익은 좌찬성 정탁과 함께 이순신을 변함없이 옹호하여 이순신을 살린 신하였다. 서인의 모든 신하들이 다 이순신을 비판할 때도 이원익은 그를 교체하면 모든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 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집에 떨어진 갓을 쓰고 쓸쓸히 지내니 아무도 그가 재상인줄 알지못했다. 인조실록2년1월19일.
필부로 고향에 돌아오니 노년에 가진 것은 비 새는 초가집 한채뿐. 영의정만 여섯번, 40년을 재상으로 지낸 조선의 청백리 오리 이원익. 그 청렴함을 기려 인조가 집을 하사하자 사양하며 그가 남긴 말. 신을 위해 집을 지으니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을 일입니다. 관감당 하사고서 중.
인조가 집 한채를 지어줬더니 안 들어가겠다는걸 강제로 살게해서 집을 한번 받은적은 있으나 그 이외에는 절대 사양하고 받질 않았어요. 이성무/한국문화 연구원 원장.
세상을 사랑하는 데는 백성 사랑만 한 것이 없고 몸을 다스리는 데는 욕심 버리는 것 만한 것이 없다. -이원익이 손자에게 남긴 글 중에서-
오리 이원익. 청렴(淸廉)과 정직(正直)으로 백성을 섬긴 참 지도자의 이름입니다.
북쪽 국경을 다잡아야 하는 중차대한 길을 떠나며 이원익은 임금에게 유언처럼 다짐하듯 말씀을 올렸다.
“임진란을 당해 초야에 계실 때처럼 상께서는 반드시 경비를 절감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재용을 절제 있게 한 뒤에야 나라의 근본이 튼튼해지기 때문입니다. 전쟁으로 절망한 백성에게서 어떻게 함부로 재용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의 힘을 덜어주어야만 백성이 살아갈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이것이 목전의 급선무입니다.”
“제향을 줄일 수 없다니 신은 의혹됩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이 무게를 가지려면 그 말과 사람이 합당해야만 한다. 이원익이 난리를 겪은 임금에게, 피난 중이었을 때처럼 경비를 절감해야 한다는 말을 올릴 수 있었고 임금이 귀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은 이원익이 몸소 행했기 때문이다.
이원익은 임진왜란에 이어 정묘 재란도 겪어야 했다. 앞서 선조를 모시고 임진왜란을 겪었지만 정묘 재난 때는 인조를 모셨다. 난리가 끝났을 때 선조에게 아뢰었던 것처럼 이원익은 인조에게 검약을 아뢰었다.
“상께서 공주에 계실 때 간소하고 검약하기를 힘써 세금을 모두 줄이겠다는 분부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간에게 내린 명령을 보니 종묘와 사직의 제향에 대한 것은 줄일 수 없다고 하시니 신은 의혹됩니다. 백성이 편안하면 종묘와 사직의 제사가 영구히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백성이 편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니 종묘 제사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향의 규모를 줄이는 것도 조상을 받들어 효도하는 방도인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워 나무 벤 아이를 풀어주다.
어느 날 이원익이 여느 때처럼 베옷을 입고 돗자리를 짜고 있었다. 갑자기 한 산지기가 어린아이의 팔목을 꽉 틀어쥐고 나타났다.
“잠깐 부탁 좀 합시다. 나무를 베지 못하게 돼 있는 성내에서 나무를 벤 아이요. 내 금세 가서 포졸을 데려올 테니 이 아이를 꼭 좀 붙잡고 있어주시오.” 산지기의 말이 끝난 뒤에도 이원익은 아무 응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자 불안해하며 산지기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이 아이를 놓치면 당신이 대신 옥에 갇힐 줄 아시오.” 산지기는 협박하듯 으르며 말을 내뱉더니 황급히 자리를 떠나 관가를 향했다.
그제야 입을 열어 이원익이 겁에 질려 우는 아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나라 법을 어기고 나무를 베었느냐?” “홀로 계신 어머님이 병에 걸려 누워 계신데 땔감이 없어 냉방에 계십니다. 약 살 돈도 없고 방이라도 따뜻하게 해드리고자….” 아이의 대답은 울음에 묻혀 끝이 흐려졌다. 이원익은 우는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슬며시 문밖으로 내밀었다. “가거라.” 울음이 가득한 아이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기쁨과 불안감이 교차해 눈망울이 안정되지 않았다.
이원익이 재차 몸을 밀어주고서야 아이는 몸을 굽혀 인사하기가 바쁘게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아이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산지기와 포졸이 도착했다. 아이가 없어진 것을 안 산지기는 포졸을 앞세워 이원익에게 막말을 내뱉고 횡포를 부렸다. 하지만 이원익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수습했다.
◆ 유관: 세종대왕때 유관은 청백리로서 비가오면 물이새어 방에서 우산을 써야했는데 우산도 없는 가난한 사람은 어찌 견딜고"걱정을 했다. 아내는 "우산없는사람은 다 준비가 돼 있답니다. 남 걱정 마시고 우리 살 궁리나 하시구려"하고 핀잔을 주었다.
◆ 황희: 세종은 모친상을 당한 황희에게 쌀 등 곡식 50석과 종이 1백 권 등의 많은 부조를 했다. 또한 임금은 상을 치르느라 허약해진 황희를 불러 특별히 고기를 주기도 했었다.
“전하께서 신이 늙어 혹시 병 날까봐 가엾게 여기시어 고기를 먹으라고 하시니 감격하여이다.”
황희가 머리를 조아리며 고기를 먹었다.
이렇게 황희 정승은 태종 때 충령대군(훗날 세종대왕)이 태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고 하여 귀양을 가게 되었다. 세종대왕이 즉위하자 세종은 황희를 영의정에 앉혔다. 황희 정승은 18년간의 벼슬길에 탄핵상소를 여러 번 받았으나 세종은 재등용을 거듭했는데 그만큼 임금에게서 인격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재등용을 거듭하는 세종의 너그러움도 대왕의 면모가 보이는데 하루는 탄핵상소문을 읽는 중에 도승지 안숭선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희는 국정을 맡은 대신이요, 또 태종상왕께서 신임하셨던 사람이다. 내 어찌 경솔하게 자르겠느냐 "
세종은 상왕 태종께서 세자 양녕대군을 폐하려 했을 때 황희가 양녕대군을 두둔한 일을 회고하면서 황희는 실로 죄가 없다는 분부와 함께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셨다. '내 어찌 아버님 상왕의 뜻을 거스르겠느냐' 하는 것이 성군 세종대왕의 효성이요 인품이었다. 또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 끝까지 같이 가고싶은 마음이 도량넓은 통치자의 마음일 것이다.
황희 정승은 아들이 넷인데 그중 한 아들이 술을 좋아하였다. 타일러도 말을 듣지않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고 고심끝에 어느날 하루 아버지(황희 정승)는 밤늦도록 이슬을 맞으며 기다렸다. 술취한 아들이 비틀거리며 마당에 들어섰다. 황희 정승은 머리를 숙여 정중하게 아들을 맞이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술취한 아들이 아버지가 인사하는 것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버님! 어쩐 일이십니까?" 황희 정승이 정중히 대답하기를
"세상에 자식이 아버지 말을 듣지 않으면 한집 식구라 할 수 없습니다. 자식이기보다 손님입니다. 저는 지금 손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 그 아들(셋째 황수신)은 술을 끊고 학문에 정진했는데 황수신은 세조12년 영의정에 올라 조선 최초의 부자 영의정이 되었다. 황수신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 아버지 황희 정승의 묘와 마주보이는 곳에 아버지에게 공손히 절하는 자세로 향해 누워있다.
정승이 농부에게서 배우다.
황희 정승이 길을 가다가 농부가 누렁소와 검정소 두마리로 논을 갈고 있는 것을 보고
"누렁소와 검정소 중에서 어느 소가 일을 잘 합니까?" 라고 묻자 농부는 황희 정승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누렁소가 더 잘 하오" 황희 정승은
"그만한 일을 가지고 일부러 논 밖으로 나오시오?" 라고 말하자 농부는 얼굴을 붉히며
"두 마리가 힘들여 일하는데 한 쪽이 못 한다고 하면 그 소는 기분이 나쁠 것 아니요! 아무리 짐승이지만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농부의 말을 듣고 부끄러워 큰 절을 하고 고마워 했다.
황희 정승은 노비출신 과학자 장영실을 세종에게 정4품호군(護軍)에 명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황희 정승은 태자책봉문제로 명분을 중시했고 아들교육문제로 후덕한 포용성을 보였으며 농부로부터 배운 후덕한 탕평정신을 보여주었다. 물론 양녕대군이 임금이 되었다면 한글은 오늘날 없을지도 모르고, 북방영토확장(두만강 하류 6진개척)과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김종서 장군(무신 아버지밑에서 자라 16세에 과거급제 문신으로 입문)을 배출하지 못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http://blog.naver.com/ash856/30125286844
◆ 이순신 장군: 선조(宣祖):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드러누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선조는 이순신을 직접 심문하는 국청(鞠廳)을 열었다.
1차 국문
문신(文臣) 예조판서 서인(西人) 윤근수 국문관(鞫問官): “나라의 은혜가 지중하거늘 어찌 두 마음을 품고 적장의 뇌물을 받고 가등청정을 잡지 않고 놓쳤느냐” 문신 윤근수는 61세로 무신 이순신보다 8년 위이고 키가 중간 이하였지만 심문하는 목소리는 웅장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중국통 외교전문가로 1573년 주청사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임란 때 예조판서에 재기용되었다.
무신 이순신: “의신(자기를 낮춤)의 책무는 국가의 간성이 되는 데에 있었으며 전란 이래 6년 동안 대소 100여 번을 싸웠으나 지금까지 재략이 모자라 적을 섬멸하지 못한 죄는 1만 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렵지만 적에게서 뇌물을 받고 적을 놓아 준 일은 없소!”
2차 국문
문신(文臣) 예조판서 서인(西人) 윤근수 국문관((鞫問官): “한산도에서 궁궐 같은 제승당이니 운주각이니 하는 집을 짓고 밤낮 주색에 빠졌다는 죄에 관하여서도….” 이순신은 말이 너무 비루하여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기록관은 순신이 제 죄를 자인하여 대답이 없다는 것으로 적었다.
각주. (시청자의 의견: KBS 1TV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방영을 보면서, 무참히 고문을 당한 이순신이었다. 정유재란 이전까지 전투마다 백전백승하여 왜군을 물리쳤거늘 이제 와서 역적으로 모는구나! 출전 장수에게는 작전의 권한이 있다. 남서해에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 장수의 임무임을 모르느냐?)
문신 좌의정 서인(西人) 윤두수: “가토의 도해(渡海)를 즉각 그대에게 통지하였거늘 수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함대의 출동은 그 후 마지못한 시위였지 않는가?”
무신 이순신: “적의 음모로 판단하였을뿐이오. 하지만 그 직후 함대를 출동하였으니 이는 조정의 명을 따른 것이오.”
문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서인(西人) 심희수: “조정을 기망(欺罔) 하고 임금의 명을 무시한 죄를 지은 자이오니 국법의 지엄함을 보여줘야 할 줄 아뢰옵니다.”
문신 좌의정 서인(西人) 윤두수: “이순신은 비단 어명을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았사옵니다. 이것은 나라를 저버린 행위로써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죄이옵니다. 마땅히 엄벌에 처해야 하옵니다.”
선조는 ‘법으로 보아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므로 죽어 마땅하다’라고 하며 ‘스스로 잘못했다는 말이 나오도록 국문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실록에 의하면 선조는 이순신을 두고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이로 인해 이순신은 여러 차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때 판중추 부사로 있던 정탁(鄭琢)은 1,298자로 이루어진 상소문 신구차(伸救箚)를 올리고 도원수 권율도 이순신을 변호했다. 국청이 새벽 6시까지 이어졌지만 도체찰사(현 비대위원장) 이원익은 끝까지 이순신을 변호했다.
선조: “도체찰사는 왜 아무 말이 없소”
문신 이원익(도체찰사): “제가 납득할 수 있는 대안을 주시온다면 따르겠사옵니다. 다만, 원균만 빼고 하명하시옵소서. 이 자리에 10년을 서 있어도 저는 못합니다.”
선조: “왜 원균을 거론 못 하게 하는가”
문신 이원익(도체찰사): “신은 전라 좌우수영으로 가서 병사훈련과 전쟁 대비를 눈으로 보았사옵니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200여 명의 문무백관들과 사대부 문신 대감들이 도열한 국청 중에 거의가 이순신을 죽여라는 쪽이고, 1.도원수 권율과 2.좌찬성 정탁, 3.도체찰사 청백리 이원익 세 사람만이 이순신을 변호했다.
운명의 그날 밤은 가히 200 대 3이다.
이순신 유성룡까지 합해 200 대 5이다.
200명이 나라를 망치고 5명이 나라를 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큰 일은 예리한 판단력의 시작과 인내력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순신·권율을 천거한 서애 우의정 유성룡과 오리 좌의정 이원익 재상의 판단력인 시작과 나라를 구한 이순신·권율 장군의 전과(戰果)인 결과가 위대하다고 찬양을 받는다.
각주. 참고로 서인 윤두수는 선조와 사돈간이다. 이원익과 이순신은 사돈간이다.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 형제는 원균과 친족 관계이다.
원균과 윤근수가 동서라고도 하고 또는 처남 매부 간이라고도 한다. 원균은 서인(西人)의 옹호를 받았다.
1597. 7. 16: 칠천량 해전: 이순신이 모함을 받아 투옥되자 원균이 그 자리(삼도수군통제사)에 앉았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은 이순신에게서 물려받은 전선 134척에 수군 1만 7000여 명, 화약 4000근, 총통 300자루를 다 잃고 보성 군수 안홍국(安弘國)·전라 우수사 이억기·충청 수사 최호 등 지휘관들이 전사하고, 원균 자신도 선전관 김식과 함께 육지로 탈출하다가 전사하였다. 경상 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했다. 1597년 8월 7일 선조는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1597. 7. 23) 시키고 복직된 22일 만에 수군 철폐 명령(1597. 8. 15)을 내린다. 남은 것이라고는 병사 120명과 배 12척뿐이었다.
今臣戰船尙有十二: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죽을 힘을 다 해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今若全廢舟師: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是賊所以爲幸而由: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湖右達於漢水:이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此臣之所恐也: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戰船雖寡:전선수와 수병이 비록 적으나
微臣不死:미천한 신은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則不敢侮我矣: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必死卽生: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必生卽死: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
一夫當逕 足懼千夫:한 사람이 길을 잘 지키면 천 명의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일본 전함 133척에 3만여 명의 왜군을 대항하여 적장 구루시마(來島通總)를 죽이고, 왜함 31척을 격침하고 8,000여 명의 왜병을 살상시켜 물리쳤다. 1598. 11. 19: 노량(관음포) 해전에서 이순신은 노량 앞바다에서 왜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의 적병을 죽였다. 이때 왜군은 이순신을 잡을 목적으로 그를 포위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협공을 받아 관음포(觀音浦)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이순신은 동시에 적에게 포위된 진린을 구출하였다. 이 해전에서 400여 척의 전선을 격파당한 왜군은 남해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이순신은 이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추격하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諱言我死), 내 몸을 방패로 가리고 울음소리를 내지 말라(以牌防身體 使之不發哭)”라고 명령하고 모질고 파란많은 생애 53세를 일기로 전사하셨다. 조선군은 왜군을 격파한 후에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한산대첩으로 해전 사상 세계 4대 해전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영토를 지켜주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대한민국의 영웅이요 국민의 무한한 존경을 받는 위대한 장수(將帥)이시다.
선조 이후 서인 세력은 정철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노론으로 이어저서 남인을 누르고 조선이 망할 때까지 300년 당쟁의 관념적인 성리학의 대세로 문신사림서인(文臣士林西人)의 신권강화세력(臣權强化勢力)이 조선왕조의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무신(武臣)이 힘을 잃어 과학 제국주의(당시 세계적 추세) 일본에 먹히게 되었다.
이순신·권율 장군을 천거한 서애 유성룡과 청백리(淸白吏) 오리 이원익(李元翼)과 도원수 권율, 좌찬성 정탁의 간언이 없었더라면 그 당시 한반도는 일본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세계 4대 해전(시대순)
1. 고대 - 살라미스 해전(그리스 해군의 페르시아 해군 격파)
2. 칼레 해전(영국 해군의 프랜시스 드레이크 =>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
3. 한산도 대첩(조선 해군 제독 이순신 장군 =>일본 해군 와키자카 제독의 수군 격파)
4. 트라팔가 해전(영국 해군의 넬슨 제독 =>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격파)
*러일전쟁 쓰시마(대마도) 해전에서 3배에 달하는 러시아 발틱 함대를 전멸시켜 승리로 이끌어 ‘군신(軍神) ’이라는 칭호를 받는 전쟁영웅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이순신을 가리켜 “나에게 영국 넬슨과 비견됨을 찬(讚)함은 감당하나 나는 이순신의 구두끈도 묶지 못한다 (일본인의 겸양 문구). 이순신에 비하면 나는 일개 하사관에 불과하다. 만일 이순신이 나의 함대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이다. 나는 국가적으로 일치단결된 지원을 받아 전투에 승리했으나 이순신은 왕의 끝없는 의심과 동료 장군과 조정 신료들(사대부 문신들)의 끝없는 음해를 받아 죽을 고문을 받고 백의종군을 하는 등 감당할 수 없는 신고(辛苦)속에서 국가 지원도 없는 가운데 23회전을 완벽한 승리로 이끈 장군이다. 나는 감히 이순신과는 대적 할 수 없는 전신(戰神)이다.”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리콴유와 아이젠하워·존슨 미국 대통령, 미 국무장관 키신저와 중국 등소평은 박정희를 인정했다. 수많은 세계 통치자들이 박정희를 배우려고 찾아오고 존경했다. 박정희는 이순신을 존경했다. 통치자는 각자의 존경하는 인물을 갖고 있다. 그 인물에서 그 인물의 성향을 알 수 있다.
일본 육사를 우등으로 졸업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순신을 존경하시고 아산 현충사와 통영 제승당을 정비하셨다. 자기가 설 곳에서 예리한 판단력으로 힘을 비축하기 위한 시작으로 결과는 적을 이김이라! 오천년 민족의 한 배고픔의 서러움 보릿고개를 없애 주시고, 갑신정변에서 3일 천하로 끝나고,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조국 근대화! 과학정책! 꼴찌 나라에서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이끈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카리스마 박정희를, 자기는 행(行)하지 않았으면서 행(行)한 박정희를 친일파라 폄훼(貶毁)하는 자(者)는 과연 무슨 의도인가?
*영국 해군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제독: "영국인의 자존심은 그 누구도 넬슨 제독과 비교하길 거부하지만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한반도의 이순신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가 없었으며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벽해 흠잡을 점이 전혀 없을 정도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영국학자 발라드는
“영국 사람으로서 넬슨과 견줄만한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하긴 항상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인정될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 인물은 바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위대한 동양의 해군 사령관 이순신 장군뿐이다”라고 말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은 넬슨의 공이 컸다. 넬슨의 전사 소식을 보고받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위기의 순간에 조국을 지키고 순국한 진정한 영웅”이라며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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