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중국 100년 서화 낙관 전각 예술가 명인의 인감 100: 사무량 谢无量
近百年书画名人印鉴100:谢无量
소스:이페어케이
사무량(謝無量, 1884~1964), 본명은 몽, 자는 대징, 호는 희범, 후명은 이침, 자는 무량, 별서는 인색암, 사천악지인(四川樂至人)이다.근대 저명한 학자, 시인, 서예가.
네 살 때 부모를 따라 안후이(安徽)에 가서 시문(詩文)의 전적(典籍)을 아버지로부터 배워 1898년 유명 학자 탕수잠( 潜壽潛)을 스승으로 모셨다.1901년 이숙동, 황염배 등과 함께 남양공학에 입학하였고, 수업과 나머지는 말과 함께 등창하였다번역 회사를 운영하여 《번역 세계》잡지를 편집 출판하다.이 시기에 장태염, 추용, 장사쇠 등을 사귀어 소보(蘇報)에 기고를 하였다.1903년 6월''사건이 터진 뒤 소, 신문은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있다.이듬해 3월 귀국해 진강, 항저우 현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1906년 《경보(京報)》의 주필을 맡았고, 1909년 쓰촨(四川)성 존고학당(存古學堂)의 감독으로 초빙되어 사장을 겸수하였다.6월과 1911년 등이 참석한 장 란. 보로 운동1912년 여름, 강을 떠나 남쪽의 여러 성들을 여행하고 이듬해 상하이로 건너가 중화서국의 책으로 편찬되었으며, 《중국 대문학사》《중국 철학사》《중국 여성 문학사》 등의 간행물을 잇달아 출판하였다.1923년 2월 광둥대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4년 5월 대원수부 특무비서(기요비서)로 부임했다.1926년 7월 난징(南京) 동남(東南)대학에서 역사학과 주임을 초빙하여 역사연구법을 강의하고, 이듬해 9월 상하이(上海)의 중국공학으로 자리를 옮겼다.1931년 2월 국민의 정부 감사원 감사위원이 되었다.1932년 상하이(上海)에서 《국난월간(國難月刊)》을 거쳐 《국난만간(國難晩刊)》으로 바뀌었고, 같은 해 채원배(蔡元培)송경령(宋慶年)노신( 鲁迅)양행불(楊行佛) 등이 발기한 '중국 민권보장동맹'에 참가하였다.1936년 1월 심균유 등이 결성한 상해각계구국연합회에 참여했다.1946년 쓰촨대학성(四川大城) 내에서 선(先)수반(先)교사로 이듬해 행헌국민대회(行憲國民會) 대표로 선출되었다.1949년 2월 구마타케 다케시(龍武)의 초청으로 중국공학문학원 원장을 지냈다.신중국 출범 후 천서문화재관리위원회 위원, 천서박물관장, 사천문사연구관 관원, 성정협 위원 등을 역임했다.1956년 1월 제2회 전국정치협상회의 특별초청대표로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 주석을 만나 기념촬영을 요청했다.같은 해 8월에는 초청으로 베이징에 가서 중국인민대학 교수로 있었다.1960년 7월 중앙문사연구관 부관장으로 임용되었다.
독보적인 서단에서 그의 '글씨 뭉침체'는 천성을 따라 자연스럽고 구속되지 않아 귀진박옥의 '애기체'로 불린다.그 존세 서예 작품은 경정리를 거쳐 비첩 형식으로 되어 있다'사무량자작시권' '20세기 서예경전-사무량권' '역대 명가 서예-사무량' '중국 역대 서풍 시리즈-사무량서풍' '사무량서풍' '사무량서법' 상하권이 나왔다.이 밖에 사회에 산재한 제시영련서신비각도 헤아릴 수 없다.
사무량은 정직한 애국자로 전통문화 계통 연구의 선구자이자 시사, 서예, 문사 연구, 문화재 감상 등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방가였다.학식이 풍부하고 연구 범위가 문학, 사학, 철학, 경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어 박학하고 깊이 있는 학술의 대가라 할 수 있다.문학사에서는 《중국대문학사》《중국육대문호》《민문학의 양대 문호》《중국여성문학사》 등의 몇 권의 저서를 대표하여 그의 역사관을 충분히 나타내었다.
《중국철학》《윤리학정의》《노자철학》《공자》《한비》《왕충철학》《주자학파》《양명학파》《불학대강》이 저술되어 있다.《불도학설전해》《고대사상연구》《중국고전제고》《여성휴양담》《중국여성문학사》《윤리학정의》《초사신론》《시학지침서》《사학지침서》《시경연구》《중국육대문호》《중국대문학사》《실용문장의법》 등이 있다.서법집 사무량 자작시권 사무량 서법 상하권 등 시집 청성잡영 논문은 재론 이의산 관한경 혁명을 기리는 연극가 시경연구와 주석 등 다양하다.
1964년 12월 7일, 사량병사한 지 80세가 되었다.
谢无量(1884-1964),原名蒙,字大澄,号希范,后易名沉,字无量,别署啬庵,四川乐至人。近代著名学者、诗人、书法家。
4岁随父母赴安徽,从父习诗文典籍,1898年拜著名学者汤寿潜为师。1901年与李叔同、黄炎培等同入南洋公学,课馀与马一浮等创办翻译会社,编辑出版《翻译世界》杂志。这时期,结识章太炎、邹容、章士钊等人,为《苏报》撰稿。1903年6月《苏报》案发生后,赴日本学习。次年3月回国,先后在镇江、杭州当地学校任教。1906年任《京报》主笔,1909年被聘为四川存古学堂监督,兼授词章。1911年6月与张澜等人参加保路运动。1912年夏,离川到南方各省游历,翌年赴上海,为中华书局编书,陆续出版《中国大文学史》、《中国哲学史》、《中国妇女文学史》等。1923年2月受聘在广东大学执教,1924年5月任大元帅府特务秘书(即机要秘书)。1926年7月应南京东南大学聘请任历史系主任,讲授历史研究法,次年9月又转入上海中国公学任教。1931年2月任国民政府监察院监察委员。1932年在上海办《国难月刊》,后改为《国难晚刊》,同年参加蔡元培、宋庆龄、鲁迅、杨杏佛等发起组织的“中国民权保障同盟”。1936年1月参与沈钧儒等组成的上海各界救国联合会活动。1946年在四川大学城内部先修班任教,翌年当选为行宪国民大会代表。1949年2月应熊克武之邀,担任中国公学文学院院长。新中国成立后,历任川西文物管理委员会委员、川西博物馆馆长、四川文史研究馆馆员、省政协委员等职。1956年1月作为第二届全国政治协商会议特邀代表,受到毛泽东主席接见并邀请合影留念。同年8月应邀赴京担任中国人民大学教授。1960年7月被聘任为中央文史研究馆副馆长。
在书坛独树一帜,他的“字结体”随性而起,听人自然,毫无拘束,因此被誉为归真返璞之“孩儿体”。其存世书法作品,经整理以碑帖形式出版的,有《谢无量自写诗卷》《二十世纪书法经典——谢无量卷》、《历代名家书法——谢无量》、《中国历代书风系列——谢无量书风》、《谢无量书法》上下册。此外散于社会中的题诗、楹联、书信、碑刻亦不可数计。
谢无量是一位正直的爱国人士,是一位传统文化系统研究的先驱,也是一位在诗词、书法、文史研究、文物鉴赏等方面卓有成就的方家。学识渊博,研究范围覆盖了文学、史学、哲学、经学等众多领域,堪称博学深思的学术大师。在文学史方面,以《中国大文学史》、《中国六大文豪》、《平民文学之两大文豪》、《中国妇女文学史》几部著作为代表,充分展现了他的历史观。
著有《中国哲学》、《伦理学精义》、《老子哲学》、《孔子》、《韩非》、《王充哲学》、《朱子学派》、《阳明学派》、《佛学大纲》、《佛道学说诠解》、《古代政治思想研究》、《中国古田制考》、《妇女修养谈》、《中国妇女文学史》、《伦理学精义》、《楚辞新论》、《诗学指南》、《词学指南》、《诗经研究》、《中国六大文豪》、《中国大文学史》、《实用文章义法》等。书法集《谢无量自写诗卷》、《谢无量书法》上下册等,诗集《青城杂咏》,论文如《再论李义山》、《纪念关汉卿——革命的戏剧家》、《诗经研究与注释》等。
1964年12月7日,谢无量病逝,终年80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