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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밀알감리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류창원권사
성 어거스틴(Augustine)
1) 어거스틴의 생애와 그 시작
성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라틴어:Sanctus Aurelius Augustinus,주후354년11월13일~430년8월28일), 즉, 어거스틴(Augustin)은 4세기 알제리와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신학자로, 법률가이자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라틴어: Sanctus Ambrosius, 340년? - 397년 4월 4일),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로마 가톨릭의 신학자인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347년 - 420년 9월 30일)와 함께 서방 교회의 4대교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라고도 불리워 졌습니다 그의 이름은 라틴어 아우구스툼(Augustum)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좋은 징조의’ 또는 ‘덕망있는’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영어식으로 어거스틴(Augustine) 이라고 부를 때가 많고, 간혹 아우구스틴(Augustin)이라고 부를 때도 있습니다
주후 354년 힙포(Hippo) 근처에 있는 북아프리카의 작은 마을 타가스트(Tagaste)에서 태어난 어거스틴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이후 가장 위대한 심리학자이며 정치학자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신약시대 이후 가장 훌륭한 기독교인이며 라틴어를 사용한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의 부친은 이교도였으나 죽기 직전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모친 모니카(Monica)는 경건한 기도의 사람으로 교회사에서 신앙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모니카는 유년시절에 어거스틴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힙포 근처의 마다우라(Madaura)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카르타고에서 공부를 하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한 적이 있었습니다 주후 370년 가정의 형편이 나아진 후 아버지는 16살의 어거스틴에게 수사학을 배우게 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어거스틴이 처음 법관이 되기 위해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공부하는 동안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 14년동안 동거하며 아데오다투스(Adeotayus, 신으로 부터 주어진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주후 389년 아들이 어린 나이에 사망할 때까지 어거스틴은 그의 곁에서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어머니 모니카와 절교를 하게되고 모자(母子)의 연을 끊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는 이때 심한 영적 갈등을 겪었으며, 키케로(Cicero)의 "호르텐시우스"(Hortenisius) 를 읽고 진리탐구의 열정을 갖고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 접한 탐구의 영역은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이원론 종교인 마니교(Manichaeism)였으며, 당시 파우스터스(Faustus)를 만나 마니교의 깊은 진리를 청취하기도 하였습니다 9년 동안 마니교를따르며 저작활동을 하였으나 그 결과는 결혼생활도 불행하였으며 정신적 혼란과 회의가 계속될 뿐이었습니다
2)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즈를 만나다
그는 진리에 대한 새로운 꿈을 안고 383년에 로마로 떠났으며, 이듬해인 384년에 밀란에서 웅변학(Rhetorcy, 수사학)의 교수직에 임명되면서, 당시 유명한 설교가이면서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즈(Ambrose) 감독의 영향을 받게되었고, 2년후에는 로마서를 읽던 중 기독교 신앙이 진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386년 부활주일, 암브로즈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32세에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기 까지 영적인 순례자의 갈등과 고뇌는 그가 남긴 불멸의 , "참회록"(Confessions)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387년 어거스틴은 암브로즈감독에게 세례를 받고 388년,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그 여정의 길에서 어거스틴의 모친인 모니카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후엔 그의 아들 데오다티스도 주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391년, 북아프리카의 도시 힙포(히포 레기우스)에서 발레리우스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받은 후, 어거스틴은 과거 자기가 몸 담았던 마니교를 비판하는 등 많은 설교 활동을 하였습니다 또한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취하며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공로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은혜론, 신학적 인식론, 교회론, 영성신학 등의 분야에서 탁월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중세초기부터 은혜론을 둘러싼 신학 논쟁에서 어거스틴주의자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395년, 아프리카의 힙포(현재의 보나)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며, 그후 35년 동안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 어떤 교부들의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비교할 수 없는 신학작품을 저술하였습니다 430년, 힙포를 포위한 반달 야만족의 침략으로 세상을 떠나기 까지 그의 삶은 서구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목회자였습니다
3) 어거스틴의 신학
어거스틴의 중요성은 로마교회, 루터교, 개혁교회, 성공회 등 모든 기독교회의 주류들이 그의 뒤를 이어간다고 자처하는 것에서 부터 잘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많은 이들은 16세기의 종교개혁이 그 신학적인 면에서 볼 때, 어거스틴의 은혜의 교리가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대한 반란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교훈과 바울서신 가운데 너무나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죄 많은 인류들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그린 성경적 은혜의 교리가, 교부시대 이후 상실되었다가 어거스틴에게서야 나타났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었습니다
실제로 사도들과 어거스틴 사이에 나타났던 기독교의 저술가 중 대부분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온전히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바울의 교훈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삶이란 바로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선물에 대해 평생 감사하는 응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시온의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Epistle to Diognetus)과 터툴리안의 저술가운데 바울이 전한 은혜의 교리의 일부가 표출되기는 하지만 어거스틴에 와서야 그 정수가 드러난 것입니다 프란시스 뉴만(Francis Newman)과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에 의하면 바울과 어거스틴은 두번 태어난 타입에서 유사점이 있습니다 두사람 모두 자기들 생애의 전체를 변화시킨 혁명적 회심을 30대 초에 경험하였습니다 두사람 모두가 그들의 죄와 자기들에게 너무도 풍성하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이러한 "은혜론"은 펠라기우스의 교훈에 관한 반동과도 관련되어 발전되었습니다 영국출신(아일랜드 출신)의 펠라기우스(Pelagius, 어거스틴은 브리튼이라고 부름)는 높은 도덕적 성품을 가진 인물로서 384년 로마에서 그의 눈에 비친 도덕적 타락을 보고 경악했습니다 그는 원죄의 교리를 부인했으며 그들이 죄인들인 이유는 아담으로부터 범죄적 경향을 유전으로 물려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아담의 전철을 밟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결단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유아세례의 필요성도 형식적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자들의 위험한 주장에 대해 어거스틴은 "영과 율법에 관하여"(On the Spirit and Letter)와 "자연과 은혜에 관하여"(On Nature and Grace) 등의 논문을 통하여 허구성을 지적하였습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주장에 의해 펠라기우스자들은 412년 칼타코 종교회의에서 정죄되었습니다 이처럼 펠라기우스자들로 인해 어거스틴이 은혜론을 정립할 수 있었다면 그의 교회론은 도나투스주의 분파 때문에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콘스탄틴 황제의 제위 초기에 보편적인 교회로 부터 분리해 나와 북아프리카에서 상당한 문제를 야기시켰으며 어거스틴 자신의 교구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이들의 순수한 교제(a pure communion), 즉 모든 배교자들 및 그 부류들은 배제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이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와 노아의 방주를 예로 들며 포괄적인 교회론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결국 이러한 양측의 대립은 411년 칼타코 회의 이후 무력에 의해 진압됨으로서 종결되었습니다 이후 412년에 발생한 로마의 함락은 어거스틴이 그의 교회론을 발전시키는데 더욱 중요한 계기를 부여하였습니다
413~426년에 완성한 어거스틴의 필생의 대작인 "신의 도성"(City of God) 은 당시 지적 도전에 답하는 하나의 역사철학입니다 로마가 로마의 신(神)들을 섬길때에는 평안하던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후로 로마의 신들이 진노하여 로마가 멸망하였다는 비난에 대하여 기독교의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변호한 책입니다 로마의 멸망은 기독교를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이미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무수한 재앙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로마는 윤리, 도덕적으로 타락의 극치를 보였으나 기독교로 말미암아 로마가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큰 유익을 얻게된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로마의 위대성은 인정하지만 이 땅의 도성이나 모든 제국은 종국적으로는 멸망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이나 업적은 불멸의 것이 될 수 없다는 논리와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오직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할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책에서 하나님의 도성은 지상교회를 통하여 이미 시작되었으나 교회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충격적인 메세지를 전하였습니다 언젠가는 인간의 나라, 악의 도성은 다 멸할 것이나 주의 나라는 영원히 서게 될 것이며 로마의 멸망도 이러한 역사의 한 과정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이 작품은 교회가 제국을 초월하여 점차 어두워져 가고 있는 시대속에서 계속 신앙과 소망을 유지할 수 있는 정신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은 중세 천년의 역사를 이루는 중요한 희망이 되었으며, 그 사상은 교황권 확장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의 또 다른 저서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은 서방신학을 결정적으로 확정시키는데 이를 만큼 명작으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론에 관하여 터툴리안과 오리겐은 다소 종속설의 틀 속에 있었으나 어거스틴은 신의 단일성을 최우선 적으로 강조함으로서 분명한 선을 그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은 같은 한 본질에 속하여 창조자 하나님과 전능한 삼위일체가 구별될 수 없이 일하고 계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은 한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홀로 계시며 위대하시고 전능하시며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자비하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다 지으신 분이다" 라고 그의 책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삼위가 동등하시며, 먼저와 나중이 서로 사이에 없으시고, 더 높고 더 낮음이 없으심"을 주장하였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론적 추리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예배의 대상이어야 하며 삼위일체 이론도 그런 정신에서 받아들여져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자신의 깊은 신앙적 체험으로 젖어있는 반면에 헬라 신 플라톤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신 플라톤주의가 악의 실재를 부인한 것은 오직 선의 결핍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참 실재는 오직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 뿐이라고 주장한 것들이 어거스틴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죄관, 결혼관, 독신관, 금욕관, 교회관, 등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도나티스트와의 논쟁에서 교회의 가견적(可見的) 요소를 지나치게 주장한 나머지 그의 교회론과 예정론은 상치성(相馳性)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예정론은 구원이 성례를 베푸는 가견적 교회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교회론에 의해 한계점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그 시대의 교회를 대변하는 신학자에게는 그 시대에 주어진 제약성이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대적 제약성을 초월하여 신학적 표현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역사상 남아있는 영원한 도전과 과제일 것입니다
4) 어거스틴의 영향력
어거스틴이 사망했을때 힙포는 게르만족의 한 민족이었던 반달족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고 아프리카에서의 로마문명은 막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수년후 레랭의 빈켄티우스는 가톨릭교회의 정통성을 가리켜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으며, 누구나 믿는 것"(Quod ubique quod semper quod ab omnibus creditumest) 이라는 유명한 구절로 표현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의도는 어거스틴의 학설가운데 일부 과장된 주장들을 배제하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빈켄티우스는 감히 어거스틴을 이단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저서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그가 서방 기독교에 끼친 엄청난 영향력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를 통일시켜 왔으며, 언젠가는 현재의 분열을 치유할 것입니다 이처럼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인은 명쾌하고 심오한 그의 지성과 신비스럽기까지 한 그의 품행과 거대한 학문적 체계보다는 그의 독특한 종교적 천재성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안셀무스, 베르나르두스, 프란시스쿠스, 파스칼, 자크, 베닌 보쉬애, 조지 버틀러, 자크 마리탱, 라인홀드, 니부어, 파울 틸리히 등 당대의 모든 학자들이 그를 통하여 큰 영감을 받았으며, 더 나아가 모든 서방교회들이 그의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슴은 그의 삶과 철학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동방교회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서 "황금의 입"이라고 불리워 질 정도로 널리 알려진 크리스톰스(Chrysostomos, 347~407), 혈기로 유명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까지도 극찬한 밀란의 감독 암브로즈(Ambrose, 339~397), 라틴어 성경의 최고 권위자이며 당대 교회사의 대표적 권위자인 제롬(Jerome, 347~420), 그리고 교황지존설을 발전시킨 로마 감독 대 레오(Leo the Great, 390~461), 이탈리아 널시아 출신으로 서방에서 수도원을 설립하고 개혁한 베네딕트(480~?) 등이 어거스틴과 함께 주후 4~5세기를 대표하는 교회 정치지도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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