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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가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17:11-19)
여러분 제가 만약 여러분에게
100억을 준다고 하면 어떠시겠습니까?
받으실 건가요?
그러면 저에게 뭐라고 하실 건가요?
고맙다고 하죠.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100억을 받고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뜰 수 없습니다.
그래도 받으시겠어요?
받지 않으실 분들이 더 많네요.
왜 그렇게 결정하셨나요?
맞아요.
우리에게 하루는
100억보다 더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삶의 순간을 대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도 태도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크게 두 부류가 등장하죠.
함께 말씀 속에서 이 둘의 차이를 찾아보고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발견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어떤 마을에 들어가세요.
여기서 열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죠.
나병 환자들은 따로 무리를 지어 생활해야 했어요.
그들은 ‘멀리 서서’ 예수님께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 선생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왜 ‘멀리 서서’ 외쳤을까요?
나병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천형이라고 여겼어요.
그래서 일반인들과의 접촉은
엄격히 금지되었어요.
혹시라도 접촉하면 그도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멀리 서서
예수님께 외친 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어요.
그들에게 현실은 차가운 시선과
관계의 단절로 인한 외로움뿐이었어요.
누구도 그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사랑을 베풀어 주지 않았죠.
그렇다고 이 병이 치유되는 것을
기대할 수도 없었어요.
평생 이렇게 저주받은 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을 겁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1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7:14a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왜 그러셨을까요?
직접 손을 대시고
“깨끗하게 나을 지어다!”를 외치셔도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셨어요.
‘간다’는 건 동사입니다.
행동해야 하는 거죠.
다시 말해 믿음이란 건 명사가 아니라
동사, 즉 행동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믿음을 테스트하신 겁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여호수아 6장에 등장합니다.
cf)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마주한 성읍은 여리고성이었어요.
이 성은 난공불락 요새로
쉽게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여호수아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여호수아 6장 2,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 6:2, 3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엄청난 무기 개발 계획서가 아니었어요.
6일 동안 성 주변을 하루에 한 번 도는 일이었죠.
그리고 마지막 7일은 일곱 번 돌고
나팔을 크게 불면 된다고 하셨어요.
한 시가 급한 전쟁터에서
이게 말이나 되나요?
그런데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2절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아직도 여리고 성은 견고하게 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선
이미 그걸 이스라엘에게 넘겨주셨다고 하십니다.
이게 어떤 의미인가요?
비록 현실은 거대한 성벽이
눈앞을 가리고 있지만,
이미 주셨다는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들은대로 행하시길 바랍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10명의 나병환자들이 그랬어요.
이들은 예수님의 ‘가라’는 말씀을 듣고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손가락질이 있을지라도
믿음으로 나아갔어요.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 함께 14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17: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동안 세상에서 격리되어 살던 그들에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겁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랑하는 이들과
떨어져 살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이 생긴 거죠.
여러분,
믿음은 순종입니다.
그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어요.
우리 모두 순종함으로
칭찬받는 주님의 일꾼되길 축복합니다.
신앙생활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과,
다른 하나는 듣긴 하지만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행하는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나요?
말씀을 믿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이라면
기꺼이 실행에 옮깁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 기적을 경험합니다.
반면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순종해야 할 상황이 오면 회피하는 사람은
얼마 못 가 그 신앙에 위기를 맞이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또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열 명의 나병 환자들처럼
우리도 ‘가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제사장만이
나병의 치유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나병환자가 병에서 나았다면
공동체 앞에서 깨끗함을 선언합니다.
그러면 다시 이전과 같이 생활할 수 있었어요.
깨끗함을 선언 받기 위해선 ‘가야’합니다.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며
바라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현재 내 눈에 아무런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는 게 믿음입니다.
어떤 국방부 장관이 큰 병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가장 용하다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갔어요.
자기 나라에서는 굉장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니까
떵떵거리며 갔죠.
그런데 그 사람이 나와보질 않는 겁니다.
한참을 기다렸는데 종이 나와서 하는 말이
“강물에 일곱 번 몸을 담그십시오.”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당장 쳐들어가서 한바탕 해도 모자를 상황이죠.
이 사람도 화가 머리끝까지 났어요.
“내가 누군데 감히 나와보지도 않고
기도도 한 번 안 해주냐!”
그리곤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부하가 말려요.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해 보시죠.
어려운 일 시킨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부하의 성화에 못 이겨
일곱 번 강물에 몸을 담갔습니다.
그랬더니 온 몸을 뒤덮고 있던
피부병이 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이야기는 성경에 등장하는 실화입니다.
아람 군대 장관이었던
나아만이 나병에 걸렸는데,
선지자 엘리사의 말대로 순종했더니
깨끗하게 나은 사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나아만에겐 믿음이 없었어요.
그런데 같이 갔던 사람들이 자꾸 하라고 하니까
그냥 따랐던 겁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열 명의 나병환자가 떠올랐어요.
이들 중에도 분명히 별로 가고 싶지 않았던 사람도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가라’는 말씀을 듣고 같이 갔더니
깨끗하게 나음을 받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요?
질병에서 깨끗하게 된 건
전적인 은혜란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게
전적인 은혜입니다.
우리 육신은 주일에 쉬고 싶고,
놀고 싶어하죠.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선 ‘가야’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해야 해요.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순종이 있을 때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에
이런 은혜가 넘치길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우리 성도님들의 가족들 모두
예배의 자리에서
이 은혜를 맛보게 되길 축복합니다.
여기까지만 본문이라면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뒤가 더 중요해요.
제사장에게 가던 나병 환자들이
갑자기 깨끗함을 받아요.
그리곤 15, 16절에 이런 일이 있네요.
함께 읽어봅시다.
사도행전 17:15,16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은
몇 명입니까?
한 명입니다.
몇 명이 나았지요?
10명이 다 나았어요.
그런데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로 가고
한 명만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예수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하고 있어요.
여기서 ‘감사하다’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테오’입니다.
이 말은 ‘받은 것을 주신 분께
잘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받은 것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감사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다 감사하는 게 아니에요.
10명이 모두 나병의 치유를 받게 되었죠.
그런데 사마리아인 1명만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깨달았거든요.
자신에게 베푸신 예수님의 은혜를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와서 감사했던 겁니다.
사마리아인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와서 감사했습니다.
받은 것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데
주님의 눈에 그가 두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구하지도 않은 것을 주십니다.
이게 축복입니다.
축복은 감사했을 때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감사하고 계십니까?
내게 주신 오늘 하루,
나의 가족들,
나의 직장, 학교, 일터,
이 모든 것들이 감사의 제목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주신 것을 주신 분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감사합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건 감사했다는 거죠.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형님의 반역 가운데서도
솔로몬을 지켜주셨어요.
그리고 안정적으로 왕권을 이어가되었으니
당연히 감사했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
그러자 솔로몬이 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그 사이에 어떤 말이 있었는지 아세요?
열왕기상 3:6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먼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윗 왕의 아들인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심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뭐주꼬?” 했는데
그는 먼저 뭐했어요? 감사했어요.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열왕기상 3:12,13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받은 것을 받았다고 이야기 했는데,
하나님 눈에 두드러지지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부와 영광을 주신다고 했어요.
받은 걸 받았다고 했는데
구하지 않은 복을 내리셨어요.
큰 아이가 5살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큰 아들이 제 품에 안겼다가
얼마 후 아내에게 갔습니다.
둘째 아들도 아내랑 붙어있었습니다.
잠자리가 넓어서 좋긴 한데 외로웠어요.
그래서 제가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서
이렇게 말했어요.
"아빠는 혼자라서 외로워. 딸이 있어야겠어."
그랬더니 큰 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진우가 아빠 옆에 있으니까 불평하지마.”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묻는 거예요.
“아빠, 불평이 뭔지 알아요?”
“뭔데?”
“불평은 되게 큰 거에요.
큰 잘못이에요.”
이 이야기를 듣고 한 편으로 웃기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불평은 큰 잘못이죠.
아들을 옆에 두고 불평하는 모습이
큰 잘못이듯이,
하나님을 곁에 두고 불평불만으로 가득찼던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걸 알게 해주시려고
이렇게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불평은 쓰레기와 같습니다.
쓰레기 위에 쓰레기가 쌓이듯이
불평하면 또 다른 불평거리가 생깁니다.
그러면 그 위에 파리가 꼬이기 시작하죠.
반면 감사는 꽃과 같습니다.
아름다운 향을 내기 때문에
꿀벌들이 모여듭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면
기쁜 소식들이 더 몰려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감사는 우리를 두드러지게 합니다.
그래서 예비하신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시편 말씀을 함께 읽어볼까요?
시편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여러분 삶은 지금 쓰레기장입니까?
아니면 꽃밭입니까?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있을 때
우리는 향기로운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눈에 두드러집니다.
그러면 그 뒤에는
또 다른 축복의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우리 오늘 본문 18-19절을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17:18, 19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감사했던 나병환자는 이방인이었지만
구원의 은혜를 받습니다.
이게 진짜 축복이죠.
겉으로 보이는 나병이 나은 것도 기쁜 일입니다.
사업을 했는데 성공해요.
아이들이 좋은 대학과 회사에 붙어요.
불치병이 나아요.
다 좋아요.
그런데 영혼의 구원보다 가치있는 게 있습니까?
우리의 소원은 오직 천국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신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주님은 그런 자를 주목하고
천국 소망을 더하여 주십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끔 힘들 때가 있습니다.
너무 피곤한데 아이들이 놀아달라고 하면 그렇죠.
잠깐 놀아주면 아이가 말합니다.
“더 놀아주세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될 때가 많아요.
그러던 중 ‘하준파파’란 사람의 간증을 듣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아내와 함께 유튜버와 사업을 하며
승승장구 중입니다.
또한 다둥이 부부로도 유명해요.
이 중에 둘째 아들이 황이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생후 5개월 무렵 아이가
갑자기 토를 하는 겁니다.
처음엔 아빠로서 당연히 잘 달래주고 했답니다.
그런데 몸이 피곤하고
애가 계속 토하니까
나중엔 짜증이 나더랍니다.
옷을 입히면 토하고,
씻기고 새로 입히면 또 토를 했어요.
결국 너무 힘들어서 손수건을
집어 던졌데요.
그러다 아이가 숨을 안 쉬는 겁니다.
급성 심장마비가 왔고
곧바로 하늘나라에 갔어요.
그렇게 장례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보니
그날의 정신없이 떠났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더래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장난감과
아이가 입고 토했던 옷가지,
그리고 한쪽 벽에 붙어있는
토를 닦고 던져둔 손수건을 보았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고 해요.
아이의 마지막을 그렇게 보낸 게 후회되었겠죠.
한참 울고 기도하다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게 이거랍니다.
‘아이가 집을 어지럽히고,
옷을 더럽히는 것은 위장된 축복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남긴
흔적인 거죠.
이것들이 있기에
우리가 그 사랑을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방송을 보며 아이들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오늘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당연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에요.
심지어 나를 힘들게 하는 것도
위장된 축복인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작은 것이라도
그 자체만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신 더 큰 은혜를 볼 수 있어요.
이게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의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말씀을 맺을 게요.
오늘 우리는 나병 환자 10명 모두
깨끗함을 받았다는 이야길 들었어요.
그런데 감사하러 돌아온 자는
사마리아인 한 명뿐이었어요.
예수님은 왜 굳이 ‘이방인’이란 단어를 쓰시며
이 사람을 칭찬하셨을까요?
당시 유대백성들의 굳고 교만한 마음을
꼬집기 위함이셨어요.
종교 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는
감사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던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신 겁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교회는 다니지만 감사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하준파파의 말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남긴 흔적 때문에
그 사랑을 경험하고 살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작은 것에 감사하며 영광 돌릴 때
주님은 더 큰 것을 허락하십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삶을 살아감으로
복된 인생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