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박영보 | 날짜 : 09-10-11 22:43 조회 : 1483 |
| | | 雪 女 박영보
지금 내가 마누라에게 시샘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몇 년 동안 차고에 쌓아두었던 잡동사니들을 치우기 시작한지 몇 주째가 된다. 야드 세일이라도 할까 싶어서 이다. 매일 이 일에만 매달릴 수가 없어 주말이나 돼야 시간을 낼 수 있으니 아직도 여러 날이 더 걸려야 될 것 같다. 천장을 올려다 보니 난간에 한 켤레씩 노끈으로 묶여 걸려있는 네 세트의 스키 장비가 눈에 뜨인다. 선반에는 플라스틱 백으로 덮어놓은 부츠도 가지런하다. 온 천지가 순백으로 뒤덮인 슬로프가 떠오른다.
‘지가 감히 누구를 앞질러?’ 두 개의 폴을 눈 더미 위에 꽂아놓고 서서 쉬고 있는 나를 옆 눈으로 바라다보며 내닫는다. 씨이~ 웃고 지나치는 마누라가 얄밉다. 그게 무슨 웃음일까. 하루 하루가 아니라 시간 시간마다 향상되어가는 실력을 뽐내고 싶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빨리 자기를 따라오라는 신호였는지도 모르겠다.
‘기집애, 올챙이적 생각은 않고~.” 우리 부부는 우리 둘만 나누는 대화 중에 종종 중고등학교의 친한 친구들끼리나 어울리는 단어를 쓰는 경우가 있다. 나의 ‘기집애’ 라는 말에는 당장 “시애끼(새끼가 아니라), 까불고 있어” 라는 응수가 따르기 마련이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이런 말이 툭툭 튀어나오려고 해 아차 싶을 때도 있다. 장난이지만 습관화 되는 것 같아 조심스러워지기도 한다. 나이 육십을 넘긴지도 한참 된 사람들의 대화가 흉하게 들릴 수도 있을 터이니 말이다.
아내가 스키를 시작한 것은 나보다 한 이년쯤 후부터였다. 자기는 운동 신경도 무디고 별 관심도 없다며 “자기나 실컷 즐겨봐.”만을 반복해 오던 터였다. “하루 반나절만 연습하면 오후부터는 혼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며 꼬드겼다. ‘스키가 아니더라도 눈 구경만으로도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기에 충분하다’며 꼬셔대는데도 한 해 겨울을 보낸 것 같다.
나 또한 초보자인 주제에 몇 십 달러면 되는 수강료를 절약하자는 구실로 내가 직접 가르치기로 했다. 내가 처음 스키장에 갔을 때 스키클래스에서 배운 순서와 방법대로만 반복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스텝을 옮기는 것, 터닝, 다치지 않고 넘어지는 법과 다시 일어나 계속 탈 수 있는 요령만 익혀도 초보자 코스에서는 충분히 탈수도 있다. 이런 연습을 할 때 싸우는 일도 잦았다. 35년 전 아내가 운전면허 시험을 위한 실기연습을 할 때도 운전학원을 가지 않고 이런 식이었다. 잔소리가 심하다며 “빨리 가서 혼자 실컷 즐겨. 나 혼자 할 테니 내 걱정 말고 없어져버려.”로 나와의 연습에서는 서로 등을 돌려야 했다. 그러고 난지 두어 시간쯤 지나서였을까. 리프트에서 내려 막 하강을 하려는 참이었다.
‘어, 저 여편네가~,’ 뒤따라 오는 리프트에 양 손으로 두 개의 폴을 잡고 앉아 있는 게 아닌가. 홧김에 연습에 가속을 붙인 것일까. ‘넘어 저도 좋아, 씨이~’하며 이를 악문 것이었을까. 난생 처음 리프트를 탄 그녀가 어떻게 착지를 하게 될 지가 걱정이었다. 혹시 리프트에서 내릴 때 실족이라도 하면 부축이라도 해줘야겠다 싶어 착지에서 가까운 위치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엉거주춤 기우뚱거렸지만 넘어지지 않고 잘 내려 터닝을 하며 돌아섰다.
“나한테 본때를 보이려는 거였어? 결심이 대단하네. 자기 입으로 둔자바리 라던 당신이 한두 시간 만에 혼자서 리프트까지 타고 내리다니~.” 라며 웃으면 “시끄러워 씨이~” 이다. “더러워서 기를 쓰고 혼자 연습했다. 왜” 라며 해해거리던 모습. 이렇게 시작된 그녀의 스키는 일년, 이년이 지난 지금 나를 앞지르고 있는 것이다. 재미도 붙인 것 같았다. 그녀에게 설녀(雪女)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당시에 아내는 병원에서 밤 근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므로 적어도 등 하교 시간에는 집에 머물러 있어야겠다며 자청해서 밤 번으로 바꾼 것이다. 집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는 못할지언정 잠시라도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도 중요하다며 내린 결정이었다. 밤 열 한시에 시작하면 아침 일곱 시에 끝나 집에 오면 여덟 시가 된다. 토요일 아침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빅베어나 마운틴 하이 같은 로칼 마운틴에 당일치기 스키를 나설라치면 금요일 밤에 일을 하고서도 토요일 아침에 퇴근하자마자 거침없이 따라 나설 정도였다.
긴 슬로프에서는 중간에 한번쯤 쉬어야 하는 나에 비하면 이 사람은 한번 출발을 했다 하면 이미 내려와 어느새 다음 리프트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보다 체력이 앞서는 것인지 리프트에 한번이라도 더 오르겠다는 욕심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이 탓일까. 체력이나 정신력의 한계점에 다다른 것일까. 마지막 산에 오른 것이 십 년도 훨씬 더 된 것 같다. 아내에게서도 ‘산에 한번 가보자’는 말을 들어본 지도 오래다. 천장에 매달려있는 스키세트가 흉물스럽다. 바라다 보기에 민망스럽기도 하고 무언가 생각을 하게 된다. 언제 또다시 저것들을 들고 산을 오르게 될지~. 야드 세일에 내 놓으려다가 도로 올려놓기를 몇 번째. 아직도 무슨 미련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일까. 작은 아이가 네 살 반이 되면서부터 시작된 스키가족. 아이들은 이제 스키 대신 스노우 보드에 빠져 있으니 가족끼리의 스키여행은 종을 친지도 오래되었다. 스키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펼쳐왔던 자잘한 꿈들도 이제 하나 둘 접어둘 준비를 해야 할 때가 돼가고 있는 것은 아닐지.
시월에 들어서니 콜로라도엔 벌써 스키장이 개장됐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어 마음을 들뜨게 하고는 있지만~. |
| 정진철 | 09-10-11 23:43 | | 참 재미있게 사시는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기집애~ 시애끼 ㅎㅎㅎㅎ 다정한 부부애도 느껴집니다만 한편으로는 무지 부럽습니다. 그렇게 못해 봤으니까요 언젠가 발맛사지 한번 한거 가지고 대단하게 생각한 사람이니 얼마나 멋없이 살았는지 다시한번 반성하게 되는군요. 그렇다고 이제와서 갑자기 고치면 그런것 있지 않습니까 ~ 갑자기 변하면 하직한다느말~ ㅎㅎㅎ 그러니 그냥 그럭 저럭 살아야 하는데 아무튼 다시한번 부럽습니다 | |
| | 박영보 | 09-10-12 02:44 | | 가끔 "언년아~'라고 부르면 '언년이'가 맞는 이름이기나 한것처럼 "왜-"하고 돌아다 봅니다. 자식들이나 며느리 앞에서도 기집애 또는 지지배, 언년이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올 정도가 되니 식구들 중에는 아무도 놀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밖에 나가거나 집에 방문해 와 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런 말들이 튀어나올라고 하여 자중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것도 양념을 치듯 가끔 써 먹어야 제 맛이 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양순태 | 09-10-12 03:31 | | 10대에 주로 쓰는 애칭으로 재미있게 사시는 선생님의 일상이 짓궂다 싶으면서도 젊은 기분의 숨겨진 비법을 발견한 느낌입니다. 바라만 봐도 무서워 근방에도 못가는 스키는 모르겠지만 운전까지도 직접 지도하신 걸 보면 자상한 남편 상이심을 엿보게 됩니다. 부부가 운전을 지도하고 배우는 입장에서 감정이 격해져 이혼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는 걸 보면 말입니다. 두 분의 아기자기한 노년이 그려지는 글 감상에 함께 행복감을 느낍니다. | |
| | 박영보 | 09-10-12 10:10 | | 이혼이라는 말씀을 들으니 아찔해 집니다. 스키를 가르킨답시고 잔소리하다가 해고(?)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군요. 잘못하면 영원히 퇴출 당할뻔 했군요. 앞으로 더더욱 조심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일만성철용 | 09-10-12 07:29 | | 여유로운 노후와 해외 생활의 모습으로 신선한 아침을 엽니다. 제가 제일 부러워 하는 여성은 건강한 여성인데 부인께서 그런 분이시군요. 부럽습니다. 제 아내는 몸이 약하니까 '잔소리+짜증'이어서 더욱 그렇군요. 어제는 홀로 영종도의 세 섬과 산을 다녀왔습니다. 그 모습으로 인사를 드리지요. | |
| | 박영보 | 09-10-12 10:39 | | 일만 선생님, 생각이 나면 나설 수도 있는 섬과 산이 가까이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이곳에도 그런 곳이 없지는 않지만 한번 나서려면 거리나 시간상으로 미리부터 계획을 세워야 하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설령 계획을 세워 나선다 해도 우리 나라의 그런 곳에 비하면 아기자기한 아름다움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뉴스를 통해 가을의 색깔로 물들어가고 있는 고국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고향이 더더욱 그리워 집니다. 사모님의 건강을 빕니다. | |
| | 김창식 | 09-10-12 12:25 | | 정선생님, 내외분이 티격태격하는 것이 정답기 그지 없군요.^^ | |
| | 박영보 | 14-08-05 07:36 | | 하루에도 셀 수 없을만큼이랍니다. 그런게 없으면 사는 것 같지도 않다면 <그 집안 꼴 뻔하구먼>이라는 실제 모습이 들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나서 조심스러워집니다. 감사합니다. | |
| | 임재문 | 09-10-12 22:18 | | 부부간에 저도 허물없이 그렇게 살고 싶고 현재도 그렇게 노력하며 살고 있답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할때면 으례 먼저 튀어나오는말 바보 ! 그러면 아내가 하는말 내가 바보니 당신따라살지 바보 아니면 벌써 뒤돌아섰을걸요 하고 웃지요. 더욱 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 |
| | 박영보 | 14-08-05 07:38 | | <나이가 들면 애가 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작은 일에도 삐지기도 하고 해해거리기도 하니 진지한 모습을 찾기가 어려워 집니다. 삐지는 일, 해해거리는 일들의 조화로 그나마의 형평이 이어져 가는가 봅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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