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v.daum.net/v/20111028204334989
[책과 삶]사랑..그 괴물 같은 감정에 대하여
▲몬스터 멜랑콜리아…권혁웅 | 민음사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저자 권혁웅씨(44)는 이 책을 가리켜 "롤랑 바르트가 쓴 < 사랑의 단상 > 의 몬스터 버전"이라고 말한다. 그가 "사랑의 담론에 관한 분석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꼽는 < 사랑의 단상 > 은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바르트가 괴테의 소설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을 바탕으로 사랑에 얽힌 복잡한 상징과 기호, 언술을 분석한 내용이다.
" < 사랑의 단상 > 보다 섬세할 자신은 없지만, 그보다 조금 더 흥미로울 수는 있겠다"는 저자의 말대로 동서고금의 신화와 전설, 철학·종교·문학을 오가면서 사랑과 관련된 괴물 이야기를 펼쳐놓은 이 책은 무척 흥미진진하다.
저자는 사랑과 관련된 16개의 열쇠말로 각 장을 구성한 다음, 거기에 해당하는 다양한 담론을 소개한다. 이름·약속·망각·짝사랑·유혹·질투·우연/필연·자기애·첫사랑·고백·기다림·무관심·소문·외설·외로움·비밀 등등. 모두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짝사랑하고 그 사랑이 성공하거나 실패한 뒤 점차 사랑의 감정이 변질돼 가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공교롭게도 그 단어들은 상상 속의 동물, 즉 괴물과 연결된다.
사랑이 괴물과 친연성을 갖는 이유는 "모든 괴물은 순수한 멜랑콜리아(우울)를 구현"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 용어로 우울은 실체가 아닌 감정적인 대상을 상실한 상태다. 사랑의 '열병'은 어느 순간이나 충만이 아닌, 박탈의 형태로 온다는 점에서 우울에 가깝다. 그리고 "몬스터는 외부로부터 들어온 감각 인상의 잔영이 형성한, 부재하는 기억인 시뮬라크르나 판타스마타에 의해 인간 내부에 형상화된 어두운 내면의 힘"이란 점에서 멜랑콜리아를 구현한다.
저자는 '한 몸이 되다' '반쪽이 되다' '가슴에 구멍이 나다'와 같은 사랑의 은유가 신화에서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국 신화에서 어떤 오누이가 서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에 분노한 천제(天帝)가 이들을 깊은 산으로 쫓아낸 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오누이는 서로를 끌어안고 죽었다. 신조(神鳥) 한 마리가 이들에게 불사의 풀을 물어다주자 7년 만에 부활했는데 몸이 한데 붙은 모습으로 태어났다. 그야말로 '한 몸'이 된 것이다. 또 < 산해경 > 에 나오는 일비민이란 족속은 온몸이 반쪽으로 둘이 합쳐야 한 사람이 되며, 관흉국이란 나라의 사람들은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귀한 사람을 모셔갈 때 긴 장대를 가슴에 꿰어 데려간다. 이처럼 현실의 은유·환유·제유는 신화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요한 동력이 된다. 비유의 언어로밖에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온갖 감정이 괴물 이야기로 태어나는 건 자연스럽다.
이런 논리를 이해한다면, 열쇠말을 따라가는 건 훨씬 쉽다. 사랑의 시작에는 상대방의 '이름'이 있다. 김춘수 시인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한 것처럼, 이름은 상대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다. 여기서 등장하는 괴물은 < 오딧세이 > 에 나오는 외눈박이 퀴클롭스다. 트로이 전쟁 후 귀향길에 오른 오디세우스는 퀴클롭스의 동굴에 갇힌 뒤 이름을 물어보는 괴물에게 '아무도 아닌 자'라고 대답한다. 퀴클롭스가 잠들자 오디세우스는 불에 달군 말뚝을 괴물의 눈에 박아넣는데, 고통에 몸부림치는 괴물은 누가 그랬냐고 물어보는 동료들에게 '아무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아무도 아닌 자'를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 없다.
'약속'을 상징하는 괴물은 그리스와 이집트의 문장(紋章)에 흔히 등장하는 우로보로스다. 제 꼬리를 입에 문 뱀 모양의 이 괴물은 남녀 양성의 완전체다. 뱀의 몸은 남성의 페니스와 같고 먹이를 삼킬 때 뱀의 입은 여성의 질과 같은데 두 가지가 합체됐기 때문이다. 우로보로스는 영원과 불멸을 상징하는 동물이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반지이기도 하다.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보면, 냄새와 연기처럼 묘연한 사랑의 실체가 좀 더 확연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나아가 인간과 괴물의 사이가 그리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소설가 카프카는 누군가 자신의 작품 < 변신 > 을 베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시대 탓이죠. 우리 둘은 시대를 묘사했어요. 우리에게는 동물이 인간보다 가깝죠." 때로는 동물을 통해 인간을 보는 게 더욱 정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