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익는 냄새 / 안도현
용택이형네 식구하고 우리 식구하고
감자를 먹으려고
젓가락을 하나씩 손에 들고 둥그렇게 둘러앉아
뜨끈뜨끈한 김이 나는 감자를 한 양푼 앞에 놓고 보니
문득 감자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감자는 먼저,
땅속에서 어떻게든 싹을 틔우려고 무진장 애를 썼을 것인데
그중에 성질이 급한 놈은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고
어떤 놈은 통통 튀기도 하면서
이놈의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둡냐고
답답해서 못 살겠다고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겠지
그러다가 어느 날 제 몸 바깥으로 솜털 같은 것이 빼죽이 나왔을 테고
깜짝 놀랐겠지, 무슨 큰 병이나 난 게 아닐까 하고
그것이 제가 틔운 싹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고 그때부터는
뭐랄까, 혁명에 대한 예감이랄까
죽자 사자 싹을 위로 치켜올렸겠지
아픈 줄도 모르고 땅 거죽을 머리로 들이받았을 거야
연초록 잎사귀를 땅 위로 펼칠 때까지 말이야
감자는 땅속 줄기가 몸이므로
내 상상력은 여기서
연초록 잎사귀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감자도 귀해 실컷 못 먹던 시절이 있었다고
용택이형은 아, 참 맛나네, 맛나네 하면서 먹고
형수는 열무김치를 척 얹어서 먹어도 맛있는데, 하고
민세와 민석이는 찍어 먹을 설탕이 모자란다고
마치 감자를 한 입 입에 넣은 것처럼
볼따구니가 퉁퉁 부어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고
뜬금없이 민해는 고구마가 먹고 싶다, 하고
아내가 설탕 가지러 주방 쪽으로 가는 사이에
나는 또 감자의 성장기를 상상해보는 것이었다
그래, 연초록 잎사귀를 땅 위로 밀어올린 뒤부터가 문제야
땅속에서는 실뿌리가 수없이 뻗어나와
흙을 움켜잡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 윗줄기에 처음에는 유경이 젖꼭지처럼 조그마한 물집 같은 게 생겼겠지
불에 덴 뒤에 부풀어오르는 것
물집,
물집이라는 말은 말은 아프다
흉터가 앉을 자리이기 때문이지
세상의 허벅지에 누군가 火印을 찍은 자국들,
감자알들,
제각기 하나의 둥글둥글한 세계,
언젠가 썩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자는 점점 몸이 부풀어갔을 거야
날이 갈수록 주렁주렁 매달리는 기쁨과 슬픔을
반반씩 키우며 속이 꽉 찬 감자가 되어갈 때
감자꽃은 하얗게 피었을 테고
어라, 감자꽃이 피었네,하며 나는 그곳을 지나쳤겠지
도현이 너는 감자도 안 먹고 무슨 생각 하냐 또 시 쓰냐
용택이형이 던지는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나는 감자에 대해 시를 한 편 써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안도현 시집 <바닷가 우체국> 1999
[출처] 안도현 시인 10|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