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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나간 이새의 아들들
삼상 17:12-19
12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가 많아 늙은 사람으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13 그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갔으니 싸움에 나간 세 아들의 이름은 장자 엘리압이요 그 다음은 아비나답이요 셋째는 삼마며
14 다윗은 막내라 장성한 세 사람은 사울을 따랐고
15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칠 때에
16 그 블레셋 사람이 사십 일을 조석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었더라
17 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지금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영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18 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19 그 때에 사울과 그들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중이더라
삼상 17:12-19 / [겁이 없는 다윗] 당시 유다 베들레헴의 변두리 마을 에브랏에는 이새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너무 늙어서 군대에도 나갈 수 없었다. 그는 아들 여덟을 두었는데, 그 막내 아들이 바로 다윗이었다. 13) 큰 아들들은 이미 셋이나 사울을 따라 싸움터에 나가 있었는데, 맏아들 엘리압과 둘째 아들 아비나답과 셋째 아들 삼마였다. 14) 이렇게 위로 큰형들 셋이 사울의 부하가 되어 싸움터에 나가 있는 동안에 막내 아들인 다윗은 15) 자주 왕궁에서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켰다. 16) 그런데 골리앗은 그동안에도 아침 저녁으로 이스라엘 진영에 나타나 결투를 청해왔고 그런 지가 40일이나 지났다. 17) 이때 이새가 다윗에게 심부름을 시키게 되었다. `네 형들에게 양식을 가져다 줄 때가 되었으니, 이번에는 네가 직접 최전방으로 형들을 찾아가 보아라. 이 볶은 곡식 ㄱ) 한 에바와 떡 열덩이를 등에 메고 진지로 뛰어가서 네 형들에게 주어라. (ㄱ. 36리터) 18) 그리고 이 ㄴ) 건락 열 덩이는 네 형들이 있는 진지의 부대장에게 선사하고, 네 형들이 무사하다는 증거물을 받아오너라! (ㄴ. 치즈) 19) 네 형들은 지금 사울과 이스라엘의 모든 군인이 집결해 있는 느티나무 골짜기에서 블레셋 족속과 싸우고 있다.'
이새는 베들레헴의 옛 명칭인 유다 에브랏 사람입니다(창 48:7). 블레셋의 침공에 장성한 세 명의 아들을 전장에 보냈습니다.
에브랏 사람 이새(12-13)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군대에 나갈 자격과 의무가 있는 자는 이십 세 이상의 남자였습니다(민 1:3). 이새는 나이가 많아 전장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그의 여덟 아들 중 순서대로 엘리압, 암미나답, 삼마를 전장에 보냅니다. 그리고 이새가 에브랏 사람(Ephrathite)이라는 것은 이새의 집안이 베들레헴 본토인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베들레헴은 선지자 미가를 통해 메시아가 태어날 장소로 예언된 곳입니다(미 5:2).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등장(14-16) 다윗이 전장에 군인으로 나가지 않은 것은 그의 나이가 이십 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울에게로 왕래하였기에 전장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과 사울 왕과의 관계는 악령에게 고통당하는 사울에게 다윗이 수금을 타주는 일로 맺어졌습니다(삼상 16:19, 22). 다윗은 사울의 병이 호전되면 다시 양을 치는 자신의 일을 위하여 다시 베들레헴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블레셋 사람, 즉 골리앗이 싸움은 하지않고 40일을 아침, 저녁으로 이스라엘 군대 앞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투가 소강상태에 머물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전장의 소식이 궁금한 이새(17-19) 블레셋 선봉장 골리앗의 계속되는 위협으로 이스라엘은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블레셋과 40일 이상 지속되는 대치로 인하여 군대의 식량이 부족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새는 볶은 곡식과 떡을 준비해서 전장에 나간 형들에게 주고, 치즈는 천부장에게 전달하여 형들의 안부를 알아오도록 합니다. 여기서 볶은 곡식과 떡은 제대로 먹지 못해 곤고한 자들에게 적절한 음식입니다(삼상 25:18; 삼하 17:28; 룻 2:14). 치즈는 건조한 우유 덩어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안부를 살피라는 것은 전장에 있는 아들들의 생존과 건강의 관한 상태를 알아보는 것이며, 증표를 가져오라는 것은 다윗이 형들을 제대로 만나서 안부와 예물이 제대로 살피고 전달되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적 용 : 전장에 자녀를 보낸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국가에서 정한 병역의무는 국민이면 누구나 감당해야 할 본분이며 책임입니다. 나와 우리의 자녀는 어떻습니까?
고역스런 상황은 40일이 아니라 4달, 4달이 아니라 4년, 4년이 아니라 40년까지도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고통을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할 때입니다. 조석으로 찾아오는 그 고통스런 상황. 우리도 타개할 수 있습니다.
호크마 주석
=====17:12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 '에브랏'(Ephrath)은 베들레헴의 고대 명칭으로서(창 48:7), 족장 야곱의 아내 라헬이 산고로 죽은 곳이며(창 35:16-19), 무엇보다도 후일 선지자 미가의 입을 통해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로 예언된 곳이다(미 5:2). 한편 본서 저자는 여기서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스불론 지파의 베들레헴과 구별했고(수 19:15;삿 12:8), 또한 '에브랏 사람'(Ephrathite)이라고 밝혀줌으로써 이새의 집안이 베들레헴 본토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결국 유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의 고향으로서, 그리고 장차 메시야 그리스도가 태어날 곳으로서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이새는...나이 많아 늙은 자 - '늙은 자'(* , 자켄)는 성경에서 보통 '장로', '노인'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한편 '나이 많아'는 '나이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앞섰다'란 의미이다. 결국 이같은 언급은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이 참전하고 있던 블레셋과의 전쟁에 이새가 참전치 아니했던 이유를 제시해 준다(Fay). 한편 스미드(R. Payne Smith) 박사는 당시 이새에게는 장성한 세 아들이 있었고, 도합 8명의 자녀가 있었던 사실에 근거하여 이새의 나이를 최소한 60세 이상으로 보았다. 여덟 아들이 있는 중 - 16:10, 11에서도 이새의 아들은 여기서처럼 여덟 명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역대상 2:13-15에서는 일곱 명으로 나와 있다. 이같은 차이를 규명해 보려는 시도로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즉 (1) 이새의 아들은 원래여덟 명이었으나 한 명은 죽었다고 보는 견해(Keil, Smith), (2) 이새의 아들은 원래 일곱 명이었으나 16:10에서 다윗을 제외하고도 일곱 명이라고 한 까닭은 많은 다른 아들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지 못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Klein) 등이다.
=====17:13
장성한 세 아들은...싸움에 나갔으니 -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군대에 나갈 자격과 의무가 있는 자는 이십 세 이상의 남자였다(민 1:3). 엘리압...아비나답...삼마 - 16:6-9 주석부분 참조.
=====17:14
다윗은 말째라 -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형들과는 달리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를 제시해 준다. 즉 이는 당시 다윗의 나이가 20세 미만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17:15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 여기서 '왕래하며'(* , 훌레크 와사브)는 다윗이 사울의 궁전과 베들레헴 집을 반복적으로 계속 오갔음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히브리 원문은 다만 '갔다가~그리고 (사울에게로부터) 왔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다윗은 수금을 타기 위해사울에게 갔다가(16:19, 22), 그의 병이 호전되자 양을 치는 자신의 일을 위하여 다시 베들레헴의 자기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베들레헴에서...양을 칠 때에 - 이것은 오히려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기 위하여'(to feed...sheep at Bethlehem, KJV)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즉 이것은 다윗이 수금을 타던일을 그만 두고, 사울의 곁을 떠났던 한 가지 목적을 언급하는 어구인 것이다.
=====17:16
그 블레셋 사람 - 이것은 단수로 표기되었다는 점에서, 블레셋 군대가 아닌 '골리앗'(Goliath) 개인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사십일을...몸을 나타내었더라 - 이것은 블레셋과의 전투가 계속적으로 소강(小康)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같은 상태가 계속된 까닭은 (1) 이스라엘측에서 골리앗을 상대할 용사를 아직껏 내보내지 못했으며(11절) (2)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진(陳)이 자리잡고 있던 지형적 조건상 전면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3절 주석). 그러나 불레셋의 선봉장 골리앗의 계속 되는 위협으로 말미암아 전황(戰況)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여기 '사십 일'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예시해 주는 어구로 보아야 할 것이다(창 8:6;삿 13:1; Krinetzki). 즉 본서 저자는 여기서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이같이 시련과 위기의 수인 '사십 일'이라는 말을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다윗이 매우 필요 적절한 시기에 이새에의해블레셋과의 전투 장소에 보내졌음을 강력히 암시하려고 한 듯하다.
=====17:17,18
이새가 여기서 이같은 조치를 위한 이유는, 블레셋과의 사십 일 이상의 대치로 인하여(16절) 이스라엘 군대의 식량이 고갈되었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각 가정은 싸움에 징집된 자식들에게 일종의 병참 지원을 했던 것 같다. 볶은 곡식...떡...치스 - 성경에서 이것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곤고한 자들에게 적절한 음식으로 주로 언급되고 있다(25:18;삼하 17:28;룻 2:14). 특히 '볶은 곡식'과 '떡'은 서민들에의해 애호되던 음식이었다(Krinetzki).그리고'치스'(* , 할라브)는 문자적으로는 '우유'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건조한 우유덩어리'를 가리킨다. 한편 '한 에바'는 약 23l에 해당하는 구약 시대 고체량의 부피 단위이다(출 16:36). 안부를 살피고 - 이것은 건강 및 생존의 여부에 관한 '솰룸'(* , '평안')의 상태를 알아보라는 당부이다. 증표를 가져오라 - 이것은 (1) 다윗이 제대로 형들을 만나 형들의 안부를 살폈는지의 여부, (2) 예물이 전달됐는지의 여부, (3) 다윗에의해 이새에게 전따마될 형들에 관한 소식의 진위(眞僞) 여부를 증명할 어떤 '증거물'(token, RSV)을 뜻한다. 틀림없이 이것은 서신(書信)의 형태였을 것이다(F. R. Fay).
=====17:19
본절도 18절에 이어, 이새에 의해 다윗에게 전달됐던 내용이다. 엘라 골짜기 - 2절 주석 참조.
=====17:20,21
일찌기 일어나서 양을...맡기고 - 다윗의 순종과 부지런함, 그리고 책임감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아마도 저자는 여기서 사울의 왕권을 계승할 자로서의 다윗의 인품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 같다. 진영 - (* , 마갈라). 이것은 '둥글게 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동사 '아갈'(*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고대 수비 진지의 일반적 형태인 둥근 모양을 한 바리케이드를 가리킨다(Lange). 한편 칼빈(Calvin)은 이 바리케이드가 병거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병거의 장소'로 이해하였다(26:5, 7). 항오를 벌이고 - '항오(行伍)를 벌이다(* , 아라크)란 말은 '정렬하다', '배열하다'란 의미로서, 곧 전투 대형으로 군사를 적절히 배치하는 것을 가리킨다.
< 설 교 >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
삼상 17:12-19 / 김남수목사
제가 처음 뉴질랜드를 갈 때는 이것이 땅 끝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순복음 뉴욕교회와 김남수 목사님 소식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순복음뉴욕교회야 말로 조국을 떠나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좋은 본보기로, 또 소망으로 세워주신 귀한 제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실 그 일들, 크고 놀라운 일들을 기대해 봅니다.
얼마 전에 TV 다큐멘터리에서 딱따구리가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는 광경을 방영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딱따구리 어미는 새끼들에게 먹이를 잡아다 먹여 줍니다. 어미가 먹이를 물고 오면 서로 받아먹으려고 어린 새끼들이 노란 부리를 내밀고 경쟁하듯이 고개를 쳐들고 먹이를 받아먹습니다. 이제 어린 새끼들이 자라서 둥지를 떠날 때가 되었는데 새끼들이 도무지 둥지를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미가 새끼들에게 둥지 밖의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방법을 쓰는데, 먹이를 가지고 와서 늘 새끼들에게 주던 방식으로 주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새끼들을 불러냅니다. 그런데 새끼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둥지를 떠나는 일이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어미가 먹이를 물고 와서 아무리 새끼들을 유인해 내려고 해도 새끼들은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않습니다. 어미는 끝까지 인내하면서 새끼들이 나올 때를 기다립니다. 나중에 시간이 흐르니까 배고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고개를 내밀고 둥지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단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유인해 낸 다음 시간이 흐르고 나니까 어미가 다른 나무 가지 위에 앉아서 새끼들을 부릅니다. 한번 둥지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둥지 안으로 들어간 새끼들은 비록 둥지 밖에 나와 보기는 했지만 다른 가지까지 먹이를 받아먹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둥지를 떠나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있습니다. 두렵습니다. 그래서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눈치만 보면서 갈까 말까 망설이는데 무려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일주일 동안을 어미새가 끈기있게 다른 가지에서 먹이를 물고 기다립니다. 일주일쯤 지나고 나니까 배가 고파서 견딜 수 없게 된 새끼들이 할 수 없이 날개짓을 해서 어미에게 먹이를 받아먹으러 갑니다. 그렇게 해서 끝내 어미는 새끼를 둥지 밖으로 불러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어미의 먹이를 받아먹고 날개짓을 시작한 새끼들은 드디어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태어나서 자라온 그 둥지가 이 세상의 전부인 줄로 알고 있었던 새끼들이었습니다. 그곳을 떠나면 큰 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할 수 없어서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어서 날개짓을 하면서 한번 날아올라본 새끼들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끝내는 그 다른 세상을 향해서 힘차게 날개짓을 하면서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이와 같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늘 전부인 듯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방법이 있지요. 이 땅을 떠나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방법을 떠나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이 땅을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을 얻어야 풍요롭게 잘 살 수 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 위에서 많은 걸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지,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배움을 통해서 잘 알고 있지요.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면 우리는 마치 우리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환경이 닥쳐오고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일들이 닥쳐올 때마다 우리는 많이 당황하게 됩니다. 혼란스러워하게 되지요.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들을 경험해야합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일들에 마주치게 될 때,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법을 떠나서,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이러한 일들을 경험하게 되면, 내 삶 가운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심히 두려워집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법을 고수해야 되고, 지금까지 우리가 이 땅에 살아오면서 우리가 추구해왔던, 그러한 방법으로만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만 우리에게 인식되어져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여러 가지 환경을 통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왔던 그 방법 이외에 또 다른 방법으로 이 땅을 살 수 있고, 또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환경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굶주리면서 어미가 예전에 먹이를 가져다주기를 기다리는 어린 새끼들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주시고, 우리에게 예전에 그렇게 해주셨던 것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안전하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한계 내에서, 그렇게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던 이 세상 밖으로 나와서, 우리가 살고 있던 그 방법 이외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방법, 세상 사람들이 추구해왔던 그 방법을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시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 크기의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서, 이 땅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을 할 때에, 이 땅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체험해보지 못했던, 우리가 알고 있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내시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환경들과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가지고, 우리들이 살고 있던 보금자리에서 우리를 불러내시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의 보금자리를 떠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아왔던 방법을 탈피하고,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경험과, 내가 배워서 알고 있었던 그런 모든 지식들을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지해서, 말씀에 순종해서 이 땅을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우리는 알게 됩니다. 때로 그것들은 우리를 심히 두렵게 합니다. 때로 그것들은 우리를 심히 혼돈스럽게 합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아니한 그 길을 우리가 걸을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마치 안개 속처럼 혼미한 우리의 앞날을 바라다보면서 우리는 심히 두려움을 느끼게 될 때가 있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예비하고 계신 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많을 것들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땅의 많은 것을 예비하고 이루어가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이루어가고 계신 그 세상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가운데 말씀을 보면 바로 이처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인 되셔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그 세상을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이지요. 다윗이라는 사람은 참 특이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믿음의 주인공들 중에서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셨던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인물이며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조상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참 특별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그도 우리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던 평범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평범 이하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뿐 아니라 그 이웃들과 그 형제자매나 그 부모까지도 별로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생애 가운데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런 인물이었지요.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으시기를 원하셔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이새의 아들 중에 한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집을 찾았습니다. 이새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었지요. 첫 번째 장남 엘리압이 등장을 합니다. 체격이 우람하고 잘생기고 정말 일국의 왕다운 풍모를 지녔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인물이구나, 하나님께서 택하실만한 인물이구나, 사무엘 선지자는 그렇게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여러분 사무엘 선지자가 그에게 기름 부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셋째, 넷째 계속해서 아들들이 지나가는데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고개짓을 하시지요. 마침내 모든 아들을 다 만나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당황했지요. 이새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아들들이 이사람들이 전부입니까 그랬더니 이새가 아니요, 아직 말째가 하나 남았는데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합니다. 여러분, 말째의 말의 의미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물론 마지막 막내아들이란 의미도 있지만 말째의 말에 원어적인 의미 속에는 별로 그렇게 대수롭지않은 인물, 즉 중요하지 않은 인물, 그렇게 별로 가치가 있지 않은 인물,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명해서 불러주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다윗에게 다윗이라는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다른 사람들이 기억조차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아무도 기대하고 있지 않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말째에 불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시고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지요. 여러분 다윗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에 보니까 다윗의 이야기가 등장을 합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등장을 하지요. 다윗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저는 마음 가운데 아주 특별한 은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역사하시는 기적의 장면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냥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일상생활에서 평범하게 체험하는 그런 평범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들을 뿐입니다. 기적의 현장이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가 늘 체험하는 이야기의 현장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역사하시는 장면을 우리는 목격하게 됩니다. 우리가 삶에서 체험하는 평범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 우리의 삶속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를 우리는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서 듣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도 그런 많은 이야기들 중에 하나입니다.
어느 날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쳐들어왔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쳐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7장에서부터 이 이야기가 시작이 되는데 에베스담밈이라는 곳에 쳐들어와서 이제 진을 쳤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쟁터에서 상대방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전술적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곳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다 진을 쳤겠지요. 블레셋 사람들이 진을 쳤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도 군대를 모아서 마주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마주볼 수 있는 한쪽 언덕에다 진을 치고 마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옛날 전쟁의 형태는 어떻습니까? 현대전하고 많이 다르지요. 양쪽 중에서 대표가 되는 장수들이 한 사람씩 등장을 합니다. 그래서 그 장수들이 먼저 자웅을 결한 다음에 거기서 승부가 나게 되면 진 쪽은 싸워볼 것도 없습니다. 자기편 대장이 지면 무조건 등을 돌리고 도망가지요. 이긴 쪽에서는 신나게 도륙하면서 쫓아가면 전쟁을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등장하는 대표선수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래서 관례대로 블레셋에서 대표가 되는 장수가 한 사람 등장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골리앗이라는 유명한 장수지요. 여러분 성경에서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도 그들이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 중에 하나가 아마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상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우리가 비유할 때 골리앗과 다윗의 비유를 하지요. 오늘 그 이야기가 여기 펼쳐지고 있지요. 블레셋 사람 중에 대표가 되는 장수가 한 사람 나왔습니다. 그가 누군가 하니 바로 골리앗이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거기 블레셋 대표로 등장했던 골리앗이라는 사람의 신장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골리앗이라는 사람의 신장이 여섯 규빗 한 뼘이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여섯 규빗이라 했는데, 규빗이라는 것은 보통 팔꿈치에서부터 손끝까지의 크기를 이야기 하지요. 팔 끝에서부터 손끝까지, 보통 사람들에 따라서 약간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약 45센티정도 됩니다. 한 뼘은 약 어느 정도 될까요? 약 20센티 정도 잡으면 되겠지요. 그렇게 하면 여섯 규빗 한 뼘이면 얼른 계산해 봐도 신장이 한 3미터정도 됩니다. 정확하게 2미터 90이지요. 한 3미터 가까이 되는데, 우리가 요즘도 찾아보기 어려운 엄청난 거인이지요. 거기에다 3미터 가까이 되는 이 거인이, 그 밑에 쭉 설명이 나오는데 60킬로에 가까운, 그러니까 보통 어른 한사람의 무게 가까이 되는 그런 갑옷을 입고 큰 창을 휘두르면서 나와서 싸우자고 싸움을 걸어옵니다. 그런데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고 하니 우리 길게 싸워볼 꺼 뭐있냐, 대표되는 사람들끼리 싸워가지고 내가 너희편 한테 지면 블레셋이 너희의 종이 되고, 너희가 우리한테 지면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종이 되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싸움을 걸어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소리소리 지르며 싸움을 거는데 아무도 그 골리앗 앞에 맞서 싸워줄 사람이 진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얼른 나와서 싸움거는 사람을 쳐다보니까 그 신장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누구든지 나가서 싸울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나가서 싸웠다가는 한칼에 생명을 잃어버릴 것 같아요. 사울왕도 체격이 보통이 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보통 어른들보다, 건장한 어른들보다도 머리하나가 더 있었다고 그랬으니까, 기골이 장대한 몸이었음에도 불과하고 골리앗을 보니까 나가서 싸울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나가서 대적을 못하지요. 골리앗을 기세가 더욱 당당해져서 날마다 나와서 싸움을 돋웁니다. 이렇게 해서 흘러간 세월이 40일이 흘렀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40일 동안 골리앗은 매일매일 나와서 싸우자고 소리소리 지르는데,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기적으로 오늘날까지 살아왔다는 그 자부심으로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골리앗 앞에 마주설 수 있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40일이지요. 날마다 40일 동안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 나와서 싸움을 걸어오는데도 주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마주설 수 있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어요. 40일간 기가 죽어서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지요. 다윗이 이때 20살도 안된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이새의 아들들 3명이 전쟁에 참전하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심부름을 보내지요. 막내 다윗에게 가서 형들이 잘 있나 안부를 잘 살펴보고 오라고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위문품을 줬지요. 볶은 곡식 한 헤바와 떡 열 덩이와 또 상관에게 갖다 줄 치즈 열 덩이를 싸서 보냈습니다. 곡식 자루를 둘러메고 전쟁터의 한복판으로 다윗이 등장합니다. 여러분들이 머릿속으로 이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쪽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멸하려고 블레셋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쪽에는 그 블레셋의 위협 앞에 꼼짝 못하고 숨죽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치고 있지요. 긴장이 흐르는 전쟁터입니다.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그곳이지요. 그런데 그곳에 어린소년 다윗이 위문품을 어깨에 둘러메고 등장을 합니다. 와보니까 이상한 상황이 벌어져 있거든요. 골리앗이 나와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싸우자고 그러는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풀이 죽어서 꼼짝 못하고 숨도 못 쉬고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주변사람들에게 물어보고 금방 상황 파악을 했습니다. 다윗이 보기엔 참 이상했지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내가 알기로 분명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우리 조상들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표적과 기적을 보여주셨고, 우리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놀라운 표적 가운데 이 땅을 살게 하셨으며,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은, 그것을 자랑하며 믿음 가운데 오늘까지 살아왔고, 이 땅에서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확신하며 오늘을 살아왔는데, 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 이 사람이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 이 사람이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아무도 저들 앞에 나가서 설 자가 없단 말인가, 그게 참 이상했지요. 다윗이 이야기 합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주변에서 깜짝 놀라는 사람, 비난하는 사람, 여러 가지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늘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람이고 은혜 가운데 살아왔다고, 그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해왔던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을 위협하는 골리앗 앞에 아무도 마주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린소년 다윗이 이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대표해서 나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여러 가지 반응이 나오지요. 나는 나가려니까 두려웠는데 나를 대신해서 누군가 나가겠다고 하니까 감사합니다, 나는 나가려니까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내가 가진 것을 다 잃어버릴지도 몰라 생각하면서 나가지 못했는데, 저 사람이 나가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나 한번 보자, 그러면서 뒤에서 그래그래 잘 생각했다, 네가 나가면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실 꺼야, 우리는 오늘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느냐 그렇게 격려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믿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수많은 말씀들을 들어왔습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 가운데 행하신 일들을 간증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이야기할 때마다, 야 좋겠다 하나님께서 내 생애 가운데에도 저렇게 일하실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저렇게 내 생에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 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이렇게 부러워하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 생애 가운데에서도 일하시는 그 흔적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중에 무언가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 세상으로 불러내려고 여러분들을 부르시지만, 그러나 막상 우리는 그 앞에 서면 그것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금방 느끼게 됩니다. 아, 저 앞에 서는 그 일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구나. 저 앞에 서면 잘못하면 우리의 생명을 잃을지 몰라. 지금까지 내가 얻었던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내가 이루었던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포기해야 될지도 몰라. 늘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 왔지만 막상 우리의 삶 앞에 그러한 일들이 닥쳐오면 그 앞에 마주서기를 두려워합니다. 마치 지금 골리앗의 위협 앞에 마주서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렇게 우리의 삶 앞에 그런 일들이 닥쳐올 때마다 우리는 주저하게되고 그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다윗은 어떤 모습입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앞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윗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많은 사나운 들짐승들을 만나보았습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고 내 능력밖에 있고 내 한계 밖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자를 만났을 때나, 곰을 만났을 때에도 그 곰의 발톱에서 나를 지켜주시고 사자의 발톱에서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때 나와 함께하시던 하나님을 체험하며 오늘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고 계시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주인 되시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며,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오늘도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의 백성들을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는 똑똑히 체험하면서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지요. 그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던 다윗은 지금까지 나와 함께하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시고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하는 믿음 가운데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 가운데 살고 있던 다윗에게는 골리앗이 나오든 사자가 나오든 곰이 나오든 그런 건 별로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경제적인 위기나, 혹은 건강의 위기나, 혹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맺어지는 관계에서 생겨나는 일들이나, 우리가 이 땅에서 마주치게 되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곰의 발톱에서 나를 지켜주시고 사자의 발톱에서 나를 지켜주시던 그 하나님이 오늘 내가 마주쳐, 오늘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내가 당황하고 있는, 또 나를 좌절하게 만들고 나를 실망하게 만드는 이 모든 위기의 순간에서도, 과거에 나를 지켜주시고 함께하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 가운데 서있는 자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지금 내가 서있는 자리가 어떠한 자리라 할지라도, 내가 서있는 이 시간에 어제 오늘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선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 알고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함께해 오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온 여러분의 삶을 한번 뒤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여러분들의 삶을 보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크고 작은 위기의 순간들을 여러번 겪어오시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지금 아주 어려운 위기의 순간을 마주쳐서 경험하고 계시는 분들도 이 가운데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온 내 삶 가운데 크고 작은 어려운 순간들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고, 그때 내 삶이 모두 다 끝나버릴 것같은 그러한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오늘까지 살아 올 수 있지 않았었습니까. 하나님께선 승리케 하셨고 그 어려운 위기의 순간에서도 나와 함께 하셨으며 나를 지켜주셔서 나에게 오늘이 있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너와 함께 하고 있고, 네가 살고 있는 이세상의 주인은 나며, 나는 너를 지킬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은 내가 오늘 어떠한 위기의 순간에 선다 할지라도 조금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지요. 사자와 곰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오늘도 나를 지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다윗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골리앗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지요. 어 이상하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세상에서는 골리앗 아니라 골리앗 할아버지가 온다고 할지라도 저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 세상에서는 길거리 널린 것들이 저런 거인들인데, 저런 거인들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심부름꾼들에 불과한 것들인데, 왜 도대체 저런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다윗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나섰지요. 사울이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을 입혀줍니다. 자신의 왕의 보검을 끌러서 그에게 주지요. 기특했지요 다윗이. 이것을 가지고 나가서 싸워라. 여러분 왕의 갑옷입니다. 왕의 보검이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꿈꾸는 것이었습니까. 여러분 어쩌면 우리가 우리의 모든 삶을 바쳐서 이 땅에서 가장 얻기를 소원하고, 우리가 성취하기 원하는 것들이 이런 것들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이 땅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것, 화려하게 장식된 왕의 갑옷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 땅의 모든 영화와 이 땅의 모든 명예와 부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곧 그것이 자기의 몸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원하고 부러워하는 그것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벗어놓습니다. 왕이시여 이게 내 몸에 맞지 않습니다. 이것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물질과 세상의 명예와 세상의 권세와 세상 사람들이 얻기를 원하고 부러워하는 것들이 있어야만 이 땅의 모든 것들을 행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에 허락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으로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자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것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물맷돌 다섯 개를 집어 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이 광경을 상상할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다윗이 베들레헴 들판에서 사자가 나오고 곰이 나올 때 그들을 상대했던 물맷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골리앗을 상대하기 위해서 엘라 골짜기에서 그가 쓸 조약돌 다섯 개를 고르고 있습니다. 조약돌이 거기 있는 것을 봐서 추측컨대 아마 거기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이쪽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째로 멸해버리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없도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말라고 강요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정체성을 말살시켜버리려고 블레셋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 앞에 두려워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편에서 그나마 마지막 남은 자신들의 목숨이라도 지켜보려고 한 쪽에서 지을 치고 있습니다. 손에 창과 칼을 들고 틈을 보고 있습니다. 순간 포착만 되면 쫓아나가서 상대방들의 숨통을 끊어버리려고 하는 일촉즉발의 긴장이 흐르고 있는 전쟁터입니다. 살이 튀고 피가 튀고 긴장이 팽팽하게 감돌고 있는 그런 전쟁터입니다. 그 한가운데 골짜기에 어린 소년 하나가 조용히 앉아서 물맷돌 다섯 개를 고르고 있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약돌 다섯 개를 고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놀라운 평강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 생명을 위협하는, 이 땅에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우리를 위협하는 이 세상의 세력들과 세상의 문제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두렵고 당황스럽고 실망스러워서 어찌할 수 없을지라도,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은 내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여유롭게 들녘에 소풍 나온 소년처럼 그 살벌한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약돌 다섯 개를 태연하게 고르고 있는 다윗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어렵다고 얘기합니다. 힘든 문제들이 많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과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들 심령 가운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건 세상의 어떤 문제들이 나를 위협해 오건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면 지금 다윗에게 허락하신 이 평강이 여러분 심령 심령 가운데 강물처럼 넘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다윗은 조약돌 다섯 개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어 듭니다. 그리고 태연하게 골리앗을 향해서 걸어갑니다. 세상이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큰소리치며 살아왔던 이스라엘이 두려움으로 꼼짝하지 못했던 그 골리앗을 향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린 소년이 조약돌 다섯 개를 들고 걸어갑니다. '너는 칼과 활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담대하게 걸어갑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수많은 골리앗들이 우리를 위협해 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을 가지고 세상 권력을 가지고 우리를 위협합니다. 네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 맞냐? 네가 하나님의 백성이 맞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해라. 우리를 위협합니다. 이 어려운 때에 네가 말씀으로 산다고. 이 어려운 때에 기도만 하면 다 된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에 살아가기를 포기하라고 종용해 옵니다. 문제들을 접할 때마다 두려워 집니다.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으로 우리가 한걸음 내어 디디는 일이 때로는 우리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태로운 일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내가 지금까지 애써서 일구어온 모든 것을 담보로 하는 것처럼 위태로운 일처럼 보입니다. 온 군대가 힘을 다해서 달려들어도 될까 말까한 여리고를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이름으로 그저 돌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리고를 돌라고 말씀하십니다.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쫓아옵니다. 앞에서는 불가항력처럼 보이는 홍해가 우리를 가로 막고 있습니다. 당황됩니다. 내 인생 여기서 끝나버릴 것 같습니다.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그 때 그 분은 사랑하는 그 분의 백성들에게 어찌해야 할 지를 알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 애타게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잠잠히 서서 오늘 내가 하나님 됨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홍해를 향하여 네 손을 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담보로 해야 될 만큼 위태로워 보이지요. 앞날을 알 수 없는 곳을 향해서, 한걸음 내딛으면 절벽으로 떨어질지 알지 못하는 그곳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한걸음 내딛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그 길을 알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머리칼 하나까지 헤아리신다고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내딛는 그 곳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곳을 향해서 아무렇게나 대딛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이미 준비되어진 그 세상을 향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내딛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연세 드신 분들은 기억하실 줄 믿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감명 깊게 보았던 벤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벤허라는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찰톤 헤스톤이 얼마 전에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벤허가 팔려서 로마 해군의 전함의 노잡이가 됩니다. 함대의 제독 아리우스가 탄 배의 벤허가 묶여서 쇠고랑을 차고 노를 젓습니다. 그런데 대전이 벌어집니다. 그때 벤허는 제독의 개인적인 호감을 얻어서 전투 직전에 쇠사슬에서 풀려납니다. 전쟁은 로마군이 승리하기는 했지만 사령관이 탔던 배는 격침되어서 그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수중에 장사됩니다. 그런데 벤허가 사령관을 살려내어 부서진 널빤지에 사령관을 태우고 표류하게 됩니다. 사령관이 깨어나서 보니 배는 깨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수장되고 노예였던 벤허와 자신 만이 널빤지에서 생명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끝났구나 생각하고 제독이 자살하려고 합니다. 그 때 벤허가 자살하려는 사령관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표류하다가 자기편의 배를 만나 구원받습니다. 그 배에 올라가자마자 사령관이 벤허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되었는가?" "사령관님,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그때 로마의 군인이 물을 떠서 사령관에게 가져옵니다. 갈증으로 목말라 있던 사령관이 물을 마시려고 하다가 벤허를 돌아보면서 물잔을 먼저 건네줍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 물잔을 받아 마시는 노예 신분인 벤허를 보면서 군인들이 모두 깜짝 놀랍니다. 그 때 제독이 벤허에게 했던 이야기를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너를 구하기 위해서 로마에게 승리를 주셨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백성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늘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반석에서 물이 솟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들에게 그 놀라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을 체험케 하시기 위해서 오늘 여러분을 광야로 부르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때로는 불뱀이 있고 전갈이 있는 광야와 같아서, 물을 구할 수 없고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광야와 같아서 당황되고 실망되지만, 그러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 땅에 세상이 알지 못하는 크고 놀랍고 비밀스러운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서 나를 그 자리로 부르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닥쳐온 그 문제 앞에 다윗처럼 믿음으로 담대하게 마주 서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그 문제 앞에 여러분들이 담대하게 서시면 여러분들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슬피우는 자매들을 바라보며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꾸준함이 능력이라는 진리
삼상 17:12-27절 / 꾸준함의 능력
나는 꾸준함이 능력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되는 것처럼 꾸준함이 모여 능력이 됩니다.
다윗은 16:13절에서 기름 부음을 받았고, 사울을 치료하는 일을 감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17장의 다윗은 여전히 양치기로 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변한 것은 없습니다. 그는 변함없이 양치기로 주어진 일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런데요? 그렇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던 어느 날 전혀 인과관계가 없어 보이는 일로 그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은 양치기로서 다윗이 충실하게 훈련된 결과였습니다. 그는 양치기로 살면서 믿음을 잃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다윗은 양치기로서도 훌륭해서 최선을 다해 양을 치고 물맷돌을 던지는 좋은 양치기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상이 새로운 인생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드리는 예배에 꾸준해야 한다고 다시 다짐해 보는 것입니다.
요사이 새벽기도에 출석하는 인원이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어른 들이 연세가 들어가시는 탓도 있고, 절실함이 사라진 시대의 게으름에 발목을 잡힌 것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꾸준함이 능력이라고 믿고 변함없이 새벽을 깨우고, 매일 묵상을 올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다윗의 일상에 마침내 새로운 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일의 시작은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형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안부를 확인하고 오는 단순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골리앗과 만나게 하시고 새로운 인생을 열어가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word play가 있습니다. 20절과 22절에 '맡기고'라는 말은 '버리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양치기로서의 인생이 끝났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인생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다윗이 그렇게 준비되고 있는 동안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려 40일 동안이나 골리앗에게 조롱당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과 사울은 그런 조롱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울이 내놓는 방안이라는 것이 세금 면제와 왕의 사위가 되고 많은 재물을 주겠다는 경품이었습니다. 그런데 40일 동안 아무도 나서지 않은 것을 보면 경품으로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적인 사고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큰 힘 앞에 비굴해지고 굴복합니다. 그게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골리앗이라는 압도적인 힘 앞에 무력한 이스라엘은 열방의 정신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한계입니다.
자, 다윗의 일갈로 오늘 묵상을 마쳐봅니다.
"이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지난 40일 동안 누구도 하지 못했던 시원한 신앙고백이요 믿음의 울분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준비된 사람 다윗의 눈에는 골리앗의 엄청난 전력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훨씬 더 큽니다. 열방의 길이 아닌 만군의 여호와와 함께한 사람의 관점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신보다 훨씬 더 큰 골리앗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믿음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훨씬 크신 것입니다. 그것이 사울과 다윗의 차이이며,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람, 열방을 따라가는 사람과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사람,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이 믿음은 양을 치는 동안 평범한 일상에 주님과 동행하고 훈련된 결과입니다.
오늘도 꾸준함이 능력이라는 진리 앞에 믿음으로 작은 일에 충성합시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승리
삼상 17장 / 최종혁목사
본문 말씀은 주일학교 학생들부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다윗과 골리앗 사이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을 대하여 전열을 벌였으니 블레셋 사람들은 이쪽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쪽 산에 섰고 그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1-3절). 이 사건이 벌어진 장소에 대한 설명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려고 에베스담밈에 진을 치고 엘라 골짜기에서 대치하고 있던 상황입니다. 이스라엘의 산은 언덕과 같아서 이쪽 언덕에 이스라엘이, 저쪽 언덕에 블레셋 진영이 있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때 블레셋 진영에서 한 사람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4절). 그리고 본문의 저자는 골리앗의 모습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오늘날로 계산하면 키가 270-290센티미터(또는 그 이상) 되고 그의 갑옷의 무게는 55킬로그램이나 됩니다. 창의 날이 약 7킬로그램 되는, 우리가 들기도 힘든 그것을 공격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위협적인 전사의 모습입니다(5-7절).
그가 블레셋 진영에서 나와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8,9절). 엘라 골짜기 양쪽 언덕에 군대가 대치하고 있고, 그 중 블레셋 진영에서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나와서 다른 쪽 진영을 보며 외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내려 보내서 일대일로 싸우고 이기는 쪽이 승리하는 것으로 하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스라엘을 도발하고 있습니다.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10절).
그에 대해 이스라엘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11절). 골리앗이 블레셋 사람들 중에 가장 강한 용사였다면,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용사는 사울이었습니다. “그들이 달려 가서 거기서 그를 데려오매 그가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컸더라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삼상 10:23,24). 사울은 키가 월등히 컸고 그와 짝할 이가 없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조차 골리앗을 보고 놀라서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던 중, 말씀은 멀리 유다 베들레헴으로 시선이 옮겨집니다.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사람의 아들이었는데”(12절). 이새의 여덟 아들들 중 셋이 전쟁에 나가있고 다윗은 아비의 양들을 돌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 이새가 다윗을 전장으로 보냅니다.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고 그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심부름을 보낸 것입니다. 블레셋 용사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도발하고 있는 전장으로 말입니다.
“다윗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이새가 명령한 대로 가지고 가서 진영에 이른즉 마침 군대가 전장에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치며”(20절). 골리앗과 다윗이 멀리 떨어져 있다가 만나게 된 상황입니다. 40일 동안을 아침저녁으로 나와서 도발하고 있던 골리앗이 그날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와 같이 말했고, 마침 그것을 다윗이 듣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여전히 도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24절). 다윗은 엘라 골짜기에서 조금 올라오기까지 하며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심히 두려워했지만 자신들이 모욕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25절). 그리고 그를 죽이는 자에게는 사울 왕이 여러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누구든지 싸워 이기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습니다. 골리앗이 너무 두렵고 커 보였기 때문입니다.
같은 상황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윗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이제 다윗이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첫 번째 말입니다.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26절). 자신이 나가서 싸우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26절). 다윗 이전에는 누구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이 상황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말하고, 골리앗을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도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싸움에서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다윗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골리앗을 “할례 받지 않는 블레셋 사람”이라고 강조한 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를 말한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증표였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7-11),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3,14).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는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의 백성이라는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할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애굽 땅으로 갈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를 설득하여 애굽으로 보내신 하나님이 다시 그를 죽이려고 하시다니 뭔가 이상해보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 것은, 모세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할례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먼저 주신 명령이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을 쳐야 하는 상황, 적군이 앞에 있는 상황에서 싸우러 나갈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아 누워있어야 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전술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바로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 언약의 백성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그들에게 두셨습니다(수 7:8,9). 이스라엘의 이름에 하나님의 이름이 걸려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22). 언약의 관계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이 땅에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 대한 모욕은 곧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었습니다. 다윗이 보고 있었던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한 장수가 도발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한 이방인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저주하고 모욕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에게 큰 형 엘리압이 말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28절). 그는 다윗의 동기를 의심하고 어린 마음에 전쟁을 구경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사울 역시 다윗을 부릅니다.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33절). 사울은 그의 능력을 의심합니다. 다윗은 전쟁 경험이 없는 사람이고, 그에 비해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장수였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34,35절). 다윗은 자신이 사자와 곰을 쳐 죽였던 경험을 말합니다. 사자와 곰도 이겼으니 골리앗도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나 사울은 그렇게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36, 37절을 보면 다윗이 말한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36절). 다윗이 사자와 곰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발톱에서 건지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이상 누가 더 강하고 약하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이 싸우려는 적이 사자나 곰도 아니고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는 이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자와 곰에게서도 나를 구하셨는데 하물며 이런 자에게서 나를 건져내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저자는 골리앗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그와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골리앗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도 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보고 있었던 것은 그의 외모나 갑옷이나 무기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고 모욕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치욕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그와 싸우러 나갑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던 다윗이 맨손으로 나가지 않고 뭔가를 열심히 준비합니다. 먼저 사울의 갑옷을 입어보고 익숙지 않아서 벗습니다. 그는 시내에 가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가져옵니다.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적당한 수의 돌입니다. 물매는 그냥 장난감이 아닙니다. 물매는 당시 활의 역할을 했던 전쟁의 무기입니다. 다윗은 나름대로 최선의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니라”(41절). 이제 골리앗과 다윗이 가까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42절). 40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도발을 했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다가 끝내 나타난 한 사람이 거대한 장수도 아니고 예쁘장한 소년이 나온 것입니다. 다윗의 모습이 전사로서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골리앗은 다윗을 업신여깁니다.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42,43절). 골리앗의 갑옷과 창이 무색할 정도로 형편없는 무기를 가지고 나온 다윗을 보고, 골리앗은 자신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합니다. 그를 죽일 뿐 아니라 그 시체도 모욕하겠다고 확언합니다. 어쩌면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45절). 골리앗이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다윗은 무기가 물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진정한 무기는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윗은 승리를 확신합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46,47절). 다윗은 자신의 승리, 곧 하나님의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의 구원이 칼과 창에 있지 않음을 그 자리에 있던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리리라고 확언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고 했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을 바로잡기 위해서 싸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48,49절). 전투는 순식간에 끝납니다. 본문을 기록한 저자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을 간단히 설명합니다.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히고 골리앗은 쓰러집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칼로 그의 머리를 자르고 싸움이 끝납니다. 블레셋의 패배이고 다윗과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다윗의 용기, 그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 다윗이 왕이 되기에 충분했다는 것, 왕으로 기름을 부은 받은 사람이 양을 치고 있을 정도로 겸손했다는 것 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이야기를 기록하신 목적은 우리가 다윗 자체에 주목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46절과 47절에 우리가 주목할 것, 꼭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46,47절).
하나는, 온 땅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골리앗도 신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신은 구원할 수 있는 신이고, 다른 신은 구원할 수 없는 신이었습니다. 아니 존재하지도 않는 신입니다. 인간이 만든 신이 인간 이상을 할 수 있을리 없습니다. 다윗의 신은 인간을 지은 하나님, 역사의 주권자로서 살아계심을 나타내셨던 하나님, 다윗이 직접 경험했던 하나님이십니다. 미래를 알고 계시고 그것에 대해 말씀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골리앗과 다윗은 둘 다 확신을 가지고 말했지만 다윗의 확신만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믿는 하나님이 참된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이야기도 이를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과 경쟁하지 않으십니다. 경쟁할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경쟁시킵니다. 인간이 다른 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고 경쟁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거짓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지만 그들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우상에 속고 있었습니다. 그 우상에 속아서 하나님이 모욕 당하시는 상황을 그냥 두고 보았던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있고 하나님의 구원은 창과 칼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칼과 창에 의존하여 그를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승패는 눈에 보이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최선의 준비를 했지만 객관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승리를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인간의 어떠함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다윗도 나름의 준비를 했지만 그는 그것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두 손에 막대와 물매를 들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약한 다윗을 이기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창과 칼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전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거대한 장수와 싸울 상황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언약의 백성으로서 영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생각할 때, 말씀을 통해서나 여러분의 삶을 통해 돌이켜볼 때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할 만한 것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살아계심에 의심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 역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이 땅에 드러내고, 하나님의 구원이 창과 칼에 있지 않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고, 그 승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다윗이 빠진 함정
삼상 18:17-19 / jocw0104
다윗이 빠진 함정
1) 다윗이 사울의 사위가 되는 것은 전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고 유혹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받는 것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다 하면 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말씀하셨다.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목적에 충실해서 이스라엘의 적과 싸우는데 최선을 다했더라면 함정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2)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사위가 되는 것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만 가지고 살 수 없는 것 같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인정도 필요하고 현실적인 입장도 필요한 것이다. 다윗이 사울의 사위가 되기를 원한 것은 이것이 출세가 완전히 보장된 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무서운 사탄의 유혹이었다.
3) 사울은 다윗에게 맏딸 메랍을 아내로 주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다윗으로 하여금 잔뜩 기대하게 해 놓고서는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줘버렸다.(19)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기만한 것이다.
17절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을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4) 다윗은 사울의 말을 듣고 감격했다. 다윗은 사울이 무슨 의도로 이런 조건을 제시하는지 모르고 순진하게 사울의 말만 믿고 충성을 다짐한다. 이것은 다윗이 이 말을 하나님 앞에서 해야 마땅했다. ‘제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중에서 제 친속이나 제 아비의 집이 무엇입니까?’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겸손이다. 하나님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한 평생 이런 이런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셨다.
18절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버지의 집이 무엇이기에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5) 그러나 다윗이 지금 사울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자기 비하이며 아첨이며 무조건적인 충성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울이 자기를 사위로 삼아 주기만 하면 무슨 짓이든지 다 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에게 맏딸 메랍을 줄 것처럼 실컷 약을 올려놓은 후에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렸다.
19절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6) 사울의 배신이 다윗에게 얼마나 실망과 충격이 되었는지 성경에 언급이 없다. 그러나 다윗은 바로 이때 사울의 집안을 통해 출세할 생각을 포기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른 계획이 있다고 믿었어야 한다. 그러나 다윗은 그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다윗은 자기가 그 기회를 잃은 것을 너무나도 아쉬워하면서 자기 충성심이 부족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다.
적용 ) 우리가 원하던 직책이나 직장을 다른 사람의 기만에 의해 잃게 되었을 때 너무 그것에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은 나를 실컷 이용한 후에 버리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용을 위한 질문 )
4) 우리가 사람 앞에 겸손과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어떻게 다른가?
- 우리는 사람 앞에 겸손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뭔가 댓가를 바라고 하는 자기 비하이며 아첨이며 무조건적인 충성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겸손하는 것은 우리가 진짜 자기를 낮추는 것이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하는 것이다.
기도 )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겸손하듯 사람 앞에서도 진정으로 겸손하여 무서운 사탄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신뢰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삼상 17:12~27 / 이웃집 Paul아저씨
사무엘상 16장에서 하나님의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하나님의 부리시는 악령이 임하여 번뇌할 때에 다윗이 수금을 타서 악령을 떠나게하고 다윗은 사울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엘라골짜기에서 벌어진 블레셋과의 전투가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의 사건인지는 알 수없으나 그때까지 다윗은 사울을 모시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칠 때에"(15절)
다윗은 여전히 양을 치면서 필요할 때에만 사울에게 불려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새의 아들은 모두 여덟 명인데 전투에 참가한 아들은 세 명입니다.
전투에 참가할 수있는 이십 세를 넘은 아들이 세 명이었다는 가설은 조금 무리가 있고 (왜냐하면 막내인 다윗의 나이가 너무 어리게 되므로),
아마 한 집안에서 징집할 수있는 인원을 세 명으로 한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다윗의 나이는 이십 세 전후로 추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윗은 아버지 이새의 명령에 따라 볶은 곡식과 떡 그리고 치즈를 가지고 형들을 만나기 위하여 전장인 엘라골짜기를 방문합니다.
그리고 사십 일동안 여전히 싸움을 걸고 있는 블레셋 사람 골리앗을 직접 눈앞에서 보게됩니다.
사울은 골리앗으로 말미암아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골리앗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많은 재물과 자신의 딸을 주고 세금도 면제해 주겠다는 엄청난 혜택을 약속합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일대일 대결을 벌여 전투의 승부를 결정짓자고 이스라엘군을 도발하였고 사울은 골리앗을 죽이는 사람에게 엄청난 상급을 걸었지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골리앗을 피하여 도망하기에 급급합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24절)
이러한 두려움을 가지고 이스라엘은 결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침 형을 만나기 위하여 전장에 와 있던 다윗도 골리앗의 이러한 도발적인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다윗을 골리앗의 모습에 공포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반응을 보십시요.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26절)
다윗은 골리앗의 모습과 언행에 두려움을 느끼기 보다는 분노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분노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골리앗은 할례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곧 골리앗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선택 받았고 따라서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고 이것을 하나님이 가만히 두고 보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다윗에게는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두려움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다윗은 우연히 옆에서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골리앗의 목에 큰 상급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6절의 말씀을 다시 보면 다윗이 골리앗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로 두 가지가 제시됩니다.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①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②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26절)
첫째, 다윗은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걸린 사울의 상급에 관심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모욕하는 이방인에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 다윗을 움직이게 한 것일까요?
사울의 상급은 모든 이스라엘 군대에 선포된 것이고 그것이 아주 매력적인 유혹이었지만 아무도 자신의 목숨과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 당시의 상황이 사울이 내건 상급이 군대의 두려움을 제거하지 못할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양을 지키는 목동의 일을 하면서 곰이나 사자와 맞서 싸웠던 경험으로 충분히 훈련되어 있어서, 골리앗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이방인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심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이 절대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대결을 벌이기로 결심한 것은 싸움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골리앗을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다윗과 같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