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시제를 지내러
4년 전 코로나가 덮쳐 온 세상이 뒤숭숭했다. 병원이나 집에서 격리자가 나오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감염되기도 했다. 학교는 장기간 문을 닫았고 날짜를 정해둔 결혼 예식이 무기 연기되기도 했다. 동창회를 비롯한 각종 모임도 줄줄이 취소되고 해외여행이나 국내 관광업계도 직격탄을 맞았다. 이런 코로나 여파로 우리 사회에 오래도록 지속된 경조사 문화에 커다란 변화가 왔다.
그해 봄 우리 집안에는 고향을 지키는 큰형님이 기제사 제도를 크게 바꾼 결단을 내렸다. 벽화산 정상부와 벽화산성 성내에 위치한 고조와 증조의 산소를 조부와 부모님을 모신 선영 근처로 옮겼다. 해마다 먼 곳까지 다녀와야 하는 벌초와 성묘의 번거로움을 들기 위해서였다. 그와 함께 윗대 조상님의 가을 시제와 별도로 고조부모 이하 조상 기제를 봄날의 시제로 통합시켰다.
유교적 사고와 윤리 의식이 투철한 보수성 짙은 큰형님의 이런 결심은 사실 코로나와 무관했다. 몇 해 전부터 구상 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코로나가 닥친 그해 봄에 선대 산소를 옮겨왔고 기제를 시제로 통합시켰다. 이런 일들이 진행 중일 때 형제나 조카들이 모두 모이질 못하고 큰형님이 주도적으로 이끌고 다른 형제들은 개별적 방문이나 전화를 넣어 진행 상황을 알게 되었다.
올해는 음력으로 윤이월이 있어 삼월이 늦게 온 편이다. 30년 전 돌아가신 아버님 기일이 음력 삼월 보름이라 우리 집안 선대 시제일은 그즈음 일요일을 정해 왔다. 후손으로 굳이 이름을 붙이면 조상을 기리는 숭모의 날이 되는 셈이다. 사월이 가는 마지막 일요일은 올해 우리 집안 봄 시제일이라 고향 걸음을 했다. 이른 아침 고향을 찾으니 큰형님 내외분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다른 형제나 조카들이 오기 전 먼저 산소를 찾아갔다. 어릴 적 나무를 하러 올랐던 뒷동산에 할아버지 내외분과 부모님의 산소가 있다. 객지로 나가 생업에 종사하고 직장에서 은퇴했고 언젠가 생을 마치면 한 줌 재도 고향 산천으로 돌아와 잠들지 싶다. 지난 시절에는 가파르게 느껴지지 않던 산기슭이었는데 나이 들고 보니 경사가 급해 보이고 숲은 그때보다 우거져 있었다.
산소 오르는 길섶에서 골무꽃과 눈개쑥부쟁이가 피운 꽃을 봤다. 여름 철새인 후투티 한 마리가 먹잇감을 찾아 잔디밭을 뒤졌다. 후투티는 머리에 모양이 특이한 관을 쓰고 있는 듯해 눈에 쉽게 띄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산소에서 자손이 찾아감을 아뢰는 절을 올렸다. 이후 산자락을 내려와 근년에 산소를 옮겨온 고조부 증조부 내외분 산소와 숙부님의 무덤 앞에 절을 올렸다.
선영 참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 형제와 조카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조카들이 손자들까지 대동하니 집안이 유치원이나 학교를 방불할 만치 아이들이 넘쳤다. 방에다 병풍을 두르고 제상에 제수를 올려 상을 차려 향을 피우고 큰조카는 준비된 지방과 축문을 꺼냈다. 술잔을 채워 나한테는 고조부부터 차례로 증조부와 부모님께 절을 올리며 축문을 읽었다.
자손들이 윗대 조상님께 술잔을 올리는 의식을 마치고는 마당에 야외용 돗자리를 펴고 온 가족이 둘러앉았다. 칠순 할아버지부터 아장아장 걷는 손자까지 서른 명 가까이 되는 대가족이었다. 집안 행사에는 언제나 큰형수님이 고생이 많았다. 큰형수님이 봄에 산을 찾아 뜯은 참취는 향긋한 산나물로 무쳐 나오고 생선이나 수육도 썰어져 나왔다. 제상에 오른 탕국도 빠지지 않았다.
나는 형님들과 같은 자리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대구 사촌과 함께 맑은 술을 반주로 들었다. 형님들은 약주를 들지 않아 나만 잔을 비운 셈이다. 나는 일찍 와 산소를 찾아뵈었는데 늦게 온 형님들은 점심 식후 산소로 올라 자손이 다녀감을 아뢰고 왔다. 이렇게 봄 시제를 마친 형제와 조카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생업에 종사하다 여름에 벌초를 위해 다시 모일 날이 다가올 테다. 23.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