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国人民解放軍軍歌 와 작곡가, 정율성 [郑律成 정뤼청 : (原名 鄭富恩. 1914 -1976) ]
中华人民共和国 건국 경축대회 등에서 중국인민해방군 사열이나 분열식이 거행되면
행사가 끝날 때까지 쉬임없이 오로지 中国人民解放軍軍歌가 연주된다.
中国人民解放軍軍歌를 작곡한 사람은 광주출신의 정율성(鄭律成)이다.
그는 1939년 1월 중국 공산당에 가입, 팔로군 행진곡 등을 작곡하였다.
中国近代三大音乐家
'중국국가'를 작곡한 섭이[ 聂耳 니에얼 : (原名 聂守信, 1912-1935)],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 [ 郑律成 정뤼청 : (原名 鄭富恩. 1914 -1976) ],
'황하대합창'을 작곡한 선성해 [冼星海 셴싱하이:(1905—1945)]를 중국3대음악가로 칭한다.
정율성(鄭律成)은 '중국인민해방군가'도 만들었고 해방후 북한에서 '조선인민군가'도 만들어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사람이다. 북한에서 '음악가 정률성' 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작곡가, 정율성 [ 郑律成 정뤼청 : (原名 鄭富恩. 1914 -1976) ]
1914년 7월 7일,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현 양림동) 79번지에서 출생.
1976년 12월 7일, 베이징에서 사망, 바바오산 혁명공동묘지(八寶山革命公墓) 안장.
정율성( 郑律成, Zhèng Lǜchéng, 정뤼청, 1914년 7월 7일 ~ 1976년 12월 7일)은
'중국 인민 해방군 군가' 작곡가로 본명은 정부은(鄭富恩)이다.
일제 강점기 1914년에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현 양림동) 79번지에서 한학자 정해업(鄭海業)과 지방 명문가의 딸 최영온(崔英溫) 사이의 5남5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이들 형제자매 중 5명이 요절해 4남1녀가 됐다.
정율성의 호적 이름은 '부은'이었으나 '구모(龜模)'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부친 정해업은 전라도 관찰부 공방서기직, 대한협회 광주지회 회원, 광주 지역 신간회 간사, 광주 수피아여고 교직에 종사하였으며, 모든 자녀를 항일 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보낼만큼 민족정신이 투철했다.
정율성의 첫째형 정남근과 둘째형 정인제, 셋째형 정의은 등이 모두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다.
정율성은 1917년 화순군 능주로 이주, 1922년에 능주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광주로 다시 이주하였다.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3월 5년제 전주신흥학교에 입학하여, 합창단에서 '내고향', '쪼각달', '고기잡이', '까투리타령' 등 노래를 지도하였다.
1933년 전주신흥학교를 중퇴하고 누나 정봉은과 함께 목포에서 평안환(平安丸)을 타고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5월 13일 상하이 푸동 항에 도착하였다. 정율성은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의열단에 가입했다.
1938년 4월 작곡한 ‘연안송’(延安頌)은 서정적이면서도 웅장한 느낌으로 당시 중국 전역에서 애창됐다.
옌안에서 중국 공산당 활동중 정설송(丁雪松 딩쉐송 1918年5月— 2011年5月)을 만나 1941년 팔로군이 주둔하던 동굴에서 결혼하였다. 정설송은 항일운동가로 국무원 외사판공실 비서장, 대외우호협회 부회장을 거쳐 중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네덜란드와 덴마크 주재 대사를 지냈으며 초대 총리인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의 양녀이기도 하다.
1939년 1월 중국 공산당 가입. 《팔로군행진곡》을 포함하여 8곡으로 구성된 '팔로군 대합창(八路軍大合唱)'을 작곡. '팔로군행진곡'은 팔로군에서 애창되었으며 第二次國共內戰時 《解放軍進行曲》으로 곡명을 바꾸었다가 1965年 《中国人民解放軍軍歌》로 바꾸어 지금에 이른다.
1988년 7월 25일, 중공중앙(中共中央)비준,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소평(鄧小平)이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 로 정식 서명. 채택하였다.
中国人民解放軍軍歌 / 中国人民解放军进行曲
中华人民共和国成立70周年庆祝大会
2019年10月1日建国70周年大阅兵
China's 70th National Day Military Parade on October 1, 2019
첫댓글 아쉽다....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분들이 생각지도 않게 공산주의에 편승하게 되여 공산당이 되었으니...
그때느누 혼탁한 때이라 그렇게 되는 것이 잘못되어 간다는 것도 모르고 그냥 독립을 위한 투쟁만을 생각했겠지요.
아쉬운 과거의 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한번도 해 보지 않은 공산당
이론이야 그럴듯하니 쉽게 물들던 때였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공산당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사정은 많이 달라졌겠지요.
역사속에 친일 반일, 좌파 우파 , 등 이념 당쟁으로 희생이 너무 컸습니다.
해방 당시
우리나라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통하여 이상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신념에 경도되었던 것 같아요.
가족을 버리고 자진 월북한 사례도 꽤 있고요.
남은 가족은 또 모진 세월을 보낸
참 안타까운 사연도 많았지요.
안타까운
한민족의운명이며 역사의 소용돌이
너무 극심했고 상처가 컸습니다.
그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고통은 말할 수도 없고
국가 사회, 개인적 손실은 헤아릴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인데
민족과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승화시키면
얼마나 좋을까요.
친절한 코멘트 감사합니다.
시간은가고 모든것은 망각속으로 사라지고 ^~^
격동의 역사
격랑의 파도속에
묻혀지고
잊혀진
사연이 안타깝고 애석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지요.